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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意’書風과 ‘大學派’를 통해 바라본 未來 韓國書壇
곽노봉 (동방대학원대학교 서화심미학과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서예에서 강구하는 것은 자신의 면모와 정신 그리고 신채이며, 배척하는 것은 남의 것만 모방하면서 그대로 따라가는 ‘奴書’이다. 따라서 서예작품에 선명한 예술 개성과 독창적인 풍격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文士들이 서예가였던 송나라 ‘尙意’서풍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해방 이후 국전을 통해 서예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서예가들은 주로 書塾에 의한 학서가 고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국전풍의 ‘館閣體’ 서예가 새로운 모습을 지향하고 개성적이며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려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일부 의식이 있는 서예가들에게서 많이 나타나지만, 가장 좋은 예를 ‘大學派’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尙意’서풍의 의의와 그들의 서예이론을 정리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고, ‘大學派’를 통해 미래 한국서단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는 현재의 한국서단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 서예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더욱 현실적 의의가 있다. 이는 과거를 알면 현재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고, 현재를 정확히 진단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논리와 부합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구는 한국서단의 미래를 위해 충분히 의의가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Ⅱ. ‘尙意’書風
‘尙意’란 작가의 개성과 성정을 숭상하는 것으로, 宋의 글씨가 唐이나 晉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董其昌이 지적한 것이나, 馮班은 ‘新意’라는 말을 사용했다. 따라서 ‘尙意’서풍은 서예의 법도나 운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여 서예의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것을 위주로 삼는 서풍이라 하겠다. 이에 대한 의의와 형성과정 및 이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尙意’書風의 意義
‘意’라는 것은 왕희지가 그의 선생인 衛夫人의 말을 해석하여 ‘意在筆前’라고 한데서 유명해졌다. 이는 점과 획이나 장법 또는 필법을 중시한 말로 송나라의 ‘상의’와는 거리가 멀다. 송나라에서 중시한 ‘의’란 서예의 서정적인 면을 말하는 것으로, 孫過庭이 말한 선천적인 情性과 후천적인 哀樂의 총화이지 왕희지가 말하는 作意의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왕희지의 작의는 당나라 서예가들에 의하여 엄정하고 근엄한 필법을 강조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송나라 서예가들은 자기의 감정과 의취를 발산하면서 서예에서 추구할 수 있는 서정 능력인 ‘의’를 최대한 발휘했다. 이는 당나라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변혁은 서예에서의 문인주의와 ‘상의’서풍을 불러일으켜 사람의 가치와 작용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고, 그 대표자는 ‘宋四大家’를 들 수 있다.
‘意’라는 개념을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서정’이라고 할 수 있고, 영어로는 Lyric으로 일종의 조용하면서도 유쾌한 창작을 말한다. 이러한 ‘의’는 ‘정’이라는 경향을 포함하고 있으며, ‘의’와 상응하는 기타의 말과도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意味ㆍ意趣ㆍ境․意ㆍ․意緖ㆍ意態ㆍ意氣ㆍ意匠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의’는 문인의 의취로 ‘법’을 초월하여 더욱 깊게 잠재된 예술의 본질이며, 작가의 성정을 중시하고 개성을 나타내며 그들의 뜻을 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에는 철리의 표현, 학식의 표현, 인품과 성정의 표현, 의취의 표현을 중시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이 ‘尙意’서풍은 學養과 人品을 중시하면서 그 형성과정에 많은 영향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예이론의 발전과 당시 서예가들 대부분이 文士라는 점이다.
‘상의’서풍의 관념은 멀리 한나라 揚雄이 말한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라는 것과, 蔡邕의 “서예라는 것은 한산하게 하는 것이다. 글씨를 쓰고자 하려면, 먼저 회포를 풀어 한산하게 하여 뜻에 맡기고 성정을 멋대로 한 연후에 글씨를 써야 한다.”라고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孫過庭은 “성정에 달하고, 슬프고 즐거운 것을 나타낸다.”라고 했는데, 이는 ‘상의’의 중요한 관념이다. 그리고 張懷瓘은 ‘神彩論’을 주장하여 정신을 쓴다는 견해를 나타냈고, 韓愈는 「送高閑上人序」에서 張旭이 초서로 자신의 모든 성정을 펴내고, 심지어 천지 만물의 변화까지 글씨에 담았다는 ‘唯情說’을 말함으로써 ‘상의’서풍의 이론적 근거를 확립했다.
