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저 멀리 석양이 물결과 고깃배에 부딪혀 수많은 별빛이 되어 흩어졌다.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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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바라본 남해는 파도만 출렁일 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석양과 파도는 수천, 수만년 동안 저렇게 변함없이 떠오르고 물결쳐 왔을 터.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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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의 확장과 기술문명의 진보는 인간과 그 삶의 모습을 변함없이 그대로 놔 두지 않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발전해왔지만 그것은 항상 피와 파괴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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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과 남쪽 바다를 둘러싼 삶의 모습도 그랬다.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한반도 남단의 꼭 중간 지점이다.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500여리(212.3km)를 달려 바다와 만나는 곳. 여기서 강물은 길목에 맞닿은 섬, '마도'의 양쪽을 에돌아 마침내 남쪽 바다와 한몸으로 어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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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광양제철소, 동쪽으로 남해대교, 그리고 앞으로는 남해섬이 버티고 있었다. 갈사리 '나팔'마을 하중원(42)씨는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농어, 도다리, 전어가 그물에 촘촘히 걸렸고, 김 양식으로 수입도 꽤 짭짤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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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제철소가 들어선 뒤 김 양식장은 거의 사라졌고, 뱃일도 시원찮다는 것. 때문에 고기잡이 대신 외지인을 상대로 식당이나 횟집,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주민이 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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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달이 바꿔 놓은 풍경이었다. 하동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 하구는 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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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와 백제의 다툼, 왜(倭)와의 교역이 빈번했던 지역.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출몰이 많아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해방 후에는 빨치산의 주요 거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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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우왕때, 왜구가 하동쪽에서 강을 건너 광양쪽으로 침입을 시도했다. 그 때 광양 진상면에 있던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8km 떨어진 다압면 나루터로 몰려가 울부짖자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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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섬(蟾)'자의 섬진강으로 불린 것은 이 때부터였다는 것. 이전에는 고운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이라고도 했다 삼국시대에도 섬진강 하구, 하동지역(당시 대사)은 바다로 드나드는 주요 교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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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500여년 전, 대가야는 이 하동을 장악한 상태였다. 대가야 하지왕의 명을 받은 사신 일행이 479년 섬진강 하구를 통해 바닷길로 나선 것이다. 이들은 배를 타고 중국 남제에 들어가 '대가야가 가야를 대표하는 왕국'임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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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견준다면 한 국가가 UN에 가입한 셈이었다. 대가야가 이 섬진강 루트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백두대간 너머 전북 남원까지 세력권을 확장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가야의 전신, 가라국은 경남 합천 야로·가야면 일대 철산지를 확보하고 농업생산력을 높인 뒤 400년대 중·후반부터 힘을 모아 서쪽으로 서서히 세력을 넓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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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년)시키며 위세를 떨쳤고,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는 등 한동안 혼란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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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433년 나제동맹을 맺어 백제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주 다툼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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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국으로서는 백제, 신라의 견제를 크게 받지 않으면서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400년대 후반, 가라국은 경북 고령에서 출발, 야천(안림천)을 따라 황강 중류의 길목까지 들어가 합천 봉산지역을 아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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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지역에는 당시 강력한 토착세력이 없어 그야말로 '무혈입성'이었다. 이어 황강을 따라 상류쪽 경남 거창을 세력권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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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합천 봉산면 송림리 반계제고분군과 거창 남하면 무릉리고분군에서 목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 그릇받침 등 대가야 토기만 출토된 점이 이를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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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남강 상류의 경남 함양까지 그 여세를 몰고 갔다. 함양읍 백천리고분군에서는 무덤 축조방식이나 출토 유물이 대가야 양식 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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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8m) 사이에 자리한 '육십령(734m)'. 함양 서상면과 전북 장수 장계면 등 영·호남을 잇는 고개. 삼국시대 이후 도적떼가 들끓어 산 아래 주막에서 족히 60명은 모여야, 그것도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서야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는 것. 조정자(63·여·함양 서상면)씨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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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통영간 고속국도가 뚫렸고,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등산객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백두대간을 따라 남쪽으로 내달렸다. 연비산(843m)과 삼봉산(1천187m) 사이 '팔랑치(513m)'가 역시 영·호남의 함양읍과 전북 남원을 맞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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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서 함양으로 치고 나간 가라국은 급기야 이 백두대간의 두 고개까지 넘봤다. 백제가 고구려와 접전을 벌이느라 동남쪽에 눈돌릴 겨를이 없는 틈을 탄 것이었다. 결국 함양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북 장수로, 팔랑치를 넘어 남원으로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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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대에는 장수에서 나아가 전북 임실과 진안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팔랑치를 넘은 가라국 세력은 '아영들'과 '운봉고원'을 기반으로 한 남원 아영면 두락리, 월산리의 토착세력과 교역 등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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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이 지역에 고령 양식의 대규모 무덤과 유물을 남겼다. 이후 남원의 고지대인 '지재'나 '여원치'를 통과, 섬진강을 따라 전남 구례로 향해 나아갔다. 가라국이 중국과의 교역루트를 완성한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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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름을 스스로 '대가야'로 천명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처럼 400년대 후반 대가야는 고령-합천(봉산세력)-거창-함양-남원(운봉세력)-구례-섬진강-하동을 거쳐 바다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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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중국 남제 및 왜와의 주요 교역루트였다. 그러나 대가야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5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함양에서 백두대간을 넘지 않고 곧바로 남쪽으로 나가는 산청-진주-하동 루트는 물론 합천(삼가세력)-진주-하동 루트, 합천(옥전세력)-의령-남강-진주-고성 루트 등도 뚫었을 것으로 유물·유적이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