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하얀 말’(1898년. 140.5×92㎝)
목어를 노크하는 산사의 비꽃
산을 오른 지 꽤 됐습니다. 이달 초엔 기상청의 소나기 예보를 듣고도 수락산을 올랐습니다. 평상시엔 산행객이 너무도 많아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오르던 그곳을 옆지기와 둘이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산사(山寺)가 가까워지면서 그윽한 범종 소리까지 버무려졌지요. “쏴아아~ 데엥~데엥~ 쪼로롱 쪼로롱~ 데엥~데엥~”
도안사에 도착하자 후두둑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그이 겸 가쁜 숨을 돌릴 요량으로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비꽃을 구경했습니다. 비꽃은 시골집 마당에서 보는 게 예쁩니다. 유리창에도, 손등에도, 꽃잎에도 비꽃은 피어납니다. 절집 마당에서 본 비꽃은 참으로 우아했습니다.
비꽃은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성글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말합니다. 빗방울이 바닥에 닿아 퍼지는 모습이 꽃을 닮아 생긴 말이지요. 그런데 비꽃은 피었다가 찰나에 사라져 애달프기 그지없습니다. 흔히 “비꽃을 뿌린다” “비꽃이 피기 시작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비꽃이 피는 소리를 들었는지, 점심 공양을 준비하던 보살 두 분이 마당으로 나와 급히 비설거지를 합니다. 열어 둔 장독을 덮고, 널어 둔 옷들을 걷습니다. 비가 싫지 않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연신 웃고 있습니다. 비꽃에 흠뻑 빠진 나는 그런 보살님의 모습도 꽃처럼 보였습니다.
툇마루 끝에 앉아 떡과 과일을 먹던 대여섯 명의 산행객들은 비옷을 꺼내 입고 등산화 끈을 고쳐 매고는 당고개역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기차바위를 타고 주봉에 올랐다 도안사에 잠시 들렀다며 “안산하세요~”라는 인사까지 하는 걸 보니 정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안산하다’는 산모가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지만 산에서만큼은 ‘안전한 산행’을 말합니다.
그들이 떠난 후 비는 “우르르! 후두둑!” 삽시간에 채찍비로 바뀌었습니다. 비바람에 절집 추녀 끝 풍경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목어(木魚)도 오랜 침묵의 소리를 울렸습니다. 시인 홍사성이 읊은 것마냥 ‘밤낮으로 눈 뜨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목어의 존재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속창 다 빼고 / 빈 몸 허공에 내걸렸다 // 원망 따위는 없다 / 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 // 먼지 뒤집어써도 그만 / 바람에 흔들려도 알 바 아니다 // 바짝 마르면 마를수록 / 맑은 울음 울 뿐”
속을 다 뺏기고 빈 몸으로 절의 누각에 걸려 있지만 그 누구에 대한 원망 따위는 없답니다. 살아 물속에 있었건만 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라네요. 강이든 바다이든 초월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겠지요. 나를 비우고 또 비우고 감정을 버리고 또 버리고…. 욕심과 집착을 던져버려야 진정 편안한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산사에서 소리들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관음(觀音)’이지 싶습니다.
비그이가 지루했던지 옆지기가 비옷을 꺼내 입으며 하산 준비를 합니다. 옆지기의 존재를 잊은 채 넋 놓고 절집에 앉아 있은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나 봅니다. 누군가에겐 ‘비그이’가 ‘외로운 시간’일 수 있음을 생각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토요일 오후, 학교에 혼자 남아 복도를 서성이며 비그이하던, 오래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비그이’는 비가 올 때 잠깐 피해 멎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정상을 찍지 않고 도시로 돌아가는 하산길은 몹시 아쉽습니다. 그래도 많을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산행이기에 성큼성큼 세상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비는 너무도 고마운 단비이자 약비, 복비였습니다.
