斗溪의 본관 牛峰(우봉)은 지금 황해도 金川(김천).
고려 명종 때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李公靖(이공정)이 이곳에 터를 잡아
牛峰 李씨의 시조가 됐다.
조선 숙종 때 이조-형조판서를 지낸
農齋(농재) 李翊(이익)의 후손이 번성해 농재공파를 이루었는데,
斗溪는 시조로부터 25世, 농재로부터 10世孫이다.
개화집안 출신의 부인에게 자극받아 新學問에 입문
斗溪의 가문은 서울 근교 수색에서 살다가 충남 보령으로 이주, 6代를 거주했으며
증조부(李鎬貞) 때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왔는데,
斗溪는 1896년 그곳에서 충청수군절도사(軍營소재지ㆍ충남 보령)를 지낸
李鳳九와 나주 金씨 사이의 5남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斗溪의 맏형 丙默(아들 宰寧의 부인이 尹潽善 前 대통령의 누이 尹桂卿)은
고종 때 영천군수와 승지,
둘째형 丙薰(閔復基 前 대법원장의 부인 李寅男의 부친)은 구한말 副尉(부위ㆍ지금의 중위)였다.
셋째형 丙熙(아호 農泉, 사위가 李載瑞 前 성균관장)는 명필로 이름났고,
넷째형 丙烈(사위가 李載瑞 前 성균관장)은 李王職(이왕직)의 예절을 맡아보는 典祀(전사)벼슬을 지냈다.
누이동생은 尹致暎 前 공화당 의장서리의 부인. 前 잠사연구소장 宰寧,
尹潽善 前 대통령비서관 宅寧, 前 은행연합회부회장 定寧 등이 조카요,
前 문화부 장관 李御寧, 화가 李逸寧은 재종질(7촌)이다.
先代와 형들이 벼슬을 지낸 家風에 따라 전통적 한문 공부를 하던 斗溪는
15세 때 1년 연상인 趙南淑(1895~1967)과의 결혼을 계기로 신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부인은 구한말 육군 參將(지금의 준장, 또는 소장)을 지낸 趙性根(조성근)의 딸.
趙性根은 斗溪의 맏형 丙默의 친구였다고 한다.
斗溪의 부친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한 1907년,
콜레라의 창궐로 많은 희생이 따르자, 率家(솔가)하여 서울에 정착했다.
그 해에 작고한 부친의 뒤를 이어 家長이 된 맏형 丙默은 趙씨댁에 斗溪의 청혼을 했다.
신부집에서는 신부감이 일찍이 신식학교를 다녀
內外(여자가 외간 남자와 대면을 피하는 것)를 아니하고,
얼굴을 가리지 않고 혼자서 행길을 다니니 신랑댁의 가풍에 맞겠느냐는 이유를 들어
처음엔 거절했다고 한다.
이는 開化 가문 출신인 신부가 承旨댁으로 불리던 전통적 신랑집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부 趙南淑은 신여성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金一葉(김일엽), 羅蕙錫(나혜석), 李光洙의 부인 許英肅(허영숙) 등과 진명여고 동기로서,
미국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워 간단한 회화까지 가능했다고 한다.
趙南淑은 전통적 婦德을 갖춘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남편을 신학문에 입문토록 자극했고, 자녀들을 학문에 정진토록 독려했다.
하버드大 박사과정에 있던 막내아들(本寧)을 만나러 미국에 간 趙南淑은
국내에 있는 자녀들에게 「하버드 대학 도서관은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더라.
너희들도 더욱 열심히 연구에 정진하라」는 편지를 보내 면학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비록 대학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斗溪가 쓴 논문을 먼저 읽어보고 어색한 부분을 推敲(퇴고)할 만큼 문장실력과
지적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金玄玉 서울시장 때 자녀들을 잘 키운 공으로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고려大 校友회장 9년 지내
구식 교육밖에 받지 못했던 斗溪는 부인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보광학교, 중동학교 졸업 후, 개인강습소를 찾아다니며 일본어 등 기초과목을 공부하여
보성전문학교(고려대 前身ㆍ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있었으며 당시는 야간) 법과에 입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려대는 斗溪가 同校 출신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斗溪는 1957년 고려대 교우회장에 피선된 이래 1966년까지 4選을 기록했으며,
1986년에는 許政, 李元淳과 함께 「자랑스러운 高大人」으로 뽑혀 상패와 기념품을 받는다.
보성전문을 나왔으나,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심해졌다.
한문 공부를 하며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斗溪는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단신으로 東京行, 고학의 길을 떠났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伯兄은 크게 노여워했으나,
마침내 막내 아우의 향학열을 이해하고 등록금을 대줬다고 한다.
斗溪는 校外강의록을 1년간 공부한 일도 있고,
學風이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와세다大에 들어가기 위해 각 수험 과목별로 학원에 다니며
실력을 쌓은 결과, 고등예과를 거쳐 문학부(사학과 및 사회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학제는 전문부와 학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의 교양과정부 格인 고등예과에 합격하기란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와세다大 동창으로는
3년 선배 張德秀(동아일보 부사장, 한민당 정치부장, 광복 후 암살당함),
2년 선배 崔斗善(前 국무총리), 申翼熙(前 국회의장),
1년 선배 玄相允(前 고려대 총장, 6ㆍ25 때 납북), 金輿濟 등이 있었다.
