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광주이씨의 시조가 신라 내사령 휘 자성과
군린-용수, 한희-방린, 광릉 삼익에 이르는 世系 史實과
기타 광이 기원 유래 史實
가. 광주이씨의 비조, 이자성(자성이족은 기원전 부터 서라벌 분황사지 역 발흥,內史의 令 )
(1)諱 인흥, 낙하 종회 합보 토의 시에 제출한 증거,
우리 이족은 자성이족으로 기원전 서라벌에 살았다.
상고하건데 초기신라시대는 각부족들의 연맹체 집단의 나라로 서라벌 9部族과 자성족등 기타 部族들이 웅거한 시기로서,
연맹체를 대표하는 부족을 선임, 소위 首長으로 임명한 것이,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에 이르는 신라王號이며,
내물왕시기 이전부터 豪族長들을 이사금, 이리, 님금이라고 호하였다.
나. 우리의 시조 자성이족은 서라벌 분황사인근에서 대대로 발흥한 족으로
당시의 족장이 자성 이사금이며 칭호는 이리, 니사금,님금, 이사군이다
즉 분皇사지 域伐의 이라고 불렀고(三國史記.遺事, 傳記, 域의 이리는 후에 伊벌찬, 伊찬이라고 職名이 변동됨)
그래서 신라는 서라벌을 중심으로, 여러 족의 이사금들이, 다스리는, 부락 연맹체의 집단인데
집단적인 연맹 왕체제로 국가적인 체제를 갖추니
이가 내물 마립간이다. 내물 마립간은 자성이족의 자성 이사금 등등 화백들의 회의를 거쳐서
옹림된 최초의 왕이다, 이가 김씨계이다.(간-왕)
다.자성李族의 자성 이사금은 이후 내물마림간(간, 한, 서불한의 한, 한국의 한은 오늘날 연맹체의 수장, 즉 왕의 최초칭호이다)
의 후손들이 신라 왕 추대에 적극 개입하였고, 자성이족은
내물왕대와 이후 칠포국과 칠체 칠토지역의 가야를 복속하였는다.
이로부터 함안의 동북의 지역의 족장이 된것이다. 분들로 諱 군린 諱 용수이다.
(당시는 칠원으로 부르지 않고 포상8국, 가라, 함안,칠제, 칠토국으로 불렀으며
칠원은 고려태조의 명에 의거 서라벌은 경주가 되고 필포는 칠원현이 된다)
후에 통판공 휘지의 기전에, 우리 광이의 시조가 신라 내사령으로 기록된 것은
자성이족이 지방의 호족장이고(니사금) 내물왕 부터 왕궁에서 왕의 조칙을 담당하고 왕립 사찰을 관리하고
비서와 같은 부서가 있는 바,
이를 內史라고 했으며(三國史記,정창원 문서, 古代 新羅 전적 제도.이차돈 전기,최치원 전기등에 내사의 관부가 나타남)
내사의 우두머리가 內史令이다, 이차돈의 원래 성은 朴씨이나 벼슬은 內史의 使人으로
진평왕때 왕을 근간에 보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內史部는 내물왕대부터 있었던 관부로 추정이 가능
(내사부의 하는 일은, 왕의 조칙, 왕 직접 운영하는 국사의 절, 사찰을 관리함)하고
이의 우두머리는 내사령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학인, 최치원은 고려 초기에 신라 내사령으로 추증된 바
신라시대에 일종의 관부로 존재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그렀다면 우리 시조의 관직이 내사령으로 기록되고
이의 내용이 傳聞으로 世宗組 통판 이지의 家乘까지 記錄으로 남아져 있는 것으로
보아 內史令 이자성은 맞다고 할 수가 있다.
라. 대대로 정확한 이름은 알 수가 없지만 휘 군린, 휘 용수가 있었고
휘 군린, 휘 용수 모두 존칭의 의미인 이름이기에 우리 선조는 족장이 맞다.
그러다가, 우리 자성이족은,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당시 지방을 분점 중이던 자성의 이족들은
일대에서 대규모로 고려에 대항 봉기하고 함락 된 뒤에도 신라부흥군과 기내와 회안으로 이주하여
경순왕을 따라온 호종 유민과 일대 봉기 세력과 합하여
경순왕이 죽기전까지 부흥을 하였으나 고려의 위무로 결국 망하니. 이것이 이속의 과정이다
이것이 신라 경애왕- 경순왕- 고려왕건- 고려경종- 광종시대의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 호걸시대의 풍경이다
(결국 궁예 견휀 등이 항복하고, 신라부흥을 봉기한 자성이족도 고려에 의해 고려 통합된 것으로,
회안으로 이속이 되니 이른바 문호공 비문의 이속 기록이다. )
마. 당시 우리 자성이족들은 지방 盟主(이사금)의 지위에서, 지방의 향장인 戶長의 지위로 格下 된 것이다,
그래도 우리 자성이족들은 신라 부흥을 외치며 기내에서 항거하다가
당시에 선대묘와 신전을 짓고, 매년 10월에 전 종족이 모여서
선조를 추창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자성 이족의 한을 추억하고 지친을 강호하였으니,
이가 漆原에서 온 자성이족의 八面石碑 祭壇 說話이다, 칠원은 고려왕건이 칠토.가야지역을
평정한 후에 칠원현이라고 칭했다.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기록은, 좌찬성 諱 우생과 기타 광이 둔촌공의 후손 필행과 휴징의 기록,
복암가의 세전기록, 기타 기록에 나타난 기록이다,
원래 팔면비는 신라의 황복사나 ,분황사지의 國師들의 기념비 석등 팔면비와 같은 것으로,
호국불교적인 신앙의 하나로, 일종의, 제단인 것이다 (초기 원효등 신라 고승들의 기념비및 석등팔면비 연구 참조)
우리 조상들은 단군 시대부터 신전을 세우고, 종족들이 제사를 지냇고, 대부분 신전들은 산의 頂上에 세웠다
초기에는 고인돌의 형태로, 삼각층으로, 사각층으로, 팔면층.(단군사. 환단고기등 전설 화)
고려조에 이르러 호장으로, 지내오다가 중기이후, 무신 정권이 들어서면서, 출사하기 시작하였고,
대표적인 분이, 유명한 先祖 廣陵 三益이고,
이후에 세계되신, 이른바 4대 명휘이상의 고려말의 선조들이다.
우리 자성 칠원이족의 기원과 내사령 이자성에 대한 고증기록으로는
대부분 석탄공, 암탄공, 율정공가에서 보관된 것으로, 조선조 초중기에 휘 휴징, 휘 이이만,복암선생의 가장
등등에 보존 유래 되었다
바.다음은 신라 내사령 자성시조에 유전된 족보기록등의 자료이다
(율정공파, 석탄공파 암탄공파 대종회 /기타 근거,제공)
(1). 이이만가의 가승보 갑진초보별보
『參考,李宜晩 선응(善應), 농은(農隱), 정정(靖貞)
1650년(효종 1) `1736년(영조 12) 사간원정언, 충청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한성판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응(善應), 호는 농은(農隱). 충정공 이준경(忠正公 李浚慶)의 5대손이며, 이사수(李士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필행(李必行)이다. 아버지는 이후징(李厚徵)이며, 어머니는 송휘길(宋暉吉)의 딸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 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가 하사되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 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청선고(淸選考)』
-시기, 하원공의 갑진보를 만들기전에 이이만가에서 내려온 가승을 토대로 광주이씨 둔촌공가
족보, 이를 별보초보라 함,
-당(唐) 자의 후손 중 고인(故人)이 된 승선공(承宣公) 이만(頤晩)이 기록한 가승(家乘)을 들어보니
또한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가 있으니, 결국 사파(四派) 휘한,휘당 석암파가 다 같이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이만(李頤晩) 公은 숙종 15년 증광시(增廣試) 문과로서
승선(承宣) 즉 승지를 지낸분으로. 父는 이후징(李厚徵)이며 <갑진보 변설13조>의 諱하원(李夏源)의 숙부이다.
