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 해석을 하자면 :
[일본이라는 언덕에서 열매를 맺겠다.]
캬 정말 멋집니다.. 일제시대에..
※. 명성황후 시해 때 총괄지휘한 일본인 성이 오카모토 (머 우연의 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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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창씨개명
한국일보 2000-11-10 05면
서양 사람이나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인의 성(姓)은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일생 동안 변하는 일이 없다. 굳은 맹세를 하면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성을 갈겠다"고 말하는 관습이 아직 남아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은 성을 가는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긴다. 그러나 20세기의 어느 시점에 한국인은 그런 치욕을 집단적으로 겪었다.
1939년 11월 10일 일제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조선 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도입하면서, 그 이듬해 2월부터 8월 10일 사이에 모든 조선인이 '씨(氏)'를 결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의 시행이다.
조선총독부는 이것을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 관헌을 동원해 협박을 일삼았고, 창씨를 하지 않는 사람의 자제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거부했다. 또 창씨하지 않은 호주는 '비국민'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 사찰을 하고, 노무 징용의 우선 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갖은 사회적 제재를 가했다. 이런 강압 속에서 다수의 한국인들은 성을 갈고 이름을 바꿨다. 그러니,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의 징표로서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골적인 친일 인사들의 일본 이름이 우리에게 슬픔을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1975년 경기도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疑問死)한 장준하는 생전에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셋 있는데, 첫째는 오카모토 미노루, 둘째는 다카키 마사오, 셋째는 박정희"라고 말한 바 있다. 세 사람은 동일인이다.
(나는 박정희 보다는 장준하의 말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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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친일행적 다시보기
아래 글은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란 글로 <박사모> 홈피의 '박정희대통령&친일호도대응자료실' 대문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글입니다. 박사모 회원들은 이 글에 대해 "어느 분이신지 대단하다"며 온통 칭찬일색이죠. 화살표가 가리키는 글은 이 글의 오류를 잡기위한 자그마한 노력입니다. 글재주가 없어 스크롤 압박이 심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길...^^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10가지란 글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현재 전혀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박정희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나 현재까지 “~~카더라.” 라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혈서론의 출처가 만주일보라고 하는 데. 만주일보는 1927년에서 1934년까지라고 입니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나 박통이 입학한 때는 1942년입니다. 만주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의 소장목록입니다.. 찾아보시길...
(http://147.46.181.112/lib_service/separate/paper_list.html#마)
▲만주군 예비소위 시절의 박정희 모습
→ 1940년대는 식민지 조선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해 상해,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일제와 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의 민족영웅 박정희는 그 시대에 어떠했는가?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긴 칼을 옆에 차고 싶은" 욕망을 위해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 즉 "충성을 다해 일본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국가를 받들겠다."며 일왕에게 바치는 충성혈서(忠誠血書)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로 보냈다.
안중근은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군이 됐지만, 박정희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바친 덕택에 일제의 철저한 신원조회·사상검증에도 불구하고 1940.4.1일 만주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해 꿈에도 그리던 일본군 장교가 된 것이다.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이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며 제안하자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하고 혈서를 썼다고 한다. 유증선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정희 이야기가 실렸다고 증언했다. 박정희추종자들이 주장하길, 유증선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인물이라 한다. 하지만 유증선은 안동교육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고 박정희가 죽기 석 달 전 청와대 초청까지 받았던 실존인물이다.
1962년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도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고 혈서론의 근거를 뒷바침할 당시 취재 내용이 들어있다.
이 내용들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나온다. 박정희 찬양이라면 진실과 상관없이 미쳐 날뛰는 조갑제조차 충성혈서(忠誠血書)의 존재를 인정하는 글을 쓴 것이다. 설마 박통교의 교주 조갑제가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겠는가?
▲ 만주로 떠나기 직전 '교사 박정희' 1940년(소화 15년) 2월 7일 와다나베 경부 송별식 기념촬영 사진. 이 사진은 박정희가 만주행에 오르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붉은 원 안이 박정희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자들은 '장발사건'으로 박정희가 일본인 교장과 싸운 뒤 교사직을 버리고 만주로 갔다고 하지만, 당시 박정희의 머리칼은 짧고 단정하다.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라는 글을 보면, 혈서론의 출처인 만주일보는 1927~1934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니 박정희가 입교한 1942년에는 만주일보가 없었다는 것이다(1940년에 만주신경군관학교 입교). 그 근거로 서울대 소장목록을 들었다. 그러나 서울대 소장목록은 말 그대로 1927~1934년 사이에 발행된 만주일보를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지 실재로 만주일보가 존재했던 기간은 아니다.