李光洙는 동기였다.
와세다大에서 서양사를 전공할 계획이던 斗溪가 한국사로 전환한 것은
당시 「일본의 국보」라고 일컫던
吉田東伍(요시다 도고ㆍ16권짜리 「大日本 地名辭典」의 저자) 교수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그가 와세다大에 입학한 후 처음 읽은 책이 吉田이 24세 때 썼다는 「日韓古史斷」이었다.
그 책을 읽고
「일본인도 한국의 역사에 대해 이처럼 정통한데, 한국인으로서 한국 역사를 몰라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문예잡지 「廢墟」의 同人으로 활동
관련 참고문헌이 없어서 고생했으나,
1919년 대학 졸업논문으로 「高句麗 對隋ㆍ唐抗爭史硏究」를 쓸 수 있었다.
3학년 때 1년간 배운 津田左右吉(쓰다 죠오기치) 와세다大 교수와
그의 친구인 東京大 池內宏(이케우치 히로시) 교수의 도움이 컸다.
「조선왕조실록」도 처음으로 池內 교수의 집에서 보았다고 한다.
특히 池內 교수는 한문 실력이 출중한 斗溪를 몹시 사랑했다.
훗날의 얘기지만 斗溪는 30代 후반의 나이에 순한문 논문인
「資料韓國儒學史草稿(자료한국유학사초고)」를 완성했고,
이어 「成硏經齋與其學術述略(성연경재여기학술술약)」(1938년 일본 稻葉 박사 환력 기념논총),
韓國儒學史上學術的論爭一段(한국유학사상 학술적 논쟁 일단ㆍ香港
「儒學在世界論文集」 1939년) 등 순한문 논문을 발표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 은사가 중학교 교사로 추천해 주겠다고 했지만,
대학 2년 선배인 崔斗善(육당 崔南善의 아우)의 요청으로 중앙학교 교원이 되어
역사, 지리, 영어를 가르쳤다.
斗溪는 영어실력도 뛰어났다.
일본에서는 중학교 5년간 영어를 배우도록 돼 있었다.
斗溪는 대학입시를 위해 겨우 1년간 영어강습소를 다니며 배운 만큼 기초가 약했다.
그러나 대학 4년간 크게 실력이 늘었다.
고등예과 때는 영문소설, 영문학개론, 영문법, 영어회화, 철학개론, 논리학 등을
원서로 공부했으며, 학부 3년간 1주일에 네 시간씩 영어강독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에머슨, 칼라일, 워즈워드, 번즈, 바이런, 일리아드-오딧세이 등을 읽었다는 것.
이때 익힌 실력으로 국제회의의 사회도 보고
미국인과의 회화도 어렵지 않게 했다는 것이 주위 제자들의 증언이다.
자신이 배운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원서강독을 많이 시켰다고 한다.
제자인 許興植 정신문화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대학 때 국사특강을 들었는데,
교재가 데니의 「中韓論(Denny, China & Korea)」이었으며,
斗溪의 영어 발음과 해석이 정확하고 해박해서 놀랐다고 한다.
자녀들은 斗溪가 작고하기 직전까지 영국 BBC방송을 듣고 받아쓰기를 했으며,
회화 테이프를 들을 정도로 끊임없이 외국어 공부를 즐겼다고 증언한다.
斗溪는 대학 때 제2외국어로 독일어, 프랑스어를 택해 원서 강독 실력을 갖추었다.
중앙학교 교사생활 중 특기할 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同人誌(동인지) 「廢墟」에 참여한 일이다.
1920년 7월 창간호를 낸 「廢墟」의 동인은
金億, 南宮璧, 黃錫禹, 李赫老, 金永煥, 羅蕙錫, 閔泰瑗, 金瓚永, 廉想涉, 吳相淳, 金元周,
斗溪 등이었으며 후에 卞榮魯가 추가로 참여, 13명이 됐다.
보통 「廢墟」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를 풍미한
허무주의 풍조를 상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한다.
독일 시인 실러의 詩句
『옛것은 없어지고 시대는 변하였다. 새 생명은 폐허로부터 솟아온다』
에서 따온 진취적인 의미라는 것.
史料 보기 위해 「朝鮮史編修會」 無給 촉탁으로 근무
斗溪의 교사생활은 길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산하에 「朝鮮史編修會」를 만들자,
東京大의 池內宏 교수는 학문을 연구하려면 編修會에서 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추천해 왔다.
斗溪도 일본인들만이 독점하던 규장각 史料 등을 섭렵하기 위해
이 권유에 따라 1925년부터 4년간 朝鮮史編修會의 촉탁으로 있었다.
