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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인문학기행 답사기
김경식
■ 청주 답사의 의미
역사의 숨결이 스며있는 우리의 국토를 답사하면, 조상들의 숭고한 조국애에 감동을 받는다.
조국을 사랑하여 선비들이 칼을 들었던 역사의 뒤안길에는 많은 사연들이 남아 있다.
8월에 유독 자유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것은 일제강점기(1910~1945)에서 해방된 달이기 때문이다. 마침 금년은 1914년 일제가 우리 국토 지명과 지역을 강제로 개편한지 100년이 되는 해다.
청주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 조헌 선생의 기상이 충천했던 곳이며, 3.1운동의 지도자였던 손병희 선생의 고향이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이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묘소가 있는 곳이다. 1960년대에 참여시를 썼던 신동문 시인의 고향이다.
그의 시 <내 노동으로>는 가난하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고, 의식주의자로 살기를 열망했던 당시 지성인의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신동문 시인의 시 <내 노동으로> 일부 인용
도종환 시인의 등단시 <고두미마을에서>는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마을이다.
그는 이 마을의 역사성에서 일제에 저항했던 신채호 선생의 독립정신을 높이 평가하여<고두미마을에서>라는 제목으로 첫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땅의 삼월 고드미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 오던
한 줌의 유골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녁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옥하리 냇가에 봄이 오면 꽃이 피어
바바람불면 상에 누워 옛얘기 같이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도종환 시인의 <고두미마을에서> 일부 인용
신채호 선생의 묘소 자리는 그가 유년시절 살던 집터다.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 시던 단재 선생의 유언을 차마 문중들이 지키지 못하자 일제는 묘소를 쓰는 것을 철저히 방해하였습니다. 그가 살던 집터에 몰래 유해를 묻어야 했으며, 집터가 묘역이 되었던 이유다. 단채 신채호 선생은 시인이기도 했다. 최근에 그의 시를 번역한 시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
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 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신채호의 시 <하늘북> 전문 -박정규 번역
이번 기행은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손병희 선생의 생가를 답사하면서 이분들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합성지명이다.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충북의 도청 소재지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청주시에 인접하여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청주는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영역이었으며, 백제 시대에는 상당현이라 불려지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의 지리적인 요충지로 인정받아 5소경 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 청주란 지명은 고려 태조 때에 얻었으니 1,000년이 지났다.
청주시를 관통하는 무심천은 국절봉에서 발원하여 속절없이 미호천으로 흘러가지만 지나는 곳에 평야를 만들어 이 고장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풍수학적으로 청주는 배가 떠서 가는 형태인 행주형(行舟形)이라고 믿었기에 용두사 철당간을 청주의 중심에 세웠던 이유다.
청주는 교육의 도시다. 고려시대에〈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곳으로 인정받았기에 교육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로 인쇄된 고서로 유네스코로부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이다. 〈직지>를 인쇄했던 흥덕사지를 답사하면, 그 역사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다. 금속활자의 역사적인 자료를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덕사지
청주는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최초로 인쇄출판을 하였던 고장이다. 이것을 증명한 곳이 흥덕사지(興德寺址)다. 1985년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서원부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 새겨진 금구조각과 황통10년(皇統十年)흥덕사(興德寺)라 새겨진 청동불발(靑銅佛鉢) 뚜껑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청동불발은 청동으로 만든 밥그릇이다.
1377년, 고려 우왕3년에 이 터에서 금속활자를 직접 주조하여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유적지로 판명이 난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학계에 오랜 정설로 남아 있던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세계심판>보다 무려 63년이 앞선 것이다. 발굴조사 전에는 흥덕사라는 사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청주목외(淸州牧外), 즉 청주 교외라고만 문헌에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 줄여서 <직지>는 현재 프랑스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흥덕사지에서는 금당지, 강당지, 탑지, 서회랑지 일부가 확인되었다.
흥덕사는 신라하대인 9세기경에 창건되고, 조선 전기 때인 15세기에 폐사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직지
청주는 교육의 도시이며 <직지>의 고장이다. <직지>는 불경을 요약한 2권의 책명을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이 책을 엮은 사람은 고려말의 승려 경한(景閑)이다. 그는 불교 경전에서 선(禪)의 핵심부분을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나름대로 엮은 책을 출간한다.
