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기둥
사무엘하 7:1-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무덥다는 대서(大暑)이다. 그렇다고 간담이 서늘한 호러 설교를 할 자신은 없고, 시원한 남미여행을 계획하였다. 벌써 방학과 휴가철을 맞았다. 여러분의 가정과 생활에 모처럼 여유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인기 있는 코너 중에 ‘네 가지’가 있다. 약점이 있는 네 남자가 나와서 자신들에 대해 변명을 하고, 항변도 하면서 의미있는 웃음을 던진다.
그들이 말하는 약점은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것들이다. 개그맨이면서 별로 인기 없는 남자, 사투리와 외모 때문에 촌놈 취급 받는 남자, 얼굴은 말끔하게 생겼으나 키 작은 것을 콤플렉스로 여기는 남자, 뚱뚱해서 먹는 것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밝힐 것이라고 오해받는 남자, 이렇게 네 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 때문에 외려 인기를 얻고, 더 유명해졌다.
우리 교회에도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장점이고, 또 강점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워지지 않고 자신의 전통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약점이 될 것이다. 반대로 시대의 추세에 따라 흔들려 전통을 소홀히 여기면 또한 약점이 될 수 있다.
교회의 네 가지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네 가지 진리이다.
첫째, 교회는 하나(Una)이다. 둘째, 교회는 거룩하다(Sancta). 셋째,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Catholica) 곳이다. 넷째, 교회는 사도적(Apostolica)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하나의 교회는 교리와 전통, 심지어 이해관계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다. 너무 많은 세속적인 풍토와 물질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교회 안에 계급이 존재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존재한다. 사도적 전통과 희생을 상실하였다.
이 네 가지 기둥은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주요한 대들보인데 이것이 흔들리면서 교회의 정체성이 의심을 받고, 하나님의 집으로서 성전이 그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다. 이것은 위기이다. 교회는 성전의 네 가지 기둥을 보수하고, 회복해야 한다. 사실 보이는 모습의 교회만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 2:22)가 된 우리 자신의 삶도 회복해야할 네 가지 기둥이 있다.
약점을 쉬쉬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 놓고 알려야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병은 자랑하라’는 말도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더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1)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은 약점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백성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부르심으로 그들에게 선민의식이 가득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의 표식으로 출애굽 직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과 성막을 주셨다. 그것이 출애굽기의 40장에 담긴 내용의 전부이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든, 가나안에서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체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역사는 성막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과 제사제도, 하나님을 날을 지키는 절기, 이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졌다. 눈에 보이는 성막은 나무와 천과 가죽으로 골격이 만들어 졌다. 이동이 가능한 임시적인 가건물에 불과하였다.
이제 다윗은 통일왕국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고, 정치적인 안정도 얻게 되었다. 궁궐을 짓고 마음도 평안해지니 비로소 하나님의 집 생각이 났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2).
그는 측근인 선지자 나단에게 속마음을 꺼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저렇게 초라한 성막 안에 둔 채, 나만 이렇게 편안히 살아도 될까? 하나님 은혜로 내 왕국이 든든히 섰는데 뭔가 하나님을 위해 보답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히브리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자신도 숱한 약점을 지닌 존재이지만 은혜로 불러 주셨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이나, 오늘 우리 자신이나 마치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인들처럼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공동체인가? 그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심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셔서 구원 받은 존재로 살아간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그런데 구원받은 내가 이렇게 분별없이 살아도 될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될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내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면서 사는가?
2) 어떻게 응답할까
이런 고민을 한 것은 다윗 시대 뿐 만이 아니다. 구약성경 에스라를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맨 처음 한 일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다. 그러나 성전 재건은 주변 이방인들의 훼방과 심지어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에 부딪쳤다. 무려 18년 가까이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 바사 왕 다리오의 후원으로 마침내 완공을 보았다.
귀환한 백성들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기초를 놓았을 때, 에스라 본문은 이 광경을 실감나게 적어 두었다.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스 3:12).