아울러 <갑진보>를 간행(刊行)한 북백 휘 이의만(李宜晩)의 형이다.
-즉 조선조 초기 4대파의 가마다 내사령선대로 시작되는
가승을 유래한 것처럼 둔촌공 후손들의 가승(家乘)에도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가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정곤수 이명징 가의 광주이씨 선대족보기록
『 연안인(延安人) 이명징(李明徵) 公과 충주인(忠州人) 정곤수(鄭崑壽.청백리) 公은
한음상공과 동시대 같이 국사를 담당한 조신으로 유명한 선비이자 반가로, 이 집에
보관 중인 廣州李氏 선대도에 관한 족보 기록 “한희(漢希)의 윗대에
자성(自成). 군린(君隣).용수(龍壽)의 三代가 있고. 문(文)에 이르러,
염주(塩州) 서자번(徐自蕃)의 딸을 배필로 삼았고, 울(蔚)은 강주(江州) 이지효(李之孝)의 딸을
배필로 삼았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시록서증, 이명징(李明徵) 公과 정곤수(鄭崑壽.청백리) 公 가 보관 광주이씨 선대도
*이명징(李明徵)은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수광주부윤(守廣州府尹)인 문과 급제자 이회(李禬)다.
정곤수(鄭崑壽)는 본관은 청주(淸州)로,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별시 문과(別試文科) 장원(壯元)이다.
관직은 좌찬성(左贊成)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봉호되었다.
아버지는 대호군 정승문(鄭承門)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형이다.
이명징(李明徵) 집안과 정곤수(鄭崑壽) 집안과 같은 명문가에 존재하는
족보기록에 廣州李氏 관련 기록이 존재
(3) 중종조 박상의 문호공 이점의 신도비명에서의 신라말 후삼국 고려초 조선개국까지 광주이씨의 역사기록
『중종조의 청백리이자 이조 참판, 눌제 박상의 문호공 이점의 신도비명에,
우리 광이의 연원을 근설한 신도비 명이 있는 바
廣陵李石灘諱養中玄孫文胡公諱坫。字崇甫。年七十有七。以疾卒。卽帝明易元以嘉靖元年春三月也。越夏五月。卜得日。歸全于利川府治之西陽嶽山坤向原先塋之側。以遺命。遷其貞夫人柳氏之墓。合厝。遵禮文也。克葬之六年。其孤今公州判官宗箕。訪予於客館。拭淚以告曰。先公之卒。凡其所以較德焯行者。莫不粗完。有幽室之誌。以圖陵谷之變遷。有太常之諡。以 019_087a著不沒之實。獨神道刻文有缺。屢俯伏仰請於翰苑大手。則職鉅務穰。力不遑及。敢布心腹。乞詞以顯後。言甚懇。姑許之。南來。公牒一埤。卒卒無須臾之間。炎涼將再易矣。復授使者狀。踔三百餘里。扣且督益勤。烏可以不文固讓乎。謹按東國史。三國之季。豪傑蠭起。各據土地爲君長。號令一方。高麗太祖統合。分屬州府郡縣。吏其人。及本朝改玉。仍其制。其苗裔之以文武出身登將相者。往往而有。於公家世可徵。初有廣吏諱知。鄕貢通籍。九分竹使符。持身廉簡。所莅 019_087b以淸白稱。嘗通判義州也。上國之人。厚行賄賂。潛相和市。通判獨不受。然累在上官。不敢發。後朝廷得其狀。移咨詰之。且云判官李某。却綃十端。其淸節之聞於朝廷如是。故我世宗賜褒。服誅其受賕者。以旌異之。貪夫足以廉矣。然果於恬退。雖富之以韓,魏。自視欿然。泉石逍遙。飯疏食飮水。樂在其中矣。其子寬義積學爲文。待聘英陵朝。初試爲司馬。學問日造。發解十六擧。卒不中第。知其命之不偶。懷抱利器。遯于荒野。遡濂洛關閩之餘波。以探洙泗之淵源。劘格 019_087c性理。擺落詞章之陋。蕭然一室。相對黃卷中聖人。願安承敎者。坌集門下。公卿以逸士交薦。起家爲栗峯道察訪。非其志也。卽辭歸舊隱。成宗十四年。布告國內。搜訪明經行修者。畿使以察訪聞。驛召入對便殿。破達性命之蘊奧。剖析天地日月星辰之度數。纚纚如貫珠。上亹亹不厭。自朝至夕而罷者數日。仍下敎曰。寬義。理學精熟。果副所聞。將欲顯用。自以年老。乞還田里。予嘉其志。賜衣許還。其令所在官。賜米豆。以示予褒奬之意。嗚呼。父子以淸德學術。見重於 019_087d二宗如彼。古今天下有幾人哉。公。察訪之子。通判之孫也。受詩禮於鯉庭。襲淸風於祖考。志存弘毅。學究篤實。餘事文藝。宣陵卽位。別試擧司馬。入學館。儕輩知其大人。遂擢巍科。分屬成均館。例遷至博士。授掌隷院司評。滯案若掃。以選轉兵曹佐郞。秩滿。出佐畿使幕。無疵。改調世子侍講院文學。書筵諷勸。不出文王世子一篇。俄遷兵曹正郞。軍機庶事。皆就其緖。顧念春萱。日迫西山。乞就養。得郡印去。庭闈近割鷄。治暇。往來省問。忠以奉上。孝以事親。公私兩全。苽 019_088a未熟。艱變疊臻。泣血三年。哀禮殫盡。曁服除。敍與司宰監僉正。旋改爲成均館司藝。學生相慶。會諫院闕司諫。選部難其人。奪諸學生而陞置大諫之左。朝議以爲不可師表闕然。學生缺望。於是以司成。再入學。學生復相慶。執經問難於函丈間者。不知其幾。而左酬右答。若決江河。然選法。重在臺諫。不獲已復除執義。卒以劾權貴罷。有命收用。拜司導寺正。時逋逃者。窮竄海島。招納中國邊氓。聚據爲窟。出入洋中。肆行劫掠。蔓延難圖也。奏請天子搜討。制曰可。乃以田霖 爲招討使。副以公以往。人皆危之。公無幾微見於言色。談笑受命。開帆廿日。直擣其穴。不戰而服。盡刷男女若干人以還。燕山主錄其功。特加三資。移拜奉常寺正。明年。超拜弘文館副提學。居無何。入政院。累遷至都承旨。摠統六曹。無招權之謗。擢拜刑曹參判。卽古之小司寇也。貳贊上卿。刑罰得中。未幾。持節嶺南道。觀察七十州。黜陟幽明。遞爲漢城府左尹。五部內。無冤訟。逮燕山主大失君道。禍及搢紳。誅流相續。公亦編管扶安縣。武宗皇帝元年丙寅秋。今上奉 019_088c皇帝詔。入承成宗之統。加恩區內。竄配者悉敍召還。拜公爲大司成。遷戶曹參判。充謝恩副使。入覲天子。東還賞其勞。賜資憲階。超拜判漢城府尹。燕山時枉屈者。繄公是賴。得以自直。愚夫婦無不以手加顙稱賀。乙亥。以七十致仕。不得謝。待以西樞閒職。蓋優老也。公弘中和表。言遜氣溫。內遇親戚。外待交遊。終始一心。未嘗變節。位非不高。而不爲集翕傾動。心非不廉。而亦不爲崖異斬絶。俸祿入門。分其半以周歉。衣裳在笥。出其餘以濟寒。過逢必具酒衣。盡其歡。 019_088d疾病必買藥餌。活其命。其治官守身。又極謹愼。不掛過差。生無招毀。歿無遺怨。豈所謂豈弟君子耶。臨絶。且以淸勤誠信四字。勉其子宗箕。爲家傳靑氈。非有得於平生。能如是乎。柳碩人。郡守孟沂之女。高麗寶文閣提學克愿之後也。舅姑如事父母。夫子如奉賓客。閨梱肅穆。親戚退無一言。不幸早世。有一女一男。女監察姜世矩妻。男卽判官宗箕。司果柳承孫女壻也。公不再聘。側室之出。女一。歸宗室瀛山監信。男一幼。銘曰。
019_089a義州拒綃。淸徹天王。見奬英陵。有煥褒章。栗峯談理。成廟嘉歎。寵貺便蕃。歸來考槃。父子種善。秀發三葉。奕奕京兆。纘戎德業。內植忠厚。外施寬假。納汚海量。無可不可。至執國論。援理證明。操履之篤。學問之精。敭歷卿相。四十六年。光風瀏瀏。霽月娟娟。鮐背黃耇。神仙中人。自少及老。眉不一顰。屬纊一言。丁寧四字。盍入貞珉。遐詔千祀。
嘉靖七年己丑三月。朴某。撰。)』
『한성판윤 문호공 휘 점(諱 坫) 신도비명 한글 전문
광릉 이문호공 (廣陵 李文胡公,