[퍼온 글] / 출처; 2019.08.27 06:57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노경아(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 ‘라온 우리말 터’ 연재 중)
부처꽃
이등병의 편지
‘이등병의 편지’는 대상이 이등병이기에 그 처연함이 더하다. 이별에서 시작해 분리, 생경, 소외, 고독, 고단, 집체, 타율, 공포 등이 가장 바특하게 버무려진 처지가 ‘이등병’이 아닌가 한다. 이 상황은 아무리 준비해도 ‘갑작스러운’ 일이기에 떠날 때도, 보낼 때도 애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이등병마저도 특권으로 느끼게 하는 기간이 있다. 훈련병 시절이다. 훈련소는 (시대마다 달랐던) 몇 주간의 훈련 종료 하루 이틀 전 이병 계급장을 직접 손바느질로 달게 했다. 엄밀히 말해 계급조차 없는 ‘피교육생’의 신분을 벗어나 계급사회로의 진입을 자각하게 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계급의 바닥, 말단의 표시 ‘작대기’ 1개를 머리와 가슴에 달며 갖는 기쁨으로, 다음 작대기를 한 개 더 얹기까지 닥칠 일들을 잊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이등병 생활이 2개월로 줄었다. 전체 군복무 기간 단축에 따른 조치다. 다음달 1일부터 시행되는 ‘군인사법 시행규칙’ 개정안에 따라 육군 및 해병대 기준으로 이병-일병-상병-병장의 복무 기간이 각각 2-6-6-4개월씩으로 정해졌다. 이병은 3개월에서 2개월로, 일병과 상병은 각각 7개월에서 6개월로 줄었다. 병장을 그대로 두고, 이병의 복무 기간에서 1개월을 줄인 것에서 ‘고생의 기간’을 줄이려 한 의도가 읽힌다. 아예 계급을 없앤다면. 소련과 중국 등 공산 국가가 ‘평등성’에 입각해 군 계급 체계를 철폐한 적이 있다. 결국 계급제로 되돌아왔다. 군대의 계급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사병의 군복무는 건국 후 36개월로 시작해 전두환 정부에서 30개월, 김영삼・김대중 정부 26개월, 노무현 정부 24개월 등으로 줄었다가 현 정권에서 18개월까지로 단축됐다. 이 과정을 ‘설움’을 삭이며 지켜보는 이들도 있다. 1969~1994년의 ‘방위병’ 출신들이다. 지금의 사회복무요원과 상근예비역은 당시의 방위병으로부터 분화했지만, 그 둘의 합이 방위병일 수는 없다.
사병의 ‘병장 전역’이 제도화된 전두환 정부 이래 ‘상병 (이하) 전역’은 조롱과 구박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 정도가 ‘신분제 사회’를 떠올릴 정도로 유별난 사람, 조직들도 적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에 ‘군’ 내역이 기재되던 때 주민증 내보이기를 주저하면 방위 출신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상병 전역으로 30년여년 놀림을 당하고 살았는데, 현역이 18개월이라니. 적어도 18방(18개월 방위)은 ‘현역’으로 바꿔줘야 한다”는 농담을 진담처럼 했던 18방 출신의 탄식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이등병의 편지는 입대 후 2개월까지만 유효하다. 편지는 이 시기 여전히 가장 간절한 구호품이겠지만, 그 애잔함도 그대로일까.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이지운(서울신문 논설위원) / 2019-08-27 02:51
누른하늘말나리
'친구'와 '적' 사이
‘선이냐, 악이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분법을 즐겨 쓴다. 그의 ‘편가르기 전략’은 어법에서도 나타난다. 주요 현안을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나누고, 국제 관계를 ‘친구’와 ‘적’으로 양분한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뒤집기도 한다. 미・중 무역전쟁 초기에 “내 친구”라고 했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그저께는 “적(enemy)”이라고 불렀다.