‘意’는 송나라 사람이 개인적 정감을 억압하는 당나라 사람의 ‘法’에 대한 상대적인 결과이다. ‘의’는 주체의 작용을 강조하고, ‘법’은 주체를 이미 정한 법도에 적응시키려고 하니, 이 둘의 구별은 매우 명확하다. 이는 서예가의 주체의식을 강조하고 아울러 그 정감과 취지 및 심미이상을 서예에 표현하여 새로운 창조적 경지에 진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상의’서풍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송나라 서예는 서정 표현을 강조하면서 전시대와는 분명히 다른 면모를 나타내었다. 청나라 王澍는 이에 대하여 “당 이전의 글씨는 풍모와 골력이 안으로 수렴되었고 송 이후의 글씨는 정신이 밖으로 뻗어 나간다.라고 했다. 대체로 위․진 이전에는 서예를 중시하지 않았지만, 당나라는 과거제도에서 서예를 통하여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당나라 대가인 歐陽詢ㆍ褚遂良ㆍ顔眞卿ㆍ柳公權과 같은 사람은 모두 관료의 신분인 ‘廟廊之士’이다. 이에 반하여 송나라는 五代의 난리를 평정하고, ‘興文敎, 抑武事’의 ‘恢儒右文’ 정책을 펴서 문인과 사대부를 중시하는 重文輕武를 國策으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송나라 서예가들은 대부분 문학과 학문을 겸비한 사대부로 당나라의 ‘廟廊之士’와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서예의 문인주의를 제창하여 ‘상의’서풍을 열어 준 구양수와,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여 ‘상의’서풍의 기틀을 완성한 소식은 모두 ‘唐宋八代家’에서 손꼽히는 문학가들이다. ‘상의’서풍의 발전과 완성에 크게 기여를 했던 ‘宋四大家’들도 모두 문인들이며, 이외에 王安石ㆍ蘇舜元ㆍ蘇舜欽ㆍ蘇轍ㆍ朱熹ㆍ陸游 등은 유명한 文士들로 이들의 작풍은 바로 ‘상의’서풍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했다.
2. ‘尙意’書風의 書論
서예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러한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을 때 서예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예술로서 온전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송나라의 서예이론은 매우 다양하고 많으나 ‘상의’서풍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을 귀납하면, ‘學書爲樂’ㆍ‘神趣論’ㆍ‘創新論’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學書爲樂
이러한 서론은 歐陽脩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는 蘇子美의 말을 인용하여 “밝은 창과 깨끗한 책상, 그리고 붓ㆍ벼루ㆍ종이ㆍ먹들이 모두 섬세하고 훌륭한 것 또한 스스로 인생에서 하나의 즐거움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筆說』에서 “글씨를 배움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다만 성정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學書不能不勞, 獨不害情性耳].”라고 하면서, 마음에 글씨를 배우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조용한 가운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要得靜中之樂者, 惟此耳].”라고 했다. 이는 글씨를 배우는 즐거움인 ‘學書爲樂’에서 진일보하여 서예 심미의 심리상태에서 ‘靜中之樂’을 제시한 것이다.
구양수의 이러한 서론은 송나라 문인들이 ‘獨善其身’의 인격적 특징으로 충분히 실현했으며, 또한 蔡邕이 말한 ‘書者, 散也.’라는 설을 발전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는 내심의 유창함을 얻음에 중점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글씨의 좋고 나쁨은 목적이 되지 못한다. 즉, 주체와 객체, 마음과 사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수단과 목적 등에 있어서 서로 중점을 달리 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구양수의 서론은 서예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작가의 주관ㆍ개성ㆍ성정을 강조한 ‘상의’서풍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했다.
나. 神趣論
이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蔡襄의 ‘神氣說’, 姜夔의 ‘風神說’, 黃庭堅의 ‘重韻論’, 米芾의 ‘眞趣論’을 들 수 있다.
송나라 초의 서예가들은 대부분 심각한 사상이 없고 맹목적이어서 세속을 따르는 서예를 귀히 여기는 현상을 낳았다. 그러나 채양은 위ㆍ진의 風度와 성당의 기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神氣說’을 주장하여 ‘상의’서풍의 물꼬를 열어주었다.
글씨를 배우는 요점은 오직 정신과 기운을 취하여 아름답게 하는 데에 있다. 만약 형상과 모양만을 모방한다면 비록 형태는 같을지라도 정신이 없게 되어 글씨가 이루어진 바를 알지 못할 따름이다.
서예작품에서 정신이 흘러나오게 함을 강조하는 것은 거의 역대 서예가들의 공통된 추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채양의 ‘신기설’은 시대서풍을 치료함과 동시에 서예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대 이후 문물과 예술이 쇠락하고 필찰이 아름답지 못한 상황에서 이는 심각한 현실적 의의가 있다. 채양의 서론은 우선 법도를 숭상한 기초 위에 서예의 정신을 중시하는 晉韻을 추구하여 소식ㆍ황정견ㆍ미불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상의’서풍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姜夔는 ‘風神說’의 대표자로 위ㆍ진 사람들이 쓴 글씨의 ‘飄逸之氣’와 형세의 ‘瀟灑縱橫’을 숭상했기 때문에 ‘영자팔법’의 해석도 매우 독특하여 이를 인체와 동물에 비유하면서 正鋒은 표일한 기가 없다고 했다. 여기서 말한 ‘飄逸之氣’와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風神說’이다.