만주일보는 1919년 7월 21일에 만주 봉천에서 친일 언론인인 선우일(鮮于日)이 창간한 친일지로 한동안 폐간되었다가 1944년 5월에 재창간된 신문이다. 또한 당시 박정희가 실린 신문은 만주일보가 아닌 1937년에 창간되고 광복때까지 존재한 만선일보라는 친일지다. 만주일보의 <창간-폐간연도>도 모르고 박정희가 입교한 해도 모르면서 거짓 글을 써댄 글쓴이와 '명쾌한 반박'이라며 입이 쩌억 벌어진 수만명의 박사모 회원들...참으로 한심스럽다!
▲ 일제시절 박정희의 병적기록을 보여주는 문서인 `임시육군군인군속계' 문서는 박정희가 1940년 4월 1일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해 두해를 보낸 뒤 42년 10월 1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고 44년 12월 23일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위의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등...)
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만선일보 1942.3.24)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 상증의 전달이 있고 폐식 하였다."(만선일보 1942.3.24)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박정희를 지도했던 일본인 장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 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일본 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일본 외교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 동료)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 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 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동경의 한 요정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전 자민당 부총재 오노)
▲ 수석 졸업하는 박정희 생도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박정희가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한 완전한 일본인이란 이유를 대기위해 근거가 될 만한 글들을 대충 모아봤다.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지닌 분들이라면 대충 읽어도 박정희가 어떤 의식을 지닌 인물인지 충분히 느끼시리라 생각된다. 박정희를 옹호하고자 하는 변명이, 일왕에게 충성한 황국신민이 되기 이전인, 교사로 재직시 박통 제자들의 증언이라니 이또한 참으로 궁색하다. 박정희의 친일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후인 일왕에게 충성한 황군이후의 일인데, 객관적 자료란게 고작 교사로 재직시의 민족교육 타령인가. 그 민족교육도 스승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의 눈물어린(?) 미화·왜곡된 증언이라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 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아래 네이버 백과사전를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47512
→ 저널리스트 이상우는 『신동아』1987년 10월호에 게재한 <박정희, 그 ‘컴플렉스의 정치학’>에서 다음과 같이 이 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장교로 임관된 다음 처음 배치된 곳은 일본의 마쓰야마(松山) 제14연대였다. 그러나 곧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으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는 얼마 안있어 이곳으로부터 화북지방의 열하성으로 이동배치되어 일본 북지나파견군의 열하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열하지구는 만주와 중국대륙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일본군에 대한 항일세력의 저항이 끊임없었던 곳이다. 항일세력의 중심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었으나 당시 동북지구성과 화북일대에서 일본군에 항거한 세력은 이밖에도 여러갈래가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관 군벌군, 독립적인 항일유격군, 심지어는 만주일대의 비적들까지도 일본군과 싸웠다. 주력은 중국인이었으나 조선인의 항일조직도 만만치 않았다. 한인들은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혹은 독립된 게릴라부대로서 때로는 단독으로 또 때로는 국부군이나 중공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벌였다. 조직의 구성과 이념은 달랐지만 당시 조선인 항일부대의 목표는 우선 한가지,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과 조국의 광복이었다.
박정희가 일본군장교로서 싸운 항일세력이란 이런 것이었다. 식민지민족의 비극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속해 있던 일본군이 소탕의 대상으로 삼았던 항일세력 속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역에서 피흘린 동족의 청년들이 있었다. ...... 당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서는 일본군으로부터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
박정희 부대와 맞서 싸운 대표적 항일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을 간단히 살펴보자. 1942. 7월에 중국의 화북지방(연안)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위해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그 밑에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거느린다. 조선의용군이 속한 조선독립동맹은 건국강령으로 보통선거실시, 의무교육실시, 조선에 있는 일제의 대기업의 국영화와 토지의 분배실시 등를 내걸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천명된 내용과도 별반 차이가 없던 항일조직이었다. 즉 조선의용군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던 한인무장부대인 것이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지 않고, 연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하며 8로군과 협동작전도 펼치고 화북, 만주지역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했다. 또한 8로군에도 한인무장단체나 독립투사들이 소속돼 있었다. 이들 독립투사들은 독자적 군대를 결성하기 힘들어 민족 독립을 위해 무기를 얻고자 8로군에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110여회나 토벌했다는 이야기의 시발점은 1960년대 박정희추종자가 쓴 <박정희 전기>다. 이 책은 박정희를 영웅화시키기 위해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시켜 항일세력들을 공비들로 둔갑시켰다.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그 분들이 항일운동가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110여회의 토벌설은 박정희의 악행으로 부메랑이 돼 이제 인터넷상에도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즉 110회 토벌설을 먼저 주장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박통교 친일수구꼴통들이었다. 왜 박정희는 자신의 추종자가 쓴 이 내용에 대해 그 당시 침묵했으며 왜 추종자들은 이제와 자신들이 주장하고 인정한 110여회의 토벌사실을 좌파들의 박정희 죽이기라며 부정하는가?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110여회는 아니여도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적극 나섰다는 주장도 과장됐겠지만, 간도특설대나 만주보병8단 출신들의 증언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축소하기 위해 박정희의 전력또한 축소시켰을 가능성도 많아 박정희가 겨우 수차례 토벌작전에 참가했다는 이들의 증언내용에 대해 그 진정성을 다 믿기는 사실 힘들다.
