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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물놀이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 백야
정읍농악명인 - 유지화
“평생을 내가 이거를 놓아보들 못허고 ”
나는 원래 전주서 났는디, 정읍서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이거를 배웠어. 고창에 박성근 선생님, 줄포에 박남식 선생님, 또 영광 법성포 그쪽에 김성낙 선생님, 정읍에는 장구에 이동원 선생님, 그 밑에 이정범 선생님, 전사섭 선생님, 이명식 선생님이 다 정읍에있었어. 어떤 사람들은 정읍이 본산지가 아니네 어쩌네 어먼 소리 허는디, 그건 천만의 말씀이여. 그건 자기가 모르는 소리야. 어차피 여그가 본산지야. 말 잘허는 사람들은 보태가꼬 말을 잘 허드라고. 여그 사시는 분들이 농악을 다 했는디 무슨 소리여.내가 처음에 정읍에 와가꼬 애로사항이 참 많은 것이 뭐였냐면 객지사람이다 이거여. 전주에서 엎디면 정읍인데 고향이 정읍이아니다 이거여. 그렇게 까시랍게 허드라고. 정읍에 댕기기는 내가 진짜 오래 되았지. 20대 중반부터 정읍을 쫓아다녔어. 선생님들이랑 같이 난장도 많이 뛰었고. 옛날 부안으로 곰소로 장날 난장 뜰 때 선생들허고 같이 유난히 내가 댕갰어. 나랑 같이 시작했던 사람들은 힘들으니까 다 (집에) 들어가버리고. 선생님들도 인자 다 돌아가시고…. 선생님들이 살아계셨드라면 내 어깨가 참힘이 있을 텐디. 그 분들 살아계실 적에는 참 내 어깨에가 힘이 있었지. 인정도 받었고. 근디 돌아가시고 나니까….
유지화 명인 걸어온 길
1943년 전주출생
열두 살 무렵, 걸립농악단에 들어가 소고, 꽹과리를 배움
박남식에게 쇠가락과 부포짓을, 김재옥·박성근에게 장
구를 배움
열일곱 살 무렵부터 전북여성농악단원으로 활동
아리랑 여성농악단, 새마을 여성농악단 등을 조직하여
여성농악의 전성기를 구가함
1979년 전주대사습 농악부문 장원
1983년 신라문화제 전국국악대회 최우수상
1987년 전라예술제 전국농악경연대회 대상
1992년 전주대사습놀이 농악무분 장원
199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2호 정읍농악
정읍국악원 예술감독
현재 정읍농악보존회 회장
가서봉게 기가맥히게 좋더라고
우리 어려서는 농악이 뭔지도 몰랐지. 처음에는 내가 소리를 했당게. 어머니 심부름 가다가 소리를 듣고는 맨날 거그 가서 서있었더니 들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소리를 한 달쯤 했어요. 글다가 들통났지. 어머니한테 많이맞았다 진짜. 그때가 한 열 두세 살 됐을 때였어. 그런 거 배우면 기생된다고어머니한테 얼마나 맞았는지. 그때는어머니 말이 답이잖아. 또 우리 집안이짱짱하니까 어머니 말이 답이야.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그래서 기생은나쁜 것이구나, 허고 소리를 안했지.근데 인자 시내를 돌아댕기다가 뭘 봤는디, 지금 생각해보니까 포스타여. 거그가 구형무소 자리네. 내가 거그 노송동 살을 때였어. 내 친구 하나가 그려.야, 쩌그서 뭐 배운다는디, 우리 같이가보자. 그때 마장대라고 허는 곳에 무슨 제실 겉은 것이 하나 있었는디, 지금은 없어져가꼬 그 자리를 못 찾겄드라고. 거그서 첨에 농악을 모집을 했어. 그 자리서만 한 1년, 2년인가를 끌었어. 단원 모집허니라고. 그래 인자가봉게 장구도 치고 북도 치고 난리가났어. 그때 그 박남식 선생님이야. 꽹과리에. 장구는 이명식 선생님이고. 소고는 홍유봉 선생님. 