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강론 >(9.17.일)
* 2021년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에 즈음하여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성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을 봉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교황님이 수락하셨고, 한진섭 요셉 조각가가 7개월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성 베드로 성당 우측 외벽에 설치되었습니다. 동양 성인의 동상이 성 베드로 성당에 설치된 것은 성 베드로 성당 역사상 처음입니다.
그리고 어제(9/16) 오후 3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유흥식 추기경이 감사미사를 드렸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역사상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이렇게 기쁜 일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미사를 봉헌합시다.
1. 제가 청도본당에 있을 때인 2013년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 4일간, 30여 명의 신부님들과 중국 장춘 소팔가자 성당과 백두산에 갔습니다. 소팔가자 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부제품 받은 성당인데, 첫날 미사를 드렸고, 그곳 김대건 기념관을 참관했습니다. 그리고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백두산 천지를 등정한 후에 돌아왔습니다.
2. 충남 당진군 솔뫼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울술라 사이에서 태어나신 성 김대건 신부님은 집안 영향으로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는 컸지만, 영양부족 때문에 가슴앓이, 위병, 요통, 두통 때문에 청년이 되어서까지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체적 결함을 사제직에 대한 열정과, 신앙에 토대한 조국애로 극복했습니다.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모방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된 후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공부하던 중, 최방제 신학생은 위열병 때문에 1837년 11월 27일 임종했습니다. 1839년 4월, 필리핀 마닐라 롤롬보이 수도원에서 6개월여 지내다 마카오로 돌아갔고, 라틴어, 교리, 프랑스어, 철학,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843년부터 장춘 소팔가자에서 살았던 김 신부님은 1844년 12월 10일, 최양업 신학생과 함께 부제품을 받은 후, 1845년 1월, 밀사를 만나 의주로 입국해서 활동하다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그해 8월 17일 사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서품이었습니다. 2주 후인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및 교우 11명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제주도를 거쳐, 10월 12일 강경 나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신부님이 체포되어 순교할 때까지의 3개월은 당신 생애 중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겁니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어, 5일 후 해주 황해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총 네 번 문초를 받은 신부님은 4차 심문 때 죽음을 각오하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인간이면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 천주를 위해 죽게 되었으니, 도리어 이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묻고 내일 묻는다 해도 오직 마땅히 이렇게 할 뿐이오. 때리든 죽이든 또한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뿐입니다. 빨리 때려 빨리 죽이시오.”
그 후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겪다가, 9월 15일 군문효수형이 확정되었고, 그 다음날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다른 순교자들도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했기 때문에 순교하시자마자 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3. 오스트리아에는 ‘짤츠부르그’ 도시가 있는데, 도시이름 뜻이 ‘소금(짤츠) 광산(부르그)’라고 불릴 정도로 도시 전체에 소금광산이 퍼져 있습니다.
그 소금광산 안에는 선사시대부터 소금을 얻기 위해 조금씩 파내려가면서 쓰던 갱도가 있는데, 그 갱도는 길이 300Km, 방 숫자가 2,500여개나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소금광산 안에 경당(chapel)이 40여 개 있다는 겁니다. 어둡고 막힌 지하에서 산소도 부족하고, 메탄가스 때문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내야 했던 광부들은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힘들고 좁은 환경에서도 경당에서 기도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했기 때문에 편하게 광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순교자들은 짤츠부르그 광부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장하고 절박한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분들이 순교로 짧은 생애를 마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천주교를 믿기 전에 불교 1,000년, 유교 500년 역사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양반, 중인, 평민, 천민 등 신분제도가 엄격했고, 남녀 차별도 심했습니다.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던 당대 석학들은 천진암주어사 강학회에서 진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받고 귀국한 후, 강학회 회원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한국천주교회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분들이 목숨 바쳐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신 덕분에 현재 천주교 신자의 수가 인구 대비 10% 정도가 되었습니다.
4.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불편해집니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한 것을 추구하면서도 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마지막 주교였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성인의 사무실로 어떤 여자가 들어와서 문을 쾅 닫은 후, 성인에게 “제가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성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문을 좀 더 조심스럽게 닫는 데서 시작하시지요!” 이처럼 성인이 되기 위해 특별한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라면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일생을 주님께 맡기며, 무슨 일이든지 늘 기쁘게 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