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문학인초청 낭독공감 낭송시/김영곤 시인

첫번째 마술 그곳에서  이미 반은 나무의 얼굴이다 나를 보니 눈망울은 늘 젖어 있다 젖은 눈으로 벚나무를 본다 벚나무도 젖은 눈으로 나를 본다 나무 근처만 가면 자꾸 돋아나려고 한다 모르는 햇살들이 늑골의 가지 사이로 함부로 쏟아져 들어온다 모르는 손길이 나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꽃잎을 활짝 열어제친다 젖은 종이가 다 떨어질 때까지 탁본한다 젖은 향기들이 흐드러지게 태어나고 모르는 나무가 되어간다 그 곳에서 벚꽃이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반은 사람의 얼굴로 점점 나를 채우고 있다 점점 가득해지는 나를  흠뻑 젖은 꽃의 얼굴로 팔랑팔랑 나를 찾아오고 있다   두번째 마술 우기  오백 일이 지나도록 이 비는 멈추지 않는다 점점 사나워진다 무대 스케줄로 꽃피우던 나의 바깥, 그 막다른 골목 귀퉁이마저 삼켰다 칼날 세운 시선이 하얗고 네모난 지붕 안쪽까지 빗발쳤다 우산처럼 뒤집히고 진흙바닥에 나뒹구는 인간의 날씨에는 언제나 고독이 멈추지 않는다 점점 불안이 격렬해진다 쓸모없어진 본업을 접고 마지막 남은 상자를 열었다 보이지 않으나 한없이 태어나는 사라지지 않는 우산 하나 우산을 펼친다는 것멈추게 하겠다는 것우산도 외로워서 사람의 온기를 꽉 쥐려는가내 손을 놓지 않는다 자주 몸이 찢겨지고 자주 뼈가 휘거나 부러지고 아침마다 손목 마비 소용돌이치고 밤마다 발목이 욱신거려도 누군가의 우산이 된다는 것더 이상 접혀 있지 않겠다는 것당신만은 젖지 않게 하겠다는 것움켜쥔 손에서 온기가 마르지 않는다    터널 하루에도 수십 터널을 지난다바람도 저마다의 터널을 지난다 천천히 나오는 사람은 그림자가 쇠처럼 눌린다무척산터널을 통과할 때내 속에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아버지귀가 때마다 목재소에서 그림자처럼 끌고 왔던 톱밥들그 식은 밥으로 우린 비탈진 산을 넘었다이젠 무척산에 묻혀 터널을 품었다 병실에서 나무의 식은 손을 만져본다 절단된 둘째손가락, 벌거벗은 터널이라고 읽어본다 손가락이 없다는 건 톱밥이 없다는 것, 방아쇠를 당기는 부위 여태껏 아무도 묻지 않았다 심장 박동으로만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아버지저 왔어요, 한 마디에잠시, 진한 나무 냄새가 났다  마지막 터널에서 톱밥 화르르 담겨지는 항아리, 출구가 일출처럼 무척 환하다   돌의 향기 돌의 자전축을 움켜쥐고 돌고 있다 돌돌, 중심이 탈탈 털려 관심 바깥으로 떠밀린다 돌돌돌, 돌들의 채찍질 같은 바람을 혀에 물며 줄줄, 돌작밭에서 피를 쏟는다 뿌리를 적시는 돌, 단단한 의자를 통째로 내준다 마침내 돌처럼 옹골찬 봄이 되어간다 돌, 돌이라는 발음이 감칠감칠 휘돌다 감돌며 닿을락말락 마주보던 입술이 애태우는 소리 돌돌, 첫사랑이 조약돌을 내던지며 돌아서던 소리, 아직도 주머니 속에서 녹슬지 않고  돌을 오래 벗 삼아온 돌나물그대가 있어 돌은 향기를 품는다점점 돌의 심장처럼 영글며돌돌첫사랑의 식탁으로 흘러간다조약돌의 향기가 오도독 씹힌다   바보, 바보-황순원의 ‘소나기’ 속으로  피하지 마라, 사랑이다소나기 앞세우고 카랑카랑 파문 쳐 오는 사랑이다‘바보, 바보’라 쓰인 편지가 풀씨처럼 날아와내 가슴 속 빈 섬에 발아되는 사랑이다비 오는 날이면 속절없이 부풀어 그리워지는 사람아멈추지 마라, 사랑이다그대 목소리에 내 심장이 찔린 채 달려가는 사랑이다오래오래 달리다 과열되어 터지면베르니케 실어증* 같은 문장들이 허방짚듯 엎질러진다 아프니까 사랑이지, 털고 일어나. 