첫째로 인품이 높아야 되고, 둘째로 옛사람의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고, 셋째로 종이와 붓이 좋아야 하고, 넷째로 글씨가 험하면서도 굳세어야 하고, 다섯째로 식견이 높고 학문이 밝아야 하고, 여섯째로 글씨가 윤택하여야 하고, 일곱째로 향하고 등지는 획이 마땅함을 얻어야 하고, 여덟째로 때때로 새로운 뜻이 표출되어야 한다.
여기서 강기가 말한 ‘風神’이란 사람에게서는 風采이고, 서예에서는 神韻이며, 예술적 개성이 서로 연결된 미학개념이다. 그는 위ㆍ진 사람들의 글씨를 숭상하면서 또한 ‘心手相應’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개 붓을 종이에 댈 때 오로지 옛사람을 모방하면 정신과 기운이 적어진다. 그렇다고 오로지 힘쓰는 데만 주력하면 속기가 제거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것은 익숙하게 연습하여 옛것을 정통하여 손과 마음이 서로 호응하면 아름다움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
이를 보면, 강기의 ‘風神’과 ‘心手相應’설은 形似보다는 神似를 중시하면서 작가의 성정이 나타나야 한다는 ‘상의’의 또 다른 이론적 표현이라 하겠다.
황정견 서론의 귀결은 속기에서 벗어나 운치를 중요시 여기는 ‘重韻’에 있다. 이에 대해 그는 「書草老杜詩後與黃斌老」에서 “나는 초서를 30여년 배웠는데, 처음에 周越을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20년간 속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만년에 蘇舜元과 蘇舜欽의 글씨를 보고 옛사람의 필의를 얻었다. 이후 張旭ㆍ懷素ㆍ高閑의 묵적을 얻어 필법의 묘한 경지를 터득했다.”라고 했다. 그는 이와 같이 하여 비로소 ‘俗氣’를 버리고 붓에서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題東坡字後」에서 “소식의 간찰은 자형이 온아하고 윤택이 나서 한 점의 속기도 없다.”라고 했다. 이렇게 한 점의 속기가 없어야 비로소 ‘韻勝’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황정견 서론의 귀결점이다. 황정견은 이렇게 선종의 영향을 받아 깨달음을 통해 속기를 없애고 자신의 성정을 깃들여 ‘韻’이 뛰어난 작품을 창작하려고 했으니, 이 또한 ‘상의’서풍의 대표적 서론이라 하겠다.
미불 서론의 핵심은 ‘眞趣’로 그는 이를 핵심으로 삼아 서예를 평했다. 예를 들면, 裴休를 평하며 “진솔된 뜻으로 편액을 써서 이에 참된 정취가 있어 추하고 괴이함에 빠지지 않았다.”라고 했고, 沈傳師의 變格을 평하여 “스스로 세속을 초월하고 참된 정취가 있으니 徐浩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변화를 제창하고 판에 박은 듯이 일률적으로 쓰는 것을 반대하여 붓 끝에 생기가 풍부하도록 했으나, 이것도 ‘眞趣’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운필은 마음의 뜻에서 나와 자연에 맡겨야 붓끝에서 비로소 변화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眞趣’이다. 또한 이것이 미불 서론의 가치가 있는 바이고, 당시 서예가들이 그를 모범으로 삼는 이치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서론은 ‘상의’의 이론적 기반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 創新論
소식은 ‘상의’서풍 創新의 대표자이며, 그의 서론은 ‘通其意’라는 사상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는 그가 서예의 전반적인 것을 먼저 파악하여 그 본말을 이해한 다음 자기의 뜻을 새롭게 나타내어 서예의 창신을 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물은 한 가지의 이치이니, 그 뜻을 통하면 나아감에 가하지 않음이 없다.……세상 사람들의 글씨는 전서에 예서를 겸하지 않고, 행서는 초서에 미치지 못하니 아직 그 뜻을 통하지 않은 것이다. 채양과 같은 사람은 해서ㆍ행서ㆍ초서ㆍ예서 등에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으며, 남긴 힘과 나머지의 뜻을 변하여 비백서를 했으니, 가히 아낄 만하여도 배울 수 없다. 그 뜻을 통하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이를 보면, 그는 글씨를 쓸 때 각 서체가 모두 서로 통하기 때문에 이를 나눠 보아서는 안 되고 먼저 서체간의 공통성을 파악한 뒤에 개별성을 실현해야지, 단지 개별성만 파악하고 공통성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표는 바로 새로운 뜻을 나타낸다는 創新에 있다.
