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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그의 페르귄트 조곡이 흘러나오는 아침이었다. 풀잎 위에 맺히는 아침 이슬처럼 상쾌한 풀루트 선율이 막 잦아들 즈음 전화 벨이 울렸다. 서희는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두근 거렸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세준이 돌아올 즈음이었고, 전화를 울릴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그일 것이라고 상상하며, 아니 확신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장민혁입니다. 이 사람은 뭐람. 한 순간 모든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날씨가 기막히게 좋아요. 나와요. 그녀는 겨우 기운을 차리고 말했다. “아뇨.” -무슨 일 있습니까?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후후... 난 서희씨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여러 번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아무 일도 없군요. 지금 집 앞에서 카폰으로 통화하고 있어요. 어서 나와요. “...” -아니면 내가 들어갈까요? “잠깐만요.” 남자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네 번째 찾아온 그날 그녀의 방 앞까지 와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곤 말릴 틈도 없이 불쑥 들어왔다. 그런 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을 물려주고도 손으로 꼽을 만큼 찾아왔고, 간청하다시피 해 야 들어오곤 했다. 그것도 잠시 앉았다 일어서곤 했다. 매일 찾아오더라도 매일 두 손 내밀어 맞고 싶은 그녀였는데, 그는 지레 그녀가 불편하리라 생각한 듯했다. -지금 당장 들어갑니다. 남자의 막무가내에 그녀는 그만 기가 질려버린 기분이었다. “나가겠어요.” 옷을 다 갈아입었건만 선뜻 나설 마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였다. 하루, 이틀, 어느 때는 보름쯤 지난 후에 느닷없이 찾아오곤 했다. 처음왔을 때 남자는 지나는 길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꽃을 들고 왔다. 세 번째는 근사한 저녁을 사겠노라고 했다. 네 번째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았고, 다섯 번째는 바람을 쐬고 싶지 않느냐고 했다. 왜 자꾸 찾아오는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정도를 모를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남자의 일방적 인 느낌일 뿐이었다. 또 호감을 갖고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쯤은 읽을 수 있어야 마땅했다. 매번 찾아올 때마다 그녀는 커피 한잔 함께 마시는 것으로 남자에게 예의를 표했 고, 서둘러 돌아오곤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그래도 불안한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쪽에서 가까워지려 노력했는지도 몰랐다. 그의 친구였으므로. 하지만 여자가 홀로 살고 있는 방에까지 염치없이 들어 온 네 째부터는 불안했고, 부담스러웠으며, 피하고 싶었다. 세준에게 다녀온 이튿날이었다. 서희는 저녁 준비를 하려고 부엌에 있었다. 그녀의 방으로 오르는 철제 계단을 마구 밟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방은 단층 양옥 옥상 한 모퉁이에 있었다.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 편했고, 옥상에 서면 캠퍼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덜컹. 문이 열였고, 남자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그릇을 놓칠 뻔했다. 남자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 다. “잘 지냈어요?” 그녀는 남자의 말에 대꾸도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선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 가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고, 그녀는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고 서희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들어왔어요. 괜찮죠?” 괜찮을 리 있겠는가. 그녀의 동의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남자는 또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 갔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이런 경우일까. 그녀는 남자의 뒤를 엉거주춤 따랐다. 방안을 휘휘 들러보는 남자의 표정이 벌레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남자의 눈길 을 따라 방을 둘러보며 당치도 않은 부끄러움에 그녀는 잠시 빠져 들었다. 허섭스레기로 방을 가 득 채웠다 한들 남자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갑갑하겠군요. 그렇죠?” 남자가 말했고,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주 좋아요.” “방도 좁고, 천장도 낮고, 욕실도 없고...많이 불편하겠어요?” "..." "그래서 말인데 비어 있는 오피스텔이 있어요. 그곳을 서희씨가 사용하면 좋겠어요.“ 터무니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듣지 못한 양 딴전을 부렸다. “어때요?” 남자는 그걸 호의라고 생각하는가. 