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1881~1955), 어머니와 아들, 1922년, 캔버스에 유채, 171.2×240.9cm, 바젤 미술관 소장
일본, 일본 사람에 관한 글 두 편
1. 못 쓰게 된 제목 ‘일본이 좋다’
한일 관계가 나빠지는 바람에 오래전부터 여퉈왔던 글 한 편이 날아갔습니다.
‘일본이 좋다’라는 제목으로 쓰려 했던 글입니다. 일본 TV 먹방 ‘고독한 미식가’를 보다가 그런 글을 쓰려고 했지요.
그 먹방을 처음엔 안 봤어요. 우리나라 먹방도 안 보는데 일본 걸 볼 일은 더 없었고, 길기만 한 주연배우 얼굴도 별로 맘에 안 들었거든요. 또 일본 문화에 가까워진 적도 없고, 가까워보려 한 적도 없었단 말입니다. 일본 소설, 영화도 본 게 많지 않아요. 그런데, 어쩌다 ‘고독한 미식가’를 끝까지 한번 본 이후, 이 먹방은 물론 일본도 좋아할 만하다는 데에까지 이르렀답니다.
이유요? 별것 아니에요.
음식도 한두 번은 먹을 만하게 보입디다만,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은 모든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고, 손님들도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예의를 보여주는 거, 그것 때문이었지요. 서거나 꿇어앉은 채 서로 몇 번씩 고개를 숙이면서, 찾아줘서 고맙다, 부족한 건 없었냐, 맛있는 거 먹도록 해줘서 고맙다, 다음에 또 들르겠다 …. 상냥함과 미소, 친절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 사람들 일상적 마음가짐이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최대한 편하게 해주겠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것들은 그 사람들의 겉모습일 뿐 뒤로 돌아서면, 집에 돌아가면 속에 들어 있는 무슨 소리, 무슨 짓이 튀어나올지는 모르지만, 겉모습부터 무뚝뚝하고 심술 가득한 채 서로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지요. 서비스 정신과 배려 …. 우리가 항용 아쉬워하고 심지어는 그리워하기도 하는 마음씨. 그런 게 왜 우리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나 하면서 본 거지요. 글에 써먹으려고 식당 사람들과 고객이 주고받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인사와 감사의 표현도 메모장에 베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이 좋다’라는 글은 이제는 쓰기가 어렵게 됐네요. ‘일본도 좋다’라고 써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쓸 수 없는 글이 있다는 것, 그게 슬픈 일인 듯합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나에게도 적용되려나 ….
‘일본이 좋다’라는 글을 포기했던 즈음 어느 아침, 차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가려는데, 축구공이 찻길로 굴러들어왔어요. 초등학교 1학년쯤 되는 사내아이가 보도에서 차도로 뛰어들다가 내 차가 오는 걸 보고 그 자리에 서더라고요. 차를 세우고, 공을 집어가라고 손짓을 했더니 얘가 후다닥 공을 들고 인도로 나갔어요.
차가 다시 움직이는데, 인도 위에 있던 그 아이 친구가 차 속의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입니다. 젖살이 다 안 빠져 볼이 아직 통통한 아이가 차를 세워주고 친구가 공을 찾도록 해준 데에 감사 표시를 한 거예요. 그냥 흐뭇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겁니다. “얘야, 자라서도 감사할 줄 아는 그 마음 잃지 마라!”
2. ‘8.15’-우리 형제들의 별명
이번 광복절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초등학교(1905년부터 보통학교, 1938년부터 소학교, 1941년부터 국민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우리 아버지는 태어나 살던 산골에서 나와 그 일대에서는 가장 대처인 안동의 한 일본인 빵가게에서 빵 일을 배웠습니다. 숙식 제공에 월급이 조금 있을까 말까 한 도제식 취업이었지요.
새벽 일찍 일어나 가마에 석탄불을 피우고 한겨울에도 웃통을 벗은 채 반죽을 치대야 하는 초보 일꾼(‘가마돌이’라고 불렀습니다)을 거쳐 앙꼬를 반죽에 싸는 정도까지는 이르렀습니다. 물들인 버터나 마가린을 짤주머니에 넣어 장미와 나뭇잎을 그리거나 주름장식을 테두리에 짜 넣는 케이크 기술은 배우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지요.
