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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서희란 여자 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지?” 민혁은 두 손으로 운전대를 탁탁 두드렸고 이어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돌이켜 생각할수록 그랬다. 왜 한서희라는 여자에게 전전긍긍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쓸데없이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또 세준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구차하고 낯뜨거운 일이었다. 한번도 여자의 환심을 사기위해 애를 태운 적이 없던 민혁이였다. 여자란 길거리를 걷다 무심 히 발에 차이는 돌부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때는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어느땐 그저 지나치 기도 하는 것이 여자였다. 걸려 넘어지건 그저 지나치건 마음 상할 이유는 없었다. 돌부리 하나를 지나면 또다른 돌부리가 다시 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녀의 내면에 담겨 있었고, 한번 넘 어진 민혁은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뭐지? 예쁘기 때문인가. 예쁜 걸로 따지자면 그녀보다 빼어난 여자들이 얼마든지 민혁 의 주위에 있었다. 생면부지의 여자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고, 사실이 그랬다. 그렇다면...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는데도 앞차가 미적거리고 있었다. 민혁은 지체없이 클랙슨을 울려 댔다. 초보 운전이란 딱지를 뒤창에 붙여놓은 차였다.재빨리 차선을 변경해 미적거리는 차를 넘겨다 보았다. 여자였다. 민혁은 조수석의 유리창을 내리고 고함을 쳤다. “집구석에나 있지, 뭐 하러 기어나와!” 여자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았고, 민혁은 한 마 디 더 쏘아붙이고 오토 윈도 버튼을 눌렀다. ‘여자의 생각이란 가슴을 넘어서지 못한다’.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여자를 매우 적절 히 표현했다고 민혁 은 생각해왔다. 그런데... 한서희라는 여자의 생각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었다. 자신의 뜻대로 그녀가 움직여주 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생각은 너무도 분명했고, 그 생각의 정점에는 세준이 있었다. 세준이 전화를 받 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황했고 또 난처했다. 그녀와 헤어진 지 채 30분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고, 민혁의 접 근에 단호한 빗장을 내린 셈이었다. 그렇다고 민혁의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는 투사처럼 마음을 다잡았 다. 천천히, 하나하나 그녀의 닫힌 문을 열 작정이었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그녀의 경계의 창부터 걷어내기로 했다. 그래서 단 한마디 인사만 전한 채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다. 잘 들어갔어요라고. 세준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세준은 철들며 만난 유일한 친구였다. 아니 사람다운 친구라고 해야 옳았다. 주변의 족속들과는 행동도, 생각도, 마음 씀씀이 모두 구별되는 친구였다. 세준을 만난 것은 의대 신입생 환영회 때 뒤풀이에서였다. 웃고, 떠들고, 쉬지않고 마셔대는 신 입생에 섞이지 못하고 민혁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섞이지 않다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같은 대학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수년간 우정을 나눠온 양 떠들어대는 그들이 유치했고, 지 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따위로 어떤 식으로든 동료 의식을 확인하려는 그들이 민혁에겐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냉소를 머금고 홀로 술잔을 비우고 있을때, 세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환영회 식장에서 의대 전체 수석으로 단상에 올라 장학금을 전달받던 그였다. 세준은 건너편 자리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지도, 분위기에 휩 쓸려 상기된 얼굴도 아니었다. 의대 수석이라는 사실이 다른 동료들에게 거리감을 준 탓이었을까. 그딴 것에 신경을 쓸 민혁이 아니었으므로 술잔을 들고 그에게 갔다. 술잔을 건네며 그에게 물 었다. “어디서 왔니?” “C읍.” “멀구나. 학교는 어디서 나왔냐?” “잘 모를 거야. C종합고등학교.” C읍이 어느 구석에 붙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더구나 C종합고등학교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촌것이 대단하군 하는 생각을 했다. 