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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그들은 묵묵히 강가를 거닐었다. 길게 이어진 백사장 끝까지 갔다 돌아설 때 서희가 입을 열었다. “오빠, 함께 서울로 가는 게 어때요?” 세준은 서둘러 허리를 굽혀 발밑의 조약돌을 집어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으므로 오래 마주볼 수 없었다. 아니었다. 그녀의 제의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두 번, 세번... 조약돌은 수면 위로 사뿐사뿐 튀어오르다 가라앉았다. “오빠가 이러고 있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혹시 그녀가 모든 것을 알아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시에 든 까닭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민선생은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민선생도 정확한 것은 모르지 않 는가. 그는 빙그레 웃으며, 조약돌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조약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고, 강을 향해 힘껏 조약돌을 던졌다. 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도대 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볼멘소리로 물었고, 그는 그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그 순 간부터, 아니 민혁의 입에서 나온 뒤부터 나름대로 변명을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그는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오빠가 의대 특별 장학생이라는 사실요. 그게 나한테 숨길 만한 일이었나요?” 그는 일부러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그 연기에 스스로 미심쩍어하면서 말했다. “그런 말을 내 입으로 직접 한다는 것이 얼마나 쑥스러운 일이겠니?” 그녀도 인정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의 됨됨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왜 방학만 되면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거죠? 그것도 힘든 일만 골라서...” “서희야!” 이름을 불러놓고,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손으로 강변의 미루나무를 가리켰다. “저 위에 까치집 보이지. 까치는 바람이 부는 날만 골라 집을 짓는대. 그래야 더 큰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거래.” 고개를 젖히고 까치집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진지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지. 다양한 삶을 체험해본다는, 뭐 그런 식의 좀 유치한 발상이었어.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힘든 노동 속에는 미처 생각 못한 것 이 있었어. 그건 이제껏 내가 살아온 삶에선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것이었지. 뭐랄까...순수한 열정 이라고 하면 될까? 하여튼 격한 노동 속에서 내 자신이 아주 맑고 투명해지는 느낌을 받곤 해.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나게 될 거야. 그때 난 오늘의 기억으로 견딜 수 있을 거야.“ ‘순순한 열정.’ 그녀의 그 말뜻을 선뜻 이해할 순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잘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젠 충분하지 않나요?” “괜찮아. 이제는 힘들지도 않아. 그리고 남자가 매일 책이나 뒤적거리고 있어서야 되겠니? 서 희야. 내가 얼마나 튼튼해졌는지 보여줄까?”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덥석 안아 들어 올렸다. 빙글빙글, 맴을 돌 리다 내려놓았다. “어때, 굉장히 힘세지?” 그녀는 샐쭉한 낯으로 대답했다. “씨름을 해보는 게 어때요?”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그는 소리내어 웃었고, 그 웃음이 그녀의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옛날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오빠는 커서 권투 선수가 되는 게 어때?” “그럴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서희가 소망원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어느 날 소망원 운동장 한 구석에 모래주머니가 매달렸다. 소망원의 아이들이 읍내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들어온 다음 날이었다. 나이든 아이가 사내아이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고아도 서러운데, 매까지 맞아서야 되겠어.” 그날부터 아이들은 기를 쓰고 모래주머니를 두 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열심히, 가장 오랫동안 모래주머니에 매달린 것은 고아도 아닌 세 준이었다. 단순히 모래주머니만을 두드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중학교 3년 내내 읍내에 있는 권투 도장을 다녔다. 한여름에 웃통을 벗어젖힌 채 비오듯 땀을 흘리며 모래주머니를 두드리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나쁜 녀석들이 한서희를 괴롭힐 때 지켜줘 야지.” 