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3 먼길이었다. 이토록 머나먼 곳까지, 그것도 홀로 나선 건 처음이었다. 두 번씩이나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P읍에 도착했을 때는 설핏 해가 기울고 있었 다. 서희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작고 초라한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바람이 일정한 방향 없이 불 어왔고, 분분히 머리카락이 일어섰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택시가 있는 곳까지 갔다. 자꾸만 분주해지는 마음이 저문 날 탓인지, 이제 곧 세준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인지 분명치 않았다. “답문리 벌목장까지 가고 싶어요.” 사십대 중반쯤 돼 보이는 기사가 길게 목을 빼며 물었다. “어디요?” “답문리 벌목장요.” “아, 산판요. 거긴 못 가요.” 등뒤로부터 사나운 바람이 불어왔고,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 카락을 치켜올렸다. “이 시간에 산판까진 어림도 없수다. 날 밝아도 거기까진 만만치 않을 거요.” 어떻게 온 길인데, 갈 수 없단 말인가. 난감했다. 맥이 풀렸다. 그러나 물러설 순 없었다. “답문리까진 갈 수 있나요?” “답문리라도 가겠수?” 그녀는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러나 기사는 좀처럼 떠날 기미를 보이 지 않았다. “답문리까지 가선 어쩔거요?” “거기서 산판까진 얼마나 되나요?” “한 십오 리 될 거요.” 십오 리. 그녀는 기사의 말을 받아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십오 리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기사가 그녀의 속마음을 알았을까. “말이 십오 리지, 이 밤중엔 장정도 못 갈 거요.” 어쩐담... 그녀는 말없이 기사의 목덜미만 바라보았다. “꼭 답문리까지라도 가자면 가겠소만, 거긴 아무것도 없수다. 아가씨, 목숨 걸 일 아니라면, 오 늘은 여기 어디서 자고 날 밝으면 가슈.” 서희는 한동안 안절부절 못하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강이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다. 어둠에 잠긴 강을 보자 비로소 세준의 엽서가 생각났고, 일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강변에 서 있는 아담한, 그러나 근사한 찻집이 있다고 했지. 어렵지 않게 그녀는 찻집을 찾았다. 그의 말은 틀림없었다. 아담하고 근사한 곳이었고, 강가가 보이는 자리에 앉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커피를 주문하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널찍한 백사장을 끼고 검은 띠처럼 강이 흐르고 있었다. 눈이 내리면 더 좋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커피는 뜨거웠고, 거리를 헤매는 동안 언 몸을 녹이기 에 충분했다. 그녀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 자신처럼 뜨거운 커피를 마시 며 엽서를 썼을 그를 떠올렸다. 그녀는 가방에서 엽서를 꺼냈다. 한자 한자 힘주어 쓴 글씨가 영락없이 그를 닮았다. 여름이면 바다로, 겨울이면 산판으로 일터를 옮겨다닌 그였지만 엽서를 보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속삭이듯 엽서를 읽어내려 갔다. 그러나 다 읽기도 전에 고개를 들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넉넉함이 호사스럽기까지 하구나.’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바로 그 구절인지도 몰랐다. 겨우 커피 한잔 마시는 것을 두고 호사스럽다니...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안쓰러움 때문에 잠을 설쳤고, 아침 일찍 엽서의 주소만 갖고 서울을 떠나왔다. 오랫동안 어둠에 잠긴 강을 바라보다 자정이 임박해 그녀는 읍내의 한 여관을 찾아들었다. 낯 선 곳에서의 잠이 두렵고 불편했지만 잘 참아냈다. 눈을 뜨면 그를 만나리라는 생각을 하며. 이튿날 일찌감치 서희는 벌목장을 향해 떠났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던 택시 기사는 10분쯤 힘 겹게 산을 오르더니 혀를 내둘렀다. “더는 못 가요. 산모퉁이 하나만 돌면 산판이니 걸어가는 게 낫겠수.” 그녀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는 걷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지만 힘든 줄 몰랐다. 눈보라를 일으키며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 이 따가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상쾌했다. 후두둑 후두둑. 나무 어딘가에 깃들여 있던 새들이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하듯 날아올랐다. 순 백의 눈으로 덮여 있는 산들이 자락을 벌리며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가장 겨울다운 곳이 좋은 거야. 겨울 내내 눈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봐. 얼마나 근사하겠어?” 그녀는 세준의 말을 떠올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에 올랐다. 미끄러지고 넘어졌지만 그때 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났다. 서희는 단 한 차례 세준과 산에 간 적이 있었다. 겨울 산이었다. 그는 이미 대학생이었고,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방학을 맞아 소망원에 내려와 있던 그 가 말했다. “우리 산에 가볼까?” “갑자기 무슨 말예요?” 