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전북 무주 잠두마을 잠두길
봄이 내려앉은 잠두길. 금강변의 아름다운 길로 손꼽힌다.
나제통문 지나 옛 백제 땅에 들어선다. 길은 남대천 따라 흐르고 천변의 벚꽃 행렬은 끊임이 없다. 무주읍을 지나면서 길이 천과 멀어지자 잠시 세상은 열없이 건조해진다. 무주로에서 갈라져 나온 37번 국도는 잠시 적상천을 만났다가 헤어지고 드디어 금강에 닿는다. 잠두 1교 앞에 ‘금강’이라 쓰인 커다란 표지판이 턱을 치켜세운다. 다리를 건너면 잠두(蠶頭)마을이다. 마을은 뒷산인 조항산(鳥項山)에서 북쪽에서 내리뻗은 능선이 일곱 개의 봉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누에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뉘머리’, ‘누구머리’ 등으로 부르다가 한자화 되어 ‘잠두’가 됐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400년 전이라 한다. 원래 빈촌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누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부촌이 되었다고 전한다.
잠두마을과 잠두1교. 지형이 누에머리 모양이라는 마을은 다리가 놓이기 전 육지속의 섬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강변으로 내려선다. 300년 된 느티나무 당산목이 둥근 단 위에 올라서 있고 나무 앞에는 돌비 하나가 서 있다. 머릿돌에 ‘잠두교’라 새겨져 있다. 핑크빛이 감도는 화강석 몸돌에 새겨놓은 희미한 이야기를 읽어본다. ‘육지 속의 섬 마을 여기 주민들의 땀과 의지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깊으신 사랑으로 이룩된 잠두교가 섰다. 잠두 마을이 터로 잡은 지 400여년! 그동안 나룻배로 강을 건너며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 살아온 이 섬마을이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대단한 감격이었을 것이다. 강물에 바투 붙어 난간도 없는 작은 시멘트 다리였지만 잠두마을과 무주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1976년에 완공된 옛 잠두교는 지금 없다. 다리는 몇 해 전 여름 장마 때 무너졌다. 강물은 느티나무의 밑동과 비석의 받침돌까지 차올랐다가 서서히 빠졌다. 쓸려 올라온 모래밭에는 장어 같은 미꾸라지와 타이거 새우 같은 민물새우가 파닥거렸다 한다.
잠두마을의 300년 된 느티나무 당산목. 나무 앞에 1976년 잠두교를 완공하고 세운 기념비가 서있다.
옛 잠두교는 지난해 장마 때 유실됐다. 조각난 스팬들이 강물에 잠겨 있다.
누에머리처럼 생긴 땅을 금강이 휘돈다. 그래서 육지 속의 섬이라 했다. 섬의 저편은 갈선산(葛仙山) 베틀봉 아래 금강 물줄기가 깎아놓은 벼랑이다. 잠두1교가 놓이기 전 현재의 37번 국도는 벼랑의 허리를 타고 무주와 충남 금산을 이었다. 완행버스가 탈탈거리며 달릴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그런 길이었다. 다리가 놓인 뒤 옛길의 시간은 멈췄고 잊혀졌다. 그러한 동안에도 벚나무 가로수의 시간은 내내 흘렀고, 어느 날부턴가 사람의 길이 되었다. 옛 국도의 이름은 잠두길이다.
잠두길. 다리가 놓이기 전 무주와 충남 금산을 잇던 길이었다.
벚꽃이 피었다. 산벚꽃도 환하게 피었다. 개복숭아 꽃도, 조팝나무 꽃도 피었다. 하얗게, 또 분홍으로, 저마다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아우성으로 피었다. 과연 길은 버스가 아슬아슬 달릴 만큼의 너비다. 단단한 땅을 뚫고 고개 내민 초록 풀들은 길섶으로 물러나 자그락거리는 걸음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들 사이에는 청보라 빛의 현호색이 있고, 남보랏빛의 제비꽃이 있다. 몸을 낮추어 제비꽃을 바라보면 그녀는 ‘나를 생각해 달라’며 도도하게 고개를 떨군다. 봄까치꽃들은 은은한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다. 우윳빛의 흰젖제비꽃들은 심장모양의 잎을 흔들고, 민들레의 빛나는 얼굴은 무구한 행복을 전한다. 강변의 가파른 사면에는 연둣빛 환한 신록이 넘실거린다. 그 아래로 청록의 금강이 흐른다. 강에는 황금쏘가리와 얼음치, 수달, 반딧불이가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두길을 반디마실길 또는 무릉도원길이라 부른다.
잠두길. 다리가 놓이기 전 무주와 충남 금산을 잇던 길이었다.
강 건너로 꽃가지에 걸린 잠두마을이 보인다. 옹기종기 모인 촌락 옆으로 완만하게 비탈진 밭들이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호두와 사과와 고추 등을 재배한다. 점점이 빛나는 분홍빛은 복사꽃일 게다. 사과꽃이 피면 또 얼마나 어여쁠까. 잘 손질된 무덤들도 보인다. 평화롭고 고요하다. 다리가 긴 정자쉼터가 나타난다. 누에머리의 정수리를 휘도는 금강의 물굽이가 시원하게 보이는 자리다. 세 여인이 정자에 앉아 달뜬 목소리로 봄날의 잠두길을 누리고 있다.
잠두마을은 반딧불이가 사는 청정지역으로 마을 사람들은 호두와 사과와 고추 등을 재배한다.
물길이 휘돈다. 굽이진 삼각형의 모서리에 화단이 가꾸어져 있다. 느티나무 교목과 영산홍, 산철쭉, 수수꽃다리, 황매화 등의 관목들, 그리고 상사화, 패랭이 동자꽃 등의 초화가 식재되어 있다는 글을 읽는다. 아직은 대부분 잠들어 있고 꽃잔디 몇 송이만이 잔잔하게 피어 있다. 화단 앞에는 금강마실길 안내판이 서 있다. 무주 금강을 따라 난 길을 ‘예향천리 금강마실길’이라고 부른다. 잠두마을은 2코스에 포함되어 있고 잠두2교에서 금강 따라 1코스인 ‘벼룻길’이 이어진다. 다리 앞 벚꽃 아래에 서있는 이정표마저 곱다.
잠두길의 정자쉼터. 누에머리의 정수리를 휘도는 금강의 물굽이가 시원하게 보이는 포토존이다.
돌아선다. 매정한 마음도 섭섭한 마음도 없이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 같지만 전혀 다른 길이다. 스스로 길을 찾아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흐르는 물소리 틈으로 새들의 울음이 날아오른다. 강물 따라 이어진 잠두길 전체가 아스라이 잡힌다. 산과 강, 봄꽃에 사로잡힌 길이 어우러진 정감 가득한 풍경이다. 갈선산은 옥녀가 거문고를 울리는 형국으로 옛날 선인이 속세를 잊고 사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베틀모양의 베틀봉은 잠두마을에서 실을 얻어 비단 강을 짜놓은 게다. 천천히 꽃나무의 그림자를 세고, 꽃비에 흠뻑 젖는다. 이백의 노래가 떠오른다. ‘왜, 산에 사느냐기에/ 그저 빙긋이/ 웃을 수밖에/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분명 여기는/ 별천지인 것을.’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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