그땐 실없는 농담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결코 가볍게 웃고 넘길 말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아무도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사람이 없건만 아이들이 하나 둘씩 소망원을 떠나곤 했다. 마치 험난한 세상과 마주할 때 가 되었다는 듯이. 소망원 아이들 중 그녀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그녀 뿐이었다. 남녀공학이었고, 중.고등학교가 한 울타리에 있는 학교였다. 학교에서 소망원까지 갈 필요는 없 었으나 언제나 그녀를 데려다주곤 했다. 그날도 그녀는 학교 정문 앞 공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한눈에 불량스러 워 보이는 학생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반반하다느니, 쓸 만하다느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한 학생이 말했다. 언뜻 보니 교복깃에 고3표시가 달려 있었다. “이 오빠들이 맛있는 거 사줄테니, 가자.” 그녀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손을 잡아 끌었고, 그녀는 발버둥을 쳤다. 그때 그가 나타 나서, 싸움이 벌어졌으며,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말을 그는 증명해 보였다. 다음 날 학교에는 온통 그의 이야기였다. 고2인 그가 고3인 다섯명을 순식간에 물리쳤다는 것 이었다. 그는 단번에 동급생과 후배들 사이에 영웅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녀 역시 덩달아 유명 인사가 되고 말았다. “재가 이세준의 동생이래.” 재 건드렸다간 아마 뼈도 못 추릴걸.“ 복도를 지날때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가 졸업한 후에도 그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졌고, 그녀는 그 전설속에서 언제나 안전했다. 저녁을 먹고, 차를 한잔 더 마셨다. 시간은 발을 매단 듯 빠르게 흘러가 밤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인적이 끊겨 을씨년스 러운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거리로 나왔다. 세준이 입을 열었다. “피곤하지?”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터미널 옆 불 밝희 여관 간판을 바라보며 자못 활기차게 걸어갔다. 폭설 때문에 산판으로 가지 못한 며칠 전 그가 묵었던 여관이었다. 읍내에선 그중 깨끗한 곳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것인가. 그는 진작부터 그 고민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여관으로 들어서는 계단을 오르기 전 그녀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방을 하나만 빌려야 하는지, 아니면... 하나만 빌린다면, 서희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한 방씩 따로 차지하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지 않은가. 그로선 아무래도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그녀에게 물어보기도 만만치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으로 그는 카운터의 유 리문을 향해 외쳤다. “방 있습니까?” 홀로 화투장을 방바닥에 가지런히 늘어놓고 있던 초로의 여자가 고개를 빼고 그를, 그뒤에 서있는 그녀를 훑어보았다. “203호로 가요.” 대수롭지 않은 여자의 말투였고,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방을 휘둘러본 그녀는 욕실 문을 열었다. 어제 묵었던 곳보다 한결 깨끗한 곳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놓 였다.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 다시 홀로 잠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녀에겐 다행스러운 일처럼 여겨졌다. 또 그와 함께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이, 잠을 깨 고개를 돌리 면 그가 옆에 있으리라는 생각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 행운인 듯도 했다. 옛날에는 그와 함께 강으로 들로 마음 내키는 대로 쏘다닐수 있었다. 그렇지만 밤이 찾아오면 헤어져야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차라리 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서 아침이 왔으면 하는 설렘으로 잠을 설치곤 했다.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는 턱없이 간절한 심정으로 그를 좋아했다. 그 에게 매달렸다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어느 때는 혹시 그가 자신에게 싫증을 내게 되는 것은 아 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바보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가 성큼 커버린 고등학교 때 특히 심했다. 그 또래의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봐도 왜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싫었는지 알수 없었다. 그녀는 욕조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진저리를 치듯 물이 쏟아졌다. 