북한 김정은과의 관계도 ‘적’과 ‘친구’ 사이를 오간다. 1년 전까지 ‘화염과 분노’ 등 자극적인 표현으로 대북 압박에 나섰던 그가 미・북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내 친구 김정은”이라는 표현을 쓰며 유화 몸짓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이 “불장난 좋아하는 불한당, 깡패, 노망난 늙은이를 불로 다스리겠다”고 했던 일은 잊은 듯한 모습이다.
친구(親舊)는 가까이(親) 오래(舊) 사귄 벗을 말한다. 친한 벗을 붕우(朋友)라고도 한다. ‘벗 붕(朋)’자는 조개를 끈으로 나란히 엮은 모양이고, ‘벗 우(友)’자는 두 손을 서로 맞잡은 형태다. 인디언들이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부를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곧 친구다.
‘대적할 적(敵)’자는 ‘밑동 적(啇)’자와 ‘칠 복(攵)’자를 합한 글자다. 뿌리 깊은 한을 갚기 위해 싸우는 상대를 뜻한다. 정치인들은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권력이 ‘적 만들기(enemy-making)’를 통해 집단혐오를 부추기면 ‘정치화된 대중’은 쉽게 증오에 빠져든다”고 분석했다.
국제 관계에서는 친하지 않은 나라끼리도 ‘공동의 적’ 앞에서 힘을 합친다. 때로는 ‘적과의 동침’도 불사한다.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국가 간, 경제블록 간 힘겨루기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연합(EU) 등 전통 우방과의 경제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누가 친구이고 적인가. 일본과 외교・안보・경제적으로 대립하고, 중국과 러시아에는 영공을 유린당하고 있다. 북한은 미사일과 막말, 조롱을 연일 퍼붓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국 대통령은 “한국이 김정은에게 무시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다 친구와 적을 구별하기 어려운 ‘프레너미(friend+enemy)의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예부터 “적을 만들기는 쉬워도 친구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했다.
[퍼온 글] / 출처; 한경닷컴 / 고두현(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9.08.27 00:32
국제관계의 우연과 필연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은 수상록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안토니우스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 해전도 없었을 것이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작은 것이 거대한 역사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순식간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전쟁의 직접적 원인인 대공의 암살에는 우연적 요소가 있다.
당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6년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를 빼앗아 병합한 데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대공은 암살음모가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감행했다. 방문 중 청년들이 폭탄을 던졌으나 빗나갔고 암살 용의자들은 경찰에 체포됐다. 프린치프가 테러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대공의 무개차(無蓋車)가 나타난 것. 길을 잘못 든 운전기사가 차를 돌리려고 애쓰는 사이에 그가 다가가 대공 부부를 총으로 쐈다. 이 암살이 없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열매
사후 가정은 역사의 유용한 도구다. 가정적 접근은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역사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길러준다. 그러나 사후 가정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기존의 역사체계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사후 가정으로 역사를 판단할 때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가능한 대안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에서 우연적 요소를 부인할 수는 없다. 베를린 장벽을 예로 들어보자. 1989년 11월 9일 장벽붕괴는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말실수에서 촉발됐다. 그는 언제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 당장.” 소식을 들은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이 검문소로 몰려들자 동독 정부는 국경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역사적 사건에도 ‘만약에’로 시작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에 멕시코 원주민들이 단결해 에르난 코르테스와 600여 명의 침략자에게 대항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만약에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에서 죽었다면?” “만약에 처칠이 1931년 뉴욕 5번가에서 차에 치였을 때 치명상을 입었다면?”
그러나 역사를 우연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클레오파트라와 페르디난트 대공의 사례를 다시 보자. 연구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대단한 미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그가 탁월한 지성과 언어 구사력으로 상대방을 사로잡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당시 그의 지상과제는 로마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미모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활용해 ‘로마로 로마를 공략’하는 전략을 집요하게 구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대공의 암살로 촉발된 것은 맞다. 그러나 전쟁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해외식민지 쟁탈전에서 뒤진 신흥강국 독일과 기존 식민제국인 영국・프랑스의 대립, 민족주의(범게르만주의 대 범슬라브주의), 복합적 동맹관계, 경제적 경쟁, 군비경쟁 등. 빈 체제를 둘러싼 유럽 강대국 간 갈등과 대립이 암살사건을 매개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것은 아닐까.
