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멀리, 서희가 언덕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준은 손으로 무릎을 누르며 일어섰다. 오랫동안 쪼그리고 있던 까닭에 다리가 심하게 저려 왔다. “오빠!”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그녀가 먼저 자신을 부르며 언덕을 달려왔다. 그녀의 하얀 목 뒤편으로 긴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두 팔을 벌리고 있으면 얼른 품에 안길 듯한 모습이였다. “언제 왔어요?” “오늘 아침.” “전화하지 그랬어요?” 그녀가 눈을 곱게 흘기는 것으로 그를 나무랐다. 밤차로 올라와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이었다. 독서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10시쯤 그녀에 게 전화를 했다. 발신음만 계속 이어졌다. 처음엔 번호를 잘못 누른 탓으로 생각했다. 두 번, 세 번... 그녀가 집을 비울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안했고, 그래서 언덕을 올라왔다. 그리고 조금만 조금만하고 기다린 것이 2시간은 족히 지났다. “많이 기다렸어요?” “지금 막 왔어.” 그녀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영문을 모른 채 그는 그녀의 웃음에 방긋이 화답했다. “왜 웃어요?” “좋아서.” “뭐가요?” “봄이 돼서... 한서희가 그랬잖아, 봄이 돼야 보겠네요 하고.” 기뻤다. 봄이 되었고, 그가 돌아와서. 그의 어깨 너머로 깊은 봄날 같은 햇살이 내리비쳤고, 꼭 그녀의 마음 같았다. “날씨 참 좋죠?” “응.” “들어가요.” “아니 좋은 날씬데 방에 들어가는 건 그렇잖아?” “그래도 커피는 한잔 마셔야죠.” “솟대에 가서 마시지 뭐.” “싫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 손으로 커피를 끓여 대접하고 싶어요.” 그녀는 망설이는 그의 팔짱을 꼈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다르지. 그녀는 남자를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가 자신의 방을 무단으로 들어왔던 것이, 그에게 죄 를 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를 방으로 반드시 데려가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고집을 부렸다. 치마를 입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앞세워 철계단을 올랐다. 그가 계단을 밟을 때마다 뒤뚱 거렸다. 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그를 불렀다. “다리가 왜 그래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혹시 산에서 다친 거 아녜요?” “다치긴? 쥐가 나서 그래. 자, 볼래?” 계단을 다 오른 그가 토끼처럼 관자놀이에 두 손을 대고 팔짝팔짝 제자리 뛰기를 했다. 여느 대 같으면 배를 잡고 웃었을 그녀였다. 하지만 놀란 가슴이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p 134 방학이되면 신으로 바다로 일터를 찾아다니는 그. 그가 떠날 때마다 그녀는 불안하고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험한 일을 하다가 다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다. 방에 들어서자 그가 잠시 방을 둘러보았고 서너 번 까닭 모를 고갯짓을 했다. “...왜요?” “냄새가 참 좋아.” 그의 말이 부르러운 향기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오전 내내 피곤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향기에 취한 듯 그를 바라보다 들고 있던 쇼핑 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건 뭐니?” 아무것도 아녜요.” 그가 슬금슬금 쇼핑 백을 넘겨다보았다. “옷 같구나.”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반색을 했다. “한 번 입어봐.” “그녀는 쇼핑 백을 책상 밑에 아무렇게나 밀어넣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그가 허리를 굽 혀 쇼핑 백을 꺼냈다. “어서. 얼마나 예쁜 옷인가 궁금해서 그래.” 그리고 지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짚곤 말을 이었다. “아참, 내가 있으면 갈아입을 수가 없지. 나가 있을 테니 다 입으면 불러.” 일어서려는 그의 손을 그녀는 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심정으로 나중에요 하고 말했다. 그가 점퍼 안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뭐예요?” 여자 모습의 정확한 목각이었다. 공들여 깎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는 목각과 그를 번갈아 보 았다. “별 거 아냐. 산판에서 심심풀이로 깎아본 거야.” 그녀가 산판을 다녀간 직후부터였다. 그는 밤잠을 줄여가며 목각을 조각하면서 내내 그녀를 생 각할 수 있었으며, 민혁과의 통화로 산만해진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었다. “어쩜!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오빠한테 이런 솜씨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목각 속의 모 델은 누구예요?” 