더운물을 가득 받아놓은 욕조 에 몸을 담근 채 오랫동안 있고 싶어졌다. 찬 공기를 너무 많이 쐰 탓일까, 벌써부터 코끝에 싸한 느낌이 었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그에게 말했다. “샤워해요. 물이 아주 뜨거워요.” 그는 씻기를 싫어하는 아이처럼 손을 내둘렀다. “난 괜찮아.” 그녀는 그를 일으켜 세워 등을 떠밀었다. “씻긴 해야죠.” 그는 욕조에 가득 받아놓은 더운물을 잠시 바라보다 세면만 하고 나왔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기고는 세면 백을 가방에서 꺼내들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간 뒤 똑, 잠금 장치 소리가 들렸다. “나 잠깐 나갔다 올께.” 그는 욕조를 향해 그렇게 외치고 방을 나왔다. 맥주와 안주,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들고 는 하릴없이 한적한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그녀가 편히 씻기를 원하면서. 그러나 다시 방으로 돌아 왔을때 그녀는 여전히 욕실에 있었다. 그는 창가에 벽을 등을 기대고 앉았다. 욕실 안에서 간간이 물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망서리다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남자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었다.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욕실쪽으로 시선이 갔고, 듣지 않 으려 할수록 물소리는 점점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는 목이 마른 사람처럼 순식간에 한 병을 비웠고, 두 번째 병의 마개를 벗겨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여자로 생각해오지 않았다. 아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겨우 초등하교 6학년에 올 라가는 해였지만, 그녀는 여자였다. 다만 여자의 몸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그랬다. 그건 매우 불온하고, 염치없고, 그녀에게 감히 연상 시 킬수 없는 그런 생각 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여자의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긴 속눈썹에 입맞추고 싶었고, 가녀린 목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향기를 마음껏 맡아보고 싶었고, 그녀를 힘주어 안아보고 싶었 다. 그녀의 봉긋 솟은 젖가슴이 처음으로 눈에 띈 날, 그 젓가슴에 무심코 팔꿈치가 닿은 그날, 그리고 그녀에게서 배어나는 향취에 갑자기 맥이 풀리던 그날... 그 불온한 생각 때문에 그녀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공연히 딴전을 부리곤 해야 했다. 문이 열렸고, 그녀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나왔다. 그 모습이 성숙한 여인처럼 보였다. “한잔할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따라주눈 술을 그녀는 두손으로 받았다. 잔의 밑바닥으로부터 차오르는 거품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막상 자려고 했지만, 술까지 급히 마셨지만 쉽사리 잠이 올것 같지 않았다. 서희는 창가에, 세 준은 문 쪽에 자리를 정하고 누웠지만 그렇다고 한방에 눕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있었고, 가지런한 그녀의 숨소리였지만 귓전에 가득했 으며, 숨쉴 때마다 그녀의 향기가 조금씩 조금씩 밀려 들었다. 처음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그와 함께 있었지만 그랬다. 그와 함께 잠들고, 그와 눈뜨기를 마치 동화속의 한 장면처럼 그녀는 그리워해 왔다. 그리고 이제 동화 속에서 막 걸어나와 그와 함께 누웠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찰나 그가 훌쩍 어디론가 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당치도 않은 색각 때문 이었다. 그는 반듯하게 누워 있었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들지 않았다는 것쯤은, 바보가 아닌 이 상 알수 있었다. “오빠!” 불러놓고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왜?” 눈은 떳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진 않았고, 그녀는 짧은 순간 그게 야속했다. “그냥요.” 그리고 다시 침묵. 시간이란 참으로 부정확한 것이었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잣대일 뿐 마음의 흐름을 잴수는 없었다. 아직 잠들지도 않았는데, 아침이 쉬이 올 것만 같은 초조함에 그녀 는 다시 그를 불렀다. “오빠!” “왜?” 무슨 말이 하고픈 것일까. 그녀는 선뜻 입을 떼지 않았다. 그는 천장을 눈이 아프도록 바라본채 기다렸다. “오빠! 손좀 줘보세요.” “...” “어서요.” 그는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손에 포게지고, 따뜻함이 따뜻함을 감쌌다. 그녀는 한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이 형편없이 거칠고 억세져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녀는 슬픔을 내리누르는 심정으로 물었다. “오빠, 나 보고 싶었어요?” “...응. 아주많이.” “됐어요, 그럼.” 싱겁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꼭 쥐어주는 그의 손이, 자신 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아, 이사람...