상권과 하권으로 엮은 이 책의 이름은 사뭇 길다. 정식적인 책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며, 줄여서 부르는 책명은 <불조직지심체>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직지>는 책의 표지 중앙에 붙여진 책명이다. 이 고서는 승려 ‘경한’이 1372년(공민왕21)에 엮었다.
경한(1299~1374)은 전라도 고부 출신이며, 40년 동안 스승 없이 많은 사찰을 답사하며 도를 터득한 승려였다. 보우의 추천으로 공민왕에게 법어를 전달하며 출세한 중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절한다. 다만 나옹화상이 천거하여 신광사의 주지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내 그는 여주 취암사에서 승려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세상을 떠날 때에 "이르는 곳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법명이 <백운화상>이다.
그는 <직지> 하권이 프랑스국립박물관에서 발견되어 유명인사가 되었다.
경한 스님은 세상을 떠난 후 600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의미 있는 역사적 사료는 이렇듯 준엄하고 확실하며, 보은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직지의 내용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의 역사적인 전기를 읽고 고부처와 승들의 게(偈), 송(頌), 찬(讚), 명(銘), 서(書), 시(詩), 법어, 설법(說法) 등에서 선(禪)의 핵심부분을 선택하여 편찬하였다.
상권에는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毘舍浮佛),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일곱 부처와 석가모니불로부터 불법을 계승한 인도의 제1조(祖)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하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까지의 28존(尊)이 게재되어 있다.
또한 승려로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의 5조사와 그 법통을 이은 안국대사(安國大師)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권에는 아호대의화상(鴉湖大義和尙),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등 다양한 승려들의 게와 시(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직지 하권은 39장으로 편찬되었지만, 첫째 장은 사라지고 총 38장이다.
1888년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콜렝 드 플랑시’는 취미가 고서 수집이었다.
그는 아예 공사관 출입문에 다음과 같은 글 귀“고서를 고가에 구입하겠습니다” 라고 써 놓고 고서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직지>도 구입했던 것이다.
‘플랑시’는 직지 표지에 “한국에서 인쇄되었던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라고 기록했지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1911년 직지가 프랑스 경매에 나왔을 때에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다른 한국 고서 80종은 구입하면서도 이 책은 제외했다.
보석상이자 고서 수집가였던 ‘앙리 베베르’가 구입하여 그의 소유가 되었다가
1943년 ‘앙리 베베르’가 세상을 떠날 때 유언으로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된다.
현재 직지의 도서번호 109번, 기증번호 9832번으로 프랑스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관 중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원본 대신 복제품이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프랑스 방문길에 선물로 받아온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연구가인 ‘존 맨’은 자신의 저서 <구텐베르크의 혁명>에서 1234년 고려에서 편찬된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찍은 세계 최초의 인쇄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상정고금예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독일 구텐베르크가 1455년 금속활자를 개발해 최초로 <42행 성서>를 인쇄한다. 직지는 이보다 78년이나 앞서서 인쇄를 한 고서이니 우리가 자랑할 만하다.
청주시는 1996년부터 직지 원본 상하권을 찾는 운동을 벌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주 중앙공원(中央公園)
청주시 중심에는 이름처럼 중앙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무려 1,300년 동안 청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청주는 서원소경이 된다. 당시 서원소경 지역이 이곳 중앙공원 터가 될 것이다.
이곳에는 수령 1,000살 먹은 은행나무가 아직도 자라고 있다. 일명 압각수다.
은행잎이 오리발처럼 생겨서 압각수(鴨脚樹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시내 중심지에는 국보 41호인 용두사(龍頭寺)터다. 이곳의 철당간은 신라말기와 고려초기의 사찰로 추정된다. 철당간은 ‘용두사’라는 절 입구에 있던 불기(佛旗)를 걸던 게양대였다.
청주는 풍수지리를 논 할 때에 무심천 위에 떠있는 배의 형상이다. 그래서 주성(舟城)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용두사터 철당간은 이 배의 돛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배를 안정적으로 운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중심지에 돛대를 설치해야 하는 이치다. 이곳은 또한 자랑스런 조상들의 숨결이 서린 곳이다.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를 기리는 비와 한봉수의 송공비, 박춘무의 비가 이를 입증한다.