휘점(諱坫)의 자(字)는 숭보(崇報)니 나이 칠십칠(七十七)에 병(炳)으로 돌아가니 가정원년(嘉靖元年) 춘삼월(春三月)이라. 여름 오월(五月)에 이천부(利川府) 서쪽 양악곤향원(陽岳坤向原) 선영(先塋)곁에 장사(葬事)하고 유명(遺命)으로 그 정부인(貞夫人) 류씨(柳氏)의 묘(墓)를 함평(含窆)하니 예문(禮文)을 따른 것이다. 장후(葬後) 육년(六年)만에 그 아들 공주판관(公州判官) 종기(宗箕)가 나를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선공(先公)께서 돌아가심에 그 덕행(德行)을 나타내는 것을 대략 갖추어서 묘지명(墓誌銘)이 있어 능곡(陵谷)의 변천(變遷)을 예비(豫備)하고 태상(太常)의 시호(諡號)가 있어 불몰(不沒)의 실적을 나타내었으나 다만 신도미명(神道碑銘)이 없으므로 여러 번 한원(翰苑)의 대가(大家)들에게 청(請)하였으나 지금까지 듯을 이루지 못하고 감(敢)히 마음으로 통(通)하는 분의 뒤를 받아 나타내 고저 한다.』하고 말이 심(甚)히 간절하거늘 허락(許諾)하였으나 남(南)쪽으로 오게 됨에 공문서(公文書)가 한결같이 밀려서 잠시 여가도 없이 두 해를 넘긴지라 다시 사람을 보내 삼백여리(三百餘里)를 와서 재촉하니 어찌 글 못한다고서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동국사(東國史)를 살펴보건대 삼국말(三國末)에 호걸(豪傑)들이 각각 땅을 웅거하여 군장(君長)이 되어 한 지방(地方)을 호령(號令)하다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이를 통합(統合)함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나누어서 그 사람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조(李朝)에서 혁명(革命)하여 그 제도에 의(依)하니 그 후예(後裔)들이 문무(文武)로서 출신(出身)하여 장상(將相)에 오른 사람이 왕왕(往往)이 있으니 공(公)의 집이 가히 증거가 된다. 처음에 광이(廣李) 휘(諱) 지(知)가 있었는데 향공(鄕貢:進仕)로 통적(通籍)하여 구분죽사부(九分竹使符)로 몸가짐을 염간(廉簡)히 하고 임지(任地)로 가매 청백(淸白)하다고 일컬었다. 의주판관(義州判官)이 됨에 중국(中國)사람이 뇌물을 두터이 하여 장사를 밀행(密行)하려 하였으나 공(公)은 홀로 받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上官)에 누(累)가 될까 하여 감(敢)히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조정(朝廷)에서 그 상황(狀況)을 알고 조사한 결과 판관 이모(李某)는 비단 열 필(匹)을 물리쳤다하니 그 청절(淸節)이 조정(朝廷)에 드러남이 이 같은 고(故)로 세종(世宗)께서 포창(襃彰)하여 의복(衣服)을 하사(下賜)하고 그 뇌물을 받은 자들은 죄(罪)주고 공(公)에 대해서는 정려(旌閭)로써 특별히 표(表)하니 탐부(貪夫)가 족(足)히 청렴(淸廉)해 지더라. 그러나 공(公)은 물러가기에 과단성이 있어 비록 한위(韓魏)의 부(富)를 당(當)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놀랍지 않게 여기고 수석(水石)에 노닐고 나물밥을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었다. 그 아들 관의(寬義)는 학(學)을 쌓고 문장(文章)을 해서 영릉조(英陵朝)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학문(學問)이 날로 나아갔으니 마침내 급제(及第)하지 못함에 때를 만나지 못함을 알고 좋은 그릇을 품고 황야(荒野)에 은거하여 정주(程朱)의 학문(學問)을 닦고 공맹(孔孟)의 연원(淵源)을 탐구(探究)하여 성리(性理)의 원리를 연마하고 사장(詞章)의 누습(陋習)을 벗어나 숙연(肅然)한 일실(一室)에서 책 가운데 성인(聖人)을 날로 대하니 배우고저 하는 자(者)가 문하(門下)에 모여들었고 공경(公卿)들은 유일(遺逸)로서 천거(薦擧)하여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삼았으나 그 뜻이 아니므로 즉시 사양하고 옛 집으로 돌아왔다. 성종(成宗) 십사년(十四年)에 국내(國內)에 널리 알려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行實)이 높은 자(者)를 찾음에 경기감사(京畿監司)가 공으로써 들리니 역마(驛馬)로 불러서 편전(便殿)에 입대(入對)케 하니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강명(講明)하고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의 도수(度數)를 분석(分析)하여 구슬을 꿴 듯이 하니 상(上)이 듣기를 즐겨하여 아침부터 저녁가지 이른지가 수일(數日)이 되었다. 인하여 상(上)이 하교왈(下交曰) 관의(寬義)는 이학(理學)이 정숙(精熟)하다더니 과연 듣는 바와 같도다 하고 장차 현용(顯用)하고 저 하였으나 스스로 늙었다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옷을 주어 돌아감을 허락(許諾)하고 그 고을 원으로 하여금 미두(米豆)를 주어서 왕(王)의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으니 아! 부자(父子)가 청덕학술(淸德學術)로 두 조정(朝廷)에 중(重)히 보임이 이 같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몇 사람이 되겠는가? 공(公)은 찰방(察訪)의 자(子)요 통판(通判)의 손(孫)이라. 리(鯉): 孔子의 子 정(庭)의 시례(詩禮)를 듣고 청풍(淸風)은 조부(祖父)로 부터 이어받아 뜻은 넓고 씩씩한데 두고 학(學)은 독실(篤實)히 연구(硏究)하고 문예(文藝)는 여사(餘事)로 엮었다. 선릉이 즉위(卽位)함에 별시 사마시(別試 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학관(學館)에 들어감에 동료들이 큰 인물(人物)로 알았다. 이어 대과(大科)에 올라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어 예(例)의 박사(博士)로 옮기고 장례원(掌豫院)의 사평(司評)이 되어 체류(滯留)된 안건(案件)을 모두 처리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전임되었다가 경기감사(京畿監史)의 보좌관(輔佐官)으로 나가 막내(幕內)에 잘못됨이 없었고 세자시강(世子侍講)으로 옮겨 서연(書筵)에서 풍자(諷刺)해서 권(勸)함이 문왕세자(文王世子) 일편(一篇)에 벗어나지 않았고 조금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서 군기서(軍器庶)로 옮겨서 매듭짓고 늙으신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군(郡)으로부터 집 가까운 곳으로 가서 다스리는 여가(餘暇)에 집에 왕래(往來)하며 부모(父母)를 성문(省問)하고 충성(忠誠)으로 임금을 받들고 효도(孝道)로 어버이를 섬겨 공(公)과 사(私)가 다 온전함을 얻었도다. 임기(任期)가 차기 전에 부모상(父母喪)을 연거푸 당하여 삼년(三年)동안 애례(哀禮)를 다하고 다시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이 되고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옮기니 학생(學生)들이 서로 경사(慶事)롭게 생각하였고 조금 있다 사간원(司諫院)에 사간(司諫)이 결원(缺員)되어 좌사간(左司諫)으로 승치(陞致)함에 조의(朝議)가 사석(師席)이 궐(闕)함이 불가(不可)하다 하여 다시 사성(司成)으로 돌아가게 하니 학생(學生)들이 다시 좋아하여 책을 잡고 어려움을 묻는 자(者)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는데 좌수우답(左酬右答)하기를 강하(江河)를 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의(執義)로 제수(除授) 되어 마침내 권귀(權貴)를 탄핵(彈劾)하다가 파직(罷職)되고 후에 다시 사도사정(司導寺正)을 배(拜)하니 때에 죄(罪)를 짓고 도망하는 무리가 해도(海島)에 숨어 살며 중국 변방 백성을 불러들여 굴을 만들어 은거하며 바다 가운데를 출입(出入)하며 급탈행위를 자행함에 이를 제압하기가 어려운지라 명(明)나라에 상주(上奏)하여 토벌키를 청(請)하니 옳다 하고 전림(田霖)으로 초례사(招禮使)를 삼고 공(公)으로 부사(副使)를 삼아서 가게 함에 사람들이 다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公)은 조금도 언색(言色)에 나타내지 아니하고 묻는 말로 명(命)을 받고 배를 타고 이십일(二十日)만에 그 굴을 두드려서 싸우지 않고 항복(降服)을 받아 남녀(男女) 약간인(若干人)을 다 돌려보냈다. 