버림받은 자신을 이제껏 지켜준 이 남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열살짜리 고아에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힘이 되어준 이 남자... 아, 이사람... 그녀는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배어져 나왔다. 이순간, 그가 원한다면 ... 난 무엇이든지 할수 있어. 앞날따윈 아무래도 좋아. 그가 원하 기만 한다면... 난 무엇이든 기쁜 마음으로 줄수 있어. 하나도 두렵지 않아. 날 정말 원하기만 한 다면... 그는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가 커처다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참 아 름다운 눈도 있구나. 세상에는 뛰어들고 싶은 만큼 맑은 눈동자. 드넓은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 이 맑디맑은 오아시스를 찾아내고 재빨리 입을 담그기 전에 망연자실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는 그녀의 눈망울을 바라 보았다. 그녀를 안고 싶다. 아, 그저 안고만 있을 수 있다면... 그러나 아직... 아직은 아니다. 완벽하게 그녀를 지켜줄수 있을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랑의 이 름으로 그녀를 떠올려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처음 본 그순간, 그녀는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 만, 사랑의 이름으로 그의 가슴에 다가왔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오면서도 사랑의 이름 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한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 외에 누구도 떠올리거나 바라볼수 없었다. 그는 때로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전생애를 관통하고 지날 여자라는 것을. 그 생애는 아주 길고 아름다울 터이므로 조급해할 필요도 없으리라. 가지런한 숨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 보았고,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남 겼던 밤 인사를. 그대의 눈에는 잠이, 그대의 가슴에는 평화가... 어떻게 아침이 왔는지, 밤은 또 어떻게 지나갔는지 세준은 알지 못 했다. 잠들었던 것은 아니 다. 그는 서희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밤새 내내 그파수꾼은 즐겁고, 행복했으며, 피곤한 줄을 몰랐다. 깊고 아늑한 잠. 그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은 채 잠을 잤다. 마치 백년동안의 잠 속에 빠져든 숲속의 공주처럼 그렇게. 눈을 떴을때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 고, 그녀는 그것이 너무 마음 편하고 좋았다. 그녀가 오랫동안 소망해왔던 것을 이룬 듯한 느낌이 었다. 아침, 떠날 시간 이었다. 그들은 터미널 나무의자에 앉아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그를 곁눈질하며 입을 열 었다. “오빠 친구 말인데요...” 그가 종이컵을 들었다 다시 내려 놓았다. “장민혁이라는 친구 말예요” “갑자기 민혁이는 왜?” “며칠 전 집으로 찾아왔었어요.” “민혁이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가슴에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반쯤남아 있던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짐짓 태연하게 되물었다. “민혁이가 왜 왔을까?” “그냥 지나다가 들렀대요.” 민혁은 그곳까지 할일없이 지나칠 친구가 아니다. 그가 서울을 떠난 후, 좀더 정확히 그날 민혁 이 그들의 만남에 합석한 이후 그의 가슴에 남아 있던 불안함과 비로소 분명하게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니었다. 묻지 않았을뿐 눈빛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채근하 고 있었다. “민혁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민혁씨... 그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긴, 좋은 친구지.” “오빠 친구니까 당연히 좋은 사람이겠지. 그런데...” “그런데 뭐지?” 그녀는 그의 손에서 흉하게 일그러지는 종이컵을 빼앗았다. 괜한 이야기를 했는가 하는 후회가 뒤따랐다. 그렇지만 아무 말없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더 이상하리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망설 이다 입을 열었다. “오빠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요. 뭐랄까, 느낌이 달라요. 남자들은 서로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나 보죠?” “사람들은 누구라도 조금씩 다른 거야. 그 친구 괜찮은 구석이 많아.” 공연한 조바심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대범한 탓일가. 어쨌든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하는 그가, 조금은 야속했다. “민혁씬 굉장한 부잔가 봐요?” “민혁이가 부자인지는 모르지만, 민혁의 아버지가 부자인 것은 분명해. 너도 알지. 일봉그룹 장사필 회장이라고?” 일봉그룹, 장사필 회장... 이 땅에 살고 있는데 그 이름을 모를까. 그런데 그 사람이 장사필 회장의 아들이란말인가. “왜 놀랐니?” 