그 세 분이신디,가서 봉게 기가 맥히게 좋더라고. 그래서 인자 노상 그리 가는 거여. 근데 소고가 그렇게 허고 싶은 거여, 나는. 근디 우리는 금방 가서 배웠응게 머리를못 돌리잖아. 그걸 헐라믄 시간이 많이걸리는디. 그래서 홍선생님이 고깔을가르쳐 준거야. 고깔만 치고 댕기라고.근디 또 허다가 들통났어. 왜 그냐면내가 맨날 나가거등. 맨날 나가니까 우리 어머니가 이상허지. 한번은 내 동생이 뒤를 밟은 거여. 근디 이미 나는 부모승낙서 도장 받아가꼬 오라고 해서우리 어머니 도장 훔쳐다가 옆방 아저씨보고 부모가 쓴 것처럼 해달라고 해서 도장을 찍어서 갖다줘버렸어. 근디그걸 한번 갖다주면 못 나간다는 거여.말하자면 계약위반으로 고발을 허면내가 영창을 간다 이거여. 그래서 인자고만 두지도 못허고 큰일났지. 하이고우리 어머니는 내가 무당 당골네 된다고 이런 웬수가 어딨냐고 땅을 치고 통곡허고. 내가 여자로는 셋째딸이고 오빠허고 남동생이 하나 있는디, 그때 우리 어머니 속을 참 많이도 썩혔지. 그때는 이걸 허면 큰일났지. 생각해봐. 말이안 되는 소리여, 지금. 그래서 인자 다시는 안 가기로 허고 어머니한테 뒤지게맞고 어머니가 내 옷을 싹 감춰버렸어요. 겨울인데. 근데 내 친구 중에 거그를같이 다닌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공장을 다녔는데, 우리 엄마는 절대 그런 데 안 보내. 여자는 그냥 집에서 살림배우고 시집가는 것이 다야. 무조건. 근디 나는 가고도 싶고 서약서 쓴 것 때문에 걱정도 되고 불안해서 죽겄는 거야.근데 가(친구) 동생이 온 거야. 누나가좀 오란다겨. 그래서 갔더니 야 너 왜 안와, 그려. 야, 나 우리엄마한테 들켜가지고 몸땡이 좀 봐라, 온 몸이 멍이 안 든데가 없어. 원래 우리 엄마가 때리는 양반이 아닌디, 그때는 얼매나 때렸는가매가 몇 자리가 부러졌다니까.
처녀들이 참말로 많이도 왔어
근디 그 친구가 다들 나를 기다린다고허고, 몇 월 며칠날 송광사로 합숙을 들어간다고 혀. 그때는 완전히 다 그리 들어가버린다고, 인자 전주 시내에서는 안허다고 혀. 근디 그때는 참 어디서 처녀들이 그리 많이도 왔어. 그때 모집헌 것이 전북여성농악인디 참 많이도 왔어.나도 가야겄는디 옷이 있어야 가지. 도망을 가야겄는디, 자꼬 연락은 와쌌고,한날은 그 친구가 야 어디로 나와, 내가데꼬 갈게, 그러드라고, 그리여. 가만히봉게 우리 어머니 몸뻬허고 쉐타가 있는거야. 나가 지금도 쬐깐헌디 그때는 얼매나 쬐간헛겠어? 그 쬐깐헌 것이 어머니 몸뻬하고 쉐타를 주서입고 도망을 가버린 거여. 그래서 인자 거길 가니까 애들이 옷을 빌려주지. 근디 죄 짓고는 못살어. 쩌어기 절 밖에 누구만 오먼 엄마나 나 잡으러 온 줄 알고 숨고…. 그러다가 단체 따라서 댕기다가 5.16 혁명을서울서 만냈네.목포에선가 광주에선가 공연허고, 목폰갑다. 목포에서 영등포로 가는 거여.그때가 열일곱인가 여덜살 땐데, 가다가내가 맹장에 걸려버렸어. 기차를 타고가는데 우리 식구가 한 사오십 명 돼요. 사업보는 사람, 집짓는 사람까지다 헝께 숫자가 많지. 그래서 기차를탈 때 이쪽 절반을 꼭 대절을 해. 그때는 그렇게 되았었어. 저녁밥을 먹고 한소금 잤는데 배가 아픈 거여. 나중에는다리가 오그라져서 안 펴져. 맹장은 안펴진다네. 그런데 마침 대전이야. 서대전. 서대전은 오래 쉬잖아. 맹장이라고빨리 내리라고 허드라고. 어떤 언니 하나가 나를 업고 대전연합병원으로 갔어. 맹장이라고 안하고 앞배라고 허드라고. 급성이랴. 딱 땄는디 보니까 벌써 터졌드라네. 그래서 내가 허리가 많이 아파. 사주를 많이 먹었어. 그때는이 허리에다 마취를 했네. 실밥을 빼야가는디 나는 인자 가고 싶어서 못 사는거여. 수술자리에 염증이 생겨가지고열 이틀만에 퇴원을 허고 서울로 갔어.