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우아한 볼륨과 구조적인 실루엣이 지배했다. 유서 깊은 하우스의 전통을 지키며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디자이너들은 2008 F/W 컬렉션에서 ‘선’과 ‘형태’에 중점을 둔 의상을 선보였다.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테일러링에 초점을 맞춘 옷은 마치 ‘의상 본연에 집중하라’는 디자이너의 의미심장한 메시지처럼 보였다. 지난 몇 시즌 동안 패션계는 옷보다 가방이나 구두, 벨트 같은 액세서리에 더 관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핸드백이 히트해야 매출이 상승하고 ‘핫’한 브랜드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가을, 패션계의 이런 판도가 서서히 바뀔 예정이다. 전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는 파리 패션의 실세, 이브 생 로랑의 스테파노 필라티와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 그리고 샤넬의 칼 라거펠트 같은 디자이너들이 액세서리를 배제한, 순수하게 옷에 집중한 쇼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패션 피플은 누가 어떤 가방을 들었느냐보다 무엇을 입었느냐에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Sculpture 선과 형태에 대한 실험 “이번 쇼는 실루엣에 관한 것입니다. 지난 S/S 시즌에는 색채에 중점을 둔 ‘회화적인’ 쇼를 선보였다면 2008 F/W 시즌에는 ‘조형적인’ 디테일에 신경 썼습니다.” 스타일닷컴과의 인터뷰에서 루이 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크 제이콥스는 48벌의 룩을 단 하나의 단어 ‘Sculptural’로 압축해 설명했다. 완만한 곡선을 이룬 무대에 등장한 첫 번째 의상은 터틀넥 스웨터와 매치한 벌룬 팬츠. 시즌 키 아이템으로 꼽힌 아랍풍의 벌룬 팬츠는 컴퍼스로 원을 그린 듯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둥그런 실루엣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봄부터 강세를 띤 팬츠를 의식한 듯 마크 제이콥스는 허리를 강조한 코트, 두루마리 휴지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네크라인의 재킷, 거꾸로 입은 듯한 셔츠, 러플 장식 블라우스와 함께 발목 길이의 팬츠를 빈번하게 선보였다.
그랑 팔레에서 열린 이브 생 로랑 컬렉션에서도 선과 형태를 강조한 의상이 눈길을 끌었다. 파도에 소용돌이치는 하얀 돛처럼 보이는 거대한 무대는 쇼에 등장한 불규칙한 헴라인의 코트와 재킷, 조각 같은 드레스를 암시하는 장치였다. 건축가 렘 쿨하스나 프랭크 게리가 의상을 디자인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오버사이즈 펠트 코트, 테일러링을 강조한 하이 웨이스트 팬츠, 모래시계 형태의 원피스 등 구조적인 실루엣이 돋보이는 의상은 스테파노 필라티가 패션계의 진정한 건축가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 밖에도 ‘스포츠 쿠튀르’를 선보인 세린느 쇼에는 볼륨과 테일러링에 중점을 둔 드레스와 코트, 재킷이 대거 등장해 패션 피플의 눈길을 끌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image.design.co.kr%2Fcms%2Fcontents%2Fdirect%2Finfo_id%2F43571%2F1206783131112.jpg) Clothes 옷에 집중하라!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와 이브 생 로랑의 스테파노 필라티. 아이러니하게도 패션계에 ‘잇 백’ 열풍을 불러일으킨 두 디자이너가 ‘옷에 집중하라!’는 따끔한 메시지를 전파한 주인공이다. “미니멀하면서도 준엄하고 관능적인 룩을 추구했습니다.” 34벌의 의상을 선보이는 내내 단 한 개의 핸드백도 무대에 올리지 않은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쇼 직후에 남긴 말이다. 이로 인해 관객은 날카로운 커팅이 돋보이는 블랙 원피스에 100%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랑 팔레에 대형 회전목마를 설치해 화제가 된 샤넬 쇼에서도 옷에서 시선을 분산시키는 액세서리, 특히 핸드백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했다. 무거운 오버사이즈 토트백을 들지 않아도 된 모델들은 롱스커트 포켓에 손을 넣은 채 여유롭게 워킹했고, 이 시크한 포즈는 의상에 포커스를 맞추는 데 일조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image.design.co.kr%2Fcms%2Fcontents%2Fdirect%2Finfo_id%2F43571%2F1206783131111.jpg) Midi to Long 점점 길어지는 라인 한동안 패션계는 지독한 ‘미니’ 열병을 앓았다. 미니 드레스와 미니스커트, 마이크로 미니 팬츠… 심지어 레드 카펫에서도 미니 드레스를 입어야만 트렌드를 진정 이해하는 셀러브러티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다가오는 가을, 스커트와 원피스, 팬츠 길이가 무릎 아래에서 바닥까지 대폭 내려갈 전망이다. 아크리스에서는 길고 슬림한 실루엣의 팬츠 수트,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롱 코트와 함께 바닥을 휩쓰는 기다란 퍼 스카프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실크, 캐시미어, 가죽 등의 고급 소재를 의식한 탓일까? 에르메스는 런웨이에 이국적인 양탄자를 깔아 바닥에 끌리는 팬츠나 점프수트를 입고 워킹해도 옷감이 손상되지 않게 했다. 