연산주(燕山主)가 그 공(功)을 록(錄)하여 삼품계자(三品階資)를 내리고 옮겨서 봉상사정(奉常寺正)에 배(拜)하였다. 다음 해에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배(拜)하고 조금 후 정원(政院)에 들어가 여러 번 옮겨 도승지가 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형벌(刑罰)을 밝게 하고 얼마 후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로 나가 잘 다스렸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옮겨 오부내(五部內)에 원통한 송사(訟事)가 없었다. 연산주(燕山主)가 군도(君道)를 크게 잃어버림에 화(禍)가 진신(縉紳)들에게 미쳐 죽이고 귀양 보냄이 서로 이어짐에 공(公)도 또한 부안현(扶安縣)으로 귀양 갔었다.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함에 공(公)을 대사성(大司成)으로 배(拜)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옮겨서 부사(副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오니 그 노고(老苦)를 상(賞)하여 자헌(資憲)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배(拜)하였다. 연산주(燕山主)때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에 대해 공(公)이 힘써 봐준 것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을해(乙亥)에 나이 칠십(七十)으로 치사(致仕)함에 서추한직(西樞閑職)을 내리니 대개 늙음을 우대(優待)함이었다. 공(公)이 속은 넓고 겉은 화(和)하고 말은 온순하고 기운은 온화하고 안으로 친척(親戚)을 대우(待遇)하고 밖으로 교유(交遊)할 때 종시 일심(一心)으로 하고 일찍 변절(變節)이 없었고 위(位)가 높지 않음이 아니었지만은 함부로 경동하지 않으며 마음이 청렴(淸廉)치 않음이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냉정(冷情)하지 않았으며 봉록(俸祿)이 문에 들어오면 그 반절(半切)을 나눠 급한 사람을 돌봐주고 옷이 상자에 있으면 그 남는 것을 추운 사람에게 주고 만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주식(酒食)을 갖추어 그 즐거움을 다하고 병(炳)이 있으면 반드시 약(藥)을 사서 그 명(命)을 살려 주고 벼슬을 다스리고 몸을 지킴에 근신함을 다하여 조그마한 과차(過差)도 없었으므로 살아서 나무라는 사람이 없고 죽어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 이른바 깨끗한 군자(君子)이었다. 죽음에 다 달아 청근성신(淸勤誠信) 네 글자로 그 아들 종기(宗箕)에게 이르기를 가전(家傳) 유훈을 삼으라 하였으니 평일(平日)에 얻은 것이 없고서야 어찌 이 같이 하였겠는가? 유석인(柳碩人)은 군수(郡守) 맹기(孟沂)의 여(女)이니 고려보문각대제학 (高麗寶文閣大提學) 극서(克恕) 후손(後孫)이다. 구고(舅姑)를 부모(父母)와 같이 섬기고 부군(夫君)을 빈객(賓客)같이 받들므로 집안이 화목하고 친척이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불행이 조사(早死)하였고 일여일남(一女一男)이 있으니 여(女)는 감찰(監察) 강세구(姜世矩)에게 가고 남(男)은 판관(判官) 종기(宗箕)이니 사과(司果) 류승손(柳承孫)의 여서(女婿)이다. 공(公)이 재취(再娶)를 아니하고 측실(側室)의 출생 일녀(一女)가 있으니 종실영산감. 신(宗室瀛山監. 信)에게 가다. 남일(男一)은 어리다. 명(銘)하여 왈(曰) 의주(義州)에서 비단 물리쳐 청백(淸白)함이 천왕(天王)에 미쳤고 세종(世宗)의 총애(寵愛)있어 빛나는 포장(襃章)내렸네. 율봉(栗峰)이 이치(理致) 논(論)함에 성종(成宗)께서 가탄(嘉歎)하고 총애(寵愛)해서 편양(便養)하게 하였으나 귀래(歸來)하여 산수(山水)에 놀았네. 부자(父子)가 선(善)을 닦아 삼엽(三葉)이 빼어나고 한성판윤(漢城判尹) 배명(拜命)하여 혁혁한 덕업(德業)이뤘네. 안으로 충후(忠厚)하고 밖으로 너그럽고 바다 같은 아량(雅量)으로 모든 것을 포용(抱容)했네. 국론(國論)을 잡을 때는 원리(原理)로 증명(證明)하고 조이(操履)가 돈독하고 학문(學問)이 정숙(精熟)하였네 경상(卿相)을 역임(歷任)한지 사십육(四十六)이라. 빛나는 바람같이 맑게 게인 달같이 밝고 밝아 대구고령(大耈高齡)으로 신선중(神仙中)의 한 사람이라. 젊어서 늙을 때가지 눈 찌푸림 없었고 운명할 때 한 말씀은 사자(四字) 정령하네 모든 사적(事績) 돌에 새겨 오는 천년 알리노라.
訥齊 朴祥撰
成均生員 安士後書
宗孫 世桓 謹竪
이를 제시하였다
박상의 문호공 신도비명은 후세 유인들이 찬사한 명문으로, 여기에 우리 광이의 연원이 기록된 것으로
즉『 삼가 동국사(東國史)를 살펴보건대 삼국말(三國末)에 호걸(豪傑)들이 각각 땅을 웅거하여 군장(君長)이 되어 한 지방(地方)을 호령(號令)하다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이를 통합(統合)함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나누어서 그 사람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조(李朝)에서 혁명(革命)하여 그 제도에 의(依)하니 그 후예(後裔)들이 문무(文武)로서 출신(出身)하여 장상(將相)에 오른 사람이 왕왕(往往)이 있으니 공(公)의 집이 가히 증거가 된다.,謹按東國史。三國之季。豪傑蠭起。各據土地爲君長。號令一方。高麗太祖統合。分屬州府郡縣。吏其人。及本朝改玉。仍其制。其苗裔之以文武出身登將相者。往往而有。於公家世可徵。』 『우리 동국사는 신라 부흥을 외치는 각주현 호족들이 있었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항거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고려태조에 의해 주군현에 통합(복속)되었는데 조선에 이르러
복흥하고 출사하여 문무장상이 배출되었다
(4) 이가 신라백 후예 廣李이자. 즉, 칠원에서 회안으로(각주현) 복속한 것으로 고려조에 항거한 기록과,
그리고 여말과 본조에 이르러 주의 씨족』으로서 大同의 優家로
이어져온 광이의 來歷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는 근거는, 인문지리지인 ≪세종실록≫ 지리지의 姓氏條로,
『성씨 그 자체가 혈연과 지연의 이중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성씨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 초였다.