그 사람들은 서울 영등포서 공연을 허고 있었는디 나가 얼룬 낫기를 바라고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먼 내가 제일 잘했덩가봐. 하여튼 내가 없어서 타격을많이 받었대. 개인놀이란 개인놀이는내가 다 춰주는 거야. 그래서 인자 영등포로 갔더니 그때는 의리들이 있어가꼬 울고불고 끌어안고 많이 울었어.그때는 의학이 발달이 안 돼가꼬 배쨌다고 하니까 걱정을 많이 했지. 그래서서울로 이동을 허는디, 5.16 혁명을 딱만났네. 인자 공연은 못 허지. 맹장수술 했지. 못 먹었지. 주인이 머리 존년들은 도망간다고, 감시를 했어. 근데우리는 못 도망가. 그 식구들 다 놔두고 어떻게 도망을 가. 근데 몇 사람이전주로 도망을 가니까 주인이 우리 옷을 다 뺏어가버리는 거야. 그때는 공연을 못 하니까 국수를 하루에 한끄니,이틀에 한끄니, 그렇게 먹고 살었어.그게 뭐 좋다고 거그서 있겄어, 생각을해봐. 그런디다가 나는 맹장수술까지해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 주인이 나를 보고 안되겄다 시펐능가 시내좀 돌아댕기다 오라고 허드라고. 마침그때 백은영이라고 소고치는 애가 있었는디 가가 돌아댕기는 걸 우리 동생이 본 거야. 엄마엄마, 누나랑 같이 간그 누나들이 돌아댕긴다고 그러니까우리 어머니가 가를 찾아간 거야. 그래서 인자 우리 어머니가 내 소식을 알고찾아왔어. 내꺼 밥값 다 갚고 나를 데꼬가. 다시는 이런 데 가지 마라 해서알았다고 했지.
이쁘게 화장허고 농악을 허니 얼마나 미어터지겄어?
근디 소양없어. 팔자가 이렁게. 그냥내비두먼 안 가는디, 꼭 연락이 와. 델러와쌌고 내가 못 살아. 인자 영원히집에는 못 들어가는 거지. 그래서 돌아댕기는디 맨날 불안허고, 부모가 인정안 해준 것이라 항상 불안허지. 그러다가 내가 남편을 만났는데, 이걸 좋아하시는 분을 만났어. 그 양반도 원래 시청인가 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어. 근데 이것이 좋아서 다 때려치고이것을 따라댕기는 거야. 그러다가 인자 전북여성농악단허고 호남여성농악단허고 나눠지는 거야. 전북여성농악단 그 사람은 소리북도 치고 참 한량이여. 근데 호남여성농악단 사람은 돈만있는 사람이여. 원래 이 사람이 전북농악단 만들 때 돈을 빌려준 사람이야.벌어서 갚으라고. 그때는 이렇게 기둥세우고 포장만 쳤는디 돈도 가마니로받었어. 원청 사람도 많이 오고 여성들이 이쁘게 화장허고 농악을 허니 얼매나 미어터지겄어. 텔레비도 없는 시댄데. 미끈미끈한 여자가 장구치고 화장허고 꽹과리치고 그렁게 미어터지지.그래가꼬 빌린 돈을 다 갚응게 그걸 보고 이냥반이 이거이 돈이 된게 해야겄다 허고 돈으로 사람을 다 꼬셔가는 거여. 이쪽(전북여성농악단)은 돈이 없응게 의리로 붙어 있고, 돈에 눈먼 사람은 그쪽(호남여성농악단)으로 가고. 그렇게 흩어진 거여. 나는 전북농악단에그대로 있는 거여, 안 가고. 별 것 다해준다고 오라했는데 내가 안 갔어. 내가 그렇게 외곬수여.그래가꼬 갈려가꼬 전북농악단 댕기다가 부산까지 갔다가 쫄땅 망했어. 겨울에 뭐하러 거그까지 갈 것이여? 망해가꼬 밥도 굶고 어찌고 허다가 겨우다시 들어와가꼬 그때부터 인자 또 안되게 생개가꼬 나하고 우리 애기아빠가 아리랑 여성농악단을 만든 거야. 인자 전북농악단은 해체되불고. 몇 년을여관에서 자고 밥묵고 하니까 여관비로 다 끝나. 벌은 것이 없어. 그라꼬 인자 나중에는 빠이프로 조립식으로 집을 짓고 그 뒤에다 삼단요 깔고 여름에모기장 치고 잤어. 자 봐, 얼마나 시원하고 존가. 여관 찍찍허니 더운 디서못 자요. 겨울에는 어차피 공연을 안하니까. 밥하는 양반을 모셔다가 밥을하니까 애들이 시도 때도 없이 먹어서얼굴살이 이려. 살이 쪄서. 그라꼬 그때부터 우리도 좀 힘이 피었어.