그가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가 여러 번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해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고, 훌쩍 어른이 된 듯한 그의 모 습 때문이었다. “어젯밤 어떤 산악인이 쓴 책을 봤어. 거기에 기막힌 구절이 있었거든. 들어볼래?” 그는 시를 읊는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산에 오르는 동안 힘이 들었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후회했고, 집에 돌아와선 줄곧 산 꿈을 꾸 었고, 깨어나선 다시 산으로 가고 싶었다. 어때, 기막힌 말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을 산에 가겠다는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서둘러 소망원을 나 섰다. 소망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산이 있었다. 그들은 산책이라도 나선 듯 가벼 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그녀는 자주 미끄러지고 넘어졌고, 그때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겨우겨우 정상에 오르는 것까 지는 그래도 좋았다. 그러나 겨울 산에 어둠이 얼마나 빨리 찾아오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하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이 밀려왔다. 두려울 건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견디기 힘든 건 추위였다. 바람이 어찌나 매서운지 볼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간신히 중턱쯤 내려왔을 때 그녀는 넘어지면서 발목을 삐고 말았다. 그는 망설임없이 등을 내 밀었다.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녀를 들쳐업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내리겠다고 해도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등판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면서도... 수없이 길을 잃었고, 수없이 왔던 길을 돌이켜야 했다. 그녀는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두고 내려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산을 내려온 건 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그녀는 생 각했다. 그녀를 내려놓고 한 번 돌아본 후, 그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완전히 탈진한 그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야 했다. 병원으로 달려온 원장어머니가 말했다. “네까짓 게 뭔데 내 아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소망원에서 나가버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그 이후로 그녀를 대하는 원장어머니의 태도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꼭 나쁜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틀이 지나 퇴원했다.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그녀는 물었다. “많이 힘들었죠?” “아니.” “나 많이 무거웠죠?” “아니. 가벼웠어, 아주, 깃털처럼. 정말이야.” 그는 빙긋이 웃고는 입을 열었다. “인도에 씽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어. 그가 한번은 동료와 함께 히말라야 오지로 전도 여행을 떠났는데 엄청난 눈보라와 혹한을 만났대. 마을까지는 먼 거리였고 도중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 정도였어.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 그냥 앞으로 나갈 도리밖에 없었지. 얼마쯤 가다 보니 길 위에 한 사람이 쓰러져 신음을 하고 있더래. 그냥 놔두면 곧 죽게 될 지경이었지. 씽은 동료에게 그 사람을 데려가자고 말했고, 동료는 고래를 저었어.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 인데 그 사람마저 데려가다간 모두 죽고 말리라는 생각이었지. 하지만 씽은 그를 두고 갈 수 없 었고, 동료는 마음대로 하라며 홀로 가 버렸어. 씽은 그를 등에 업고 눈보라를 뚫고 나갔지. 너무 힘들어 그냥 그를 내려놓고 가버릴까 하는 유혹이 들더래. 하여튼 천신만고끝에 마을이 보이는 지점까지 다다랐을 때 길 위에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어. 그 사람은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한 뒤였고, 바로 홀로 떠난 동료 선교사였대. 혹한 속에서 동사한 것이었지. 하지만 씽은 등에 업은 사람의 체온과 많은 땀을 흘린 덕택에 살 수 있었던 거야.” 그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서희야! 너 알아? 네가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로 하여금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마디의 말로 그녀를 감동시키는, 묘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었다. 산모퉁이 하나만 돌면 산판이라던 택시 기사의 말과는 달리, 서희는 몇 개의 산모퉁이를 돌아 서고 나서야 벌목장에 닿았다. 윙윙윙. 산비탈 곳곳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저기 어디쯤 그가 있으리라. 그녀는 벌목장 초입에 있는 막사로 갔다. 막사 입고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에 말했다. “이세준이라는 사람을 찾아왔는데요.”