초기 신라와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지방군주가 호장 호걸로 지역 군주이었고 (이들중 한 무리이었던 우리 자성이족은
後三國과 고려 開國이라는 격심한 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의 변동이 있게된 것이다, 즉, 태조 왕건(王建)과 고려 왕 들이
반도를 재통일한 다음, 당대 실질적인 지배세력(왕건에 자원복속하거나 투항한 지방군주)으로
등장한 새로운 호족을, 각 출신지역별로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地域적·身分的으로 주군현의 새로운 제의(제도)로 임명하고, 再編成된 것이다(그래서 저항한 부족이나
호적들은 강계,이속시킨것이다 조선시대도 반역한 향리는 부로 있다가 갑자기 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래서
後三國시대까지 地方君主인 자성 이족은, 고려 복속을 拒否하고 ,항거하다 고려에 함락된 지라,
이사금 자성이족은
주부군현의 리(호장, 향임, 당임)로 이속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이족의 신분 변천의 역사이다
그러다가 고려中期에 이르러서야
무신정권과 지방 호족들의 발흥으,로 왕중심의 中央集權體制의 약화되고, 그러니,
우리 이족은 다시 회안일대의 호장 등으로 이어 오다가
일부 이족은 출사하기도 하여여, 문무 高관직에 오르기도한 것이다. 이 광이 자성이족은,
이제, 조선의 혁명에 의거, 조선의 율법에 의함으로, 원래되로 환복하였으니
소위 선초의 통판공, 문호공, 3손의 아들 8극과 두신, 우생공 율정공이 아닌가)』,
이것이 박상의 문호공 비문의 해석인 것이다
(5)박상의 廣李歷史論은 김부식의 三國史記와 이후의 高麗史의 내용과 전부 合一 一致하는 사관으로
이 史實은 당시 『박상과 사림과 반가등 중종조에 널이 알려진 우리 廣이의 來歷이다,
어찌 諺傳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하고 율정 석암탄 후들은 동조근원 통일을 주장하고, 이른 것인데
박상은 중종조 이조판서 청백리로 녹선된 人物로, 우리 동고 상공보다 몇대 以前의 분인 것이다
한음이 보았다는 동고相公의 印譜보다. 이미 세종 중종조에 이르러 둔촌공파와 울정공파와 석암탄공파에서는
가승보가 내려져 있다는 證據이고, 廣李가 新羅시대 內史令공의 後孫이라는 것이, 一般化된 視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석탄은 누구인가., 문호공 이점은 누구인가, 눌제는 문호공이 석탄의 현손으로 하고 율정공과 문호공의 이리를 서술하였다
율정은 누구인가.동방에는 性理學이 있고, 성리학의 이기와 일원의 始作은, 율정으로부터 始作한다라고 했으며
死後,김종직 정여창 김일손 이이 이황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사림들의 學論의 의표가 된 선초의 학자가 율정이다,
율정은 시서와 천문 역서 지리에 통달한 사람으로, 당시의 성종까지
이의 머리를 빌릴 정도의 존경받은 사람이고, 後學들(조광조, 이이, 이황 )은 이분을 孔丘에 빗대어 "李子"라 부른 것이다.
이분의 家에는 世傳草譜가 있었고 율정은 천문지리 역사에 정통한 당대의 학자이셨다.
율정공의 이후로 7, 8대 후손들의 벼슬은 변변치 않았는데 이천의 율정공가에 이르러서는
저 李가家 율정공의 후손들이다 할 정도로 당대의 世高 선비들이 찾아와 人事한 곳이 율정공 가이다.
『기록서증.廣陵李石灘諱養中玄孫文胡公諱坫신도비명)
(6) 석암탄공의 손인 세종조 증좌찬성, 고려 사온주부공 휘 우생의 묘지명 기록,
1) 『암탄공 이양중 공의 아들 左贊成 휘 우생(遇生) 公의 <묘지명(墓誌銘)>』에 광주이씨의
상대기록에 대한 계보의 기록을 발견하였었고,
(휘 우생은 고려 사온주부로 증 좌찬성이다. 아버지는 고려 수절신 형조참의 이양중이다
아들이 수철과 석철이고 수철은 1411-1473, 세종조 원종공신, 목사-평안절도사를 지냈다
증 좌찬성 봉 한원군 부인은 양성 이씨 부 관찰사 맹상이다
손자가 손이며, 세종조 문과 좌찬성 정국 공신이다 시호는 문간공이다
총명출천 찰기여신 국가전물 산천도리 섬실구도 일세함칭 기구정덕
신도비명은 용제 이행, 부인은 경주, 부장 계번이고 ,익제 문충공의 6세손이다)
(7) 북백 휘 이의만공가의 기록, 시조 이자성 내사령공 기록,
칠원 자성이족의 기내(광주 여주 철원일대) 설단 팔면비석의 제단 기록
(8) 세종조 통판 휘 이지와 율정공가의 세전초보(가장 오래된 광이족보)
.통판공 지와 율정공의 세전 광릉이씨보
. 휘 인흥은 『8대조 율정공(세종 성종조 온 사림이 추앙한 李子) 생존시 부터 내려운 가승보인
『율정(栗亭)공가 <세전초보(世傳草譜)>를 직접 보여주면서 세첩 첫머리
『신라 내물왕 조의 내사령인 이자성(李自成)은 처음 본관이
칠원(漆原)이다. 五世에 와서 손자 한희(漢希)가 있고 한희에게 아들 방린(防麟)이
있으며, 방린의 아래는 자자자자(子子子子)로, 아들 子 자(字) 네 자[四字]가 쓰여
있고, 그 아래 익비(益庇), 익준(益俊), 익강(益康)의 삼형제가 있다.
익비의 아들은 문(文)이요, 문(文)의 아들은, 름(菻)과 울(蔚) 형제며, 울(蔚)의 아들은
한(漢)과 당(唐) 형제니 당(唐)은 곧 둔촌(遁村)인 원령(元齡)의 아버지이며
한(漢은 생원(生員)인 녹생(祿生)공의 아버지이다."』 라는 족보 두서문의 내용이다 즉,
둔촌에서 부터 위의 익(益) 자까지는 四代에 지나지 아니하고 대수가 명확한 것인 바
적실(的實)한 사실을 근거로 우리 광이의 상대를 통일하고 4파의 합보를 주장하였다, 즉,
문호공의 비문, 우생공의 묘지명, 정곤수 이명징가의 광릉 이씨 선대도, 율정 가승세전보를 제시하며
마땅히 족보에 두서하고 동수하여야 할 것이다 라 주장한 것이다 율정(栗亭)은 성종조의 성리학자로 성종 임금이
율정(栗亭)의 학문이 높은 것을 알고, 선정전(宣政殿)에 재상들을 모이게 하였다, 즉,
『 『參考,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과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우찬성(右贊成) 허종(許琮),·좌참찬(左參贊) 이승소(李承召)·,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파(李坡),·공조 판서(工曹判書) 손순효,(孫舜孝),
동지사(同知事) 이극기(李克基)·,
동지 유진(兪鎭), 대사성(大司成) 노자형(盧自亨)과 승지(承旨)등 조정의 大學유들을 전부 입시(入侍)케 하고,
이관의(李寬義)를 불러 《대학(大學)》·《중용(中庸)》을 임금과 신료들에게 강(講)론하게 하였다.
또 천지의 도수(度數), 일월 성신(日月星辰), 세차(歲差), 역수(曆數)의 일변을 묻자,
율정(栗亭)공이 물음에 따라서 대답하였다 (중종실록기록)
이처럼,율정(栗亭)관의는 젊어서 시·서(詩書)에 통달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정밀하여
한때의 선비가 함께 추앙하는 바가 되었는데, 이때의 나이 75세였다.