배고픈게 도둑질도 허겄등만
아리랑 농악단으로 계속 댕기다가저어~그 진도를 한번 갔네. 진도는겨울에도 날이 따땃허다고. 거그서 겨울을 나자고 했어. 양승렬이라고 알랑가 몰라. 그 전에 익산 이리농악 소고쳤던 양반인디, 우리가 해산해버리니까 이리로 간 양반인디, 그 분이 어떻게 장난이 심헝가, 진도에 가니까 전깃불이 없어 그때는. 그래서 솜으로 뭉쳐서 횃불을 밝히는디, 그릇이 없응게 옹기그릇 깨진 거, 그것을 구더기를 파서묻어. 사방 네 군디다가. 그라꼬 인자사람을 사. 네 군디서 뜨끈뜨끈허니 불을 붙이라고. 우리는 초저녁에는 이삐게 화장허고 나가는디, 나중에는 얼굴에 끄시름!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막웃어. 근디 그놈의 새끼가 농악허다 꼭옹기그릇을 흔들고 가고 장난질을 쳐.글다가 거그에 확 빠져부럿네. 불이 화악 붙었는디 다행히 한쪽 다리만 빠져가꼬, 그때는 의상이 다후다 천이 막나와서 맨들 때였는디, 다후다 천이 다달라붙어 부렀으니 어찌 됐겄어? 이놈다 뜯어가꼬 밤새드락 소주 댓병을 사다가 붓어놓고 화기를 뺐지. 그랬응게가가 살았지, 글안했으면 죽었어. 그라꼬 그 사람은 방에 누워있지, 그래도어떡혀, 공연은 해야지. 밥은 먹어야니까. 그런디 또 어떤 애기가 거기 있다가 불이 붙었네. 농악칠 때 정신이 없으먼 그것이 안 보여. 그래가꼬 인자진도에서 쫄딱 망했어. 거기에다 다 잽히고 가는 거여. 나중에 돈 갖고 와서도로 찾아간다고. 애기 병원비 그놈 다물어줘야지, 그래가꼬 배가 고파가꼬이틀인가 굶었네잉. 워쩌겄어? 도둑질도 허겄등만, 배고픈게. 우리가 잤던방은 진도에 여관도 없고 허니까 동네사랑방이야. 그 방에 고구마를 이렇게세워갖고 쟁여놨더라고. 겨울에 물이있어 뭣이 있어. 그냥 눈을 퍼다가 씻지도 않고 흙만 털어서 가마솥에 넣고나무는 천징께 그냥 땠어. 밤중에 주인모르게. 그래도 인심이 좋았지. 그라꼬다 불러다가 그 놈을 먹어. 지금 생각해봉게 그것이 그래도 좋았등간만. 그때는 참 배고파서 그 고구마를 밤새도록 먹었어. 먹고 나이롱 책보에다 신문지 깔고 고구마를 싸라, 배에 가서 먹자, 그랬지. 그때는 물고구마라 왜 그렇게 물도 많이 나와, 질질질질. 배타고 나오는디 춥기는 허지, 그 놈 먹고,인자 대전까지 차비를 해가꼬 왔는디돈이 없어서 더 갈 수가 없어. 그래도거까지 왔응게 살었지. 그때는 징 깨진거, 꽹과리 깨진 걸 다 가지고 왔어. 감서 고철이라도 팔자고잉. 징 몇 개 깨진것 허고 꽹과리허고 팔으니까 딱 전주까지 갈 차비가 나오드라고. 그래서단원들 데리고 전주까지 와가지고 집에서 밥해서 먹였지.