하여튼 섞이지 못한 처지끼리 몇 마디 나눈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날 이후 세준과는 그런 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민혁이 주로 그를 찾아갔고, 찾아간 이유 중 절반은 대리 출석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친구가 된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였다. 그가 잔뜩 굳은 얼굴로 민혁을 의대 뒤편 잔디밭으로 불러냈다. 민혁은 그가 자신을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는 이유를 짐작했다. “나한테 너 이상 출석 부탁은 하지 마라.” “알았어.” 민혁은 간단히 대답하고 말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미 동급생들은 자신의 입학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돈으로 들어왔 느니, 백으로 들어왔느니 하는 식의 말이었다. 누구든 한번 걸리면 박살을 내리라 마음 먹고 있던 참이었다. 세준의 귀에도 뒤늦게 그 이야기가 들어간 모양이다. 민혁은 돌아서려는 그를 불러세웠 다. “야, 이세준! 그거 때문에 사람을 이 구석까지 불러낸 거야?” 그가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촌놈의 자식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민혁은 그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싸움은 맥없이 끝나고 말았다. 민혁을 물 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그가 말했다. “받아. 입술이 터진 모양이다.” 손수건이었다. 씨익, 손수건을 받아들며 민혁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는 웃음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음은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자신이 진정한 남자들 세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민혁은 그의 손수건을 돌려주는 대신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한잔하자.” 얼마든지 가슴을 열어놓아도 좋을 친구. 그 친구를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에게 마음을 두고있는 자신. 민혁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될 대로 되라지.” 민혁은 차를 강남 쪽으로 급히 몰았다. 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해야 할 일이 있는것도 아니었 다. 마음같 아선 ‘야누스’에 가서 술이나 퍼먹다 한판 두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제 걸려온 전화가 끈질 기게 민혁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어머니 명여사의 전화였다. -애야, 한번 다녀가렴. “무슨 일 있어요?” -일은 없다. 보고 싶어서 그런다. “요즘 바빠요.” -바쁜 줄은 안다. 그렇지만 시간을 좀 내다오. 명여사는 아들인 민혁에게 사정하다시피 했고, 민혁은 그런 어머니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민혁은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해 차를 세웠다. 야누스로 들어서자 마담이 반색을 하며 민혁은 맞았다. “별일이네, 우리 왕자님이 이런 시간에 나타나시다니.” “쓰레기들 있어?” 민혁은 자신과 어울리는 패거리를 그렇게 불렀다. 간간이 그 쓰레기들과 술을 마시고 밤을 세 워 포커 판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이 몇 신데 벌써 출근을 하겠어?” 그렇게 말한 마담이 민혁의 팔장을 끼고 밀실로 안내 했다. 바트 69를 스트레이트로 두 잔 마시고 나니 막혔던 속이 뚫린는 느낌이었다. 마담이 민혁의 옆으로 바짝 옮겨앉으며 물었다. “어째 우리 왕자님 심기가 편치 않아 보여... 무슨 일 있어?” “계집애가 하나 있는데, 말을 안 들어.” “어떤 여잔데?” “특별한 계집애.” “어떻게특별한데?” “나도 몰라.” 마담이 손뼉을 치며 소리내어 웃었다. 마담은 민혁보다 서너 살 위였다. 자신의 입으로 밝힌 바 에 의하면 모 여대 불문과 출신이라고 했다. 뛰어난 미인일 뿐더러 제법 식견도 있고, 분위기도 잘 맞추어 민혁의 패거리 사이에선 인기가 좋았다. “드디어 우리 왕자님이 사랑에 빠지셨군.” “사랑? 그럴지도 모르지.” “사랑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세가 뭔지 알아? 상대방이 좋긴 좋은데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좋은 지를 알 수 없는 거야.” 민혁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곤 마담에게 건넸다. 마담이 헤헤거리며 덧붙였다. “그 여자가 특별하다고 했지? 같은 여자로서 하는 얘긴데, 세상에 특별한 여자란 없어. 아무리 도도한 여자도 한번 엎어지면 어쩔 줄 모르는게 여자의 심리야.” “엎어지다니?” “그 멋진 몸 가지고 뭐해? 말로 안되면 몸으로 밀어붙이는 거야. 한번 엎어뜨리라고. 그럼 끝 날 테니까. 