성종은 율정(栗亭)(李寬義)에게 유의(횼衣) 두 벌을 하사하고,“그대가 지금 벼슬할 수 있겠는가?”하며
관직 제수 의향을 물으니, 관의가 말하기를,“신이 이제 늙고 병들어서 벼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본도 관찰사(本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여 미두(米豆)를 내려서 권장하게 하였다.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내가 듣건대,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가 이학(理學)을 연구하여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불러서 시험해 물었더니,
논의가 정밀하고 능숙하여 과연 소문과 같으므로 장차 드러나게 기용하여
그 뜻을 위로하고자 하였으나, 관의가 스스로 나이가 많아 일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서 여년(餘年)을 마치고자 하므로, 내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의복을 하사하고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제 흉년으로 생활이 어려울 것이니, 그가 살고 있는 이천(利川) 관청으로
하여금 쌀과 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여 나의 포장(褒奬)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율정(栗亭)에게는 생전과 사후에 따르는 후학이 많았다, 제자로 정여창이 있는데
성종 14년(1483)에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나갔다 그때 어전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의한 스승 이관의를 만나게 되어 제자로 자처하고,
「율정(栗亭)이관의 선생의 운을 따르다」를 시구를 바쳤다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공부는 당대 으뜸이시지만[ 學 究 天 人 冠 一 時]
거친 마을에 지내시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而 居 陋 巷 不 求 知]
성군께서 특별히 부르시어 다스리는 도리를 물으시고 [聖 君 特 召 問 治 道]
이내 산림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받아주셨네[ 因 許 山 林 意 所 之]했다』......... (이상 일두 정여창 문집)
정여창은 첫스승을 율정(栗亭)으로 ,다음은 김종직을 따랐는데 언제나 시원은 율정이었다
율정(栗亭)공을 따르는 후학들이, 대부분 김종직의 사림들로, 후에 김일손 김굉필,이황 이율곡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성리학 대보를 잇게한 것이다 )
(9) 둔촌공 후손가에서 보존 가승된 가장 초보
가.한음이 보았다는 집안내의 언전과 잡기를 말함
나. 또한 당시 둔촌공가의 일부도 내사령공 이후의 상대선대를 선계한 가승보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 내사령공 추존의 문제는, 『1700년 갑진 편수당시에 가장 극렬한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일부 후손들도 찬성한 것이다, 이런 예로 복암가장초보가 있었다
그래서 둔촌공 일부의 후손들과 율석의 휘 인흥과 휘 홍은 동수 간하고,
『율정 후손 휘 인흥과 휘 명련과 석탄공 후손 휘 홍은, 당시 낙하 종가에 모인 경향의 종친들
에게, 간하기를 “『 이번에 간하고자하는 우리 광이 동성보(姓譜)를 상중하 세권으로 나누어서,
매 권 머리에 내사령을 본원 비조(本源鼻祖)라 두서한 뒤, 중절(中絶)된 곳에는 중절이라 쓰고, 이어진 곳에는, 차례 차례
휘(諱)를 이어 써서, 각 파가 문호(門戶)를 일으켜 세운 곳에, 이르러서는 중시조
(中始祖)를 삼는다면(둔촌공파는 둔촌으로 시조를 삼고,
율정공과 석암탄공 십운공등의 파조로 한다)
파는 파의 조로 시조를 삼고, 또한 각자가 이미 추존할 조상이 있으니,
이와 같이 수보(修譜)한다면, 위로는, 본원의 할아버지(내사령공)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목종(睦宗)의 도리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강정을 하니,
『낙하에 모인 종친들의 중론(衆論)이 찬동』하고,그렇다면, 위와 같이,
『광이 합보로 "강정(講定)하자는 뜻"을 모으고 둔촌공파의 교리(校理) 승원(承源) 公도 이뜻에 찬동하여,
세 권의 족보로 합보하자』고 하였었다.
(10) 염현의 기내위치사실(회안 광주 일대)과 지명의 정확성
(11) 염주서씨 서자번과 강주이씨 이지효는 광이의 사돈가라는 사실
시조 이자성의 기록(내외가 8조고도의 우리나라 족보관습, 우리나라 족보는 맨처음 내와가
8조고 또는 외가까지 기록하는 것이 통례 였슴
-그러므로 광이의 사돈가인 이명징 정곤수가의 광주이씨 선대기록 중의
《鹽州徐氏(염주서씨)(延安別號.》
오늘의 이천서씨이다, 이천의 분파이다,
고려때에 始祖(시조)는 自蕃(자번,正朝戶長)으로 전해진다. 이는 이천서씨이다,
서견은 율정의 고모부이고 둔촌의 친구이며, 두문동 72현이다
《이 후손이, 고려말 유명한 학자 서견이다 서씨(徐氏)의 원류는 3부류로 나눈다,
이천(利川)은 아간공(阿干公)을, 부여(扶餘)는 온조왕(溫祚王)을, 달성(達成)은
소윤공(少尹公)을 선조로 삼았다.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기자의 40세손 준(準)이
난을 피해 이천 서하성(徐河城)에서 살았으므로 자손이 그 지명을 취해 성을 서씨(徐氏)라
했으니 이것이 노담(老聃)이 성을 얻은 것과 같고 가장 오래된 일이다.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이 난을 피해
남으로 와서 부여성(扶餘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의 30세 의자왕에 이르러 신라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그 뒤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에서는 부여융의 여(餘)란 글자를 고쳐 서(徐)라는 성을 주었으니
이것이 원백(袁伯)이 성을 전한 것과 같고 가장 근래의 일이다. 달성 서씨(達成 徐氏)의
선조는 고려 말에 일어났다.
광이의 족보에 나타난 염주 서씨는 무엇인가,
(이천의 유래를 상고하면, 원래 기외에세 살았는데 효양산의 서목이 왕건을
이천에서 도와주어 이천을 세거지로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 서신일(徐神逸)이 교외에 살 때 사슴이
집으로 들어오자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하며
“그 사슴은 바로 내 아들인데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 서신일이 나이 80세에 서필(徐弼)을 낳았고,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1] 고려 말기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이천부(利川府)는 고구려 때의 읍호(邑號)이며 멸오(滅烏) 또는 황무(荒武)라고도 한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켜서 군주부(軍主簿)를 두었으며
경덕왕 때 한천(漢川)이라고 고쳤다. 그 뒤 935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태조를 인도해 복하(福河)의큰 물을 이롭게 건넜다하여 이천(利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로되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염주는 고구려 때는 동음홀(冬音忽),
신라 때는 해고군(海皐郡)이었는데,
고려 전기에 염주였다 주군현의 체제에서 개성을 포함하는 큰곳이다 1217년(고종 4)영응현(永膺縣)으로 바꾸었다.이 지역은 예성강(禮成江)을 사이에 두고 개성과 마주보는 지역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931년(경순왕 5) 견훤(甄萱)이 부하 일길(一吉)에게 수군을 보내어 예성강에 들어가 3일간 머무르며 고려의 백주(白州)·염주·
진주(眞州)의 배 100여척을 불사르게 하였다. 또한, 몽고군이 이곳에 오래 주둔하였고, 홍건적의 난 때는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염주의 지명유래는 성(城) 또는 평야 지역에 우뚝 솟은 산이라는 데에서 나왔다. )
에서 보듯이 《염주서씨는, 오늘날의 이천徐씨로.》 서신일의 分派 一族이며, 염주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황해도의 연안 경기인근을 말한다, 고려조에 이르러 대부분 이천에 살았고, 先代 傳說에 이천강의 유래가 있어서 이천서씨로 한다.
(조선 세종시에 이천서씨) 여기서 우리가 요찰할 것이, 新羅-後三國, 高麗, 朝鮮에 이르는 貫鄕의 變遷, 즉 정향 이속에 變遷에서 항상 上古族譜史를 분석하여야 한다.