호남여성농악단을 맨들어줬어
그 고생을 다 허고…. 참 이것을 안헐라고도 해봤네잉. 고만 둬볼라고 여성농악단 헐 때 김칠선이라고 있었어.거그다가 단체를 넘겨줬어. 돈 벌으면갚으라고 허고. 그라꼬 대구로 돈을 받을라고 갔는디, 아따 싸난 사람들허고는 못해보겄등만. 우리는 이리케 생개도 말만 싸납지 못 싸난디, 그 사람들허고는 못해봐. 그라꼬 돈을 못 받았어. 그래서 깨끄시 포기허고, 그때는등록증이란 것이 있었는디, 그것을 시청 공보실에 냈어. 그 쯩이 본인이 아니면 제 3자가 못 가져가게 돼 있어.주는 놈도 걸리고 허는 놈도 걸리고.그래서 우리 등록증을 찾아야겄다 해서, 우리 등록증을 찾고 새로 맨들아줬어. 호남여성농악이라고. 그라꼬 인자신입생들을 모집을 해서 내가 가르치고 내가 상쇠를 쳤기 때문에 유지를 헌거야. 다른 디는 상쇠 치는 사람이 없으니까 망하는 거야. 그때는 밥값 대주고 따라댕기는 사람을 똘똘이라 그랬거등. 똘똘이 몇 개 달았냐? 두 개 달았다, 막 그랬는디, 우리는 아직까지그런 건 한 번도 안 해봤어. 한 번도 빚쟁이 데리고 댕갰다거나 그런 거 없었어. 왜냐면 내가 이걸 하기 때문에 내가 지도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었어. 그렇게 고생을 허다가 한 삼십 칠팔 세부터 좀 안정이 된 거야.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디 공연을 허믄 안 되제
그런데 내가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세 번을 망했어. 처음에는 5.16 혁명.그담에는 화폐개혁! 우리 딸이 토끼띠거등? 벌써 40년이 넘었잖아. 그 딸이태어났을 땐가, 임신해가꼬 그랬나?하여튼 그때였을 거여. 화폐개혁을 허는데 금방 붕어빵 하나에 1원이 5원되고, 5원짜리가 10원 되고, 물가가 완전히 뒤집어서 버린 거야. 그래서 내가돈을 못 받고 난리야. 그런데다가 한달을 비가 오드만, 한 달을!! 그때가 보리이삭이 팰 땐디, 다 올라와서 익을무렵이야. 보리가 누릇누릇허니 익을라고 허는디 비가 그러케 오니까 그 자리에서 싹이 나드라고. 싹이 나부러.그라꼬 우리 단체는 완전 작살이 나부렀어. 밥을 먹데끼 굶고 그러케 고생을했다니까. 그러고 나서 인자 좀 괜찮을만 헝게, 돌아가셨어! 허허허. 돌아가셔서 또 환장을 허지. 공연을 못 헝게.그때 우리가 진주예술제에 갔을 땐디,진주예술제가 10월 말엔가 혀. 근데그 전에는 진주남강 다리에서 예술제를 허니까 공연이 괜찮았는디, 그때는저어기 백사장으로 가라는 거여. 백사장이 머니까 사람들이 구경허러 안 와.그라꼬 단체들이 막 죽어나는 거여. 그때는 동춘 서커스단이 젤로 컸어. 그거이 큰집이고 우리는 작은집이다 허면서 내가 그랬지, 우리가 이러지 말고남강다리에다 자리를 잡자, 니가 얼마내라, 내가 얼마 내고, 그렇게 몇 백씩을 주고 남강다리 밑에다 자리를 딱 잡았지. 그렇게 다 장소 잡아서 돈 내놓고 삼천포에서 공연을 했네잉. 진주예술제까지 한 2주나 못 되게 날짜가 남었어. 그동안 먹고 놀 수가 없응게 삼천포에다 단원들을 놓고 섬으로 들어가서 일주일만 공연을 허고 오자, 그랬어. 딱 섬에 들어가서 다 허가받고 밤공연을 헌 거야. 어디든지 저녁공연부터 허거등? 밤공연 딱 허고 아침에 늦잠을 좀 잤지, 피곤허니까. 갰더니 누가 그래, 나보고. 성! 빨리 일어나. 대통령이 갔어, 그려. 버르장머리 없이그거이 뭔 소리냐고 헝게 나한테 라디오를 갖다 줘. 워메! 워쨔오랴? 큰일났네. 정신 버쩍 채리고 일어났네.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디 공연 허믄 안 되제.다른 디는 공연 허다가 다 걸렸대요. 그래 인자해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여. 그런디 딱 계엄령 선포가 내려부렀잖아. 진주도 작살나부렀지, 근다고 우리가 돈 다시 내달라고 그러겄어?나라가 그런 것인디. 거그서부텀 또 작살나기 시작해서 그 해에 그만 뒀어야 허는디, 그 이듬해에또 해갖고 왕창 돈을 엎어먹었어 또. 그래놓고 봉게 삼재랴. 삼재가 참 무섭드만.