해방 후 얼마가 지나 빵가게를 내게 된 아버지는 간판을 ‘8.15제과점’이라고 달았습니다. 그 이후 우리 8남매는 ‘8.15집 아이들’이었으며,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우리를 부를 때 “야, 팔일오!”라고 했습니다. 누님, 큰형님, 작은형님도 ‘팔일오’였고, 나와 아우들도 ‘팔일오’였습니다.
‘8.15제과점’에서는 앙꼬빵(팥빵) 소보루빵(곰보빵) 쇼빵(식빵) 크림빵과 롤케이크 마들렌느 마카롱 스펀지 파운드 등 양과자와 모나카 센베이 요깡 같은 화과자(和菓子, 일본 전통 과자)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가게 뒤 공장 인력은 네 명이었지요. ‘가마돌이’가 제일 아래, 그 위에 ‘주산빠’(뜻은 모릅니다)가 있었고, 주산빠 다음 단계(직책 명이 기억 안 나네요), 맨 마지막에 케이크 장식을 할 수 있는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가마돌이와 주산빠, 그 다음 단계까지는 아버지처럼 도제식으로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며 양성됐지만 기술자는 제과 기술이 앞선 대구나 부산에서 스카우트해왔습니다. 그중에는 ‘8.15’에서 주산빠로 있다가 대도시로 나가 기술자가 되어 돌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골 빵가게보다 더 큰일 해보신다고 서울 부산 대구를 자주 내왕했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공장으로 들어가 직원들 사이에 서서 밀가루를 날려가며 앙꼬빵을 싸셨습니다. 주산빠일 때 해방을 맞았던 거지요.
방학 때면 간혹 서울에서 내려온 사단장 가족이나 검찰 지청장 가족이 ‘8.15’에 찾아와 메뉴에 없는 샌드위치를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샌드위치 만들기는 (집에 있을 때) 아버지 일이었습니다. 식빵을 똑같은 두께로 잘라서 딱딱한 테두리는 저며서 버리고, 프라이팬에 구운 후, 마요네즈를 바르고, 양배추와 오이 토마토를 참으로 정성스럽게 썰어 넣었습니다. 귀했던 달걀 프라이도 아버지가 직접 하셨습니다. 구경하는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안 본다고 대충하면 안 되지. 일본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안 해. 남이 보건 안 보건 배운 대로, 아는 대로 하지 ….”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마돌이들에게 앙꼬빵 싸는 걸 직접 가르칠 때도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일본 사람들이 일을 잘 한다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잘 한다고, 거기에 대면 우리는 아직 멀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해방이 기뻤던 모양입니다.. 서울 부산 대구의 일류 제과점이 ‘뉴욕’ ‘고려당’ ‘프린스’ ‘황태자’ ‘에튜드’ '태극당' 같은 품위 있는 이름을 걸었을 때, 저기 경북 북부의 작은 도시 안동에서 ‘8.15’라는 당당한 간판으로 장사를 시작했으니까요.
‘8.15제과점’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빵공장(기계로 반죽을 치대고, 컨베이어 벨트가 그걸 나르는)을 운영해보기로 하면서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하여튼 우리 형제들의 별명은 ‘8.15’였습니다. 지금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초등학교 동창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유난했던 이번 광복절이었습니다.
[퍼온 글] / 출처; 2019.08.30 06:57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정숭호[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기능올림픽 '역주행'
6・25전쟁의 참화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60년대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소년 가장 배진효도 마찬가지였다. 1963년 경남 진주에서 무작정 상경한 15세 청년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제화점을 찾았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기술을 습득한 그는 한국이 처음 출전한 1967년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양복기술자 홍근삼 씨와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 스토리’는 극적이었다. 한국 선수단은 수상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처음에는 양복과 제화 부문 참가를 포기했다. 목공 등 일반 기능 분야와는 달리 세련된 디자인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근무 중인 제화점과 양복점이 경비를 대는 조건으로 겨우 참가했고, 결국 인생역전을 일궈냈다.