나의 글씨가 비록 매우 아름답지는 않지만, 스스로 새로운 뜻을 내어 옛사람을 답습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이를 보면, 창신은 바로 ‘出新意’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숙련된 기교를 갖추고 아울러 높은 예술적 수양이 충만한 學養을 닦아야 한다. 창작을 함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표현하려는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하고 있는 객관적 사물을 어떻게 정확하게 표현하느냐의 문제이다. 소식은 전자를 ‘道’, 후자를 ‘技’ 또는 ‘藝’라고 하면서 이들을 모두 중시했다.
기교가 나아지면서 도가 나아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진소유(秦少游)는 기교와 도가 함께 나아지는구나.
소식이 말한 ‘도’는 결코 유가적인 ‘도’가 아니라, 사물에 내재된 특징과 규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가장 잘 어우러진 것이 ‘自然天趣’의 경지이고,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진나라의 서예이며, 이러한 경지는 송나라 서예가들이 추구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소식 이전에 구양수는 진나라 법첩에 운치가 있다고 말했고, 채양도 진나라의 글씨에 풍류적인 기운이 쌓여있다고 설파했다. 소식 이후에 황정견이나 미불도 진나라 운치에 대해 예찬을 하면서 이들의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했다. 이를 보면, 송나라 사람들이 추구했던 ‘상의’의 심미관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Ⅲ. ‘大學派’
‘大學派’란 대학교에서 서예를 전공하여 이론과 실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창작을 모색하는 무리들을 말한다. 이에 대한 연원과 과제 및 전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大學派’의 淵源
‘大學派’는 이론과 실기를 겸하며 일반 서숙문화나 기존 서단의 작품과 차별성을 두면서 자신의 성정과 주제를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대학파’를 중국에서는 ‘學院派’라 부르는데, 그 연원은 중국 고대에 서예를 전문적으로 가르쳤던 기관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나라의 鴻都門(蔡邕), 당나라의 弘文館(虞世南과 歐陽詢), 북송의 書學(書學博士인 米芾), 원나라의 奎章閣(奎章閣鑒書博士인 柯九思) 등이 그것이다. 당 태종 때 전문적으로 國子監과 弘文館을 설치해 규범을 건립하고, 전적으로 법을 숭상하는 서예를 배우게 했다. 당시 국자감에서 가르쳤던 七學 중의 하나가 ‘書學’이고, 홍문관에서 유명한 서예가로는 우세남과 구양순이 있다. 이때부터 초기 형태적인 ‘대학파’ 서예의 성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중국 정부가 들어서며 서예의 보급과 시대의 요청에 의해 中國美術學院에서 1962년 처음으로 서예과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79년에는 석사반, 1996년에는 박사반이 설립되어 서예의 재도약을 이루는 바탕이 마련되면서 이론과 실기를 겸한 ‘대학파’ 서예의 체계화가 완성됐다.
이에 반해 한국은 고려에서 최초로 태조 13년(930) 12월에 西京에 학교를 세우고, 廷鶚을 書學博士로 임명한 기록이 있다. 이후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國子監은 성종 11년(992)에 설립되었고, 교육과목은 國子學ㆍ太學ㆍ四門學으로 구분하였으며, 각 과목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후 문종 때 관제를 정비함에 國子博士는 정7품, 太學博士는 종7품, 四門博士는 정8품, 그리고 書學博士 2명은 종9품으로 삼았고, 京師六學(즉, 國子學ㆍ太學ㆍ四門學ㆍ律學ㆍ書學ㆍ算學)이 갖추어짐에 따라 書學은 국자감의 주요 과목이 되었다. 그리고 인종에 이르러 과거제도에서 서예에 관한 시험방식ㆍ시험과목ㆍ채점방식 등이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또한 조선의 書壯官과 寫字官 제도도 書學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후 1989년 원광대를 시작으로 계명대ㆍ대구예술대ㆍ대전대ㆍ호남대ㆍ경기대 등에 서예과가 개설되었고, 1995년 원광대를 시작으로 2000년에는 수도권에 위치한 경기대ㆍ성균관대ㆍ한성대에 석사과정을 개설되었으며, 2005년 동방대학원대학교ㆍ원광대ㆍ성균관대ㆍ대전대 등에 박사과정이 설립되었다. 그 결과 현재 국회전자도서관에는 600여 편 이상의 서예관련 석사학위 논문과 10여 편에 이르는 박사학위 논문이 등재되고, 한국서예학회를 비롯한 크고 작은 학회활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서예가 단순히 실기 위주의 기능 연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체계적인 연구와 발전을 바탕으로 한 ‘대학파’의 체계수립이며, 동시에 ‘대학파’의 연원으로 삼는데 전혀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2. ‘大學派’의 과제
한국서단에서 서예는 주로 서숙위주로 보급되다가 대학교에 서예전공이 생기자 많은 관심이 쏠렸다. 특히, 원광대 서예과 첫 졸업전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일반 전시와 차별성이 없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또한 수도권에 처음 생긴 경기대 석사논문에서 서예의 새로운 방향을 찾길 원했지만 이 또한 별로 소득이 없고, 다만 누구나 들어가면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서예교육은 계속 이어졌고, 이에 따라 ‘대학파’들이 점차 서단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많은 轉機를 일구었다. 예를 들면, 서사기능의 실기위주에서 이를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배워야 하겠다는 것, 인식전환을 하여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창작에 대한 모색, 그리고 서예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것 등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아직까지 ‘대학파’가 서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하겠다. 