그녀는 그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이번에는 그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컵 두 개를 빼 앗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또 왔었니?” 그녀는 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물음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려 먹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그가 두어 차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일어섰다. 벌써부터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운전기사가 올라타고 있었다. 그가 어깨에 가방을 메어 주고 가볍게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서 가. 보름쯤 더 있다 올라갈께.” 그녀가 머뭇거리자, 속뜻도 모르고 그가 등을 떠밀었다. “어서.” 곧 떠날 듯 액셀러레이터를 맹렬하게 밟아대던 버스는 쉽사리 움직일 줄 몰랐다. 그녀는 창에 이마를 댄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깊게 찔러넣은 채 있었고, 그녀와 눈이 마주칠 적마다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예전 같지 않았다. 슬픔에 잠긴 웃음이 저럴까. 그녀는 가방을 열어 메모지를 꺼냈다. 손을 바삐 놀려 그 위에 적어갔다. 버스는 떠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저씨, 잠깐만요.” 그녀는 기사를 향해 외치곤 버스에 서 내려 그에게 달려가 메모지를 건넸다. 그리고 슬금슬금 미끄러지는 버스에 올라탔다. 답문리행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라는 일처럼 짜증나는 일이 있을까. 잔뜩 화난 사람처럼 버스가 달려올 곳을 노려보던 세준의 눈에 길 건너 공중전화 부스가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길을 가로질러 공중 전화 부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남긴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민혁에게 왜 그녀를 찾아갔는지 묻고 싶었다. 한편 그런 식 으로 자신의 옹졸함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버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장민혁씨 부탁합니다.” - 누구세요. “같은 과 친굽니다.” - 친구 누구죠? “이세준이라고 합니다.” - 기다려보세요. 있는지 모르겠어요. 오빠 하는 긴 외침이 들려왔다. 아, 네가 유리라는 아이구나. 그는 유리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민혁의 이야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민혁의 유일한 온전 한 혈육. 젖도 못 뗀 아이를 데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던, 그 아이가 바로 유리였다.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도통 소식이 없었다. 그는 연신 투입구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 여보세요. 잠이 덜 깬 목소리였지만 민혁이 분명했다. “나야, 세준이. - 어, 웬일이니?” 반색을 하는 목소리였고, 다시 물어왔다. - 올라온 거야? “아니.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왔어.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그렇게 묻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묻고 싶은 것을 물으라고, 이세준. 전의를 다지듯 그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때 민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야, 이세준. 나무 많이 죽였냐? 이젠 살생일랑 작작 하고 그만 올라와라. 서희씨도 많이 기다 리던데. 기다리던 말이었다. 하지만 민혁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다시금묵직한 그 무 엇인가가 가슴에 철렁 내려 앉았다. “서희 만났니?” “응. 너 떠나고 몇 번 만났어.” 몇 번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빠르고 거칠게 몰려들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담담 한 목소리로 물으려 할 때 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희씬 잘 지내고 있어. 빨리 올라와. 보고 싶다. 그리고, 할 말도 많고... 동전이 떨어지면서 전화는 맥없이 끊겼다. 동전을 바꿀 곳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왔고, 또 버스를 기다렸다. 여전히 버스가 달려올 곳을 바라보았지만 버스가 늦는 것쯤은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서희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리라. 그랬으면 됐지. 깊이 생 각할 일도 아니다. 잠시 사납게 일렁이던 마음의 격랑이 고요해진 느낌이었다. 마치 폭풍의 눈 속으로 들어선 것 처럼. 그는 주머니 속에서 그녀가 남겨준 쪽지를 꺼냈다. 순수를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은 결코 슬퍼 보이지 않는다. - 안데르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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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