우수생으로 박정희와 함께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일본인인 다카야나기 도시오 일본 법정대 교수조차도 "당시 공비로 불리던 독립군 토벌이 군관학교의 역할"이라며 "황국군인으로 길러진 청년 장교들이 만주국의 통치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소련과의 전쟁준비에 이용됐다"고 했다.
어쨌든 박정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항일운동가들을 적으로 삼는 제국군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황국신민이란 사실엔 추호도 변함이 없다.
*위에 추종자가 출처를 밝힌 네이버 오픈백과사전은 개인의 자유 주장일 뿐 검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잘못된 정보라 생각될 경우 누구나 이의제기를 해서 수정을 요구할 수 있죠. 헌데 위에 밝힌 주소를 찾아갔더니 글이 삭제되었더군요... ^,.ㅠ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 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 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 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재일동포 포함)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로 육군군관학교 조선인 출신들이 이들을 지휘, 일명 ‘독립군 사냥개’집단으로 불리었다. 5·16쿠데타의 핵심역할을 했던 군인 대부분이 육군군관학교 출신이다.
만주국군은 1932년 3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제1단계 치안숙정’기간을 정하고 대부대를 동원하여 ‘집중적 배치전술’로 항일운동의 중심지를 대규모적으로 토벌하였다. 이 기간동안 1만여 명의 항일운동가들과 무고한 사람들이 집단도살당하거나 살해되었고 700여 채의 가옥이 전부 불에 탔으며 650만 권에 달하는 역사책들이 소각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함께 같은 해 5월부터 만주지역에는 일제의 앞잡이(개)를 잡는 유격대조직인 일명 ‘개잡이 부대’들이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어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만주제국 옌볜(延邊,간도성) 초대성장 이범익(李範益,기요하라 노리에키·淸原範益)은 1938년 9월15일 일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로 결성된 특수부대를 옌볜에 조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이 제의를 쾌히 받아들여 안투(安圖)현 치안대, 훈춘(琿春) 국경감시대, 옌지(延吉) 청년훈련소, 펑톈(奉天,선양·瀋陽) 육군군관학교와 기타 만주국군 부대에서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급군관과 사관 각각 3명을 선발하여 안도현 명월구에 조선인 특설부대 본부와 분부를 설치했는데 후에 이 부대를 ‘젠다오 특별설치부대(間島特別設治部隊)’라고 불렀다.
당시 연길 특무기관장 겸 옌볜지구 고문인 오코시 노부오(小越信雄) 중좌는 조선인 거주지구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새로 설치하였는데 간부 이하 전원은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 대장은 야나가와 가즈오(梁川一男) 소교였고 부대장은 고모리야 요시카쓰(小森谷義一) 상위였으며 연장은 하시기 기요시(橋木淸) 상위였다. 병사는 제1, 2련 및 기관통련이 각각 120명씩으로 360명이었다. 나머지 각 부대 대장은 와타나배 주고로(渡邊捨五郞), 소노베 이치지로(園部市二郞), 사사키 고로(佐佐木五郞), 시바타 기요시(柴田淸) 소교였다.
간도특설대는 옌볜 각지의 병력을 집결하여 이르는 곳마다 ‘수비대’‘헌병대’‘경찰서’‘분주소‘‘산림경찰대’ 그리고 각종 ‘특무기관’을 설치하였다. 민족반역자 집단인 간도특설대는 1945년 8월20일 중국 만리장성 부근인 리허(熱河)성에서 조선의용군 토벌을 감행하다 뒤늦게 8·15광복소식을 듣고 선양에서 해산됐다. 간도성 특별설치부대는 그 암흑의 나날 민족앞에 천추에 용납못할 악행을 저지른 민족반역자 집단이었다.
