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흥선대원군은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의 아버지이자 영조의 혈손으로 아버지는 남연군, 부인은 자신보다 2살 더 많은 여흥부대부인 민씨... 흥선대원군과는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인물...며느리 명성황후까지...
흥선대원군을 스쳐간 인물들도 엄청 많다.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금 학계에서도 아직 미스테리라면 미스테리로 서로 찬반으로 나뉘어 한쪽은 대단한 인물, 다른 한 쪽은 그저 쇄국정책에 목숨을 건 인물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글 훨씬 전에서 jenny누님께서 명성황후는 재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반면,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을 토로하신 바 있다.
내 생각도 솔직히 그렇다.
흥선대원군을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로는 1973년 MBC 사극 민비, 1982년 KBS 사극 풍운, 1990년 MBC 조선왕조 500년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대원군" 편, 1996년
KBS 찬란한 여명에서 방영한 사극에서, 마지막으로 2001년 KBS특별기획드라마 명성황후에서 흥선대원군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뮤지컬에서도 말이다...^^
조선의 오랜 정책은 쇄국정책이었다. 마치 흥선대원군이 발단한 것처럼...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텐데, 흥선대원군은 조선시대가 선대에 펴왔던 정책을 이롭게 펴왔을 뿐이다. 아들인 고종이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12세, 이때 흥선대원군의 나이는 44세였다. 이후 10년간 흥선대원군이 편 정책은 제법 훌륭한 것이었다.
먼저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려서 국가재정을 어렵게 하고 농민을 괴롭히던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또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서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했고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했다. 마지막으로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런 정치는 어지러워진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가재정을 늘리고 백성들의 기대에도
어느정도 부응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부 양반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경복궁 공사만 해도 거의 국가의 재정과 맞먹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조선왕실의 위엄을 올리는데는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허나 흥선대원군의 정치에는 한계가 있었던것 만큼은 분명하다. 아들이 20살이 되도 전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와 갈등이 시작된 것은 1868년 영보당 이씨가 완화군을 출산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1871년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화파이자 명성황후의 일문인 민씨친족을 자기 곁에 대거 등용 시키자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화가 났을 것이다. 그건 흥선대원군은 자신 주변에 운현궁에서 키운 수많은 군사와 장병들, 그리고 종복들까지 흥선대원군을 보호할 만한 세력이 많았지만 고종은 그러질 못했다. 그랬기에 명성황후는 민씨일문 중 똑똑한 사람보다는 비리를 덜 저지르는 착하고 충실히 따르는 인물로만 고종 곁에 둠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명성황후의 민씨일문의 등장은 과거 안동김씨나 대원군처럼 왕권을 압도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고종 옆에서 보호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나오게 한다, 비록 일부 민씨세력들이 비리를 저질러 후에 임오군란이 나오게 되지만 말이다...) 결국 1873년 흥선대원군은 남편을 대신해 직접 맞선 며느리 명성황후에 의해 54세의 나이로 10년간의 세도정치는 끝을 맺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부터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약 10년간 운현궁에 머무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에 의해 추대되면서 정사를 돌보게 되는데 10년만에 궁궐에서 고종과 대면하게 된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상궁의 옷으로 갈아입고 홍계훈에 의해 대궐밖으로 빠져나가 윤태준의 집을 필두로 민응식의 집인 장호원까지 장정 51일동안 피신하게 된다.) 고종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있게 대원군이 품결하도록 지시한다. 이로써 대원군은 10년만에 다시 권좌에 오르게 된다. 대원군은 문제가 됐던 별기군을 해체하고 오영을 복구시키는 한편
그동안 고종이 이루어낸 개방 정책들을 백지화시킨다.
그러나 대원군에게도 대궐 안에 머물러 있는 군인과 백성들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원군은 중전이 사망했다고 하고 국상을 치르라는 묘안을 내놓는다.
대원군도 포화 상태에 이른 군인과 백성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명성황후를 살려주기 위해 방책을 내놓은 것이다. 허나 이것 또한 명성황후를 다시 대궐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서 잠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마치 평생동안 앙숙으로 지내온 것 처럼 알고 있는데 둘이 갈등을 겪은 시간은 1868년부터 1873년까지 약 6년간이다...) 중전의 국상 문제로 원로대신들과 중신들의 반발, 그리고 그에 힘입은 고종의 대항에도 대원군은 끄덕하지 않는다. 중전의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 국상을 선포했으니 더 이상 문제를 삼지 말라고 하는 대원군이었다. 그러나 혹 살아있다면 다시 대궐로 돌아올 수는 없다고 못을 박는 대원군이기도 했다.
이어 연금을 하듯 고종의 처소에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한편, 원로대신들을 강제로 집으로 돌려보낸다. 한편으로 대원군은 민씨의 지휘를 받는 보부상들이 도성으로 오고 있다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다. 이것은 민씨세력들을 마저 꺾어 놓으려는 흥선대원군의 계산이었다고 사료된다. 허나 임오군란때 권좌에 오른 대원군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때 대원군의 나이는 63세... 환갑을 넘긴 나이었다. (여기서 잠깐! 드라마에서나 보통 시각에선 명성황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몰아냈다고 알고 있다. 드라마에선 명성황후가 조대비에게 서찰을 보내지만 그 당시 피신해서 목숨도 연명하기 힘든 명성황후가 서찰을 써 보냈는지는 의문이 든다.) 내 생각엔 당시 대원군과 라이벌이자 왕실의 큰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조씨 아니면 민씨세력들, 아님 개화파 쪽에서 청과 손을 잡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정권을 잡은지 한달만에 대원군은 청국에 의해 납치되고, 얼마 후에 명성황후가 환궁하게 되면서 임오군란의 주동자들을 처벌하면서 사건은 해결된다.(여기서 잠깐!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관에 불을 지른것은 일본의 쇼였다! 마치 우리가 불을 지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과 부하들에게 시켜 불을 저질러 놓고 마치 조선인들이 지은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이것은 최근에 밝혀진 바이다.)