이 밖에도 요지 야마모토를 비롯해 이브 생 로랑, 루이 비통 쇼에는 종아리부터 발목까지 오는 롱스커트가 대거 등장했고 스텔라 맥카트니는 종아리 길이의 스웨터 드레스를 편안하고 섹시한 데이 웨어로 제안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image.design.co.kr%2Fcms%2Fcontents%2Fdirect%2Finfo_id%2F43571%2F1206783162160.jpg) Jewelry 핸드백의 자리를 넘보다 “커스텀 주얼리는 핸드백의 자리를 대신하는 시즌 머스트 해브 액세서리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수지 멘키스는 파리 컬렉션을 지켜보며 위와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고 보니 “액세서리는 미니멀리즘을 저해하는 요소”라고 말한 드리스 반 노튼도 알록달록한 목걸이와 팔찌를 대거 선보였고, 쇼 내내 단 하나의 핸드백도 선보이지 않은 발렌시아가와 이브 생 로랑도 주얼리에 관해서만큼은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이는 주얼리가 의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이기 때문일 듯. 블랙과 네이비, 브라운 등 어두운 컬러에 중점을 둔 랑방의 앨버 엘바즈는 의상의 포인트로 대담한 디자인의 실버 주얼리를 활용했고, 바바라 부이 역시 의상에 자수 효과를 주는 콜라주 형태의 펜던트를 블라우스와 셔츠, 원피스에 매치했다. “가톨릭과 이탈리아 교회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십자가처럼 종교적인 모티브를 활용한 체인 액세서리를 선보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슬림한 블랙 수트 위에 여러 개 겹쳐 착용한 십자가 체인 목걸이가 신성해 보이기는커녕 1980년대의 로큰롤 스타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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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sh debut in Paris 파리의 미래를 책임질 패션 총아들 2008 F/W 시즌 첫 데뷔 무대를 치르는 디자이너들로 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장 발렌티노가 은퇴한 후 유서 깊은 쿠튀르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알레산드라 파키네티Alessandra Facchinetti, 엠마누엘 웅가로의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된 스물세 살의 콜롬비아 청년 에스테반 코타자르Esteban Cotazar, 16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 스페인 패션 명가 로에베의 미래를 책임질 스튜어트 베버스Stuart Vevers 그리고 소니아 리키엘의 치프 어시스턴트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전격 승진한 가브리엘 그레스Gabrielle Greiss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 시즌 가장 화제가 된 디자이너는 누가 뭐래도 발렌티노의 알레산드라 파키네티일 것이다.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레드 카펫을 지배한 발렌티노의 부재를 서른다섯 살의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게다가 그녀는 2005년 톰 포드 이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다 1년 만에 프리다 지아니니에게 자리를 내준 전력이 있지 않은가(물론 이후 몽클레어에서 멋지게 재기했지만). 파리 16구에 위치한 샤요 궁전에서 데뷔 무대를 펼친 알레산드라 파키네티는 패션계의 우려를 한 방에 잠재우는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프런트 로에는 <보그 USA> 편집장 안나 윈투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수지 멘키스, <보그 이탈리아> 편집장 프랑카 소차니 등 패션계 거물급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데이 웨어로 제안한 캐시미어 스커트 수트로 시작한 쇼에는 로맨틱한 블라우스에 매치한 팬츠와 리본 모양의 메탈 벨트, 테일러링이 돋보이는 블랙 코트와 핑크 시폰 원피스 등 현대 여성이 입고 싶어 하는 발렌티노의 새로운 모습이 제시됐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image.design.co.kr%2Fcms%2Fcontents%2Fdirect%2Finfo_id%2F43571%2F1206783162163.jpg) 19벌의 의상에 매치한 19개의 핸드백과 19켤레의 신발을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선보인 로에베의 스튜어트 베버스. 보테가 베네타, 루엘라 바틀리, 지방시, 루이 비통에서 경력을 쌓은 전직 멀버리 수석 디자이너는 그의 주특기인 액세서리 라인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고 팔로마 피카소에게 영감을 얻은 의상들도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패션계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진 엠마누엘 웅가로의 꽃미남 디자이너 에스테반 코타자르. 하우스의 시그너처인 우아한 드레이프 장식의 실크 저지 드레스로 합격점을 받은 그는 쇼 중간 중간에 시즌 트렌드로 떠오른 오프숄더 드레스를 선보이며 브랜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올해로 브랜드 탄생 40주년을 맞은 소니아 리키엘 쇼에는 하우스를 상징하는 모든 것, 이를테면 스트라이프 니트와 사랑스러운 베이비 돌 드레스 그리고 소니아 리키엘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가 등장했다. 아카이브를 반영한 57벌의 의상을 소개한 후 피날레에는 소니아 리키엘과 그녀의 딸 나탈리 그리고 이번 시즌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가브리엘 그레스가 사이좋게 등장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image.design.co.kr%2Fcms%2Fcontents%2Fdirect%2Finfo_id%2F43571%2F1206783162161.jpg) episode 1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오 마라스는 패션쇼 연출의 귀재다. 언제나 드라마틱한 무대를 선보이는 그가 이번 시즌을 위해 준비한 것은 로맨틱한 장미꽃이다. 붉은 구의 모습으로 위장한 꽃잎들은 드레스를 입은 마지막 모델이 나온 순간, 공중에서 흩어지며 한 편의 영화 같은 피날레를 완성했다.
