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만물이 드러나는 방식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별의 방식 이전에 만물의 바탕을 이루는 하나의 도가 있습니다.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분별없는 앎, 그것이 곧 견성이다 -수심결-
본성(本性)은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이다.
아상(我相)은 이 세상에서의 경험(經驗)이 쌓여서 만들어진 망상(妄想)이고,
아상이 드러나는 방식이 경험의 산물인 언어를 사용하는 생각이다.
언어를 통해 아상이 구현되는 생각은 이 세상에서 축적된 '직접/간접' 경험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
아상이 구축한 망상과 '비교/판단'하는 이분법(二分法)의 분별(分別)이다.
아상의 망상과 일치하면(會) '옳다/좋다'고 해석하고, 일치하지 않으면(不會) '틀렸다/나쁘다'고 해석한다.
본성은 영화가 펼쳐지는 스크린이나 홀로그램(hologram)이 펼쳐지는 허공(虛空)처럼
모든 경험과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이다.
그러니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생각으로는 본성을 인식할 수 없다.
영화의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상이 진짜가 아닌 것을 알면 허상인 영상을 통해 스크린이라는 본질을 볼 수 있다.
허공에 펼쳐지는 홀로그램이 진짜가 아닌 것을 알면 허상인 홀로그램을 통해 허공이라는 본질을 볼 수 있다.
봄을 보지 못하지만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을 보고 봄을 아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이 세상이 펼쳐지는 하나의 본바탕 자리인 본성을 본다.
그것이 바로 본성의 자리를 보는 견성(見性)이다.
본성을 보려고 애쓰는 것을 보는 그것이 견성이고, 먹고 자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을 보는 그것이 바로 견성이다.
투명한 유리는 보이지 않지만 유리에 깃든 얼룩으로 유리가 드러나는 이치이다.
이 세상 만물은 세상 만물이 펼쳐지기 이전의 자리인 지금 여기에서 시절인연(時節因緣)으로 펼쳐지고,
모든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 이자리 하나의 본성 위에 펼쳐져 있다.
망상이 분별이라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분법적인 앎이 유위(有爲)의 앎이라면
망상에서 벗어나 일어나는 사실 그대로를 분별없이 아는 앎이 바로 무위(無爲)의 앎이다.
깨어남은 경험으로 축적된 지식을 모아 일치시키지 않고 아는 지불회(知不會)의 앎이 열리는 인식의 전환이다.
이분법의 분별로 해석한 옳고 그름이 없이 펼쳐지는 모두가 이대로 온전한 진실이며 진리임을 저절로 알게되는
무위(無爲)의 앎이다.
일체가 이대로 온전한(恕) 하나의 현묘(玄)이다
- 어느날 문득... 서현(恕玄) -
첫댓글 문득도 두터운 저변 위에 생겨 나는 현상으로 봅니다.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이 세상이 펼쳐지는 하나의 본 바탕 자리인 본성을 본다." 낙죽장은 29년 동안 송광사에 살면서 또는 절 밥을 먹으면서도 위 글을 이해 못하는 하 근기 였습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어도 남의 나라 얘기로 지식으로만 다가왔었습니다. 눈에는 잉어 비늘을 씌운 것처럼 흐릿하고 귀는 들려도 인식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시절 인연은 마음 공부를 통해 진참회가 이뤄지고 이치가 밝혀졌습니다. 통으로 하나 인 품 안에 들었다 나오니 갈래가 쳐지기 시작 했습니다.
글도 이치 안에서 써지고 작품도 오늘과 같이 변화 된 것입니다.
기적은 서현 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래 그래 맞아 맞아! 하는 것입니다. ^ ^
거두절미 하고 당해보면 압니다.
그 사건에 일어나는 고통에만 몰입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왜? 라는 질문에, 질문에, 또 질문에 질문을 하여 ...
내 몸과 마음에서 ... 아하 ~ 감탄사가 절로 나오면 .. 그 후에... 본질을 안다는 것은!
본성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자꾸 그림만 보입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