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眞珠灣) 공습의 의문점-1941년
1.
마커스 사무엘(Marcus Samuel,1853-1927)은 유대계 영국인으로 1871년 18세의 나이로 3등 선실표 편도 한 장을 들고 요코하마로 갔다. 당시 그의 전재산은 현재가치로 10만원 정도인 5파운드였다고 한다.
그는 도착후 일본 어부들이 매일 바닷가의 갯벌과 모래에서 조개를 캐는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고, 그도 조개를 주워, 단추와 옷에 다는 장식 그리고 장남감 등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조개껍질 안쪽에 옻칠하는 세공품(細工品)과 이른바 자개장식의 소형상자 등을 만들어 이를 영국에 있는 부친에게 보냈고, 부친은 이를 손수레에 싣고 다니며 행상(行商)을 하며 팔았는데, 날개 돋친듯이 팔려나가게 되었다.
런던과 일본 모두에서 마커스의 사업은 번창하게 되었다.
마커스가 왔던 일본 요코하마(Yokohama-横浜市)는 조가비가 무진장 잡히던 따뜻한 곳으로 서유럽에 일찍 알려진 향료전쟁의 무대였던 현 인도네시아 반다(Banda)제도의 위쪽 현 필리핀의 어느 곳으로 보아야 하는데,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마커스는 조가비 장식품을 팔아 자본을 축적하여 큰 부자가 되었고, 당시 세계적 열풍이 불고 있던 석유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일본과 중국은 목탄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마커스는 이들 나라에 석유와 등유를 팔기 위해 러시아산 석유를 2갤런 깡통으로 운반해 왔는데, 화재위험과 청결문제등으로 운반비가 매우 비쌌으며 또한 선박회사들이 원유운반을 꺼리게 되었다. 이에 마커스는 유조선(油槽船)의 설계를 의뢰해 1891년 세계최초의 유조선을 건조해 선주(船主)가 되었는데 이후 추가로 건조한 8척의 유조선 모두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캐냈던 가리비 조개의 모양을 상표로 붙이게 되었고,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소규모 유전개발을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투자를 한 결과, 양질의 석유(石油)가 채굴되었다.
그는 가리비 조개모양의 상표를 부착한 라이딩선 석유주식회사를 설립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채굴한 석유를 일본에 판매했는데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1897년 마커스는 쉘(Shell) 무역운송회사를 만들어 유럽과 아시아의 석유시장을 석권해 유럽의 록펠러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을 정도로 석유사업에서 독보적 존재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 세계최대의 석유수출회사는 당연히 미국의 록펠러였다.
록펠러는 1861년12월 세계최초로 펜실베니아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의 석유를 영국에 수출한 이후 프랑스,독일,스페인 등으로 수출시장을 확대하게 되는데, 1901년 조선을 방문했던 독일(獨逸)의 지리학자(地理學者) 지그프리트 겐테(Sigfried Genthe, 1870~1904)는 그의 조선방문기에서 당시 록펠러의 펜실베니아산 석유가 러시아산 석유보다 30배이상 수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정확한 양을 알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대륙의 거대한 조선 그리고 당시 500만이상이 살고 있었던 한양(漢陽)을 고려해보면 분명 엄청난 양의 록펠러 석유가 조선에 도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1521년 3월,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 도착하여 필리핀 원주민과 싸우다 죽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바로 일본 사무라이와 싸우다 죽은 사실로 보아야 하며, 마젤란이 도착했던 현 필리핀 세부(Cebu Island)와 그 옆 막탄섬(Mactan Island)의 지리적 위치는 이 글에서 고찰하려는 1941년의 진주만(眞珠灣) 공격과 관련한 의문점의 정점(頂點)에 서 있다 할 수 있다.
진주만 공습은 1941년 12월8일(일본시각)에 일본의 선전포고(宣戰布告)없이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군(日本軍) 공습허가의 암호명이 바로 "니타카 산에 올라라 1208(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였다고 한다.
니타카산은 한자명으로 신고산(新高山)이다. 이 신고산(新高山)은 현 대만(臺灣)의 옥산(玉山)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옥산(玉山)의 최고봉은 3,952m이며, 대만(臺灣)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타이완 섬이 중화민국에 반환되면서 현재의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위 글은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 진주만공격(眞珠灣攻擊)을 분석하면서 게재했던 글중의 일부이다.