이 고장을 빛낸 다양한 비석들이 약 50여개가 중앙공원내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곳은 비림박물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앙공원터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1,000살이 된 압각수은행나무에 관한 의미 있는 일화가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1390년, 고려 공양왕 2년에 이초와 윤이가 명나라 태조에게 고려 조정을 모독하는 무고를 한다.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며, 이를 반대한 이색 등을 살해하려 했다는 내용이었지만 그러나 이 내용은 거짓말이었다. 이 무렵에 이색 등 10여명이 '이초의 난'에 연루돼 청주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큰 홍수를 만난다. 피할 곳이 없던 이색 등은 이 은행나무에 올라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한 나무라고 전해온다.
충청도의 병마절도사가 중앙공원내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이곳이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터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799년부터 중앙공원자리에서 천주교 순교자 약 20여명이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둥그런 화강암에 <순교자현양비>만이 이들의 죽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망선루는 원래 취경루란 당호를 가진 건축물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를 열었던 유서깊은 장소다. 고려말에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자 안동까지 피난을 내려왔던 공민왕은 돌아가는 길에 청주에 행궁을 설치하고, 약 6개월간을 머물렀다.
이때에 과거시험을 중앙공원 자리에서 실시하고 합격자명단을 이곳 취경루에
걸었다고 한다.
1461년 세조 7년에 이백상 목사가 새로 고쳐 짓고 한명회가 편액의 명칭을 망선루라고 고쳐 지어 쓰고 걸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한다. 그러나 망선루는 1922년 일제에 의해 헐리게 되자 1923년 청주제일교회로 이전한다. 이것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은 김태희였다.
이후 망선루는 세광학교의 교사로 사용되다가 1999년에 이곳 중앙공원으로 옮기고 옛 원형을 보존하였다.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은 본영의 출입문이었다. 병마절도사 본영은 충남 해미현에서 1651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종2품의 충청도병마절도사가 이곳에서 근무를 하였으니 청주가 충청도의
군사요충지가 되었던 것을 증명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목조 2층의 팔작 기와집이다.
■ 임진왜란과 청주성전투
의병은 외침을 받아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에 백성 스스로가 애국의 마음으로 조직하는 자위군이다. 나라의 명령이나 동원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하여 종군하는 민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의병의 역사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지만, 몽고의 침략이 있던 고려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의병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일제에 저항 했던 동학군을 포함한 조선 말기의 의병활동은 항일 독립군의 토대가 되어 주었다.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이런 의병정신이 국난을 당할 때마다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은식 역사학자는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의병의 활약사에 빛나는 역할을 감당했던 때는 임진왜란과 조선 후기의 의병이었다. 모두 왜적과의 싸움이었다.
일본군은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요충지에만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일부 지역은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은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적인 저항의 온상지가 되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의병의 신분은 다양했다. 국난을 당하여 신분을 따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민도 의병이 될 수 있었다. 의병장은 대부분 글을 읽던 선비들이었다. 평소에 그 지방에서 덕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의병장의 인간됨을 보고 의병에 가담하는 경향이 강했다. 1593년(선조 26년) 당시 의병의 숫자는 대략 26,000명이었다. 이 자료는 1593년 1월에 조선이 명나라 원정군에게 알려준 의병의 숫자다.
영규대사는 승려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 스님부대를 지휘했으며 끝내 자신의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
본관이 밀양 박씨였으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였다.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서 태어나 계룡산의 갑사와 가산사와 보석사에서 승려로 수행했다.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은 충청도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성을 왜군에게 점령당한다.
1592년 음력 7월 말 승려 영규는 800여 명의 스님부대를 지휘하며, 옥천 가산사에서 대규모의 승군을 조직한다.
청주성으로 진격한 승군은 왜적과 대치하면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 의병장과도 긴밀하게 협공태세를 강구한다. 당시 청주성에는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7,000 병력 중의 일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1592년 음력 8월1일, 영규대사와 조헌 의병장이 지휘하는 3,600여 명의 스님부대와 의병, 관군의 연합군은 일제히 청주성을 공격한다. 이날 하루 종일 전투가 계속되었다. 스님부대와 의병들은 목숨을 바쳐 왜적과 백병전을 벌였다. 이런 결과 왜군은 승려부대와 의병의 사기가 매우 높다고 판단하여 그날 밤에 청주성을 포기하고 탈주한다. 이 싸움으로 3개월 동안 왜적에게 점령당했던 청주성은 탈환되었다.