달리다굼*, 이 말씀만 마시면 이별이란 없어. 들국화 싸리꽃 도라지꽃 마타리꽃 들이 하늘에다 소나기를 퍼붓고 있어. 저 대추알만 한 하늘은 금방 눈물 속에 잠길 거야. 개울이 생기겠지. 거기에다 호두알 같은 내 가슴 징검징검 박을 테니, 언제든지 와. 내 가슴 바스락바스락 밟는 소리, 하늘이 흔들거려. 누가 하늘문 열어 놓았나, 이 멈추지 않는 소나기를누가 던져 주었나, 이 식지 않는 조약돌을비가 오면 그대만 무성해지는 섬그 섬에는 찔려야 다시 사는 바보가 살고 있다    구멍   재봉틀 같은 쌘비구름이 오래 머물러 있다 자정의 하늘에심장은 차갑고 발만 따뜻하다몰래 우는 하늘을 문지르는 번개소리밤새 뒤척이던 창문이잠시 얇은 잠을 끌어당겨 덮고 있다  한쪽으로만 돌고 있는 굵은 시계소리창틀 너머의 별들들들들몸의 공허를 둥글게 박음질하는 빗소리 시계소리 들린다 천둥처럼 귀를 밝혀 들고재봉실 퍼붓는 소리만 따라 뒤쫓아가듯 돌고 있다 달달달달한 점 한 점 채워지는 부신 발자국들점점이 부풀어오르는 달, 암흑의 뼈 발라낸 하늘의 구멍 그 황홀에 취해 팽글팽글 바늘을 돌렸었지달이라고 믿다가 시계에 빠지곤 했었지 싱싱해지는 달의 빛줄기창문에 포개는 달의 입술 구름 같은 귀가 달의 동선 따라 째깍째깍 걷고 있다    바깥에서  들짐승처럼 길들여진다 하루의 절반은 너를 잡기 위해 나를 돌린다 돌리는 중이다 돌리다가 도로 잡힌다 이미 사로잡혀 있으면서 이미 잡고 있는 중이다 잡으면 잡을수록 더 사나워진다 덥썩 손목이 물린다 철철 피가 뿜어나도 그대로 둔다 야생의 이빨에게 다시 나를 미끼로 던져 둔다 하루의 절반은 바깥에 서 있다너의 안으로 갇히기 위해  너는 더 이상 바깥이 아니다 죽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 야생이다 서슬푸른 칼날이며 문을 여는 손잡이다문을 열면 열려야 할 바깥이 끊임없이 다시 쏟아져나오고나는 언제나 바깥에 있는 중이다    구멍  꿰매고 싶다나를 잠시 열고서야 모서리에 찢긴 삶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멍난 옷 왜 이렇게 되었을까어저께 일어난 지진 때문이었을까팔천 명의 목숨이 갈라진 구멍 속으로 사라지고오십만 채의 집이 낙엽처럼 떨어진 네팔의 작은 마을 송곳 같은 눈물 토해 몸에 달라붙는 피를 씻기는여인을 보며, 흙 묻은 신발 한 짝에 얼굴을 묻는여인을 보며, 부르면 금방 꽃필 것 같은 이름을 허공 뼈에 새기는당신을 보며, 살아있는 게 미안하다 옷을 찢고 자신을 찢는 당신의 너무나 오래된 뒷모습에서 절벽을 보며문득, 지진처럼 찢겼던 나를 떠올린다 꿰매고 싶다 펄펄 끓는 절망으로 담금질한 바늘그 바늘구멍에 끊겼던 세월을 다시 이어 끼운다고요만 자우룩한 나뭇가지마다 따뜻한 촛불 밝혀놓고 온 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이 작은 바늘 하나로 꿰매다 보면잃어버린 웃음마저 미어 터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