바로 성전은 내 삶의 눈물샘이 있는 곳이고, 또한 한없는 기쁨과 영광이 있는 곳이다. 바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들이 흘린 눈물과 외친 함성은 성전이 그들의 삶에 얼마나 특별한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귀환 백성들은 보이는 성전은 재건했지만, 보이지 않는 성전은 완공하지 못했다. 건물로서 성전은 회복했지만 보이지 않는 성전인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적인 에스라의 신앙개혁은 바로 보이는 건물로서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타락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회복하는 일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전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부터 성전 건축의 의향을 들었던 나단에게 말씀하신다. 내 종 다윗에게 이렇게 전해주어라.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7).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 아니다. 화려하게 꾸민 성전이 아니다. 내가 언제 궁궐 같은 백향목 집을 원했더냐?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의 올바른 삶이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미가의 말씀을 상기하라.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건물이 없는 것이 우리의 약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약점이다. 하나님은 건물 안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증언을 들어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4).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땅의 고난을 택하셨다.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가운데 살기를 원하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것이 복음서가 증거 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건물이 아닌 우리의 삶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지 못하고 권위적인 표상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오히려 성전을 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주님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을 통해 다시 새로운 성전, 교회를 세우셨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지극한 마음을 칭찬하신다. 양을 돌보던 목자인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다윗을 위대하게 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다고 한 다윗을 위해 오히려 다윗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3).
사실 교회와 성전은 단지 건물이 아님에도 점점 외적인 건물에 집착한다. 대체로 미국 교회의 예배당을 보면 유럽에 비해 아주 소박하다.
처음 청교도가 신대륙 뉴잉글랜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맨 처음 지은 집은 성전이었다. 그 성전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건물이었다. 물론 그 건물은 예배당뿐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주민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치 센타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예배당은 공동회당(Common House)으로도 불렸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지금도 미국의 교회 특히 시골 교회들은 건물을 아주 단순하고 간소하게 짓는다.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 청소년들을 위한 체육관 역할도 하고, 때로는 타운홀 모임도 하고, 또 선거 때는 투표소로도 사용된다.
최소한의 재정을 들여 창고 건물처럼 간단하게 벽을 세운다. 다만 교회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세워, 이곳이 거룩한 하나님의 집임임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4년 전에 미국에 가서 아주 은혜로운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다. 그것은 미국 교회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시카고 인근 작은 도시에 있는 베이커스 메모리얼 교회였다. 십자가를 수집하신다는 원로 목사님을 만나러 갔다가 그가 은퇴한 교회를 구경한 것이다. 기대와 달리 정말 대단한 예배당이었다. 돌로 세워진 교회는 규모도 규모이지만 내부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모든 성물과 가구가 최고급이었다. 놀라운 일은 이 예배당의 대지, 건물, 인테리어, 가구, 심지어 부엌의 포크까지 단 한 사람이 봉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지역의 어느 부자가 자원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부자의 이름이 예배당 어느 곳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 다윗의 마음이 그 부자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는 부자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난한 마음을 지녔기에 그런 헌신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속마음을 진실함을 보시고,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그의 성실함을 보시고 약속하셨다.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11).
다윗이 먼저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기셔서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짓겠다고 하신다. 약속하신 그 집이 바로 다윗 왕조이다.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2).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에 이르러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에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점에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신다.
세상에 보이는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나, 장 칼뱅이나 그들은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을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향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의 집인 성전 중심의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세상의 부정과 불의한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과 말씀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의 선물과 복을 주기를 원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과연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중세 시대 스콜라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이렇게 고백하였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우리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우리 교회의 네 가지 기둥이 과연 안전하게 서 있는가?
그 사랑의 일치와 마음으로 하나됨, 그 지극하신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는 교회, 그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장점이 많거나 약점투성이거나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체, 그 헌신과 봉사로 밑돌을 놓은 사도적 전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가?
사람의 이름이 기념되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사회적 재주와 경력이 높임을 받고, 물질적 능력과 규모가 인정받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가난한 마음과 자신을 내려놓는 겸비함과 약점과 아픔과 눈물을 가진 그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신다. 교회의 네 가지 기둥을 바로 세우기 위해 바로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강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한 나를 사랑하신다. 그 약점을 사랑하라! 그 사랑을 자랑하라!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