나랑 내기해도 좋아.” “마담도 그랬어?” 민혁은 마담의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다. 민혁의 불편을 덜어주려는 듯 마담이 블라우스 의 앞단추를 풀었다. 그러나 마담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잠시 후 민혁은 손을 뺐다. 머릿속이 욱신 거렸다. 민혁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마담에게 말했다. “그거나 한 대 가져와.” “요즘 단속이 심해.” “단속 좋아하고 있네. 빨리 가져와.” “알았어. 어떻게 구해볼게.” 마담이 나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어제 쓸만한 애 하나 왔는데, 넣어줄까?” “일 없어.” 어머니 명여사가 살고있는 빌라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선 시간이었다. “늦었구나.” 민혁을 보자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서너 달 만에 왔건만 마치 아침에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듯 했다. “좀 야윈 것 같구나.” “병원에는 잘 다니고 있어요?” 민혁 자신이 듣기에도 퉁명스런 말이었다. 늘 그 모양이었다. 그런 아들의 태도이 이미 익숙한 탓일까, 어머니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만성 신부전증이었다. 민혁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늘 아팠다. 그러나 장회장이 오는 날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을 하고 맞았다. 어린 민 혁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래 하고 물으면, 어린 민혁은 망설이지않고 대답했다. 의사가 되 어 엄마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유리 좀 데려올 수 없겠니? 유리가 보고 싶구나.” “말했잖아요, 유린 미국에 있다고.” 민혁이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아픈 몸으로 출산을 했고, 그아 이가 유리였다. 민혁의 6남매 중 유일하게 배가다르지 않은 온전한 혈육이었다. 그해 민혁은 어 머니의 품을 떠나야 했다. 젖도 채 떨어지지 않은 유리와 함께 장회장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떠나는 민혁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유리는 네가 돌보아야 한다고. 미국에 있다 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여고 3학년이 된 유리는 어머니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상처뿐인 가족사에 신음하는 것은 자신으로 족했다. “아버지는 편안하시니?” “그 영감 얘긴 좀 안 할 수 없어요. 이젠 정말 지겨워요.” 장회장 집으로 들어간 후 민혁은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의 세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입밖으로 낼수도 없었다. 장회장은 어머니의 행방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장회장은 두렵고 무서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배다른 형들 역시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어느 정도 체념하며 지냈다. “그러지 말아라, 얘야. 아버지도 하실만큼 하셨다. 너도 다 컸쟎니? 어서 아버지를 도와 드려 야지.” 할 만큼 했다는 말이 민혁으로선 납득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속으로 난 두 아이를 장회장의 자 식으로 받아준 것을 뜻하는 것인지, 자식을 거두어가는 대신 먹고 살 만큼 재산을 남겨주었다는 것인지... “나는 어째 오래 못할 것 같다. 요즘엔 안 보이던 사람들이 자꾸 보여. 이 몸으로 살 만큼 산 셈이지...” 민혁이 다시 어머니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한 여인이 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고, 처음엔 어머니인 줄 알아보지 못 했다. 그후 민혁은 장회장의 눈을 피해 어머니의 집에 드나들었다. 거의 매일 찾아갔고, 어느 때 는 몇 달씩 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인생이 안타까웠고, 한편 이해할 수 없었으며 화도 났다. 그리 고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민혁의 가슴에 장회장에 대한 혐오가 더해졌다. “시간 나면 또 오겠어요.” “늦었다. 자고 가렴.” 한 번도 자고 간 적이 없건만 언제나 남기는 마지막 말이었다. “안돼요. 내일 아침에 일이 있어요.” 민혁이 쌀쌀맞게 대꾸하고 돌아서려는데 등뒤에서 어머니의 말이 들려왔다. “얘야, 넌 왜 어미한테 어미라고 부르지 않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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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즐감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