위키백과의 대만 신고산(新高山)에 대한 설명은 일본의 인류학자가 1900년 이 산을 최초로 등반하고 일본 열도의 후지산(3,776m)보다 176m가 더 높기에 신고산(新高山)이라 명명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1941년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공습하기 위한 암호에 왜 타이완의 신고산(新高山)이 들어갔는가 하는 점이고, 이를 통해 현 대만(臺灣)이 바로 일본의 동경(東京)이 위치하고 있었던 곳임을 기타 자료와 더불어 논증해 냈었다.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역사에서 일본이 호놀룰루에 위치한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한 중요 이유는 바로 전쟁에 필수적인 석유공급망의 확보와 보전 때문이었다.
위에서 기술한대로 마커스 사무엘이 투자해 성공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는 초기부터 일본에 판매되어 일본의 근대화와 무기체계의 발전에 막대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기치아래 반다제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세력팽창과 대륙의 남만주(南滿洲)였던 현 신강(新彊)지구 천산(天山)이북지역에서의 기동성있는 군사력 확대에도 석유는 전쟁의 성패를 결정짓는 최우선의 전략물자였다.
이렇게 중요한 석유자원의 확보와 관련해 미국이 일본의 세력팽창을 견제하고자 석유금수조치를 경고하자 일본은 미국 태평양함대를 궤멸시키는 전략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 바로 역사에 회자되는 1941년의 진주만 공습이다.
마커스 사무엘의 기록을 통해 일본에 공급된 석유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라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면서, 그렇다면 미국이 이 수마트라섬의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의 일본반입을 차단하기 위해서 미함대(美艦隊)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지는 재고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다.
수마트라섬에서 필리핀 세부까지는 대략 2,700km미터다. 당시 중폭격기의 항속거리는 약 2,200km였음을 고려하면 왕복비행이 불가능한 먼 거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필리핀 세부에서 현 대만(臺灣) 타이페이까지는 약 1,650km로 역시 왕복비행이 불가능한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필리핀의 진주만(眞珠灣)을 현 세부로 비정할 때, 지리적 모양은 천연의 요새(要塞)와 같은 곳이다. 또한 수마트라 섬에서 생산된 원유(原油)가 남중국해를 지나 당시 일본의 동경(東京)이었던 현 대만으로 이동시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현 세부에 정박해 있었다고 가정할 때 충분히 일본의 석유공급망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하와이에서 필리핀 서쪽의 남중국해(南中國海)까지는 무려 9,000km가 넘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거리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기지를 두고서 필리핀 서쪽 해상을 통제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입장에서도 필리핀에서 8,000km이상의 먼거리에 있는 미함대(美艦隊)를 공격할 이유는 그 타당성을 입증하기가 곤란하다 할 수 있다.
3.
춘추필법(春秋筆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심이 되는 역사서술방식이다. 이를 통해 자국의 역사는 위대하고 웅대하게 기술하는 반면, 상대국의 역사는 비겁하고 비굴하게 기술하는 승자독식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1866년 대륙조선의 강화도(江華島)에 침입한 프랑스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휘아래 강력한 방어망을 형성한 조선군의 유격전술(遊擊戰術)과 평안도에서 내려와 전투에 참가한 착호갑사(捉虎甲士)들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큰 손실을 입고 바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하는데. 이 전쟁에 대해서 일제(日帝)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프랑스의 일개 장수가 자의적 의사에 따라 조선을 공격했던 것으로 프랑스라는 국체(國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전쟁을 묘사했고, 프랑스도 또한 그에 동조해 자신들의 나라가 동양의 조선(朝鮮)이라는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숨기며, 자신들은 패배를 모르는 위대한 프랑스로 만들어 나가며 역사의 방관자가 되려 했다. 그러나 비열한 독재자 박정희의 하수인들에 의해 날조된 동백림사건으로 나라를 떠나야 했던 위대한 조선인 박병선(朴炳善, 1923-2011)여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지하 서고(書庫)에 잠자고 있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찾아내 이것이 실존하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임을 입증하는 엄청난 일을 해내고 박병선 선생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해고당하게 된다. 또한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프랑스라는 국체(國體)가 나라를 대표하여 동방의 강자 조선(朝鮮)과 싸워 명확히 패배한 전투였음을 밝혀 삐뚤어진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 올바로 세워놓는 정의로운 조선인의 임무를 완성해 내기도 하였다.