이 경력 때문에 훗날 「植民史觀(식민사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때 접한 방대한 사료와 문헌 등에 대한 지식은
평생의 資産(자산)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植民史觀」이라는 단어는 斗溪의 제자인 李基白 前 서강대 교수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李교수는
『일본 학자들이 韓民族의 독립심을 말살하기 위해 열등의식을 불어넣을 목적으로
역사를 조작한 것을 지적한 것』이라면서
『古典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일부 젊은 사학도와 일반국민들이 斗溪를,
植民史觀을 가진 親日학자로 오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다산 丁若鏞이 지은 「我邦彊域考」에
漢四郡(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比定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산이 식민사관을 가진 親日학자냐』고 반문했다.
斗溪는
朝鮮史編修會에 無給촉탁으로 있으면서 日帝의 월급을 한푼도 받지 않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요시찰인으로 지목됐다.
관할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말단 순사에게 창피를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斗溪는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을 확신하고 일가 친척들의 창씨 종용에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斗溪 자녀들에 따르면 斗溪는
일본에서 생화학, 농화학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던 아들들이 방학 때 집에 오면
우리나라가 독립할 경우, 설립할 대학의 人的 조직에 대해 父子간에 진지한 논의를 하곤 했다고 한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 학술지에 논문 발표
朝鮮史編修會에 있으면서 斗溪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東京大 중심의 학술지 「史學雜誌」와 「東洋學報」에 「妙淸의 西京遷都運動」을 비롯,
「眞番郡考」, 「玄郡及臨屯郡考」 등의 논문을 잇달아 낸다.
한사군 관련 논문은 대부분 종래의 학설을 뒤집는 내용이어서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東洋學報」는 일본 학자도 아무나 논문을 내지 못하는 최고권위의 학술지였으나,
斗溪는 池內宏 교수를 통하여 논문을 발표, 필명을 떨쳤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李崇寧 박사는
『당시 국어학자들은 철자법, 표준어 제정에 시간을 뺏겨 논문 쓸 여가가 없었다.
내가 斗溪의 논문을 보고 국어학계는(斗溪의 논문같이 수준 높은 논문을 쓰려면)
어림도 없다고 했다』고
斗溪 死後 나온 「歷史家의 遺香」이라는 斗溪 추모 문집에서 회고하고 있다.
斗溪는 1977년 펴낸 「韓國古代史硏究」를 이때부터 착수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우리 고대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으나
한국 사람은 아무도 얘기 못 하는 데 대한 일종의 의분심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펜을 들고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朝鮮史編修會 생활은 짧았지만, 斗溪에게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일본인들이 朝鮮史編修會를 만들고 「靑丘學叢」이다,
「朝鮮學報(今西龍 주관)」 같은 학술지를 냈다.
거기에 자극받아 1934년 李允宰, 李熙昇, 趙潤濟, 李秉岐, 宋錫夏, 李相佰, 孫晉泰, 金庠基
등과 함께 역사연구 학술단체인 「震檀學會」를 창립,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논문집 震檀學報를 발간케 된 것이다.
崔南善, 李能和, 李重華, 安自山, 文一平, 黃義敦 등은 찬조회원이 되었다.
일반 잡지조차 대개 창간호나 2호 정도를 내고 마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으나,
斗溪는 私財(사재)를 털어가며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震檀學會가 해산되기까지 14호까지 발간해 일본인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學報를 내는 데 찬조금을 낸 사람들이 尹致昊, 崔奎東, 金性洙-金秊洙 형제, 尹潽善 등이었다.
「震檀」이라는 이름은 황국사관에 젖어 있는 일본 사학자들과 대항하기 위해
우리 고유의 국명인 震(東方이라는 뜻)과 檀君의 檀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학문은 냉엄·정확하고 과학적이어야』
在野사학자들은 斗溪가 마치 檀君의 존재를 부인한 것처럼 비난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았다.
학회의 이름을 震檀學會라고 명명한 것부터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훗날 李恒寧과 제자 李喜秀 등의 요청으로 檀君을 숭앙하는 顯正會(현정회)의 이사 취임을 승낙했다.
斗溪는 檀君의 실존을 확신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어떻게 실증하느냐에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91세 때인 1986년 10월9일자 朝鮮日報에 발표한 「檀君의 歷史的 實存」은 그같은 고심의 결과다.
斗溪는 그 논문에서 「三國遺事」가 참고한 문헌 가운데 지금은 없어진
「古記」, 「舊三國史記」, 현존 「魏書」, 또 하나의 「魏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斗溪는 재야사학자들의 근거 없는 주장은 철저히 무시했다.
그는 『학문은 냉엄, 정확, 과학적이어야 한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역사에 따스한 정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침소봉대하여 존재하지도 않은 사실을 과장되게 기록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 분명한 태도를 밝혔다.
이같은 태도로 인해 斗溪史學을 민족혼이 빠진 史學이라고 비판하는 측도 없지 않다.
이에 대해 金載元 前 국립박물관장은 생전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인으로 한국사의 명맥을 살려온 분들이 우리나라 애국지사였다.
짓밟힌 한국 문화를 살리기 위해 그 바탕이 될 한국 역사를 연구했으니,
安在鴻, 申采浩, 鄭寅普 같은 분이 「애국지사 역사가」였다.