우연을 기회로 만들 수 있어야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말이다. 이는 국제관계에도 적용된다. 우연처럼 보이는 역사적 사실도 인과관계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또 역사적 사실의 저변에 있는 힘과 흐름을 무시할 경우 역사로부터 통찰력을 얻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드 카가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적 우연을 강조하는 견해를 부정하면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이 있다. 노력 없이는 운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원래의 뜻이다. 국운(國運)도 마찬가지다. 우연을 기회로 만들고, 기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 최근 동북아의 안보지형에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다. 대내외 경제환경도 녹록지 않다. 모든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행운의 여신은 준비된 사람과 국가에 미소 짓는 법이다.
[퍼온 글] / 출처; 한국경신문 / 박희권(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2019.08.27 00:11
하늘의 도
1990년대 들어 내리막길을 걷던 '강변가요제'는 1995년에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극과 극을 이어붙였다. 판소리와 랩을 결합한 이른바 '판랩'의 탄생, 육각수의 '흥보가 기가 막혀' 때문이었다. 파격적이고 새로운 시도에 대중은 호응했다. '가요톱10'에서 1위 경쟁을 했고, 연말 가요대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 독특한 노래의 가사 중에서도, 다시 독특한 대목이 있다. 쫓아내는 형에게 어디로 가라는 것이냐며 애걸하며 '백이 숙제 주려 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라고 한다. 물론 형은 '아따 이 놈아 내가 니 갈 곳까지 일러주랴. 잔소리 말고 썩 꺼져라.'고 일갈한다.
백이와 숙제는 사마천의 위대한 고전 '사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고대 중국 고죽국이라는 나라의 왕자들이었다. 왕이 죽은 후에 왕권 경쟁은커녕 서로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며 사양하다 아예 둘 다 도망가 숨어버렸다. 이 곳 저 곳 떠돌다 노인이 된 그들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기 위해 출정하는 길 앞을 막아서는 일을 벌였다. "부왕이 돌아가셔서 아직 장례도 끝나기 전에 무기를 손에 잡으니 어찌 효(孝)라 할 것이며,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려 하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소."
무왕의 신하들이 그들을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막아 겨우 살아남았다. 무왕은 결국 은나라를 멸망시켰고 주나라가 천하를 다스리게 됐다. 하지만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산에서 살다 '주려' 죽었던 것이다.
사기는 '하늘의 도'를 묻는다. 사사로움이 없으며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이라고 한다면, 백이와 숙제는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을 바르게 했음에도 결국 굶어 죽은 것은 무슨 뜻이냐고 한다. 공자는 제자 중 안회를 두고 학문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는데 끼니도 제대로 못 이어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반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으로 회를 쳐서 먹었다는 도적 도척은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옳다고 여겨 왕에게 직언을 한 것 때문에 궁형에 처해진 사마천의 개인적 삶과도 맞닿아있다. 2000여 년 전 사마천의 고뇌는 지금에 이르러 얼마나 달라졌을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지속되는 화두인 듯 하다. 하늘의 도는 때로 보상을 해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정의는 역사적 사명이자 인간의 길이지 않을까.