학생대사습에서 일등 해가꼬 가버렸지
그렇게 원청 돈 엎어먹고 군산 영화동에 우리언니하고 나하고 돈을 보태갖고 쪼끄만 상가를하나 얻어논 것이 있었어. 나중에 장사라도 허자고. 그것 팔아서 없앴지. 백색전화도 팔아 없앴지. 단원도 싹 해체시키고 가져가라고 허고, 나는고향도 못 들어오겄드라고, 챙피해서. 그래서 부산 가서 좀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버렸지. 인자 이거 안 허고 딴 거 헐라고. 하이고 이거 징그랑게장사라도 해야겄다 허고 서울 사는디, 아는 사람이 많응게 다들 나를 도와주드라고. 근디 뭣 좀헐라고 맨들어놓고 못허고 또 이것에 끌려댕개.서울에서 한 7, 8년 있었어. 학교에서 애들도 갈치고. 그때부터 대사습을 오기 시작하는 거야. 구리시 토평국민학교가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농악을 좋아하셔. 여러 사람이 농악을 갈쳤는디 실패를 했드만. 그래서 내가 댕김서 농악을 갈치는디서울서보텀 일등했다는 애들허고 붙으먼 우리 애기들이 이기는 거야. 그라꼬 전주 와서 학생대사습에서 일등 해가꼬 가버렸지. 긍게 사람들이 저유지화가 에지간해서는 오는 사람이 아닌데, 심사위원들보고 정신 똑바로 채리라고 허드랴. 어쩡띠게 허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때는 경기도나경상도 이런 디서 전주대사습에 와가꼬 따가들못했어요. 우리 선생님들 다 살아계실 때는. 근디지금은 우리것을 다 가져갔어. 가락 자체를 다 안가져간디가 없어. 솔직헌 얘기로 다른 디서 허는건 못 봤어. 못 들어줬어. 긍게 맨날 떨어지지. 게임도 되도 않고. 지금은 평준화가 많이 되았어.
보름 만에 정읍농악을 맨들어놓는디… 그때는 젊으니까 했지
내가 정읍에 내려온 게 93년도. 그 전에는 농악 맨든다고 왔다갔다 했지. 처음에는 정읍에 창악회라고 있었어. 판소리 회원들이 만든 모임인디 거그 있는 사람들이 맨날 소리만 허먼 재미가없으니까 유지화 선생을 모셔다가 농악을 좀 배우자, 마을 댕김서 걸립이라도 하자, 이랬디야.판짜기나 진지, 이런 것은 못 배우고 그 양반들이. 그래 정읍에 내가 왔었어. 팔십몇년도에 와서창악회를 가르치고 그리고 나중에 시립농악을 맨들었지. 뭣을 좀 해볼라고 해도 사람이 없어. 최고로 나이 적은 사람이 오십다섯 살인가 그려. 그러고 다 팔십몇살, 칠십몇살, 사람 죽을 일이지.생각해봐. 하루 내내 갈치고 그 이튿날 보면 도로똑같애. 하이고 워쨔오랴. 그래도 어뜨께 어뜨께해서 걸음마 시켜서 겨우 맨들었어. 동네 걸립헌다고 굿거리허고 휘모리허고 삼채만 갈친 거여.그것도 잘 안 되는 판인디, 누가 쏘삭거린거여. 유지화 선생 속에 정읍 농악이 다들어있는디, 왜 그것을 안 배우고 이런것만 배우냐, 그렇게 쏘삭거린 거여.긍게 그냥 시늉으로라도, 정읍농악이 있다는 것만 보게 좀 갈쳐달라는 거여. 그것이 그렇게되는 것이 아닌데. 그라꼬 인자 농악을 보름만에 정읍 농악을 맨들어 내놓는디, 그때는 내가 젊으니까 했지 지금은 그렇게 못 맨들어.자꼬 나도 기운이 떨어져. 농악은 힘으로 허거등? 힘이 등께 그냥 내일 허자그려, 지금은. 그래가꼬 시립농악을 맨들었어. 나이드신 분들이라도 맨들어놓고 서울로 인자 올라 가. 그 나중에또 인자 정읍사 농악회라고 만들어졌드만? 저쪽에 국악원이 있는데 거그에서 새복에 갈쳤지. 세상에 새복 4시반에 일어나서 다섯 시에 갈치고 그렇게정읍농악을 맨들었네.