이와 달리, 과학적 방법으로 역사학을 발전시켜 온 것이 震檀學會와 그 핵심인 斗溪였다.
李丙燾 사학을 비판하는 측도 없지 않다.
그러나 斗溪는 한국사의 문헌비판에 있어서 확실치 않은 것은 부정해 버림으로써
한국사를 왜곡하던 일본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헌이
믿기 어려우면 그것이 왜 믿기 어려운지,
그 本源을 찾아 그 문헌의 복원에까지 이름으로써 우리 역사의 근간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에 대한 비판은 그러한 깊은 蘊蓄(온축)과 참된 경지를 了解(요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2세 때 「韓國儒學史」 완성
斗溪 자신도 1977년에 펴낸 「韓國古代史硏究」 自序(자서)를 통해
『간혹 세간에서는 鄙說(비설:자신의 학설을 겸손하게 표현한 말)에 대해
반대를 시도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는 받아들일 수 없다.
반론, 반박에는 그럴 듯한 충분한 논거와 이론이 서야 한다.
더욱이 史學徒로서는 고전에 대한 심각한 검토와 냉엄한 분석비판을 결여해서는 아니된다.
고전의 기록이라고 해서 철두철미 그대로 信從(신종)하려 하거나,
주관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도의 태도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8ㆍ15 광복과 함께 斗溪는 震檀學會를 부활시키고,
美軍政의 요청을 받아 2세들에게 국어·국사 교육을 시킬 「임시중등교원양성소」를 개설,
6개월간 속성으로 교원을 배출하는 한편,
우리말로 된 최초의 역사책 「國史敎本」을 편찬, 보급함으로써 日帝에 의해 단절됐던
국사교육의 脈(맥)을 이었다.
이때 양성된 교원들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2세들에게 국사와 국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白樂濬, 趙潤濟, 兪鎭午와 함께 美 군정청의 지명을 받아
서울대학교 교수진용을 짜는 멤버로 참여, 서울대 문리대를 창설하는 주역을 맡았다.
광복 이후, 斗溪의 학문은 滿開했다. 저서는 모두 광복 이후에 나왔고,
논문 100여 편 가운데 26편만 광복 전일 뿐, 나머지는 모두 광복 후에 쏟아졌다.
논문의 경우, 80세 이후에 나온 것만도 10여 편이나 되고 91세 때
「韓國儒學史略」, 92세 때 「韓國儒學史」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早老하는
후학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저서 가운데
「韓國歷史大觀(한국역사대관)」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어로 번역돼 있다.
특히 左派 지식인들이 唯物사학적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자료를 전단하여 짜맞춘 것을
바로잡은 것은 큰 업적이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소련은 북한 쪽 사료는 완전히 무시하고
斗溪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많은 학자들이 인용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人 문화비평가 티코노프(한국명 박노자)에 따르면
모스크바大의 한국학 전공학자 미하일 朴 교수 같은 이는
삼국사기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斗溪의 譯注(역주)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할 정도로 높이 평가한다는 것.
미국 역사학회가 동양인에게 한 자리 할애하는 명예회원으로
중국의 胡適 박사에 이어 두 번째로 斗溪를 선정한 것과
명예박사 학위를 남발하지 않는 프린스턴大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
브라질 학술원이 명예회장으로 모신 것 등은
斗溪를 학자로서 높이 평가했다는 객관적 증거다.
1988년 나온 共著는 절대 인정 안 해
창작 못지않게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譯注도 중요한 작업이었다.
두 책은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譯注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만큼 방대한 분량이고,
우리 古代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 가옥·복식 등 일상생활사에 이르기까지
각 방면에 두루 정통해야 함은 물론,
중국과 일본 古典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斗溪는 독자적인 노력으로 일제시대부터 착수, 1977년까지 이를 완성했다.
개인의 창조적인 구상을 중시하여 학술지에 수록한 것 외에는
논문을 묶어서 책의 형태로 내는 일이 없었다.
共著(공저)와 編著(편저)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88년에 共著로 나온 영문판 역사서에 대해
斗溪는 生前 이를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斗溪의 3남 李泰寧 박사는 전한다.
자신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용 한 번 보여주지 않고 그런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斗溪의 업적 가운데 우리 文化史上 무척 중대한 사실인데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 하나 있다.
서울대 奎章閣(규장각)과 서울대 도서관에 있던 수십만 권의 장서와
국립박물관의 유물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킨 일이다.
斗溪는 당시 서울대 도서관장이었다.
9ㆍ28 수복 때, 학교에 돌아온 斗溪는 이 장서들을 인민군들이 실어가려고
포장까지 끝마쳐 놓은 사실을 알게 됐다.
1ㆍ4 후퇴 때 斗溪는 이 민족유산을 그냥 두었다가는 北에 빼앗길 위험이 있다고 판단,
핸더슨 문정관을 통해 주한 미국 대사와 8군사령관을 설득, 화차 20량을 얻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큰 배려였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던 白樂濬과 斗溪가 서울역에서 직접 짐을 실었다고 한다.
