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교회론을 검토한다: 교회의 본질과 현실
“건물로서의 교회는 인간 욕망의 투사물이자 사적 소유물이 되고 있다. 신앙의 수렴점을 건물 교회로 집중하는 것은 온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구현에 대한 전망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건물 교회의 ‘과잉’은 멈춰야 하며, 교회당 건물의 공공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 김동춘
건물 교회의 존재 이유 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회집장소로서의 공간 필요성에 있다. 예배가 신앙생활의 가장 근간이라면 예배를 위한 공간은 없어서는 안된다. 예배당의 과잉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정기적으로 열리는 예배를 위한 건물은 필요하다.
물론 건물로서의 예배당이 회사나 카페, 음식점, 공장처럼 매일 사용되지 않고, 예배 없는 날이면 비어 있는 공간이 너무 많아 낭비적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교회 건물을 갖지 않을 것을 교회의 방향과 목회철학으로 설정한 교회도 실제 교회 공간을 위한 임대비 지출이 상당히 크다는 것도 사실이다.
# 본질의 교회 대체하는 건물 교회
교회 건물인 예배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과잉’이다. 교회 건축, 건물 교회는 비판받고 있다. 그 이유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본질의 교회’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온갖 성물들이 채워진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인 한 명도 없는 임대상가에 헌금으로 다양한 예배 기물들을 진열하고, 최고 수준의 인테리어가 되어 있더라도 교회는 아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없는 교회,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교회, 십자가의 은혜가 선포되고 세례가 시행되지 않는 곳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없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지니는 교회관의 치명적인 오류는 교회됨의 본질적 요소를 등한시하면서 교회 건물을 소유하면 마치 그 곳이 교회가 된다고 하는 착각이다. 화려한 외형을 갖춘 교회 건물이 교회의 본질을 대체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그 곳이 가정이든, 창고이든, 커피숍이든, 공공시설이든 길거리든 아무 상관 없이 교회가 된다.
# 건물 교회가 성전이라고?
한국 교회에 편만한 교회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류와 왜곡은 예배당 건물의 ‘성전화’다. 교회당 건물을 성전시하는 사고는 일종의 한국 교회에 깊숙이 안착된 대중신학의 하나로서 예배당 자체를 천상의 성전으로 격상시켜 버렸다.
구약적 성전 개념을 신약의 교회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구약의 성전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 이전에 동물의 희생제물로 시행된 속죄의 장소였다. 성전은 속죄제사를 통해 인간과 하나님의 제의적 친교가 이루어지는 성별된 장소였다.
하지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와 화해 사역을 실행하심으로써 성전의 제사의식은 종결됐다.
따라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친다거나 강단을 ‘제단’으로 칭하거나 목사를 축복과 사죄의 중개자로 부각시키면서 레위지파로 특화하는 것은 더 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신약적 관점에도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인사제주의’를 강조했던 종교개혁적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목회자들이 건물 교회를 ‘성전화’ 하는 것일까? 유독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교회당의 부속 기물들을 ‘성물’로 지칭하면서, 목회자의 제사장직(사제주의)만을 강화하는 이유는 교회 건물과 목회자를 숭배하도록 유도하는 타락한 목회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향한 헌신을 ‘보이는 건물’로 대체해 물질과 관심을 쏟게 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고, 교회성장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 욕망의 투사물이자 사적 소유물이 된 건물 교회
건물 교회에 대한 집착은 ‘내 교회’를 소유하겠다는 사적 욕망의 표출이다. 내 집 한 채 소유하는 것을 인생의 최종목표로 삼는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당을 건축하는 과정 자체가 교회를 위한 헌신의 척도가 되고, 결국 목회자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간주한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의 건물 교회에 대한 숭배의식은 보통 이상이다.
목회자들의 꿈꾸는 목회적 최종점이자 종착지는 건물 교회를 짓는 것이다. 한마디로 건물 교회는 목회적 성취감의 표현이며, 자기 욕망의 표현이다. 웅장한 교회 건물은 하나님 나라 확장의 표지가 아니라 목회자와 교인들의 자기만족과 욕망의 투영물이다.
건물 교회는 교회됨의 본질보다 교회의 외형적 규모와 가시적 성취에 집중하게 한다. 따라서 교회 건물의 규모가 목회자들의 목회 성공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교회가 무엇을 하는가라는 ‘내용’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교회 건물을 사유화하는 사고에서 공유적 사고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회 건축의 과잉 열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의 왜곡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부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진보는 교회의 성장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 안에서도 진행된다. 따라서 건물 교회가 확장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건물 교회가 수적으로 늘어난다 해도 교회가 국가와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내용적으로 구현해 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사건 속의 교회’라는 역동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가시화되는 현실이다. 그리스도적 구조가 세상 속에 현재화하는 곳이다. 세계 현실이 되신 그리스도가 대리적으로 실존한 것처럼 교회 역시 타인을 위한 대리적 삶의 원리에 따라 책임적 존재로 실존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 차단막을 친 종교 조직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섬김의 도구일 때 의미가 있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형체를 드러내는 교회는 건물 교회를 넘어서야 하며, 세상 속에 육화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제 건물 교회의 ‘과잉’은 멈춰야 한다. 한국 교회가 투자해야 할 분야는 건물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관, 사회정의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기독교연구소나 전문기관이다.
교회당 건물의 공공성도 고려해야 한다.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 교회 건물을 갖지 않기로 하고, 공공시설이나 빈 공간을 예배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실험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새로운 대안들이 희미하지만 저 밑바닥에서 움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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