비록 서예과 개설 20주년을 맞이하여 6개 대학교 졸업자 116명이 ‘大學派展’이란 합동 전시회를 개최했지만, 미래의 기대감은 있으나 기존 서단질서를 바꾸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것은 한국서단, 기성작가, 서예학회가 ‘대학파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서단의 시각은 ‘대학파’라는 명칭이 생경하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서예가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하나, 비교적 생동하고 표현이 자유롭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기존 서예가들의 시각은 기성 작가들이 다 해본 나머지라고 하면서 더욱 전통에 충실하던가 아니면 더욱 파괴하고 창의적인 작품을 시도하여 서예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학회의 시각은 “대학파 전시는 아직 법고에 치중할 단계인데, 한국서단에 무엇인가 해결해야할 화두를 던진 것이 아니라 어설픈 잔치에 불과하다.”라고 일축한 것으로 대변할 수 있다.
만약 ‘대학파’가 진정한 경쟁력을 갖추고 기존 서단과 차별성을 나타내려면, 다음과 같은 과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첫째, 學養의 절대 부족이다.
학양은 학문과 수양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字外功夫’로 모든 방면에서 영양을 흡수하고 학문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흔히 ‘行萬里路’와 ‘讀萬卷書’로 표현하기도 한다. 좁은 의미로는 서예에 국한한 서예기법ㆍ서체ㆍ서예미학ㆍ서예작품ㆍ서예가ㆍ서예도구ㆍ서론ㆍ서예사ㆍ감상법ㆍ교육법ㆍ서예용어 등에 대한 연구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학양을 제대로 갖추면, 서예의 소통과 올바른 서예문화를 일구어 서단에 이바지할 것이다.
둘째, 法度와 自由의 모순적 통일이다.
현재 한국서단의 작품을 보면, 대체적으로 전통을 추구하는 작가는 법도에 치우치고, 새로운 창작을 추구하는 작가는 자유로움에 치우치고 있다. 여기서 법도는 객관성이고, 자유는 개성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비록 서로 모순적이지만 이를 원만하게 조화시켜 통일시킬 수 있어야 객관성을 인정받으면서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면, 전통서예를 유지하는 것이 결코 서예 발전에 가장 좋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아직 전통서예보다 더 좋은 방향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따를 뿐이다. 성공한 서예가들을 보면, 거의가 몇 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한 다음 비로소 자기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예는 결코 속성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이것도 현실적으로 하나의 문제점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시 무엇보다도 먼저 각고의 노력을 통해 법도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창작세계를 추구하여 법도와 자유의 모순적 통일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첨예한 작가정신이다.
첨예한 작가정신을 갖추려면 필수적으로 觀察力ㆍ模倣力ㆍ理解力ㆍ創造力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관찰력이란 서예의 추상 형식에 대한 感知능력을 가리키며, 이는 서예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모방력은 법을 취하는 법첩에 대한 재현의 능력이다. 따라서 관찰은 눈을 훈련하는 과정이고, 모방은 손의 정확성을 단련시키는 과정이라 하겠다. 여기에 서예 형식에 있는 내재 규율과 본질을 통찰하고 이를 묵계할 수 있는 이해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이미 가지고 있는 관찰과 모방 능력을 기초로 삼아 서예의 표면적 현상에 대해 반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해력의 민첩성은 하나를 배워 이를 다른 데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마지막으로 서예 학습의 종합 능력인 창조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관찰력ㆍ모방력ㆍ이해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서예를 하는 목표이면서 귀결점이기도 하다. 물론 서예 풍격에서 자아를 창조한다는 것은 바로 성숙된 예술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서예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조합하고, 원형을 개발하고, 근원을 탐구하고, 거슬러 탐구할 수 있고, 자아를 찾을 수 있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할 수 있고, 여러 실마리를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이른바 ‘프로’라고 자처하는 일반 서예가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론과 실기를 겸한 ‘대학파’들에게 더욱 적합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법첩만 베끼거나, 감성에만 의지하여 붓만 마구 휘두르거나, 색깔과 조형만 앞세우거나, 서예의 객관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격에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구호만 써대며 허장성세나 일삼는 행위는 잠시의 유희에 그칠 뿐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3. ‘大學派’의 전망
먼저 결론적으로 말하면, ‘大學派’의 전망은 매우 밝고 미래 한국서단의 희망이라 할 수 있다.