한편 간도특설대 중대장급 군관이었던 육군 중위 박정희(朴正熙,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는 광복 후 시세에 편승하여 중국 하북지대 조선족 청년들을 모아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 했으나 추방당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
☆간도특설대 관련 박정희 의혹들
①박정희가 속했던 보병 8군단이 간도특설대와 연합했다는 증언.
②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있다가 갔다는 의혹.
③같이 근무했던 부대원의 입을 통해, 박정희가 북간도로 건너가 '간도조선인특별부대'에 자원 입대했다는 증언.
④1980년 8월 18일에 육군본부가 펴낸 '창군전사'란 자료집에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근무했다는 기록.
⑤1991년에 중국만주지방의 조선족 유지들이 발간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결전편>에 "특설부대에 참가한 자들은 모두 민족반역자들이다. 박정희는 특설부대의 중대장급 군관이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시세에 편승하여 하북지대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조선의용군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자 곧추 남조선으로 내뺐는데 그 뒤 우익세력을 긁어모아 나중에는 대통령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라고 기록.
지금은 한줌 흙이 된 합창의장 출신의 장창국이란 인간또한 박정희를 비밀광복군으로 미화시키는 글을 쓰다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며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관련되었다고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와같이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와 관련되었다는 자료와 의혹들또한 상당하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 글은 사실이며 기회주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공산주의를 배신한 것이 왜 기회주의가 되어야 하는지? 그러면 공산주의자로서 그냥 남아 있어야 했다는 뜻인지? 솔직히 공산주의 배신한 것 잘한 것 아닌가요?
→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쳐 만주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노루에서 다시 박정희로,
만주군 중위에서 가짜 광복군 중대장으로,
가짜 광복군 중대장에서 대한민국 육군장교로,
제국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가 공산당 진압군 작전장교로,
무기징역 죄수에서 다시 육군 정보장교로,
'빨갱이'에서 반공주의자로,
육군장성에서 반란군 두목으로,
민정이양공약에서 출마선언으로,
"개헌은 없다"에서 삼선개헌으로,
"이번이 마지막 출마"에서 종신 대통령으로,
어제까지 악마라고 욕하던 김일성과 손에 손잡고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전민족과 세계를 상대로 '역사적 사기'를 치고...
-'알몸 박정희' 중에서-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는 '마루야마(丸山)'로 김대중은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로 김영삼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로 창씨개명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창씨개명이 시행되던 당시 김대중은 만15세, 김영삼은 만13세, 박정희는 만23세였다. 박정희는 당시 만주군관학교 생도로, 본인 스스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김대중, 김영삼은 창씨개명 당시의 나이로 봐 자신들이 했다기 보다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대중의 창씨개명에 흥분해 앞뒤분간도 못하고 김대중을 끌어들여 박정희의 친일행위를 덮어버리려는 추종자들의 작태가 혐오스럽다. 일왕에게 충성혈서를 쓰고 황국신민이 되고자 자진해서 창씨개명한 다카키 마사오와, 강제에 의한 창씨개명으로 친일파의 기준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국민들의 한 사람에 불과했던 당시 15살의 어린 김대중을 같이 엮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독립군 장준하
1945년 8월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 어느 사진관에서...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은 가짜 광복군 박정희와 잠시나마 같이 지냈던 독립군 장준하가 주장한 박정희의 또다른 창씨개명이며 박정희의 일본군 시절 동료들이 증언한 이름이다. 생각컨데, 호적상 이름과 부르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카모토 미노루는 그런식으로 혼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고자 스스로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한 인물에 대해 오카모토 미노루란 이름을 또 팔아먹으면서 박정희를 씹어댈 만큼 독립군 출신 장준하가 파렴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하~ 수구꼴통들의 민족영웅 박정희는 진정한 황국신민이 되기위해 자진해서 두 번이나 이름을 바꾸셨다니 참으로 존경스럽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⑧⑨⑩은 지겨워 상상에 맡기렵니다.^^
첫댓글 역시 자료 지존인데요.^^b
박사모 여러분들 좀더 공부좀 하시고 반박좀 하시죠.. 반박해 봤자.. 친일매국노군사쿠테타수괴지요 머 달라질게 있나요.. ^^
이런게 자료라고요? 한숨만 나오는군요. 적어도 자료라면, 밑에 일심님의 이미지 파일이 진짜 자료지요. 저건 그냥 짜깁기 날조일뿐입니다.