국민들은 두 사람을 보기 위해 카퍼레이드 구간(김포공항~서울시민회관) 도로변을 가득 메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약속했던 ‘금일봉’ 100만원을 내줬다. 당시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기능올림픽은 변변한 일자리조차 없던 시절에 한 개인에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였다. 기술을 갈고 닦은 수많은 청년들은 기능장으로 성장해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 됐다.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한국 선수단은 전무후무한 기능올림픽 기록을 세웠다. 1977년 제23회 대회에서 첫 종합우승을 차지한 이래 지금까지 19차례 종합우승을 했다. 두 번째로 종합우승 기록이 많은 일본이 6차례다.
한국이 최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제45회 대회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밀려 3위에 그쳤다. 1971년 스페인 대회(4위) 이래 최저 성적이다. 뿌리 깊은 학력 중시 풍토 탓에 마이스터고 등 특성화고 학생이 점점 줄고, 기능인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는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일부에선 “빅데이터 등이 지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능올림픽 성적이 떨어졌다고 우려할 상황이 아니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술강국인 일본(8위)과 독일(11위)도 우리보다 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지식이 축적된 선진 기술강국이 아니다.
게다가 이번 대회에서 52개 금메달 중 5개가 걸린 제조업 경쟁력 잣대인 기계 부문에서 ‘노메달’에 그친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기능이 기술로, 기술이 혁신을 이끄는 촉매가 될 수 있도록 기능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시급하다.
[퍼온 글] / 출처; 한경닷컴 / 김태철(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9.08.30 00:13
동방'입시'지국
조선시대는 지금보다 각종 권력형 비리가 난무했던 시대지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과거(科擧)시험에서의 비리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었다. 제 아무리 왕족이라해도 반드시 과거시험을 통과해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고위직 자녀들이 받을 수 있었던 음서직들은 워낙 하급관직이고 승진도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오히려 대부분 기피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권세가의 자식들도 관료가 되려면 과거시험은 무조건 통과해야 했다. 심지어 권세를 잡은 사람들도 과거시험을 통과해야 벼슬이 주어졌다. 조선 제7대 임금 세조(世祖)의 최측근 공신이었던 한명회(韓明澮)는 반정에 성공해 공신으로 임명된 이후였음에도 벼슬을 얻기 위해 나이 40이 넘어서 과거시험을 봐야했다.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냈던 권율 장군의 경우에는 사위인 이항복보다 2년이나 늦어 나이 46세일 때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행주대첩의 영웅인 권율조차 사위보다 후배로 들어갔다는 온갖 놀림 속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해야만 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과거시험은 돈도 빽도 소용없는 시험이었다. 경쟁률이 지금 입시(入試)시험보다 훨씬 살인적이었기 때문에 부정시험이 한 건이라도 발생하면 곧바로 시험 전체가 취소됐고, 비리가 걸리면 목을 내놔야했다. 매년 15만 명이 응시해 33명만 최종합격되는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려운 시험이기도 했다. 응시자는 너무 많고 시험은 워낙 어렵고 길다보니 답안지를 베껴서 내려해도 글을 제시간에 못쓰면 곧바로 불합격인지라 능력이 아예 없으면 컨닝조차 어려운 시험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나 일가친척 등 소위 '빽'의 개입이 거의 불가능한 시험이다보니 양반이 아닌 평민들의 합격률도 조선왕조가 망하기 전까지 50~60%를 꾸준히 유지했다. 500년 전에도 이처럼 입시만큼은 공정했던 나라에서 시험 한번 보지 않고 모든 입시과정을 통과했다는, 소위 부모 잘 만난 학생의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청년들은 하나같이 분노할 수밖에 없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던 초심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퍼온 글] / 출처; 아시아경제 / 이현우(아시아경제신문 기자) / 2019.08.29 13:47
병장 월급
병사들에게 월급날만큼 기다려지는 날도 없을 것이다. 내가 군생활을 했던 1985∼87년에는 특히 더 그랬다. 매점(PX)으로 달려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꼬깔콘・새우깡 등 과자나 빵,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전부였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입대를 하면 초등학생 입맛이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실컷 먹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월급이 박봉인 탓이다.