납치당한 뒤 3년뒤인 1885년 67세의 나이로 백발 노인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청나라가 대원군을 보낸 것은 친러정책과 함께 청을 멀리하려는 명성황후를 견제하기 위함 이었다. 이 이후로 대원군을 감시하기 위해서 운현궁의 대원군이 머물던 곳의 잘 감시하기 위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일 수 있도록 할 만큼 대원군은 이 이후로 거의 감금 상태에 있었다고 사료된다. 드라마에서는 마치 대원군이 조선에 환국하고도 의기양양하며 궁궐과 운현궁을 오가며 활동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돌아온 이후 원세개의 꾀임에 빠져 손자인 이준용을 보위에 앉치려 했지만 이홍장이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원세개가 이준용을 선동하여 보위에 세운다음 조선을 청국의 속방으로 완전히 굳혀 자신은 조선에서 임금아닌 임금을 해보겠다는 계산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나도 잘...^^)
마지막으로 하이라이트... 1895년 일본은 미우라 고로를 필두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시바 시로, 스즈키, 오카모토, 와타나베, 아다치 겐조등 일본의 거물급 인사들 및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등 총 56여명과 우범선 등을 필두로 한 조선군 40여명의 훈련대 등이 경복궁을 난입했다. 이때 중요한 인물 흥선대원군이 아소정(참고로 아소정은 대원군이 말년에 지낸 곳으로 당시 대원군의 처지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공덕리) 오카모토가 아소정을 침입해 대원군을 강제로 납치한 뒤 경복궁에 가둬놓은 상태에서 무엄하게도 건청궁에서 고종과 세자, 세자빈을 협박하고 칼로 위협하였으며 결국엔 옥호루에서 조선와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만다. 아직까지도 마치 대원군이 선동하여 명성황후를 죽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대원군을 경복궁으로 데려간 것은 이 범죄를 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에게 뒤집어 씌울 계산이었다. 그것은 한때 대원군이 명성황후와 사이가 안좋았고, 또한 조선군 훈련대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날 해산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빌미삼아 이 둘에게(흥선대원군, 조선군 훈련대)에게 책임을 떠넘길 목적으로 그리 한 것이다. 결국 대원군은 1898년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드라마에서는 대원군이 1885년 이후 명성황후와 화해를 하고 손을 잡은 것으로 나와있지만 대원군의 힘은 1873년 권자에서 물러나 소강상태에 있은 뒤 1882년 임오군란때 한달동안 권자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원군이 귀국을 햇서도 정치에 목매달면서 그린 것은 잘못 된 것이라 생각된다.
흥선대원군이나 명성황후를 비화시키며 오늘날에도 이리 생각하게 만든 것은 일본이 조선이 망한 것을 이 두 인물에게 떠넘기기 위함이며, 그것을 모두 기록화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 아직까지도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빨리 개선해서 위 두 인물과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흥선대원군 중심으로 본 연대표 -
1820 (01세)
12월 21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남.
1831 (12세)
민씨 집안의 딸과 결혼함.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
1843 (24세)
군의 칭호를 받아 흥선군이 됨.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방탕한 생활을 함
1863 (44세)
철종이 뒤를 이을 왕자가 없이 병이 들자 조 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약속받음.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아들이 왕위에 오름. 대원군이 되어 섭정을 시작함.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여 나라 살림임 좋아짐. 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함.
1865 (46세)
왕조의 위엄을 살리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 함. 공사 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발행함.
1866 (47세)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아 들임.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천주교도를 더욱 탄압하고 쇄국 정책을 강화함.
1867 (48세)
경복궁에서 불이 남. 공사 비용이 더 많이 들자, 다시 원납전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짐
1868 (49세)
경복궁을 완성함.
1871 (52세)
미국 무역선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남.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
1873 (54세)
최익현, 대원군의 잘못을 알리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도록 함. 11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정치에게 물러남.
1882 (63세)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음. 민씨척족과 대왕대비 측근의 계략으로 청나라에 잡혀감.
1885 (67세)
조선으로 돌아옴
1895 (77세)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고종이 도움을 요청함.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후 스스로 물러남
대원위는 정치적인 역량을 분명히 타고난 분이긴 하나, 역시 시대를 잘 못 타고는 불운으로 혼란을 겪다가 청과 일본에 이용 당한 역사적으로 아쉬움이 많은 어른같습니다. 선대의 과오로 혼란정국 속에 개화파, 대왕대비 조씨, 명성황후와 맞물리면서 청과 일본에 빌미를 주어 후대에 길이길이 아쉬움을 남겼지요...
첫댓글 흥선 대원왕 이십니다
웬 왕??? 어떤 게 맞나요? 오렌지향기님? 전 물론 님의 말을 믿지만요. 오렌지향기님 올려주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낼름낼름 지식만 가져가고 흔적도 남기지 못해 죄송한 생각이었는데 유익한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대원위는 정치적인 역량을 분명히 타고난 분이긴 하나, 역시 시대를 잘 못 타고는 불운으로 혼란을 겪다가 청과 일본에 이용 당한 역사적으로 아쉬움이 많은 어른같습니다. 선대의 과오로 혼란정국 속에 개화파, 대왕대비 조씨, 명성황후와 맞물리면서 청과 일본에 빌미를 주어 후대에 길이길이 아쉬움을 남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