장서를 싣고도 남은 부분에는 金載元 국립박물관장의 요청으로
박물관 所藏(소장) 유물을 실었다.
이 보물들을 싣고 대전에 도착했다.
당시 대전지구 위수사령관이 斗溪의 제자 李형석 장군이었다.
6ㆍ25가 발발하기 전, 육사출신 장교들 가운데 대학원에 진학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李장군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李장군은 트럭 세 대를 서울로 보내 斗溪 부인과 개인 장서를 실어오자고 제안했다.
斗溪는 사적인 일에 트럭을 쓸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이때 옮겨진 규장각 도서와 국립박물관 유물들은 부산창고에 보관되고,
그후 박물관 문화재들은 경주박물관으로 移送됐다가 還都 몇 년 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朴正熙의 한글專用을 비판
1965년에 결성한 「민족문화추진회」도 기록에 남을 업적이다.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 전승하기 위해 漢籍(한적)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절실했으나
漢文(한문)에 정통한 전통적 유학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던 무렵이었다.
金鍾泌 당시 공화당 의장의 주선으로 학계, 예술계 원로 50명이 「民推」를 발족,
회장에 朴鍾和, 부회장에 李丙燾, 崔鉉培를 뽑고 漢籍을 번역시킬 棟梁 교육에 나섰다.
成樂熏, 河性在, 趙國元, 曺圭喆, 辛鎬烈 등 노령의 유학자들을 여기에 참여시켜,
고전국역사업과 함께 후계자 수업을 맡겼다.
고전국역후원회(회장 宋志英)도 결성됐고,
훗날 盧信永 당시 총리의 도움으로 종로구 구기동에 자체 건물도 마련했다.
斗溪는 「민족문화추진회」에 깊은 애착을 가져 작고 직전까지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斗溪는 본래 성품이 부드러웠으나, 학문에 관해서는 칼날 같았고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참지 못했다.
한글專用을 시도하던 朴正熙 前 대통령을 바로 코앞에서 비판한 일,
「광화문」 한글 간판을 卑下한 일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朴正熙 前 대통령은 斗溪의 비판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기분 나빠 했다고 한다.
그는 대체로 군인들과 사이가 나빴다.
5ㆍ16 후, 5공화국 이후, 두 번 다 정권 담당자들과 틀어졌다.
특히 1981년에는 학술원 조직개편이 뒤따라 1962년부터 20년 가까이
재임하던 학술원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까지 있었다.
예외적으로 인문과학, 예술에 이해가 깊던 金鍾泌만은
학술원 청사 마련, 기금 조성 등을 도와 명예회원으로 추대받았다고 한다.
斗溪는 딱 한 번 學界 이외의 일로 외도했다.
1960년 4ㆍ19 학생의거로 李承晩 前 대통령이 하야하고 許政 과도정부가 수립된 후였다.
문교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許政의 간청이 있었다.
許政은 보성전문학교 동기였다.
이를 수락하며 차관에 李恒寧 고려대 교수, 고등교육국장에 金曾漢 서울대 법대 교수,
편수국장에 全海宗 서강대 교수, 문화국장에 金恩雨 이화여대 교수,
과학교육국장에 崔相嶪 서울대 문리대 교수, 사회교육국장에 趙炳郁 서울사대 교수 등을 발탁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학에 대한 문교부의 학사 간섭을 배제시켰고,
대학 총-학장을 교수회의에서 뽑도록 학원민주화를 단행했다.
斗溪는 회갑 이후, 10년마다 한 번씩 수필집을 냈다. 회갑 때 「斗溪雜筆」,
칠순 때 「내가 본 어제와 오늘」, 팔순 때 「斗室餘滴」, 구순 때 「成己集」이다.
여기서 斗溪는 우리 국민성의 장단점을 분석했다.
학자 많이 배출한 집안이 최고의 양반
그는 한민족의 장점은 농경민족으로서 평화를 사랑하고 문화와 교육을 중시하며,
불의·부정에 대한 저항정신이 강한 점이라고 했다.
왕조시대의 혁명, 민란, 반란, 일제 때 독립운동, 4ㆍ19 혁명 등으로 저항정신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교육에 관해서는 고려시대 때 거란의 포로로 붙잡혀 만주 한구석에 살면서도
글방(학교)을 설립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고,
구한말 이후 북간도로 피난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학교의 건설이었으며,
6ㆍ25 전쟁 중에도 천막을 치고 학교를 운영한 것은 세계사에 드문 일이라고 평했다.
충효사상은 역사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 고유의 사상체계라고 보았다.
중국 문화가 들어와 글자로 표현된 것일 뿐,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점으로는 겉치레를 좋아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체면치레, 옷치레, 집치레, 車치레 등이 모두 겉치레를 좋아하는 민족성의 단면이라고 했다.
斗溪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훈은 「惜福(석복)」. 福을 아낀다는 뜻이다.