호의라고 생각해도 좋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호의란 악의와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그녀는 남자의 태도에 화가 났고, 스스로에게도 그랬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했기 에 남자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부담 갖지 말아요. 어차피 빈 채로 있는 곳이거든요.” 남자의 집요함 때문에 그녀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어요.” 이슬을 가릴 지붕도, 바람막이 벽조차 없는 곳일지라도 이곳을 떠날 수 없어요.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녜요. 차차 생각해봐요.”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려다 그녀는 얼른 생각을 바꿨다. “약속이 있어요. 지금 나가봐야 돼요.” “명색이 손님인데. 커피라도 한잔 대접받아야겠어요, 난.” 남자가 히죽히죽 웃었고, 왠지 진지하지 못한 그 웃음이 그녀는 못 마땅했다. “어쩌죠? 마침 커피가 떨어졌네요.” 전화 벨이 성급하게 울어댔다. 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잠시 바라보았다. “참을성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중얼거리고 울리는 전화 벨 소리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남자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색 외제 차였다. 남자가 무슨 빨간 차람. 남자는 귀부인을 맞는 중세의 기사처럼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으며 말했다. “타십시오.” 그녀가 머뭇거리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어차피 내려가야 할거 아닙니까?” 그녀가 차에 타자, 차는 곧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차나 한잔 마시고 들어올 생각이었다. 아니었다. 오늘은 분명히 못박아둘 말이 있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했다. 하지만 민혁이 주위에 있는 것을 방관해 온 셈이었다. 더 이상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그와는 친한 친구 사이긴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산판에서 민혁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의 얼굴빛이 결코 밝지 않았음을 그녀는 기억했고, 그래 서 단호하고 확실하게 말할 자신이 생겼다. 차가 언덕을 다 내려왔을 때 그녀는 물었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나요?” “애, 궁금해요?” 남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골목에서 한 아이가 뛰어 나왔다. “아아!” 그녀가 비명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고, 이어 브레이크 소리가 거칠고 사납게 들려왔다. “자식, 완전히 겁을 상실했구만.” 남자의 말과는 달리 아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나왔던 골목을 향해 달음질쳤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세준이가 서희씨 전화번호를 알려주더군요.”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이 때문에 놀란 가슴이 이젠 걷잡을 수 없는 만큼 튀었다. 남자의 말이 사실일까.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와 셋이서 만난 그날 이후 그는 내내 산에 있었다. “오빠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요?” “보름쯤 됐을 겁니다, 아마, 잠깐 산에서 내려왔다고 새벽같이 전화를 했더군요. 우연히 서희씨 얘기가 나온 김에 내가 물었죠.“ 그렇다면... 산판에서 돌아온 그날 아침이었다는 말이다. 그녀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사나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느낌 이었다. 차가 학교 앞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항의라도 하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실은 부탁할게 있습니다.” 남자는 그녀의 응답을 기다리듯 한동안 말을 잊지 않았다. 힐끗 그녀는 남자의 옆얼굴을 쳐다 보았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믿음 가는 얼굴은 아니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며칠 뒤 점잖은 자리가 있어요. 그때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요. 서 희씨의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옷을 좀 골라줬으면 해서요.“ 어쩌구니 없었다. 또 남자의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부탁이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낫겠어요. 내 옷 하나 제대로 사입지 못해요. 난. ” “무슨 소립니까? 서희씨만큼 자신의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게 옷을 입는 사람을 못 보았어요, 난.“ 듣기 좋은 소리로 하는 소리야. 그녀는 남자의 말을 그렇게 받아 들였다.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옷을 입다니? 어린 시절부터 내 옷이라는 개념이 그녀에겐 없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이 입던 옷을 그대로 물려입었고, 그것도 잠시뿐 또 다른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했 다. 겉옷은 물론 속옷에서 양말까지 온전한 그녀의 몫은 없었다. 철이 바뀔 때면 소망원에는 한 보따리의 낡은 옷이 배달되었다. 사회 단체가 여기저기서 수거 해 보내온 의류였다. 그 옷들을 소망원 사생들은 크기별로 옷장에 넣어 두었고, 아이들은 자기 몸 에 맞는 옷을 찾아서 입으면 그만이었다. 