[퍼온 글] / 출처; 아시아경제 / 박철응(아시아경제신문 기자) / 2019.08.26 15:15
생물체의 시시포스, ATP와 ADP
물고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물들은 물에 빠지면 죽는다. 물에 빠지면 숨을 쉬지 못하고,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산소 공급이 부족해져서다. 사실 물고기도 물로부터 산소를 얻는 과정이 없으면 죽는다.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인 ATP(올린 이 주; ATP - adenosine tri-phosphate, 생명체에서 에너지를 생산, 소비하는 것을 연결해 주는 고에너지 화합물)가 합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ATP가 일정 정도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ATP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생명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걸까? ATP는 몸속에서 수많은 화학반응이 일어나게 하고 모든 움직임과 물질 수송에 사용된다. 생명을 유지하는 거의 모든 활동에 사용되는 물질이다.
생물들은 왜 수많은 화학 분자 중 ATP를 사용할까? 대용량 휴대전화 배터리처럼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도당을 비롯한 많은 유기분자와 비교하면 꽤 작지만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ATP에는 3개의 인산이 붙어 있는데 인산은 모두 음성(-)을 띠고 있어서 서로 반발한다. 약간의 화학적 환경만 제공해 주면 인산 하나가 쉽게 떨어져 나가서 ADP(올린 이 주; ADP - adenosine di-phosphate, 인산기 하나를 덧붙여 생명체의 에너지원인 ATP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화학물질)가 된다. ATP가 ADP가 된다는 것은 인산이 3개 붙은 구조에서 1개가 떨어져 나가 인산 2개를 가진 구조가 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를 생명 유지에 사용하는 것이다. 에너지를 사용한 상태인 ADP에 인산 1개를 붙여 놓아야, 다시 말해 충전해 놓아야 ATP가 되고 충전된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열심히 숨을 쉬고 음식을 섭취하면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들이 ADP에 인산을 붙여 ATP를 만든다. 그래서 ATP는 마치 충전해서 쓰는 전지와 같다. 생물들은 ADP를 재료로 끊임없이 ATP를 만들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ATP를 소모해서 ADP로 바꾼다.
다른 모든 화학 반응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도 발열 반응 아니면 흡열 반응이다. 자유에너지 변화량은 반응 이후의 자유에너지에서 반응 전의 자유에너지를 뺀 값이다. 발열 반응은 그 값이 0보다 작은 것으로 반응 전 자유에너지가 더 많아서 반응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실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도 우리 몸 내부 전체의 자유에너지 변화량이 0보다 작은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려면 분자들을 전환시키거나 합성하는 많은 반응들처럼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면 꿈쩍 않는 흡열 반응도 자유에너지 변화량을 0보다 작게 만들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ATP다. ATP를 공급해 반응 전 자유에너지를 늘리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생물은 이렇듯 자유에너지 변화량을 0보다 작게 유지하기 위해 일정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양의 ATP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필요한 모든 화학 반응, 수송, 움직임 등이 일어날 수 있다. 참고로 생명 활동이 중지된 죽음을 에너지 개념으로 바꿔 보면 자유에너지의 변화량이 0이라고 할 수 있다.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굴러 내려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꼭대기에 올려놓아야 하는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우리 몸에서 ATP와 ADP의 상호 전환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한껏 무의미해 보이는 단순 반복이지만 이 단순 반복 과정이 근간이 돼 우리는 인격체로서 인간다운 일을 하며 성장하고 가치를 갖게 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장수철(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 2019-08-27 02:51
의료기술의 진화
전 세계 수많은 팬에게 사랑받는 영화 `마블` 시리즈. 영화관을 찾아 관람하지는 않았지만, 일과를 마치고 잠시 시간을 내 지난해 개봉한 `블랙 팬서`를 집에서 봤다. 영화를 보면서 최첨단 의상에 눈길이 갔다. 이 영화는 미래 요소를 결합하기 위해 3D 프린팅 의상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블랙 팬서`에 3D 프린팅으로 제작된 의상이 선보인다는 기사를 이미 지난해에 접한 터라 영화 속 의상을 더 유심히 보았다.