‘대학파’의 본질은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여 새로운 창작을 하는 데에 있다. 현재 한국서단은 20세기까지 서예보급과 저변확대를 하며 거의 청나라 서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1세기에 들어와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면서부터 서예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뚜렷한 목표설정과 지표가 서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이론의 빈약과 학양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이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파’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밝다고 하겠다.
사회가 극도로 발전하면서 개성의식을 추구하는 것이 현 문명사회의 특징이 되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어떤 서체가 주류를 이루거나, 어떤 서예가가 서단의 맹주가 되거나, 공모전에만 매달려 체본만 베끼는 것보다는 서예의 다원화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성정과 기질을 가진 사람은 이를 펴낼 알맞은 서체의 형식을 찾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더욱 새로운 풍격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성정은 서예에서 극도로 발휘될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되려면, 서예를 열심히 연마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양에 대한 필요성과 ‘자외공부’가 더욱 절실하다. 왜냐하면, 창작의 실천은 이론의 지지를 필요로 하고, 이론이 결여된 실천은 성취가 낮을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대학파’ 출신의 서예가들이 다양한 이론을 펴면서 서단을 주도할 것이다.
서예사를 보면, 서예가 고조하거나 전환기를 마련할 때마다 서론을 정리하여 이론의 선도아래 대서예가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은 한나라의 蔡邕(『九勢』ㆍ『筆論』), 위진남북조의 衛恒(『四體書勢』)ㆍ衛夫人(『筆陣圖』)ㆍ王羲之(『書論』), 수나라의 智果(『心成頌』), 당나라의 歐陽詢(『三十六法』)ㆍ虞世南(『筆髓論』)ㆍ張懷瓘(『書斷』)ㆍ顔眞卿(『述張長史筆法十二意』), 송나라의 蘇軾(『東坡題跋』)ㆍ黃庭堅(『山谷題跋』)ㆍ米芾(『海嶽名言』), 원나라의 趙孟頫(『蘭亭十三跋』), 명나라의 董其昌(『畵禪室隨筆』)ㆍ文徵明(『文待詔題跋』), 청나라의 阮元(『北碑南帖論』)ㆍ包世臣(『藝舟雙楫』)ㆍ康有爲(『廣藝舟雙楫』)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李漵(『筆訣』)ㆍ李匡師(『書訣』)ㆍ金正喜(『秋史集』) 등이 서론을 정리하여 이론과 실기를 겸했을 때 서예가 가장 절정에 달했음을 상기해야 한다.
실제로 어떠한 예술을 막론하고 그 분야가 제대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고, 다음은 이를 대표하는 대가들이 나타나야 하며, 마지막으로 이를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앞으로의 방향을 정확히 제시하는 이론가들이 나타나야 한다. 서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서예의 보급과 많은 대가들이 출현했다고 보면, 앞으로의 과제는 이론의 정립과 올바른 방향 설정을 통해 새로운 서풍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서숙에서 실기위주로 공부하는 쪽보다 이론과 실기를 겸할 수 있는 ‘대학파’에서 더욱 많은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학파’에 거는 기대는 막중할 뿐만 아니라 전망도 매우 밝고 미래 한국서단의 희망이라 하겠다.
Ⅳ. 未來의 韓國書壇
현재 한국서단을 보면 많은 기대를 갖게 된다. 그 이유는 과거에 비해 많이 늘어난 서예인구, 왕성한 실험정신, 작품의 다양화, 그리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흡하거나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국면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전통의 위축, 작가들의 학양 부족, 서예교육의 불합리성, 비평의 역할미흡 등을 들 수 있다.