1985년 이병 때 3300원을 받았다. 그중에서 1000원은 소대비로 떼어간다. 소대비는 전역병 환송회식 때 주로 쓰이는데 원천징수다. 2300원으로 한달을 버텨야 하니 매점을 가는 호사는 많아야 두세 번이다. 이러니 월급날을 학수고대할 수밖에. 분대 최고참 병장이 됐을 때가 문제다. 분대원들을 챙길 품위유지비가 필요한데 월급 5100원으로는 언감생심이다. 훈련 나갈 때는 라면 한 박스는 추진해줘야 낯이 선다. 고심 끝에 고향이 같은 하급 병사가 휴가를 갈 때 “우리 집에 들러 돈을 좀 가져오라”고 부탁을 했다.
다행히 몇 만 원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고 혹한기 훈련의 추위를 따듯한 라면 국물로 이겨낸 기억이 새롭다.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부대 옆 술집 주인의 계좌로 돈을 받은 다음 일요일에 종교행사를 핑계로 영외로 나가 외상값을 제하고 받아오는 ‘간 큰’ 병사들도 있었다. 고참 병사들에게나 가능했던 수법이다. 30개월을 복무하던 시절 얘기다.
병사들 월급이 크게 오른다. 국방부가 발표한 ‘2020년도 국방예산안’에 따르면 병장 월급은 내년에 40만5700원에서 54만900원으로 인상된다. 상병은 36만6200원에서 48만8200원으로, 일병은 33만1300원에서 44만1700원으로, 이병은 30만6100원에서 40만8100원으로 오른다. 내가 군 복무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병장 월급은 32년 만에 100배 이상 오르는 셈이다. 잘만 모으면 전역 때 1년치 대학등록금인 1000만 원 정도를 챙겨 나올 수 있다. ‘군테크’에 성공하는 병사가 많을 듯하다. 복무기간도 18개월로 줄고 일과 후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지 오래다. 한국 군대가 ‘썩으러 가는 곳’이라는 오명을 벗게 될 것 같다.
[퍼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김환기(세계일보 논설위원) / 2019-08-29 23:37:02
중국의 ‘큰손 아줌마’
27일 상하이에서 문을 연 코스트코 중국 1호점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회원제 할인매장은 인파가 몰려 개장 5시간 만에 영업중단을 선언했다. 10~20% 싼 식료품과 온라인보다 저렴한 술・화장품, 명품 패션・가방들이 금세 동난 것이다. 전동 셔터가 올라갈 때 사람들이 바닥으로 기어 달려갔고 계산대에서는 1시간을 기다렸다. 문전성시・인산인해・품절로 이어진 대륙의 소비력이다. 미・중 무역전쟁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애국’을 선창해 온 관영 환구시보는 “중국의 아줌마 경제는 글로벌 경제에서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썼다. ‘큰손 아줌마’를 뜻하는 ‘따마(大妈)’를 신드롬(현상)에 빗댄 것이다.
따마가 세계 뉴스로 등장한 것은 2013년 4월. 순금 값이 20% 급락하자 미국 월스트리트로 몰려가 싹쓸이 쇼핑에 나섰을 때다. 열흘 만에 17조 원을 뿌리며 순금 300t을 사들여 금값이 반등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영어단어 ‘DAMA’를 만든 해였다. 따마는 다음해 제주도 부동산 구매자의 90%를 점했다. 2017년엔 가상화폐 비트코인 투자자로, 2018년엔 중국은 참가 못한 러시아 월드컵에서 싹쓸이 쇼핑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금・주식・부동산 시장을 쥐락펴락하면서 투자도 소비도 공격적으로 몰려다니는 큰손이다.
따마는 중국 도시에 살며 직장 은퇴 후 손주와 가사를 돌보는 약 1000만 명의 50~60대 주부를 칭한다. 1960년 전후 마오쩌둥 시대에 태어나 1980년대 개혁・개방 시대에 사회에 진출하고, 이때까지 무상으로 받은 직장인 아파트가 1990년대부터 폭등하고 재개발되며 경제적 여유가 커진 중국의 고령사회 진입세대다. 광장무(舞)를 즐기는 그들은 집단적 사고와 비교・모방 심리도 강한 세대로 묘사된다.