`블랙 팬서`의 배우가 착장한 의상처럼 3D 프린터를 이용해 3차원 입체 형태로 실제 물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3D 프린팅`이라고 한다. 3D 프린터에는 잉크가 아닌 금속, 플라스틱, 나일론 등 입체 도형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재료를 적용할 수 있다.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무궁무진한 결과물이 탄생하는 3D 프린팅 기술은 산업 전반에 활용된다. `블랙 팬서` 어머니의 왕관은 폴리아미드라는 소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겠지만, 이미 3D 프린팅 기술은 영화 `아이언맨 2`의 의상과 `트랜스포머 4`의 자동차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3D 프린팅` 기술은 의료기술의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를 `바이오 3D 프린팅 기술`이라고 부른다. 불의의 사고로 손발이나 팔다리 등이 절단된 환자에게 꼭 맞는 신체 일부를 제공하고, 심장이 고장이 난 환자에게는 정교한 인공 심장을 줄 수 있다. 이런 첨단 의료기술을 두고 미국 정보기술(IT) 분야 리서치 기업인 `가트너`는 3D 프린팅을 접목한 의료산업이 미래를 이끌 3대 산업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의료기술에 3D 프린팅 기술을 접목한 대표적인 사례는 `인공관절`이다. 가령 퇴행성 무릎관절염 말기 환자는 먼저 MRI를 통해 무릎 모양을 촬영한 후 3차원 이미지로 정밀하게 측정한다. 그런 다음 3D 프린팅으로 환자에게 적합한 관절 모형과 인공관절 수술도구인 절삭유도장치를 사전 제작한다. 이처럼 3D 프린팅을 통한 사전 시뮬레이션은 환자 자신에게 꼭 맞는 관절을 제공하며, 수술의 정확도를 높여 수술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현재의 3D 프린팅 기술이 의료기술에 기여한 것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첨단 의료기술 분야에서 4D 프린팅과 인공지능(AI)이 접목된다면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해진 의료기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치료 결과의 `성공률`을 상당히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발전하는 `의료기술의 진화`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을 살리는 의료기술은 늘 `안전성`을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며, `기술의 발전`만을 도모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퍼온 글] / 출처; 매일경제신문 / 고용곤(연세사랑병원 원장) / 2019.08.27 00:05:01
윤리를 가르칠 수 있을까
철학 수업, 특히 실천윤리 과목을 수강하면 학생들이 더 윤리적으로 행동할까. 실천윤리학 교수라면 분명 답변에 관심이 갈 것이다. 실천윤리를 수강하려는 학생에게도 필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철학적 의미에서 더 중요하다. 윤리적 판단을 하고 행동을 결정할 때 이성의 역할에 대한 매우 오래되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은 쌍두마차의 은유를 사용한다. 한 말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충동을, 다른 말은 비이성적 열정이나 욕망을 나타낸다. 마차의 역할은 두 말이 하나가 되어 달리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이 열정과 이성의 복합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성이 우월한 아래에서 조화해야 한다고 했다.
18세기 데이비드 흄은 이런 이성 대 열정의 우열 다툼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했다. 흄은 이성 자체로는 의지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유명한 ‘열정의 노예’라는 표현이 나왔다. 그가 말하는 열정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의미가 훨씬 넓다. 그가 열정이라고 한 것에는 타인에 대한 동료의식이나 동정심, 오랜 관심사도 포함된다. 다른 철학자들이 이성과 감정 사이의 갈등으로 본 것을 그는 이런 ‘조용한 열정’과 더 격렬하고 종종 무례한 열정 사이의 갈등으로 이해했다.
이성에 대해 현대심리학은 흄과 유사한 관점의 영향을 받고 있다. ‘행복 가설’과 ‘바른 마음’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플라톤을 연상시키지만 흄에 더 가까운 관점을 가지는 은유를 사용해 ‘윤리에 대한 사회직관주의적 견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그는 ‘바른 마음’ 첫 페이지에서 “마음은 코끼리의 기수처럼 나뉘어 있다. 기수가 하는 일은 코끼리의 시중을 드는 것이다”고 했다. 여기서 사용한 은유인 ‘기수’는 사람이 제어하는 정신 과정, 주로 의식적 추론이며 코끼리는 정신 과정의 다른 99%, 주로 감정과 직관이다.