高麗시에 서신일 후손등은 全部 신라말 고려 왕건의 건국에 일조하여, 고려의 태후에 봉한 직위를 지냈다,
그래서 서희 등을 알수가 있다, 대부분 염주 일대에 살았다. 염주는 당시에 연안, 開城, 黃海, 京畿 北이고
서신일 등 유력 後先들은 이천에 世居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조가 망한 뒤, 조선이 개국된 뒤에, 이천은 그대로 새로운 제도에 의하여도 서씨의 貫鄕(세종실록지리지)이 되었으나 ,조선 개국을 반대한 자들은
스스로 염주를 시원으로 한 것이다, 서자번은 고려말경(?.고증이 필요함)의 사람인데 그래서 염주서씨의 시조로 칭하고 있으나 ,
기실 이천인이다. 염주는 등급이 格下되어 염현이 되고, 이 염현은, 이천부 또는 광주일대, 또는 예성강의 일대 또는
황해안의 지명으로 추측이 된다, 조선 개국에 반대한 두문동 72현의 율정공의 고무부 서견은 利川人이나 기실 염주인이다.
..보존된 《통판공 諱 이지의 기록과 율정의 세전초보, 諱 인흥의 을사보 내용
그리고 諱 우생공의 묘지석, 정곤수 이명징 가의 광이 선대도, 諱 휴징과 필행의 선세사적, 문호공 비문》등은
三國時代와 後三國시대, 高麗초기, 高麗말, 朝鮮초기의 氏族集團의 社會生活史와
신앙, 당시의 지방세력을 연구하는 자료로 고려 시대와 신라 시대부터 시조를 하고 내려온 동국 만성들의
고전 기록과 함께, 우리나라 원삼국등, 고대사회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신라 金의 후손 인자라 신라 위주로 썼고, 그래서 사기의 내용 중에 틀린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史家에서는 오히려 三國유사. 고대부터 姓氏를 이룬 성씨보를 많이 참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율정가의 上古部分은 중요한 史料이다.》
(12) 복암가 소장의 가장초보기록
(13) 승지공의 선대 묘지석 기록, 패천동 선묘에서 발견한
묘지석 기록에는 ""한희로 부터 생원공에 이르기까지 신, 한, 방귀의 관직과
가문의 계통을 기록한 묘지석,
(14) 諱휴징 휘 필행의 先世 史蹟 기록(광주이씨 대종회에서 1970년 편간, 광이세적으로 통합)
--함음상공이 경술보를 찬할때 둔촌공가에 내려온 언전과 기록들(호송산 전설외 15가지)
--우리 광이의 내력은,신라 성백으로 내려오다가 경순왕의 고려 항복에 동의하지 않고,
절의를 높이고 항거하니
고려태조가 성을 함락 시키고 지위를 강계하여 회안으로 강계 이속하였다(문호공 비문 정향이속과 일치)
-기타 광주유수와 생원공 이야기, 호송산 전설, 석탄공일화, 고덕동전설. 둔굴.국청사우물.최사간, 광쥬유수와 인화이씨,
생원공 휘 이당의 조입정언설, 오자구등과 전설. 인화이씨묘발견기.연화기. 둔촌의 시문.
(15) 칠원이족의 畿內 이속 후의 八面석비등 祭壇설단, 祭祀기록과 선조들의 風俗
(후삼국 고려초기의 우리민족의 풍속과 일치)
(16) 율정가 세전초보의 史料的 가치, 대부분 학자들 성씨족보학 상으로 가치인정
-삼국유사가 正史인 삼국사기보다 당시의 時代相을 잘보여준 사료인 것과 같이
-율정공가의 유전된 사실의 기록 또한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통설
특히 족보등의 상고 사실은 전기에 의한것이 각문파의 통설임.
(15) 신라 內史令의 이자성과 內史令 기록, 보서연구가및 상고사 성씨학자들 대부분 가치인정
-상고시대의 신라 성읍국가와 24개 연맹의 구성
-이소지왕의 명문발견
-신라 초기 사회연구
-內史令의 관직은 내물왕대부터 진평왕시까지 內史라는 官廳이 있었다, 이차돈의 일대기나 신라고문에
관한 사료등에 왕을 근접 조칙을 행하고 국사를 관리하는 부서이다
-니사금의 전어이다라는 설이 있다. 신라초기 지방호족장의 칭호가 이사금인데
이가금 이사군이 관직의 명으로 내사령이다라는 설
(16) 분황사지 發興과 팔면석비등의 記錄, 사료적 가치인정
--신라말 호국불교
--신라말 사찰, 민간 신앙
(17) 율정공의 學問과 位相
-율정은 朝鮮初期 세종-성종祖의 大유이다, 이의 學問과 理機론과 天文과 地理와 역서와 약사와
통의는 조선내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못하는 만큼, 박학다식의 학자다,
90평생 학문에 몰두한 분이다
당대, 정여창 손순효등등등 후에 사림의 始頭들이된 朝廷名臣들이 모두 스승으로 모신 분이다
王이 공의 학문이 높아서, 어전에 모든 신료들이 모이게 한 다음에, 事說에 대한 경연을 부탁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공의 家門에 先考 통판공부터 전해오는 世傳譜가 있었고, 율정이 다시 필사한 것이
인흥의 율정가 세전초보가 아닌가, 율정공이 만든 광릉이씨 譜가 거짓일 수가 있겠는가,
공은, 누구보다도 우리 광이의 내력, 칠원의 이족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전해들었을 것이다
멀리 신라 호족의 후예임을, 공의 작적으로 보아 당대 광주이씨의 모든 인물보다도, 우리 광이의 근원, 시조, 이속, 내력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세전초보를 무시한다 함은, 율정공의 성종 임금앞의 위상과 학문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닌가, 율정은 누구인가 공구를 후세의 제자들이 공자라고 불렀다, 율정의 이관의는 후세의 학자들이 이자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사림에서 孔丘(孔子)를 얼마나 신성시하였는가, 大邱가 원래는 大丘인데, 丘가 孔子의 함자하고 같다하여 邱라고 지명을 개칭한 朝鮮이 아닌가,
박상이 율정의 后 문호공 비문을 스스로 讚한 것은, 當代 율정의 偉業을
이미 알기 때문 아닌가,
아래는 조선초 유명한 상신 눌제 박상이 찬한 율정공의 아들 문호공 이점의 신도비명에서 율정공 내용입니다
이것을 읽노라면 율정공의 학문과 위상을
우러러 뵈올수 있습니다. 눌제 박상이 찬한 비명을 부인한다면, 도대체 어느것을 인정한다는 것인지요,
................
그 아들 관의(寬義)는
학(學)을 쌓고 문장(文章)을 해서 영릉조(英陵朝)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학문(學問)이 날로 나아갔으니 마침내 급제(及第)하지 못함에 때를 만나지 못함을 알고
좋은 그릇을 품고 황야(荒野)에 은거하여
정주(程朱)의 학문(學問)을 닦고
공맹(孔孟)의 연원(淵源)을 탐구(探究)하여
성리(性理)의 원리를 연마하고
사장(詞章)의 누습(陋習)을 벗어나 숙연(肅然)한 일실(一室)에서
책 가운데 성인(聖人)을 날로 대하니
배우고저 하는 자(者)가 문하(門下)에 모여들었고
공경(公卿)들은 유일(遺逸)로서 천거(薦擧)하여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삼았으나
그 뜻이 아니므로 즉시 사양하고 옛 집으로 돌아왔다.
성종(成宗) 십사년(十四年)에 국내(國內)에 널리 알려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行實)이 높은 자(者)를 찾음에
경기감사(京畿監司)가 공으로써 들리니 역마(驛馬)로 불러서 편전(便殿)에 입대(入對)케 하니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강명(講明)하고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의 도수(度數)를 분석(分析)하여
구슬을 꿴 듯이 하니
상(上)이 듣기를 즐겨하여 아침부터 저녁가지 이른지가 수일(數日)이 되었다.
인하여 상(上)이 하교왈(下交曰) 관의(寬義)는 이학(理學)이 정숙(精熟)하다더니
과연 듣는 바와 같도다 하고
장차 현용(顯用)하고 저 하였으나 스스로 늙었다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옷을 주어 돌아감을 허락(許諾)하고
그 고을 원으로 하여금 미두(米豆)를 주어서 왕(王)의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으니
아! 부자(父子)가 청덕학술(淸德學術)로 두 조정(朝廷)에 중(重)히 보임이 이 같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몇 사람이 되겠는가?