경제학자들이 분석하는 ‘아줌마’는 체면・집착보다 자기만족을 우선하는 ‘합리적 경제인’이다. 2010년 타임지가 ‘쉬코노미(She+Economy)가 왔다’며 주목한 세계의 큰손 주부들은 강남 아줌마(한국), 소피아 부인(유럽), 스미스 부인(미국), 와타나베 부인(일본)을 지나 이제 따마가 대세다. ‘코스트코 품절’ 사태를 이끈 그들은 중국 내 온라인 여행상품 구매 상승률도 가장 높다. 무역분쟁 속 세계의 눈이 너나없이 따마의 돈과 동선에 꽂혀 있다.
[퍼온 글] / 출처; 경향신문 / 이기수(경향신문 논설위원) / 2019.08.29 20:38
험한 세상 함께 헤쳐가는 친구
親 친할 친 舊 예 구
함께 술 마셔주고, 얘기를 들어주며, 걱정을 나눈다. 친구, 벗의 관계다. 친구는 한자로 ‘親舊’다. 본래는 혈연관계의 친척(親戚), 오래 사귄 사람 구교(舊交)의 앞 자를 합성한 단어다. ‘벗’은 그런 친구를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중국에서는 흔히 붕우(朋友)를 쓴다. 붕(朋)은 한 스승에게 배운 동문(同門)을 가리킨다. 우(友)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 즉 동지(同志)다. 비슷한 맥락의 교(交)도 있다. 고교(故交), 구교(舊交) 등으로 친구를 표시한다. 새로 사귄 친구는 신교(新交)다. 고구(故舊), 고우(故友)도 벗이라는 뜻이다.
사이가 아주 가까운 벗은 지우(至友), 지교(至交)라고 부른다. 뜻과 기질 등이 서로 통해 막역한 사이로 발전하면 집우(執友)가 된다. 원래는 진지(眞摯)하다의 지(摯)라는 글자를 썼다가 간소화한 모양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친구는 부집(父執)으로 불렀다.
어렸을 적 친구는 총각교(總角交)다. 머리를 뿔처럼 묶었던 ‘총각’ 시절의 친구다. 죽마고우(竹馬故友)도 잘 알려진 말이다. 나이가 크게 차이 나면서도 친구로 맺어지면 망년교(忘年交)다. 나이(年)를 잊는다(忘)는 뜻의 엮음이다. 금석교(金石交)는 쇠와 돌처럼 변하지 않는 우정을 지칭한다. 그런 친구는 석우(石友), 석교(石交)라고 불렀다.
아주 가까워진 사이의 친구는 막역교(莫逆交)다.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도 ‘거스를 게 없다’는 뜻의 ‘막역’이라는 단어를 썼다. 목을 내놓고서도 상대를 지켜주는 우정은 문경교(刎頸交)다. 아주 험난한 경우에 빠진 친구를 목숨 내놓고 구하는 우정이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날카로움은 쇠를 끊고, 마음이 한데 어울려 내놓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는 말은 유명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금란지교(金蘭之交)다. 난교(蘭交)라고도 한다. 도움을 주는 친구는 익우(益友), 손해를 끼치는 친구는 손우(損友)다. 겉으로는 함께 어울리고 있지만 마음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친구 사이는 면우(面友), 면붕(面朋)이다.
친구와 벗은 험한 세상을 이겨가는 동반자다. 친구 잘 두면 만난(萬難)을 함께 헤쳐갈 수 있다. 그래서 한자 세계에서 친구를 지칭하는 단어의 수가 이렇게 많고 뜻은 깊다. 혈맹으로 맺어져 대한민국 발전에 큰 도움을 준 미국과의 친구 관계가 흔들린다. 서로 지켜주는 ‘문경지교’가 마음이 멀어진 ‘면붕’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해 속이 퍽 불편하다.