째깐헌 것이 흥청흥청허고 댕기는 것 봉게 눈물이 나서 울었대요
그라꼬 인자 시군대항 농악대회를가야 혀. 거그를 갈라고 내가 갈친 거야. 그렁게 막 체계적으로 못 갈치고일단은 가서 공연하고 상타는 용으로급하게 갈쳤지. 근디 모다들 대사습을가자는 거여. 그려 이름을 내놀라면 대사습을 가야헌다. 그래서 대사습을 가기로 했는데, 혹시 몰르니까 상쇠를 두명을 갈쳤어. 하나는 호남중학교 선생인데 하필 감사에 걸려갖고 못 나와.또 한 사람은 마을금고 전무인데 자기네 종친 선산에 나무 두 그릇을 잘라버리는 바람에 인심을 잃어서 고발을 당해 버렸네. 그라꼬 감옥에 가버렸네.세상에 사람 상할 일이지. 이미 대사습에 나가기로 결정을 했는데 안 나갈 수도 없고, 헐 수 없이 내가 상쇠를 치는거여. 내가 갈쳐갖고 내가 나가니, 참사람 죽을 일이지. 참말로 그냥.그때 공주농고 졸업헌 출신들이 전주 대사습에 왔어. 장원을 헐라고 이미다 사전작업 해놓고. 근디 정읍에서 나간다 그러니까 정읍농악분과 위원장이망을 보러 온 거여. 상쇠가 누구여? 그래서 내가 치지! 그랬어. 그랬더니 세상에 유지화가 나가면 난리난다 이거여. 큰일난다고 그래. 왜 큰일나는디?긍게 심사위원들이 유지화 다 아는디,유지화가 상쇠치고 나오면 되겄냐고그려. 아니 내 맘대로 내가 상쇠 치는데 먼 상관 있대요? 내가 정읍으로 이사했고 내가 갈친 내 제자들인디 내가상쇠친다고 어떤 놈들이 머라겨? 그랬어. 긍게 헐말없지. 세상에 전주를 갔더니 예선도 허지도 않아서 공주가 1등, 다른 애들이 2등, 정읍 3등으로벌써 나와 있어. 내가 허는 말이 세상에 애기 낳지도 않어서 기저구 만든다더니, 참 웃기네. 경연도 시작되기 전에 1,2등이 다 나와부럿네? 하이구!그리고 인자 예선을 치렀지. 예선을 치릉게 내 쇠놀이 하나만 가지도고 난리가 나부렀어. 그때는 지금보다 진짜 잘했다, 더. 응? 근디 마이크를 달으라는거여. 마이크 달면 소리가 다 나가잖아. 내가 막 거그 안 돼, 똑바로 혀, 하고 악을 써야 허는디, 안 달고 싶드만.근디 달기를 잘했어. 내 쇠소리가 다른소리를 다 잡아먹어부렀어. 오메 내가달기를 잘했네. 그때는 날마다 뙤약볕에서 운동장에서 입도 짧은 내가 밥도못 먹어감서 갈쳤으니 내가 어떻게 됐겄어? 하여튼 얼굴이 타서 나를 몰라봐. 어디 시골서 농사짓는 아줌마가 온지 알았디야. 모기는 물지 몸뚱이가 성한 디가 없어. 근디 정읍농악 대사습나갔다고 허니까 정읍시민들이 다 텔레비를 켜놓고 다 본 거야. 근디 시상으 내가 째깐허드랴. 째깐해서 안시럽다고. 그때 내가 감기한자 들어가꼬 열은 있지 밥은 못 먹지 감기약은 먹어놓게 술취헌 놈맹이로 비틀비틀허지. 그래 봉게 째깐헌 것이 흥청흥청허고 댕기는 것 봉게 눈물이 나서 울었대요.사람들이 안시러서 울었대요. 긍게 말하자면 50년, 60년 만에 정읍농악의명예를 살렸다 이거여. 정읍농악이 없어져부렀당게. 그때 대사습 심사위원들이 우리 정읍때미 토론을 다섯 번을했댜. 정읍 유지화를 장원을 안 주면대한민국 난리난다, 지금 텔레비로 다나가고 있다, 저 양반이 실력이 없어서저기 나온 것 아니지 않냐,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심사를 할 양반이 저렇게세상에 사람들 데리고 댕김서 땀흘리고 힘들게 치면서 우리들 앞에서 절을헐 때 나는 눈물이 나왔다… 그랬대.운 사람도 있드라고. 다섯 번 토론허고장원 가져왔어 이 사람아. 정읍농악이그런 농악이여.