개중에는 마음에 드는 옷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몫 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드센 아이들이 먼저 골라 입었고, 그녀의 차례는 언제나 맨 나중이었 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녀만이 차지할수 있는 옷이 생겼다. 교복이었다. 함께 자란 아이들은 소 망원을 떠난 뒤였으므로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녀 혼자였다. 헌 교복이었지만 그게 왜 그렇게 좋고 신기했는지... 자신의 손으로 옷을 사본 것은 대학에 다니면서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매달 보내오는 생활비로 산 옷이었다. 생활비는 분에 넘칠 만큼 풍족했다. 그러나 옷을 사입는다는 게 @p 125 꼭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었다. 남대문 시장을 뒤지고 뒤져 값싼 청바지나 티 정도를 샀을 뿐이 었다. 남자가 빛깔과 향기 운운한 것이 그녀의 처지를 고려한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동의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강남의 중심가로 접어든 차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백화점으로 오는 동안 그녀는 내내 무엇인가 잘못 엮인 기분에 젖어 있었다. “어때요?” 점잖은 자리에서 입을 옷이라더니 남자가 고른 옷은 결코 점잖지 못했다. “괜찮네요.”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했고, 남자가 다시 옷을 집어들렀다. 점잖지 않기는 마찬가 지였다. “이건 어때요?” “좋네요.” 남자는 지체없이 들었던 두 벌의 옷을 샀다. 그런 남자를 그녀로선 또 이해할수 없었다. 돈을 과시하고 싶은 걸까. 아무렴 어때. 그녀는 한 순간 돈이란 참 덧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로 서둘러 옷 사기를 마 친 남자가 고맙기까지 했다. 용무를 마쳤으면 얼른 돌아갈 것이지, 남자가 또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여성복 코너로 들어선 남자가 말했다. “저옷 어때요? 멋지지 않아요?” 남자가 가리킨 것은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는 연보랏빛 정장 투피스였다. “입어봐요. 서희씨한테 썩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는 들지만 자신에게 어울릴지는 의문이었다. 어울린대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서요.”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벗어나려 할수록 남자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손님, 한번 입어보세요. 마음에 안 들면 안 사셔도 돼요.” 여자 점원이 옷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남자에게 잡힌 팔이 너무 아팠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자가 내민 옷을 받아 들었다. 탈의실로 들어갔다. 옷에 붙인 가격표를 보니 한 학기의 등록금에 가까운 액수 였고, 그것이 또 그녀의 기를 탁 막히게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남자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최곱니다. 굉장히 멋져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낯설었다. 한서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껏 멋을 부리 고 서 있는 듯했다. 예쁘고 맘에 드는 옷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벗어놓은 옷을 점원이 포장하기 시작했다. 포장된 옷이 쇼핑 백에 담겨져 남자에게 전 해졌고, 남자는 말했다. “자, 받아요.” 남자가 조금 전처럼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힘껏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는 남자를 쏘아보 았다. 그녀의 시선 따윈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남자가 말했다. “손 떨어지겠어요.” "내가 왜 이걸 받아야 하죠?“ 그가 얼굴을 붉히며 되물었다. “몰라서 물어요?”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정작 화를 내고 얼굴을 붉혀야 할 사람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하하하. 소리내어 웃고 난 남자가 말하였다. “서희씨! 화내니깐 더 아름다운데요.다른뜻은 없어요.내부탁을 들어준 데 대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빠르고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희를 위해서 산 것인데 서희씨가 않받겠다면 이 옷은 어떡하죠?”. “물리세요.” 남자가 점원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물었다. “이 백화점에선 한 번 산 물건을 환불해 주지 않죠?” 점원이 남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남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에요.” 남자의 차를 타고 다시 학교앞에 도착했고, 서희는 자청해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남자는 얼른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왕 차를 마실 거면 다른 데 갑시다.가까운 교외에 기막힌 찻집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남자의 제의를 물리치고 ‘솟대’로 들어섰다.개학을 앞둔 탓인지 평소와는 달리 수선 스런 분위기였다.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는 칵테일을.그녀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는 전의를 다지는 병사처럼 물컵을 힘주어 쥐었다. “한서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작스런 물음인 까닭인지 남자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물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어갔다.