(18) 조선조 1630년대 간행한, 씨족원류고 <광주이씨조> 기록
-조선중기 임진왜란으로 각지의 관향에 의거된 만성의 성씨보들이 불타없어지고
사적이 곤비하하므로 하자 조종운은 자신의 조씨가 족보를 만들면서 만성의
씨족원류(성씨의 원류.시원)를 밝히는 자료수즙 편수를 시작하였으니,
1600년대이다, 조중운은 각성의 족보를 직접보고, 기록하여
편간한 것이 오늘날 傳해오는 氏族原流考로 광이 始祖는 李自成이고
다음은 諱 군린 諱 용수로 나왔다,
-그렇다면 1600년 당시 廣州李氏의 根源 原流 始祖가 이자성으로 이미, 기록이 존재하였다는
이치이다.또한 시조 이자성으로 하는, 광릉이씨세승보들을, 1600년 당대에 어느 집인가
보존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19) 둔촌공가의 동공상공 때의 인보, 한음이 어렸을때, 대부거소에서 보았다는 인보
(20) 둔촌공파의 한음의 경술보 해석
--경술 당시는 任辰亂이 끝난지 몇 해라, 나라가 어수선하고 整備가 되지않는 때이고
임진란 當時까지는 세보가 있었는데, 불에 타고 없어진지라 族譜 保存 必要性이 있었으므로 하여
당시는, 석탄 암탄 율정공파 후손들에게는 수단의 통문을 하지 않고,
둔촌공가 후손들 집의 가승보와 세적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집안의 족들이 가져온 자료를 보니(이이만가와 싱지공의 가승보), 상대가 고려이속된 이족의 후예로,
석암탄 율정공가가 방친 임이 맞으나,.
--그러나 거명된 계보의 대수와 이름의 명자가 불명하니, 전의 구정한다.
--그래서 우리 광이 동성보는 둔촌부터 시작한다,
(21) 석탄공 암탄공 율정공 3파의 조선조 1720년대 간행, 을사보 해석
-전승된 가승및 족보로 오래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 고려통판 이지부터 전래된 율정공작성 율정공가 세전초보를 근거로
-내사령공 시조 이자성 휘 군린 휘용수로 이어져오다
- 둔촌공파 휘하원이 합보를 거부하자
3파 합동의 동성보(현존 기록)
<廣陵李氏族譜 乙巳譜 序文 광릉이씨족보서(廣陵李氏族譜序)
내가 모든 뫼를 보니 조종산(祖宗山)이 있고, 모든 물을 보니 그 본연 (本然)의 근원(根源)이 있는바,
뫼를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조종산을 말하고, 물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 본연(本然)의 근원(根源)을 말한다.
뫼와 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세대(世代)가 있는 자에게
가히 근본(根本)인 조상이 없으랴.
오로지 우리 선계(先系)는 신라(新羅) 때부터 있었으니,
내물왕 조(奈勿王朝)에 내사령(內史令)公이 바로 시조(始祖)이시다.
연대가 오래되어 세계(世系)가 비록 절손됨이 있으나,
公이 신라 때에 벼슬이 높았고, 이에 후세 자손들이 계속해서
전해가며 외어서 천 년 전의 조상이 있으니, 이로서 세첩(世牒)이 있는 것이리라.
무릇 우리 姓氏로서 세첩(世牒)이 없는 者라면, 들으면 즐거워하고 보았다면
감동하여 모두들 조상으로 받들어 보첩 첫머리에 기록하고,
모든 자손들을 통합해 기록해서 백대(百代)토록 친목하는 것이
옳거늘, 대수(代數)가 멀다고 해서 홀로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정녕 무슨 마음인가?
내가 다투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서 사파(四派) 일가들과
더불어 내사령(內史令)公을 시조로 모시고 삼가 세보(世譜)를 만들어
인쇄하여 전하고 져 하니, 이 족보에 참여한 자는 어찌 마음으로 본받음이 없으랴.
내사령(內史令) 公 이후로 비록 멀기는 하나 동일한 혈맥이라
돈목(敦睦)하지 아니하면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 할 수 없으니, 부디 힘 쓸 지어라.
모든 一家들은 같은 뿌리임을 생각해서 이제 다시 친하고 정의(情義)있게 지내면서
양신가절(良辰佳節)에 가끔 종친들이 한 장소에 원만하게 모여서
대대로 돈후(敦厚)한 풍습을 이어감으로써 합보(合譜)한 정의를
저버리지 아니 한다면 심히 다행한 일이다 할 것이다.
숭정 기원 후(崇禎紀元後) 乙巳 四月에, 栗亭公 八代孫 인흥(仁興)
- 대부분 족보학및 서지학자들, 전공 교수들이 인정한 족보
-시조는 서라벌 신라 내물왕조의 내사령공 이자성이다, 호족장이다
-신라말 어지러운 난세에 호족으로서 지방을 분점 다스리다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자 이에 반대하고 절의를 높이고 항거하였다
-고려가 군대를 동원 성을 함락하다
-살아남은자들은 조상을 기리고 제사를 지냈다
-고려는 성을 함락하고 우리 광주이속의 신분을 정향이속하였다.
--휘군린 휘 용수이고 어느해부터는 휘 한희 휘 방린 다시 광릉의 삼익으로 생원공 휘한, 휘당
휘 방귀로 사대명휘이며 이분들의 손이 율정공, 둔촌공, 십운공, 석탄공, 암탄공이다
(22) 둔촌공파의 갑진보의 해석
((중략...그 후 고조고 찬성공께서 이어 편차하시고 한음상공께서
서하였는 바, 생원공 이상 사대명휘가
언전잡기에서 처음 나왔고 명문의
가거할 만한 것이 없는 고로, 권말에 기록하고 그 각파자손도 부기하여 본보와 구별하였으니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경술보가 이것이다.
거슬러 경술까지는 거의 백 여 년이 되어 세대는 멀어지고 자손은 번성하니
보첩의 개수가 시기로 보아서 합당하다 하겠다.
지난 신미년에 선왕고께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각파단목을 수합하여
첨삭 보증하여 벌로함이 없었고 두루 방주를 달고 외손까지 목록하였으니
예규는 문란스럽지 않고 생략도 적당하여 드디어 상중하 삼권으로 나누어서
초본이 정해지자 왕조께서 하세하시고 그 책은 族叔父(족숙부)참판공에게
돌려져 시기를 보아 인출하려 하였던 바 말기에 참판공께서 또 별세하시니
상자 속에 넣어둔 지 또 몇 년이 지났다.얼마 전에 北伯公(북백공)이 참판공의 동생으로 변경을 관찰하게
됨을 구공판사(공구를 모으고 일을 처리함) 할 만하고 판결군은 참판공의 아들로 명민정근하여 실
제 교정 소임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이에 임초양본(인은 경술보, 초는 중수할 초본)에 의거하여 자못 증책과 거치가 있었다.
별거 자손을 기록치 못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빠지기 때문이요, 사대명휘를 그대로 등재하였음은
마땅히 신중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합보지설을 배척함에 있어서 사의가 명정하고 변의지서를 만듦에 있어서
원고가 상세하게 하면서 몇 달이 못되어 편찬과 각판을 마치니 ..... ))
--석율암 3파가 합보를 요구하면서 가져온 사료를 가지고, 한음 상공 당시의 전의 구정의 뜻에 따라
명함을 해하였으나, 명에 이르지 못한다(합보지설을 배척함에 있어서 사의가 명정하고 변의지서를 만듦에 있어서 ..
중략. 갑진보 서문)
. 시조 이자성 또한 오늘 처음 본다, 상대의 선계들이 의구하므로
둔촌을 시조로하는 광이 동성보를 만든다, 휘인흥의 석율암 3파가 비조 이자성과 합보 이유를
간하는 통문과 석율암의 을사보에 부당을 논하므로,변설을 부기하고 이를 밝힌다.
--둔촌을 시조로한다.
--단독의 갑진보로 편수 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