미국은 1871년 대륙조선의 강화도를 침범해 제너럴셔면호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강요헀으나.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고 또한 전투시일이 지나가면서 증강되는 조선군의 규모를 보고 프랑스가 패배했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철수하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일제와 조선사편수회는 미군이 무의미한 살상을 그만두고자 철수했다는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말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지껄이며 후세를 기만해 왔다.
당시 미군은 패배가 두려워 물러난 것이다. 강력한 조선군의 저항과 평안도 포수를 비롯한 일만리 강역의 용맹한 조선(朝鮮)의 전사들이 나라가 위기에 빠지니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여기며 강화로 몰려들어 미군(美軍)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미군 제독(提督) 로저스(John Rodgers)는 철수를 명해 조선의 강역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후세의 역사와 미국의 전사(戰史)는 마치 미국이 승리한 것처럼 기술해 후세를 기만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춘추필법에 기반한 까닭일 뿐, 역사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1941년 7월26일 군사고문에서 미육군 소장으로 현역에 복귀하고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 된 후 필리핀 마닐라에서 근무하다가 제2차세계대전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1941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였으나 마닐라를 빼앗기고 1942년 3월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다고 나와 있는데, 이 일본군의 공격이 바로 필리핀 세부 근처에 존재했던 진주만(眞珠灣)공격으로 보여지며, 이후 공격에 밀려 결국 남쪽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한 것이라 판단된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후, 일본은 아이누족의 땅이었던 하이도(鰕夷島) 즉 현 열도로 모조리 이주하고, 미국의 뜻대로 춘추필법에 기반하여 하와이에 진주만을 만들고 이곳을 일본이 공격한 것으로 역사를 변조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군(美軍)이 유사이래 가장 참혹하게 패배하여 물러났던 진주만의 전투가 변조되고 굴절되어 새롭게 각색된 후 굴욕감 없는 미군주도의 전쟁역사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강자(强者)의 역사가 주류 역사인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4.
이를 지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2023.04.13.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정혜님 항상 부지런하십니다. 건강하시구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한마디로 소설이었군요.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여 진주만에 정박중인 신형 항모는 피신시키고 구형항모만 파괴 당하게 하여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죠. 이건 김용옥씨의 견해죠.
일본이 러일전쟁당시 승리요인 중 하나가 암호 도청이 가능한 기술력인데 미국에 도청당했다는 것은 좀 말이 안되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이 러일전쟁시 암호도청 했다는 것은 모 스님의 견해죠.
송계님의 견해가 참으로 합리적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이 미쳤다고 지금의 진주만까지 가서 공격할리가 없어 보입니다. 진짜 싸움은 필리핀과 호주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 졌는데 말이죠.
네 전쟁은 상식적 수준에서 고려되어야 하는데 진주만은 의문이 너무 많은 역사기록속에 존재합니다. 그 의문을 제기해 다시한번 고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구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진주만전쟁 당시 제로전투기의 최대운항거리를 ChatGPT에게 물어봤습니다.
" 제로 전투기의 최대 운항 거리는 버전과 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제로 모델 21의 최대 운항 거리는 약 3,000km(1,864마일)에서 3,700km(2,299마일) 정도였고,
제로 모델 52의 최대 운항 거리는 약 3,200km(1,988마일)에서 4,300km(2,671마일) 사이에 위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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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반 전투기 제로모델의 표준항속거리는 2,222 km이고 증고장착시 3,350km이네요. 52형은 오히려 보조연료 장착하고도 2,560km라고 자료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B25 중폭격기는 2,170km이고요. 폭격목적일 경우 많은 양의 폭탄을 실어야 하니 항속거리는 더 줄어들 것입니다.
진짜 믿을 게 없네. 세계사의 조작이 현실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