그는 연구를 통해 도덕적 추론을 사람의 자동직관적 대응에 대한 사후합리화로 보았다. 그 결과 “나는 윤리적 행동, 특히 교실에서의 직접 교육을 통한 접근 방식에 회의적“이라며 “도덕에 관한 지식을 학생에게 주입시키고 학생이 교실 밖에서 그 지식을 그대로 실천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썼다.
©게티이미지뱅크
‘바른 마음’에서 그는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의 철학자 에릭 슈비츠제벨과 스테트슨대 조슈아 러스트의 연구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한다. 슈비츠제벨과 러스트는 윤리학 교수가 다른 철학교수들보다 품행이 낫지 못하고, 심지어 철학과 관련 없는 교수들보다 더 윤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윤리학 교수들조차 다른 분야 교수들보다 더 윤리적이지 않다면 윤리적 추론을 해보는 것이 사람들을 더 윤리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증거를 나는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다. 입증은 안됐지만 내 실천윤리수업을 들었던 학생 중 최소 몇몇은 삶이 근본적으로 바뀐 경우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은 채식주의자나 비건이 되었고, 어떤 학생은 저소득 국가에서 극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기부를 시작했으며, 또 어떤 학생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일을 더 많이 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슈비츠제벨은 2년 전 육식에 대한 윤리수업이 학생들의 음식 취향을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엄격한 방식의 연구를 제안했다. 캔자스대 철학교수 브래드 코클릿과 함께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에서 1,143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학생 절반에게는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철학 기사를 읽고, 선택 사항으로 육식을 반대하는 영상을 보고, 소그룹 토론에 참여하도록 했다. 대조군인 나머지 절반에게는 유사 자료를 주고 빈곤한 사람을 돕는 기부에 대해 토론하도록 했다.
캠퍼스 식권의 정보를 바탕으로 수업 전후에 두 그룹의 학생들이 어떤 음식을 구매하는지 알아보았다. 476명의 학생에게서 약 6,000건의 음식구매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구매는 육식 윤리에 대해 읽고 논의했거나 하지 않은 학생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자료는 익명으로 수집했으므로 이름을 알아도 구매 정보를 식별할 수는 없었다.
연구 결과 육류윤리그룹 학생들의 육류 구매가 52%에서 45%로 감소했으며, 수업 후 몇 주간 육류구매 비율이 낮게 유지되었다. 자선기부그룹의 육류 구매 수준에는 변화가 없었다(이들이 자선단체에 더 많이 기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연구는 예비조사 단계이고 아직 동료의 검토를 거치지 않았다. 영상 시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피는 추가 데이터도 모으는 중이다. 이런 영상은 학생들의 이성보다 감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연구는 대학 수준의 철학수업이 학생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험실 환경이 아닌 실제 환경에서 진행된 최초의 제대로 통제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육식의 감소는 크지 않았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했고, 교실에서 윤리적 추론이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퍼온 글] / 출처; 한국일보 / 피터 싱어(미국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교수) / 2019.08.26. 04:40
"아빠 저런 모습 너무 싫어"… 근데 어느새 내게 그 모습이
호모 사피엔스 복잡한 마음… 가족, 직장 관계 어렵게
인간의 '部族 심리', 부정적 작용하면 각종 갈등 유발
'알고 보니 괜찮네' 방법… 반대쪽과 칭찬 섞어 대화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의 인류를 가리키는 호모 사피엔스(Home sapiens) 관련 책들이 유행 중이다. 국내외 저자의 책을 몇 권 읽으며 왜 인기일까 생각해 보았다. 먼저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여러 분야의 연구 결과, 즉 사실을 기반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는 작가의 주관적 상상과 해석이 책에 더 가득해도 '진짠가 봐' 하고 몰입하게 된다. 