福이 찾아왔을 때, 분수에 맞게 아끼어 오래도록 소중하게 가꾸어 감이 惜福이며,
惜福의 노력으로써 생긴 복의 餘分을 남에게 베풀어 줌이 「兼福(겸복)」이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비단 대님 한번 차본 일이 없고, 눈이 부셔서 하얀 쌀밥만 어떻게 먹냐며
잡곡밥만 먹었다고 한다.
제자들에 따르면 겨울에도 불을 넣지 않은 냉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공부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조선조는 학자를 우러러보는 사회였다.
名家(명가)의 요건은 학자를 얼마나 배출했느냐에 따라 좌우됐다.
文廟(문묘ㆍ공자묘)에 배향된 학자가 있으면 최고였고, 대제학과 문과 급제자를 많이 낼수록 명문가로 꼽았다.
斗溪는 자신이 大學者이면서,
아들 5형제를 모두 명문대에 보내 각 분야의 최고봉에 오르게 했으며,
딸·며느리·손자·외손자까지 합쳐 30여 명의 대학교수, 박사·의사 등을 배출했다.
조선식 전통대로라면 학자를 많이 배출한 斗溪의 집안은
우리나라 최고의 名家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녀들은 모두 자연과학 전공
자손들의 특징은 대부분 이공계를 택했다는 점이다.
자손들은 斗溪가 역사학자로서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를 받는 것을 보고 자란데다,
斗溪가 평소 『나라가 발전하려면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자녀들에게 강조해 온 데
따른 것이다.
농화학을 전공한 외숙 趙伯顯(작고ㆍ일본 九州大, 농화학박사, 서울대 명예교수)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장남 基寧(1913~2002)은 경성제대 의전을 졸업한 후 경성제대 의화학 교실,
일본 나가사키의과대학에서 연구했다.
1945년 부친 斗溪와 함께 서울대(의대) 교수로 임용됐다.
1979년 정년퇴직했으며 명예교수로 추대됐다.
퇴직 후인 1980~1989년 영남대 생화학과교수, 유전자공학연구소장을 겸했다.
1956년부터 10년간, 1968년부터 2년간 대한생화학학회 회장을 지냈다.
의사 자격을 갖고도 개업하지 않고 평생 생화학자로 일관했다.
특히 유전공학의 기초가 되는 核酸(핵산) 연구의 선각자.
1952년 프랑스로 유학, 1956년 소르본느 대학에서 국가가 주는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술원 회원, 프랑스 국가문화훈장, 과학기술상, 국민훈장 동백장 受勳. 「생화학」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基寧의 부인 牟壽美(76)는 숙명여대를 나와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원에서 영양학 석사,
서울대에서 영양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가정대 교수로 정년퇴직,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基寧의 장남 英茂(61)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버클리大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캘리포니아大 교수 겸 단백질구조연구소장으로 근무 중이다.
그의 부인 姜日熙(60)는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로,
미국 캘리포니아州 데이비스 의대 병원의 소아과 외래교수를 거쳐 현재는 개업 중이다.
증손자도 미국의 의사·대학교수
基寧의 차남 雄茂(58)도 서울대 화학과 출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大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 화학과 교수.
雄茂의 부인 金美英(53ㆍ미국 메릴랜드大, 대학원 식품영양학 석사,
미국 국방성 여성ㆍ유아 영양상담사)은 金雄洙 前 6군단장(예비역 육군소장)의 딸.
金雄洙는 육사교장이던 매부 姜英勳(예비역 육군중장ㆍ前 국무총리)과 함께
5ㆍ16에 반대했다가 구속된 후, 풀려나 미국 가톨릭大로 유학,
워싱턴大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톨릭大 교수로 있다가 한때 충남 논산 건양대 교수로 귀국했는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둘 사이엔 英慧(25ㆍ미국 메릴랜드大 영문과 졸업, 대학원 재학 중),
秀本(22ㆍ미국 메릴랜드大 사학과 졸업, AFP 워싱턴지국 근무) 등 2녀가 있다.
基寧의 고명딸 寅惠(65)는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유학,
미국 와이오밍주립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켄터키 주립大 분자생물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寅惠의 부군 池泰和(64)도 생화학자. 경기高를 수석졸업하고 서울대 동물학과에 들어갔다.
캘리포니아大 샌디에이고 분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켄터키 주립大 화학과 교수로 봉직 중이다.
이들은 1남1녀를 뒀는데, 아들 한리(34)도 미국 최고의 의과대학이라는
존스홉킨스大를 나와 현재 스탠포드 의과대학 교수로 있으며,
딸 지은은 스와모스大 출신으로 펜실베이니아大 경영대학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MBA를 획득, 곧바로 마이크로소프트社의 부장으로 특채됐다.
斗溪의 차남 春寧(86)은 일본 九州大 농화학과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농학자.
미국 조지타운大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6년 서울농대 교수로 부임, 학장을 지냈고 1982년 정년퇴직한 후 명예교수로 추대됐다.
학술원회원, 농화학회장, 한국콩연구회장 등을 역임했다.
「유기화학」, 「생화학」, 「쌀과 문화」 등 저서가 있고,
이 중 「농업기술사」는 역저로 꼽힌다. 국민훈장동백장, 월봉저작상을 받았다.