전통의 위축은 창작 측면에서 한국적 특성의 발현에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외래의 영향에 지나칠 정도로 기울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전통은 우리를 지탱해주고, 우리를 우리답게 해주면서 남과 구분을 지어주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서예가는 한국적 서예를 창출하려는 목표아래 끊임없이 전통으로부터 탈피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단순히 전통을 외면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저하게 섭렵하고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방법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전통서예 및 중국서예를 우리의 미의식과 필요성에 입각하여 주체적이고 선별적으로 엄격한 검토와 판단을 거쳐 수용해야 하고, 외형적 수용에 치중하지 않고 그 내면과 이론적 배경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받아들여야 하며, 일단 수용한 것은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재창조해야 한다.
모든 예술은 생각(즉, 사상과 학양)과 재능(즉, 기량)이 합쳐져서 높은 수준으로 승화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풍부하고 창의적인 생각 내지는 사상과 철학이 빼어난 기량과 기법을 통해 구현되어야만 훌륭한 창작이 가능하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보편적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손재주를 키우는 일에만 몰두하고 머리와 가슴을 풍요롭게 하는 일은 소홀히 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讀萬卷書, 行萬里路”를 음미하면서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多讀多學’, ‘多思多究’, ‘多見多察’, ‘多硏多作’을 제시하며 다시 한 번 學養과 情感이라는 구호를 외쳐본다.
서예의 바람직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작가ㆍ교육자ㆍ비평가ㆍ애호가들의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져 유능한 인재들이 서예계에 계속 충전되고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입시제도, 교육과정, 교육의 내용과 방법, 비평의 빈곤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서예전공자들에 대한 실기와 이론교육의 불균형, 창의력 高揚, 올바른 감상과 비평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이론교육은 실기를 선도하여 창의력을 고취시킬 수 있고, 올바른 감상은 정확한 목표설정과 방향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평론은 전공에 따른 분업화, 객관적이고 공평한 비평의 제고, 평론내용의 논리성과 명확한 제고, 비평철학과 방향의 제시 등을 통해 객관적이고 창의적인 창작에 도움이 되어야 올바른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 한국서단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볼 때 개인의 정감을 숭상하는 ‘尙情’과 ‘學養’이 서단에서 가장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중에서 ‘尙情’은 ‘尙意’보다 작가의 주체정신을 더 높게 나타낼 것이며, 새로운 예술사조에 더욱 잘 적응할 것이다.
서예가 비록 고도의 추상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주로 도덕과 교화가 목적이었을 때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예가 자신의 성정을 깃들인다는 ‘寄情論’이 제시되면서부터 문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사람의 성정을 옮길 수 있어야 서예의 지극함이 된다.”라는 것은 서예가의 성정을 표현한다는 본질적인 특징을 밝힌 이론이다. 이는 작가의 정감과 내용이 충만한 글씨라야만 진정으로 예술의 가치와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하나는 서예가의 정감을 옮김으로써 다른 의미를 형성하고, 다른 하나는 서예가의 감정을 작품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사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과 감상이란 면에서 볼 때 “성정을 다스리는 것은 글씨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라는 것은 서예의 근본적인 법칙이며, 글씨를 연습할 때 “마음과 손이 성정에 도달해서” “그 성정을 따르면 업을 이룰 수 있고, 그 마음을 위배하면 보람이 없어진다.”라는 것은 바로 서예의 지극함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尙情’은 현재와 미래 한국서단에서 구호가 될 뿐만 아니라 서예의 목표로 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Ⅴ. 나오는 말
지금까지 ‘尙意’서풍과 ‘大學派’를 통해 바라본 미래 한국서단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尙意’서풍은 서예의 법도나 운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學養과 人品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여 서예의 새로운 뜻을 나타낸 서풍이라 하겠다.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는 揚雄의 “書, 心畵也.”, 蔡邕의 “書者, 散也.”, 孫過庭의 “達其情性, 形其哀樂.”, 張懷瓘의 “唯觀神彩, 不見字形.”, 韓愈의 ‘唯情說’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尙意’서풍을 주도한 송나라 서예가들의 주요 이론을 살펴보면, 歐陽脩의 ‘學書爲樂’, 蔡襄의 ‘神氣說’, 蘇軾의 ‘出新意’, 黃庭堅의 ‘重韻論’, 米芾의 ‘眞趣論’, 姜夔의 ‘風神說’ 등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상의’서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이 추구했던 심미관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에 반해 ‘대학파’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여 새로운 창작을 모색하는 것을 본질로 삼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 성과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학양의 절대 부족, 법도와 자유의 통일, 첨예한 작가정신을 ‘대학파’의 과제로 제시하고 밝은 전망과 미래 한국서단의 희망을 기대해본다.