또 예언서처럼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위기를 담고 있다는 점도 흥미를 끄는데,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힘든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하며 관찰자의 입장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살펴보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지 않나 싶다. 또 '남의 탓'이란 심리 방어가 가능한 점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 영혼이 담긴 호모 사피엔스라는 하드웨어 자체에 뿌리 깊은 단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피엔스'의 저자 말을 빌리면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종의 위기'는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이고 '가족의 위기'는 매일 접하고 있다. 위기의 구체적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크게 나누어보면 유사한 고민이 많다. 그중 하나가 '부모의 저런 모습은 절대 닮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자신이 부모가 된 후 자녀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고민이다. 예를 들면,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욕설이 포함된 거친 소통을 하셨는데, 엄마도 자신에게 똑같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그런 거친 소통을 자녀에게 하고 있어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데, 절대 닮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왜 닮는 것인지 이상하기만 하다. 그런데 닮을 수가 있다. 생각으론 '부모의 저런 거친 언행은 절대 배워서는 안 돼'라고 다짐해도 내 마음이 이상하게 작동된다. 부모는 중요한 존재이고 부모를 미워하는 것은 금기이기에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머금고 사는 것에 마음이 부담을 느낀다. 생각과 마음에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부모와 나를 확 동일시하며 부모의 행동을 흡수해 버린다. 그리고 내가 부모가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저장된 그 행동이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 일러스트=이철원
요즘 직장인들의 고민 사연 중 분노 조절에 대한 것이 많다. 생각과 마음의 부조화는 직장에서 발생하는 '화'에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예를 들면, 신상품은 이번 겨울에 출시하면 좋겠다는 내 의견에 상사가 미루지 말고 여름에 하라고 지시하여 그렇게 실행했더니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상사가 왜 여름에 출시했느냐며 탓을 나에게 돌리는 것이다. 억울함과 그래도 상사인데 잘 지내야지 하는 부조화가 마음에서 일어나면서 무의식적으로 '여름에 출시한 건 내 잘못이야'라고 내 탓을 만들어 버리는데 깊은 마음에는 화가 쌓이게 된다. 그리고 이 화는 내가 상사가 되었을 때 똑같은 행동을 하게끔 할 수 있다.
이렇게 호모 사피엔스는 복잡한 마음을 가진 종이다 보니 마음이 내 생존에 도움도 주지만 앞의 예들처럼 나를 불편하게 하고 가족, 직장 관계에서 갈등과 위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종의 위기'에서도 이런 마음의 이중성이 상당한 원인 제공을 하지 않나 싶다. 정치심리학에서 우리 마음에 부족(部族) 심리가 있다고 한다. 너와 나를 구분 짓는, 특정 그룹에 속하고 싶은 욕구이다. 이 또한 생존에 유익이 있어 마음에 존재하는 것일 텐데,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사회 분열, 과도한 민족주의나 국가 간 갈등 등을 유발하게 된다.
심화되는 사회 갈등은 세계적 문제인 듯한데 한 해외 유명 정치심리학자의 해결책이 단순하다 못해 순진하다. '알고 보니 괜찮네'라는 관계 기술인데 반대 부족의 사람을 우선 만나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에 칭찬을 섞어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은 부 분 의견이 다르지만, 내가 정말 존경하는 점은 이거야 하고 말한 후 의견을 나누라는 것이다. 이 소통은 서로에게 '알고 보니 괜찮네'라는 느낌을 주어 화끈한 사과나 상대방에 대한 인정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상대 부족에 대한 '네거티브 마케팅'은 결국 상대방은 '인간도 아니야'란 혐오감을 심어주어 성장이 아닌 파괴적인 갈등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퍼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윤대현(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2019.08.27 03:11
Henry Herbert La Thangue(1859-1929), Traveling Haarves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