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시죠? 난 내세울 게 하나도 없어요. 고아예요, 고아. 어릴 때부터 고아 원에서 자랐지요.“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바라보지 않았다. 다만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을 기척으 로 알 수 있었다. 아무렴 어때. 어차피 상관없는 일인데. 하지만 그녀는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자신이 마땅치 않았다. 마치 사랑을 구걸하는 고 백같았다. “부모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뻔하잖아요. 자기 자식을 버릴정도의 수준의 부모라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그녀는 여전히 물컵을 응시한 채로 남자의 말을 받았다. “나한테 잘해주는 건 정말 고마워요. 그러나 솔직히 부담스럽네요. 그리고...” “그리고 뭐죠?” 성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녀는 비로소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정말 하고픈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요?.”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요. 찾아오는 것도 싫고요.” 남자는 입꼬리에 웃음을 매달았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남자는 내내 그 웃음을 짓 고 있었다. 비웃음인지, 자조의 웃음인지 모를. “그 사람이 누굽니까?” “...” "서희씨가 오래전부터 좋아해 온 그 사람이 누구죠?“ “꼭 말해야 하나요?” “내가 맞춰 볼까요? 이세준, 맞죠?”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동의할 필요는 없었다. 남자가 팔짱을 낀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만 일어서고 싶었다. 하고픈 말을 다했으니까. 그라나 남자에게 가혹한 일처럼 느껴져 선뜻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겁니까, 사랑하는 겁니까?” “둘 다예요.” 사랑한다. 그렇게 말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랑은 함부로 입밖에 낼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고, 남자의 앞에선 특히 더했다. “좋아하면서 사랑한다. 사랑하면서 좋아한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남자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세준이와는 다른 말을 하는군요. 서희씨한테 한 질문을 세준이한테도 했었죠. 세준이는 대뜸 말하더군요. 좋아한다고.“ 마음이 상했고, 남자의 눈웃음 때문이라고 그녀는 믿고 싶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감정을 함부로 입밖에 낼 사람이 아니 다. “이젠 내 이야기 좀 해볼까요.” 굳이 들을 필요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혼자이고 싶었다. 그 마음도 모르는 남자는 이야기를 시 작했다. “난 말이죠, 남들이 보기엔 세상에서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고 싶은 건 무엇이 든 하면서 살아왔어요. 돈요? 그건 주체할 수 없이 많죠. 우리아버지가 일봉그룹 장사필 회장이거 든요.”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라지 않는군요, 다른 사람들처럼. 하긴 놀라지 않는 게 당연해요. 그건 껍데기에 불과한 것 이니까요... 내가 왜 세준이를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녀는 진작부터 그게 궁금했다. 남자가 그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내 주위엔 온통 껍데기들 뿐예요. 머리는 텅텅 비고 가슴엔 탐욕밖에 없는 껍데기들 말예요. 물론 나도 그 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세준이는 달라요. 탐욕 대신 순수함으로 꽉 차 있지요. 맑고 깊어요. 샘이 날 정도로...” 맑고 깊은 순수함. 그녀는 남자의 말에 동감했고, 그래서 남자는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서희씨! 알고 있어요. 서희씨가 세준이와 아주 많이 닮았다는 거?” 그렇게 말해 놓고 남자는 창밖으로 눈길을 주었다. “처음 서희씨를 만났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내가 수첩을 보이자 서희씨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억해요?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수첩부터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서희씨는 수첩을 받는 대신 가 방부터 열어봤지요. 그 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어요... 서희씨한테 내가 부담스러운 존재였 다면 아마 그때의 기억 때문일겁니다. 하여튼 사과하고 싶군요. 나는 다만 세준이를 좋아하듯 서 희씨를 좋아하려 했어요.” 남자에 대해 자신이 너무 과민 반응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쳤다. “두 사람 사이에 이 장민혁이 들어갈 틈은 없는 겁니까?” 그녀는 웃었다. 웃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거리며 일어섰다. “이만 갈래요. 이건 돌려 드려야겠어요.” 그녀는 쇼핑 백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날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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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