2 파리의 명품 거리, 몽테뉴 아브뉴에 위치한 디올 본사에서 만난 2008 F/W 컬렉션 프레젠테이션. 1960년대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컬렉션에서는 레드와 핫 핑크, 오렌지, 바이올렛, 애시드 그린, 옐로 등 풍부한 컬러와 기하학 패턴이 돋보이는 재킷과 원피스, 액세서리가 눈길을 끌었다.
3 파리 패션 위크 기간 가장 많은 쇼에 참석한 스타는? 바로 루이 비통, 스텔라 맥카트니, 미우 미우, 샤넬, 에르메스 등 메이저 쇼에는 모조리 얼굴을 비춘 래퍼 카니에 웨스트다. TPO에 맞춰 클래식한 보타이에 블레이저 또는 캐주얼한 트랙 수트 차림으로 쇼에 나타난 당신은 진정한 패셔니스타!
4 올봄 국내에 정식 론칭하며 분더숍에서 판매하는 로저 비비에. 컬렉션 기간 동안 로저 비비에의 프레젠테이션이 포부르 생토노레 가에서 열렸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스퀘어 버클을 다양하게 변형한 펌프스와 조형적인 굽이 돋보이는 하이힐, 대담한 주얼리와 이국적인 핸드백이 눈길을 끌었다.
5 2월 29일 금요일 밤 열린 펜디의 아브뉴 몽테뉴 부티크 오프닝 행사에서 영국 출신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축하 공연이 펼쳐졌다. 그래미 어워드 5개 부문을 휩쓴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두꺼운 아이라이너, 부풀린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며 최근 패션 아이콘으로도 급부상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image.design.co.kr%2Fcms%2Fcontents%2Fdirect%2Finfo_id%2F43571%2F1206783162162.jpg) episode 1 미래 여전사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 검은색 짧은 가발에 얇은 선글라스를 끼고 반짝이는 검은색 립스틱으로 마무리한 이브 생 로랑의 헤어 메이크업. 동일한 모습으로 등장한 모델들 덕에 그 무엇에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옷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스테파노 필라티가 노린 효과인지도.
2 쇼가 끝나고 디자이너에게 남는 것은 명성 아니면 혹독한 비평. 에디터에게 남는 것은 컬렉션에 대한 단상과 자료 그리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초대장이다. 경기 불황 탓인지 점점 단순해지는 디자인 중 단박에 눈길을 끈 것은 스텔라 맥카트니에서 보낸 목각 고양이 인형이 부착된 초대장.
3 다가오는 가을, 국내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미우 미우에 대한 국내 프레스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하이테크 소재의 스포츠웨어를 선보인 F/W 컬렉션에서 가장 돋보인 아이템은 컬러풀한 부츠와 펌프스 그리고 최근 에디터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실용적인 핸드백 컬렉션이다.
4 샤넬의 칼 라거펠트 바로 옆에서 피날레 행진을 하는 한혜진을 본 순간 알았다. 어느새 그녀가 단순히 유럽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모델이 아니라 전 세계 톱 모델 반열에 올랐음을. 이번 시즌 파리 컬렉션에는 한혜진 외에도 김다울, 이현이, 혜박 등 반가운 한국 모델이 런웨이에 등장했다.
5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으로 컬렉션을 소개해온 바네사 브루노가 파리 11구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다. 모피 소재의 코삭cossack 해트를 쓴 모델들이 등장한 쇼에서는 시크한 하이 웨이스트 팬츠와 여성스러운 새틴 원피스, 편안한 스웨터 드레스 등 시즌 트렌드로 떠오른 아이템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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