공부 많이 하신 한미남씨.. 정말 짜증나는 구랴.. 귀하가 말하고자 하는게 도데체 머요.. 그래서 박정희가 친일매국노군사쿠테타수괴빨갱이 남로당원이 아니라는거요 머요.. 공부많이한 귀하의 의견을 듣고 싶구려... 머 말끗 마다 세뇌되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래 세뇌되어지지 않은 당신의 의견좀 말해보시오.. 박정희가 친일매국노군사쿠테타수괴에 빨갱이 남로당원이 아니란 말이요.. 도데체 머요...
친일매국노군사쿠데타수괴빨갱이 라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근거를 제시하라고요. 님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인터넷에 악의적으로 날조된 글만 보고 세뇌되어 그걸 마치 100% 진실인양 사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역사왜곡까지 자행하고 있지요. 저는 님께서 말씀하신 걸 전부 사실에 근거해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뭘 주장하다니요? 님의 주장이 근거없는 주장이라는 걸 주장했을 뿐이지요.
그래 당신이 말하는 그 중요한 1차사료에 박정희는 친일매국노군사쿠테타수괴 빨갱이 남로당원이 아니라는 증거 있소이까... 좀 그 사료좀 가져와 보시오.. 자칭 세뇌않된 공부많이한 한미남씨...
입증책임은 최초 제기자가 지어야 하는것이지요. 소송관련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제가 환규아빠님께 환규아빠님은 환규아빠가 아니라, 엄마라고 주장한다면 님이 그걸 증명할 책임이 있습니까? 주장한 제가 증명해야지요. 아니라는 증거? 이런식의 소모적 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무엇때문에 그런 증오와 시기심을 가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둔갑시켜 날조를 해서는 안되겠지요.
정곡을 찌르는 자료지요 ㅋㅋㅋㅋㅋㅋ
관계자의 증언과 관계자 이름까지 명시했는데도 못 믿겠다는건 믿기 싫다는 뜻이죠?
이봐요.. 한미남씨.. 박정희에 대한 친일매국노 문제, 군사쿠테타문제, 남로당원 문제 등은 공지의 사실이요.. 그럼 내가 1+1=2 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되겠소.. 1+1=2 사실이 아니고 세뇌되었다고 주장하는 당신이 증명해야 하겠소..
환규아빠님, 박정희의 친일 문제,군사쿠데타 문제, 남로당원 문제는 여기서 거론 사항이 아닐텐데요? 오카모토 미노루 에 대한 근거자료 부탁드립니다.
님이 그 주지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걸 제가 저 아래에서 전부 반박 및 사실확인을 시켜드렸지요.
우겨도 어쩔수 없지요 ㅎㅎㅎ 끝까지 우기시오 보수분들
한미남님이 꺼내놓는 자료들은 일단 한번씩 사실확인작업부터 거쳐야 할겁니다. 이분 예전에 1997년 체결된 신어업조약이 2000년 해수부장관으로 임명된 노무현장관에게 책임있는거 처럼 우기시던 분이죠. 기초적 연표, 선후관계는 확인조차 안하고 자기 논리에 맞게 사실을 왜곡시켜 논거로 삼죠. 더 재미있는건 그러면서도 자기 의견이 논리적이라고, 반론한 사람들이 자기에게 논박당하고 철저히 깨졌다고 믿고 있었다는겁니다.
아아.. 그리고 난독증에, 논점이탈도 빈번하더군요. 반론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그러게요.. 저사람들은 말도 잘 지어내지요
기억이 납니다.
박정희가 친일주구였다는건 이제 코흘리개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요.. 새삼스러울것이 없네요... 참으로 불쌍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저런것들이 지도자였으니.. 국민들이 똑똑하고 성실해서 이정도 왔지 지도자란 놈들을 보면 아프리카 독재자만도 못한 새끼들이었죠..
박정희가 친일주구였다는건 이제 코흘리개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요.. ==> 크하하하.. 맞습니다.. 박정희를 깎아내리기위해 빨갱이들이 열나 애들 빨갱이교유시킨 결과죠.. 이번 전교조건이 또하나의 증거랍니다..
아마 한열사에서는 보수쪽에서 제대로 반박을 못할거요..욕설을 못하니.. ㅋㅋㅋㅋㅋㅋ
친일매국노를 보수주의자라고 말한다면 한국에서 보수는 사라져야합니다
박사모 글과 그에 대한 반박 글을 글자색을 달리하여 정리하시면 더 보기 좋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