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가씨, 여기선 그렇게 말하면 누군지 몰라. 이세준이 어떻게 생겨먹은 친구지?” 그를 어떻게 설명한담. 그녀는 한동안 말설이다 말했다. “저, 서울에서 온...”. “아, 의사학생”. 남자의 말에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 사인가?” “동생이에요.” “동생?” 남자가 담배를 꺼내물며 덧붙였다. “여기선 그런 식으로 숨길 필요 없어. 애인이면 애인이라고 말해도 돼.” 여기선... 두 번째 듣는 말이었다. 이곳을 마치 딴 세상인 양 남자는 말하고 있었다. 꾸미고 가릴 필요가 없는 곳. 그래서 그는 이런 적막강산에서 험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라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어때, 아가씨! 애인이 틀림없지?” 아무렴 어떤가. 그녀는 남자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불러올 테니, 막사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남자는 막사의 문을 열어주고는 성큼성큼 비탈을 올라갔다. 막사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난로 곁으로 다가갔 다. 난로 밑 한 구석에 눈에 익은 것이 보였다. “아!” 그녀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선인장이었고, 반듯한 나무 상자 안에 고이 놓여 있었다. 추위를 가려줄 생각으로 난로 곁에 놓 아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한 순간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그녀 자신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 이었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서둘러 선인장에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꼭 감았다. 늘 그랬다.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그였다. 때때로 그의 손길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희는 눈을 떴다. 아,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텁수룩하게 자란 수염,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바람에 거칠어진 피부, 그 사이 더 야윈 듯한 얼굴, 얼룩진 작업복... 어느 하나 세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의 눈빛으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솟아나오는 그만이 간직한 따뜻함으로 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달라진 모습 때문에 반가움보다 안타까움이 먼저 찾아왔다. 그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 특유의 미소. 입술을 벌리지 않은 채 눈을 살짝 감은 듯한 웃음은 여 전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어떻게 왔어?”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녀는 살짝 눈을 흘겼다. “도대체 그 수염은 뭐예요?” 그가 계면쩍게 웃으며 손으로 수염을 여러 차례 문질렀고, 그때마다 스윽스윽 수염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그렇게 수염이 많은지 그녀는 미처 몰랐다. 구레나루에서 턱까지 온통 털북숭이가 되어 있 었다. “멋있지?” “산적 소굴에서 막 나온 사람 같아요.” “그럼 내가 산적이란 말야?” 그가 자못 정색을 하고 물었고, 그녀는 얼른 자신의 말을 바꾸었다. “아니, 뭐랄까... 허수아비? 그래요. 빈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낫겠어 요.”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허수아비? 산적보단 훨씬 좋군.” 그가 말을 마치고 우뚝 선 채 두 팔을 벌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더니 혀까지 쑥 내밀었다, 정 말 허수아비라도 된 양. 그녀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하지만 까닭 모를 슬픔이 다가왔다. 정말 허수아비 같은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에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자 신만이 감당하고 있는 쓸쓸함이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자신을 깊이 바라볼 때면 그 쓸쓸함을 언 뜻언뜻 느끼곤 했다. 그녀는 한없이 이어질 듯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내기 힘들죠?” “전혀.” “많이 야윈 것 같아요.” “수염 때문이겠지. 난 여기 들어와서 한 끼에 두 그릇씩이나 뚝딱 먹어치우고 있다고.” 과연 수염 때문에 야위어 보이는 걸까. 그녀는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쳤다. “좀 답답하네요.” 막사를 나와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할 말은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는 눈 덮인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 역시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췄고, 그녀도 따라 섰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그가 말했다. “어떻게 왔니, 여기까지?” 그걸 몰라서 물어요, 정말.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발치의 눈을 의미 없이 꾹꾹 밟아댔다. |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