정읍농악이 그런 농악이여
내가 똑바로 행동허니까 정읍농악이살아남지 안 그러면 진흙탕이여. 나는문화재 될라고 정읍 온 거 아니네잉.참말이여. 어떻게든지 정읍농악 맨들어서 전수시킬려고 그때부터 그런 거지. 정읍으로 이사 올 생각도 없었는디잠깐만 등본 좀 옮겨달라고 해서 그러라 했더니 얼마 안 있어서 오라고 허드라고. 하도 그래싸서 옹게 세상에 배울사람을 한 150명을 모집을 해놨드라고. 그때는 내가 이렇게 빼빼허들 안했어. 속살이 있었어. 근디 여그 와서 다빠져부렀어. 10개월 허고 보니까 8키로가 줄더라고. 아침에 출근허면 점심시간 한 시간만 빼고 7시, 8시까지 갈쳤어. 멍청허게 갈쳤지.내가 우리 아들을 잃어부렀어, 교통사고로. 내가 키우도 못헌 놈이, 빨래한번 못해주고 밥 한그릇 못해준 놈이교통사고로 죽어부렀어, 장개 가가꼬.그때 내가 여기 왔다갔다 헐 때여. 하이고 내가 정읍 내래가서 수양이나 헌다고 생각하고 그양 살아야겄다 생각하고 내려온 거여. 그래서 정읍으로 온거여. 지금도 내려온 거 후회혀. 정읍농악이 하도 아사리판이라. 이수자를맨드는 것이 참 좋은 제도요, 제도는.안 그런 사람은 안 그러겠제마는 문화재 되어갖고는 아무나 어중이 떠중이이수증을 주는가봐. 우리가 볼 때는 원청 문화재도 안 될 사람도 문화재로 올라가 있고 엉망이요 지금. 될 사람은안 되어 있고. 그렁게 철저하게 조사를해가지고 심사를 잘 했으면 좋겄어.
내가 이리저리 안 흔들리고 꽈악 중심을 잡고 있응게
나는 어려서부터 이걸 했잖아. 평생을 내가 이거를 놓아보들 못허고 지금까지 살았기 때믄에 그게 머리에가 쩔었어. 옛날에 우리 선생님들이‘예술허는 사람은 돈을 알면 예술을 못 헌다’그랬어. 그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가 그랬는디 확실히 그런 게 있더라고.그래서 아, 내가 우리 선생님들한테 공부를 제대로 배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가거등. 왜 돈을 알먼 예술을 못 허는가 했더니, 돈맛을 알면요, 이걸 공부를 안해요. 멈춰버려요. 공부를 해야하는디 돈만 벌러 가. 그래서 시기를놓쳐.우리는 어려서부텀 돈이란 걸 모르고 살았거등.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같애. 내가 돈 벌라 했으면 엄청 벌었겠지. 지금도 내가 불쌍한 애기들 많이키워. 중학생 고등학생 둘 키워. 하나는 올해 졸업반이여. 인자 이걸(농악)로 대학 가. 긍게 돈 못 벌어. 농악은인원이 많아논께 내 개인발표나 공연한번 헐라믄 인원이 있어야 혀. 돈 쥐꼬리만침 받은 거 갖고 그놈들 다 여비라도 줘야지. 없는 놈들인게. 이거 허는 사람들은 다 없는 사람들이여. 미쳐, 아조! 허허허. 진짜랑게. 농악은 특히 그래.내가 인자 농악을 허믄 얼마나 허겄어. 아직 정읍은 농악 질서가 안 잽해가꼬 있어. 잽히며는 제대로 허는 사람이 정읍에 좀 있어야 혀. 정읍은 선생도 많어. 몇 달 배워가꼬 지가 선생이여. 그래도 내가 이리 안 흔들리고 저리 안 흔들리고 꽈악 중심을 잡고 있응게 여기까지 온 거야. 정말이야. 내가돈이나 밝히고 헐떡벌떡허고 그러면안돼, 내가 지금 겁나게 제자들을 길러놨어. 한예종, 중앙대, 대불대. 정읍에서는 인원도 인원이지만 이걸로는 먹고 살기 힘등게 이걸 안 해. 인자는 먹고 살만헝게 이걸 취미로 헌대. 운동삼아서 허고 취미로 헌다니 참 사람 상할 일이지. 누구는 몇 십 년 평생을 이걸로 살았는디, 누구는 취미로 허고 운동삼아 헌다니, 참 사람 이상허지.
출처 :풍물놀이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 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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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승렬이라고 알랑가 몰라. 그 전에 익산 이리농악 소고쳤던 양반인디, 우리가 해산해버리니까 이리로 간 양반인디
• 전북 무형문화재 제7-2호
• 부 문 : 우도농악
• 생년월일 : 1943. 6. 11.
• 주 소 : 전북 정읍시 삼동 LG A.P.T 104/403
• 전화번호 : 063) 532-9903 (정읍농악전수회관)
• 의 상 : 고깔을 쓰며 복색이 화려함
• 기 법 : 느린가락이 많고 빠른 가락을 혼합하는 다양함과 개인연기 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