부인 任玉淳(78)과 사이에 2남1녀를 뒀다.
春寧의 장인 任明宰(작고ㆍ경성의전)는 일제시대 경성의전(서울의대 前身) 교수와
서울시 의사회장, 수도육군병원 내과과장, 大韓醫協 회장을 역임한 의학계의 원로였다.
斗溪와 斗溪의 중형인 서예가 丙熙와 가까운 벗이었다.
春寧의 처남 任正淳(작고ㆍ경성의전)도 서울의대 교수였다.
아들이 없는 斗溪의 바로 위 형 丙烈에게 出系했다.
3男은 팔만대장경 보존 책임연구원
春寧의 장남 長茂(57)는 서울공대에서 기계공학 전공.
미국 아이오와 주립大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공대학장을 지냈다. 현재는 평교수.
부인 李玉姬(서울대)와 사이에 英範(홍익대 재학 중), 德範(고려대 재학 중) 등
아들 둘이 있다.
春寧의 차남 健茂(55)는 서울대에서 고고인류학과를 나왔다.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다.
春寧의 고명딸 英珠(숙명여대 사회과학 도서관 관장. 숙대 강사),
夫南哲(외국어대, 정치학 박사, 영산대 조교수) 부부는 獨子 贊用을 뒀다.
斗溪의 3남 泰寧(78)은 서울대 화학과 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부터 1989년까지 33년간 서울사대 화학교육과 교수로 봉직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국제문화재보존센터(로마 ICCROM) 이사,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과학적 보존을 위한 연구를 주관했으며
한국문화재 보존과학회 초대 회장. 금성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 석류장, 동백장 受勳, 대한민국 학술원상 수상. 斗溪기념사업을 구상 중.
전매청 염삼국장을 지낸 權寧一(일본 중앙대)의 딸 權夏子(70ㆍ이화여대 약학과)와 결혼,
슬하에 독자 涇茂(45ㆍ서울대 의대, 충북대 의대 재활의학과 부교수),
장녀 美京(46ㆍ서울대 농화학과, 농화학박사, 연초인삼중앙연구소 연구원),
차녀 宣卿(43ㆍ서울대 음대, 미국 보스턴大 음악연주학 박사, 국민대 예술대 음악과 조교수),
3녀 希卿(42ㆍ이화여대. 서울대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영국 런던大 문학박사)이 있다.
希卿은 특히 중국 고전에 해박, 중국-한국의 儒佛 관련 미술사를 전공했다.
斗溪의 4남 東寧(75)은 실험 물리학계의 세계적 학자.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영국 런던大에서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미국 가톨릭大 교수를 거쳐, 포항공대 교수 겸
포항전자광연구소장을 지냈다.
포항공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 은퇴 후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3ㆍ1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육군 통신소위로 임관한 東寧은 6ㆍ25가 발발하자
당시 孫元一 해군참모총장에게 차출돼 육군에서 해군으로 전속,
진해통제부사령부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이유는 해군장교 한 사람으로부터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는 일본 학자를 확보했다』는 제보를 받은
孫제독이 원자탄의 폭발원리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東寧의 강의를 듣고 그 제보가 엉터리임을 알게 된 孫제독은 무척 아쉬워하더라는 것.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전자가속기 만들다
전쟁 후, 해군의 주선으로 영국 런던 퀸메리大에 유학, 핵물리학을 전공케 됐는데,
대학 측은 東寧의 친가, 외가, 처가의 3代까지 신원조회를 의뢰하더라는 것.
런던에서는 서울대 졸업 학력을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東寧의 실력이 출중한 것을 보고 東寧 이후,
서울대 출신 유학생부터는 학력을 인정, 별도의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대학졸업 자격을 인정했다고 한다.
1959년 귀국한 그는 국방과학연구소, 원자력연구소, 서울대 교수를 거쳐 渡美,
미국에서 해군연구소 연구원, 가톨릭大 교수 등을 지냈다.
특히 美 해군연구소에서 재직하는 동안, X선 레이저를 개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작고한 金浩吉 前 포항공대 학장의 간청으로 25년간의 미국 연구생활을 마치고
포항공대 설립에 참여, 가속기연구소장을 역임하며 고온 고밀도 플라즈마,
X선 레이저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의 지도 아래 세계 2위의 규모에 해당하는 전자가속기(싱크로트론)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국방부 장관을 지낸 金用雨의 딸 金美姬(63)와 결혼, 2남1녀를 뒀다.
金用雨는 스포츠맨으로 유명했다.
민의원, 주영대사, 국방부 장관을 거쳐 閔寬植 후임으로 대한체육회장을 맡았고,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다.
東寧의 장남 明茂(41ㆍ미국 밴더빌트大 화학과, 노스웨스턴大 의과대, 美군의관 공군 소령 제대)는
로스앤젤레스 카이저병원 피부과 과장으로 있고,
부인은 주재엽 변호사의 딸 朱馨善(미국 인디아나大 법대, 미국 변호사)이다.