웃었다. 웃는 것으로 충분한 답이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예쁘다. 아주 맘에 들어요. 매끄러운 감촉도 좋고요.” “주목이라는 나무야.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 간다는 나무지.” 천 년 또 다시 천 년... 그 천 년의 의미가 그녀의 가슴 가득히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나가자. 나 돈 많이 벌어왔어. 맛있는 거 사줄게." 그가 지갑이 들어 있을 성싶은 안주머니를 소리나게 두드렸다. "오늘은 아녜요. 오빠, 해물탕 좋아하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요. 맛있는 해물탕을 만들어 바 칠 테니까요." “괜한 수고할 것 있니?” “수고는 무슨 수고예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그리고 나 그동안 음식 솜씨 많이 늘었어요. 오빠한테 자랑하고 싶은걸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부엌으로 나갔다. “시장에 다녀올게요.” 그녀의 말에 그는 외쳤다. “같이 갈까?” 그러나 이미 철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다리를 뻗었다. 편안했다. 마치 길고 고단했던 여행을 마 치고 고향에 돌아온 듯했다. 책상위의 전화가 울어댔다. 받아야 하나? 망설이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울려댔으므로 세준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거기 한서희씨 댁 아닌가요? “맞습니다.” - 전화 받는 사람은 ... 어, 세준이구나? 민혁! 민혁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한 순간 그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에 사로잡혔다. - 그런데 네가 웬일로 거기에 있냐? 너야말로 웬일로 전화를 하니?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냥 들렀어.” - 언제 왔어? “오늘.” - 지식, 왔으면 형님한테 문안인사부터 드려야지. 농담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농담으로 태연함을 가장하고 싶은 걸까. - 서희씨 좀 바꿔줘. “지금 없는데...” -그새 어디 갔어? 조금 전에 나랑 헤어졌는데... “잠깐나갔어. 살 게 있다고. 무슨 일 있니?” - 무슨 일은 . 잘 들어갔나 확인 전화하는 거지. 확인 전화? 그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전화 왔었다고 전해주랴?” - 괜찮아. 다시 하지 뭐. 하여튼 올라와서 반갑다. 민혁은 조만간 술 한잔 걸판지게 하자는 말로, 그는 언제든지 좋다는 응수로 통화를 끝냈다. 그는 한동안 전화기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군가 머릿속으로 들어가 함부로 휘젓고 다니며 생각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숱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다시 떠올랐다. 민혁은 말했다. 조금 전에 자기와 헤어졌다고. 그리고 그는 언덕을 올라오는 그녀를 만났다. 그 녀가 들고 있던 쇼핑 백... 그는 자리에 누워 벌렁 누워 눈을 감았다. 민혁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할까. 그는 곧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 고 싶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과연 그녀를 태연히 바라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녀가 베게를 갖다 머리를 받쳐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는 깊은 잠에 빠진 양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깊고 고요한 물 속에 가라앉은 듯이 잠을 자고 싶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라, 단순히. 서로 인사를 나눴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새장 안의 새처럼 가두어두고 싶은 것은 아니잖은가. 그리고, 너는 그리운 사람의 방에 편안히 누워 있다. 그러면 족하지 않는 가. 상을 들고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상을 소리없이 내려놓고 그의 머 리맡에 앉았다. 가지런한 숨소리,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가슴, 굳게 다문 입, 반듯한 이마를 덮고 있는 몇 올의 머리카락... 잠든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그의 주위에 있었으면서도, 지난 번 산판으 로 그를 찾아갔을 때, 여관에서 그녀는 그의 잠든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보처럼 먼저 잠 이 들고 말았었다. 이제 그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방에서. 그런 그가 그녀는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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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