미래의 한국서단이 건전하게 나아가려면, 전통의 위축, 작가들의 학양 부족, 서예교육의 불합리성, 비평의 역할미흡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려면 먼저 이에 알맞은 명분과 구호를 정해 기치로 삼아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서단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볼 때 ‘學養’과 작가의 성정을 숭상하는 ‘尙情’을 서단의 구호로 제시하고자 한다. ‘학양’은 작가에게 필수부가결한 요소이고, ‘상정’은 ‘상의’보다 작가의 주체정신을 더 높게 나타낼 것이며, 새로운 예술사조에 더욱 잘 적응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양’과 ‘상정’은 현재와 미래 한국서단에서 구호가 될 뿐만 아니라 서예의 목표로 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상의’서풍과 중국 ‘학원파’의 대표작, 그리고 ‘대학파’전의 추진위원장인 손동준, ‘墨調’예술을 주창한 조수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태상 서울교육대학교 미술과 교수의 작품을 도판으로 제시하여 각자 미래 한국서단의 건전한 방향에 대해 모색하는 것을 숙제로 남기면서 글을 맺는다.
참고서목
陳振濂, 「尙意書風管窺」, 『書譜』卷46-50.
『宋史』, 卷157, 「選擧志」三.
민족문화추진회, 『고려사절요』, 경인문화사, 1977.
宋民著 郭魯鳳譯, 『中國書藝美學』, 東文選, 1998.
郭魯鳳, 『中國書法與中國當代書壇現狀之硏究』, 西泠印社, 2000.
熊秉明著 郭魯鳳譯, 『중국서예이론체계』, 동문선, 2002.
곽노봉편저, 『소동파의 서예세계』, 다운샘, 2005.
안휘준, 『미술사로 본 한국의 현대미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郭魯鳳, 「蔡襄의 ‘神氣’說에 관한 考察」,『書藝學硏究』第六號(韓國書藝學會 2005. 3), pp.168-169,
郭魯鳳, 「高麗前期와 宋의 서예 비교」, 『書藝學硏究』第13號(韓國書藝學會, 2008. 9), pp.228-230.
1. ‘尙意’서풍의 대표작
蔡襄, <脚氣帖>
蘇軾, <黃州寒食詩>
黃庭堅, <松風閣詩卷>
米芾, <吳江舟中詩卷>
2. 중국 ‘學院派’의 대표작
蔡夢霞<女書-空白之頁>
75×100cm
陳大中<采古來能書人名>
76×164cm
陳迅<兒時學書回憶>140×210cm
3. 한국작품
孫東俊〈삶〉97×130cm
2009대학파전 출품
대학파창립 추진위원장
韓泰相<文字 이야기 09-Ⅷ>30×30×10cm
2009韓國國際書法聯盟展 출품
서울敎育大學校 美術科 敎授
趙守鎬<墨調-創世記>40×18cm
2009韓國國際書法聯盟展 출품
大韓民國藝術院 會員
국문초록
서예에서 강구하는 것은 자신의 면모와 정신 그리고 신채이며, 배척하는 것은 남의 것만 모방하면서 그대로 따라가는 ‘奴書’이다. 따라서 서예작품에 선명한 예술 개성과 독창적인 풍격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文士들이 서예가였던 송나라 ‘尙意’서풍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해방 이후 국전을 통해 서예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서예가들은 주로 書塾에 의한 학서가 고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국전풍의 ‘館閣體’ 서예가 새로운 모습을 지향하고 개성적이며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려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일부 의식이 있는 서예가들에게서 많이 나타나지만, 가장 좋은 예를 ‘大學派’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尙意’서풍의 의의와 그들의 서예이론을 정리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고, ‘大學派’를 통해 미래 한국서단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는 현재의 한국서단을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 서예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더욱 현실적 의의가 있다. 이는 과거를 알면 현재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고, 현재를 정확히 진단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논리와 부합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구는 한국서단의 미래를 위해 충분히 의의가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尙意’서풍은 서예의 법도나 운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學養과 人品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성정을 표현하여 서예의 새로운 뜻을 나타낸 서풍이라 하겠다.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는 揚雄의 “書, 心畵也.”, 蔡邕의 “書者, 散也.”, 孫過庭의 “達其情性, 形其哀樂.”, 張懷瓘의 “唯觀神彩, 不見字形.”, 韓愈의 ‘唯情說’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尙意’서풍을 주도한 송나라 서예가들의 주요 이론을 살펴보면, 歐陽脩의 ‘學書爲樂’, 蔡襄의 ‘神氣說’, 蘇軾의 ‘出新意’, 黃庭堅의 ‘重韻論’, 米芾의 ‘眞趣論’, 姜夔의 ‘風神說’ 등이 있다.
이에 반해 ‘대학파’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여 새로운 창작을 모색하는 것을 본질로 삼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 성과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학양의 절대 부족, 법도와 자유의 통일, 첨예한 작가정신을 ‘대학파’의 과제로 제시하고 밝은 전망과 미래 한국서단의 희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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