차남 振茂(39ㆍ미국 예일大, 코넬大 대학원 및 의과대, 이학박사)는 워싱턴大
의과대 신경과 조교수이며,
그의 부인 武優秋(무유투ㆍ38ㆍ미국 MIT공대, 코넬大 의대)도 워싱턴大 의대 방사선과
조교수. 부인은 越南人으로 코넬大에서 만나 연애결혼했다.
고명딸 恩奎(1960~2000)는 미국 메릴랜드大 의과대를 나와 캘리포니아大 의대 신경과
부교수로 재직하던 중 病死했다.
남편 데이비드는 보스턴에서 컴퓨터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斗溪의 5남 本寧(66)은 서울대 문리대 2년 때 50대 1의 경쟁을 뚫고
문교부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渡美, 명문으로 꼽히는 다트머스大를 나왔다.
하버드大 물리학박사. 박사학위를 받을 때 지도교수 2명이 모두 노벨상 수상자였는데,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라 이해 못 할 정도였다는 일화를 남겼다.
분자물리학과 세포생물학에 밝아, 듀폴大 물리학과 교수 및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 교수를 지냈다.
최근 정년퇴직. 부인 李瑜漢(서울대 생물학과. 미국 마이애미大 식품영양학 석사)과 사이에 2남을 뒀다.
本寧의 장남 啓茂(40)는 미국 MIT공대를 나와, 시카고大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이스大 조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연방중앙은행 경제연구소 연구원.
그의 부인은 무카치조이아(39)라는 印度人인데, 미국 라이스大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차남 道茂(38)는 하버드大를 졸업하고 MIT공대에서 생물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칼텍工大 연구원. 공부와 결혼했다고 선언한 독신주의자.
이 두 형제는 모두 수학실력이 뛰어나 중학생 때 영재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수학 과목만 대학원 하기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화가 張旭鎭, 朴正熙 주치의 閔獻基가 사위
斗溪의 장녀 舜卿(82)은 화가 겸 조각가 張旭鎭 화백(작고ㆍ일본제국미술학교)과 결혼,
1남4녀를 뒀다. 張화백은 1938년 朝鮮日報 주최 한국학생미전에서 입선,
화가로의 길을 걸었다.
서울미대 교수, 국전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90년 작고한 뒤 최근까지 추모전, 명품전 등이 잇달았다.
張旭鎭 장남 正淳(60)은 서울대 동물학과를 나온 후, 일본에 유학, 소화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하대 의대 생화학교실 교수로 있다. 부인 羅明子(이화여대).
張旭鎭의 장녀 경수(이화여대)는 李秉根(서울대 국문과) 서울대 교수와 결혼했다.
張旭鎭의 차녀 희순(서울여대)은 李圭德(서울의대, 소아과의원 개업, 현재 의료평가원 심사관)과 혼인했다.
張旭鎭의 3녀 혜수(이화여대)는 중국에서 사업하는 金益成(연세대)과 결혼, 4녀 윤미(이화여대)는 玄知勳(성균관대, 부산에서 사업 중. 玄承勳 화승그룹 회장의 아우)과 결혼.
斗溪의 차녀 雲卿(71)은 서울여의전을 나온 서울대 의대 의학박사.
한국병원 부원장으로 있으며, 존타아시아지구 총재를 맡은 바 있다.
남편 閔獻基 박사(74ㆍ한국병원 고문)는 서울의대에서 내분비 내과를 전공했다.
1961년부터 30여 년 서울대 교수로 봉직하는 동안 10년간 朴正熙 前 대통령의 주치의(1970~1979)를 맡았다.
국민훈장 모란장 受勳. 아들만 둘인데,
장남 庚楫(44ㆍ서울공대)은 뉴욕 주립大 공학박사며 현재 LG화학 기술전략담당부장.
차남 庚柱(41ㆍ한국외국어대, 미국 피츠버그大 MBA)는 최근 IBM부장에서 SK로 자리를 옮겼다
斗溪의 3녀 承姬(64ㆍ한성대)는 林鍾豆斗(성균관大)와 혼인, 아들 永植(41ㆍ인하대ㆍ두산중공업 차장),
永相(30ㆍ한경대ㆍ용인농협 근무), 딸 영왜(37ㆍ중앙대 의대, 아주대 의대 임상화학과 조교수)·崔臣煥(중앙大 의대ㆍ내과의사), 딸 영열(35ㆍ펜실베이니아大 대학원 법학박사, 메트로폴리탄 주립大 조교수) 등 2남2녀를 뒀다.
斗溪의 4녀 永姬·吳炯鎭 부부는 수연(33ㆍ단국大 의대 박사과정)·李豊碩(충북대 대학원), 유연(30ㆍ미국 미시간 거주ㆍ영양사)·임봉섭(32ㆍ영양사) 자매를 뒀다.
斗溪의 5녀 季姬(서울대 심리학과)·黃天鳳(서울대 정치학과) 부부는 아들 유진(33·조지워싱턴大 의과대,
뉴욕시에서 피부과 의사 개업), 딸 성원(34·버클리, 조지타운大 법과 졸업, 변호사, 샌프란시스코 로펌 근무)을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