[퍼온 글] / 출처; 한국경제신문 / 유광종(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2019.08.30 00:07
인터넷의 원리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세기의 재판'이라는 칭호로 언론에 오르내린 방송통신위원회와 페이스북 간의 1심 판결이 나왔다. 방통위가 페이스북이 접속 경로를 국내 통신사의 캐시 서버에서 해외 서버로 고의적으로 변경하는 바람에 국내 이용자가 피해를 입었다고 과징금을 부과한 것에 대해 페이스북이 불복해 이뤄진 소송에서 재판부는 페이스북의 손을 들어줬다.
사실 법원의 결정은 인터넷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한다면 매우 당연하고 상식적인 판결이다.
그런데, 방통위와 많은 언론사는 이 판결이 부당하고 글로벌 기업의 횡포가 가중돼 역차별 문제가 심화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구조와 원리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통신사들의 주장에 경도됐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인터넷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이용자와 콘텐츠 제공자(CPㆍContents Provider)가 접속돼 있는 상태이기만 하면 원하는 데이터가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약속 하에 성립된 것이다. 이용자와 CP는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 통신사 등에 비용을 내고 서비스를 이용한다. 이용자와 이용자, 이용자와 CP 간에 주고받는 데이터가 1개 통신사의 망을 거치든 50개 통신사의 망을 거치든 각 망을 관리하는 통신사들은 최선을 다해 차별하지 않고 데이터를 전송해줄 의무가 있다. 전 세계 모든 이용자와 콘텐츠를 이어주는 인터넷은 이런 원칙과 약속 하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런 인터넷에 이용자와 CP가 어디에서 접속할지, 어느 통신사의 망을 통해 접속할지는 그야말로 이용자와 CP의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비용과 품질을 비교해 유리한 서비스와 접속 지점을 선택할 수 있다. 이용자든 CP든 통신사의 접속 서비스를 이용할 때 품질이 좋아도 비용이 너무 비싸다든지, 저렴한 비용이지만 너무 품질이 떨어진다든지 하면 당연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방통위는 페이스북에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망 이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망 이용 계약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입장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CP에게 망 접속 계약을 강제하고 품질 유지 의무를 엉뚱하게 CP에게도 부과해, 결과적으로 높은 비용을 국내 통신사에 지불하게 하려는 내용이다. 반시장적이고 불공정할뿐더러 인터넷의 원리를 부정하는 행동이다.
더군다나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내 CP와 해외 CP 간의 '역차별'이라는 것은, 그동안 국내 통신사가 국내 CP들에게서 높은 망 접속 비용을 받아온 데다 전 세계적으로 이 비용이 낮아지는 추세에 역행해 우리나라의 망 접속 비용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것을 해결해달라고 국내 CP들이 요구해온 것이다. 국내 CP들이 이번 판결이 상식적이고 당연하다고 반응하는 것에서 역차별의 의미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는 일인데, 방통위는 이를 핑계로 망 이용 가이드라인 추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네이버의 태국 이용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해서 태국 정부가 네이버에 반드시 태국 통신사에 직접 서버를 연결해야 하고, 그 요금을 태국 통신사가 요구하는 대로 정하도록 하고, 품질이 떨어지면 네이버에도 책임을 묻겠으니 충분한 용량을 구매해야 한다고 규제를 가한다면, 우리 정부는 이를 정당하고 공정한 태국 정부의 조치라고 칭찬해야 할까.
국적을 바꿔 국내 CP와 국내 통신사의 문제에서도 이 같은 규제가 이뤄진다면 불공정하고 부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더 이상 국내 CP나 스타트업과의 역차별을 내세워 비상식적 규제를 추진하지 말고, CP와 이용자들의 망 접속 비용 부담을 낮춰 스타트업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서비스를 선보일 수 있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재판부의 다음 판시 내용을 깊이 고민해보길 권한다.
"인터넷 이용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적극적ㆍ개방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인터넷의 이러한 기능은 정보를 제공하는 CP가 있음으로써 더욱 고양될 수 있다." "만약 CP에 대해 서비스 품질과 관련한 법적 규제의 폭을 넓혀간다면 CP의 정보 제공 행위 역시 규제를 받을 수밖에 없어 명확한 규정이 없는 이상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퍼온 글] / 출처; 아시아경제신문 / 최성진(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 / 2019.08.2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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