청주성 탈환 싸움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패전을 거듭하던 육지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영규대사와 조헌 의병장의 뛰어난 지도력과 호국정신 낳은 결과였다. 청주성 탈환 전투는 스님부대와 의병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 전투는 의병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으며, 특히 승려부대의 참가와 승리는 이후 승군의 모집에 활성화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의병과 승병은 임진왜란 중에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부대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심장하다.
■신채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문학
일제강점기 때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탐구하여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독립운동의 첨병으로 싸우다가 일제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분이 있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이다. 그는 또한 시와 소설을 썼던 문인이며, 학자, 언론인, 사상가였다.
특히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사 연구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역사가 웅비했던 시대를 회상하면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신채호는 유년 시절 그의 조부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천재적인 머리를 타고난 그는 당시 한양에 있던 성균관에 입학한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현재 대전직할시 대덕구 산내면 어남리 도림 마을에서 태어났다.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본관은 고령 신씨로 신숙주의 18대손이다. 조부 신성우는 1867년에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지만 8세에 부친이 사망한 후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에서 살기 시작한다.
조부가 설립한 서당에서 9세에 <자치통감>, 13세 때에는 사서삼경을 완독한다.
청원 일대에서 신동이란 별명을 들으며 자란 그는
<삼국지>와 <수호지>를 탐독하며, 한시를 읽고 쓸 정도의 한문 실력을 지니게 된다. 조부는 충남 목천에 살고 있던 친구의 신기선에게 자신의 손자 신채호를 소개하여 장서를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허락을 받는다. 이후 신기선은 신채호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준 장본인이다. 신기선은 현재 교육부 차관급의 교육 관료였다.
청년시절에는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적인 애국계몽운동과 구국활동에 전념했다. 당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민족 사랑과 일제의 침략을 대비하자는 논설을 통해 민중들의 애국혼을 일깨우려고 사력을 다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와 야만적인 만행들을 폭로하고 위대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와 연관된 많은 논설과 영웅들의 전기를 집필한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해산 그리고 1910년 우리나라가 완전히 일제에게 망하자 신채호는 중국으로 망명한다. 만주와 북경 상해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집안을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에서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고 충격을 받는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 편을 만 번을 읽는 것보다 <집안>의 고구려유적지를 한 번 답사하는 것이 우리민족의 역사를 탐구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의 역사탐구는 왕조중심 사관과 일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강하게 부정하고, 자주적이며 강인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토대가 되었다. 이는 실로 감개무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로인해 우리의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의 주춧돌이 민족의 재단 놓여 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일제의 속박으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에서도 언어적인 협상과 보수적인 자치론이나 외교론을 철저하게 배격하였으며, 비타협적이고 무력에 의한 자주독립을 주장하였다.
충남 목천에 있는 신기선 본가의 장서를 읽으며 그는 더욱 많은 지식을 얻을 nt 있었다. 신채호는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19세 때에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성균관에 입학한 신채호는 변영만 같은 친구들과 벗하면서 성균관에서도 학문적으로 가장 촉망 받는 학생이 되었다. 당시 성균관 관장으로 근무하던 ‘이종원’에게 인정받으며 열정적으로 학습했다. 성균관내에 있는 도서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종로에 있던 서점에서 자신이 접할 수 없었던 책을 구하여 독파했다. 그의 역사 관계의 논문과 저서들 중에는 이때의 독서 내용을 기억하면서 쓴 것이 많기 때문이다.
성균관에서 공부 할 때에 독립협회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개최되곤 했다.
이 운동에 참여하다가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고향 마을에 설립되었던 문동학원에서 계몽운동을 하기도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까지 성균관에서 계속 공부하여 '성균관박사'가 된다.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였는데 이 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로 유명한 장지연이 사장으로 있던 신문사다.
1898년 독립협회 출신들이 창간된 황성신문에는 박은식 선생이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박은식 선생은 교육 역사 관계의 논설을 써서 민중을 계몽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우리민족에게 보물 같은 역사책을 저술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1905년 11월 17일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날이다.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며 체결한 강제조약이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의 외교권은 사라졌다.
황성신문은 을사늑약을 폭로하고, 시일야방성대곡 '이 날에 소리 놓아 크게 울리라‘라는 사설을 쓰고 일제에 저항했다. 일제는 이 사설을 이유로 황성신문을 무기한 정간시키고 신문을 압수하고도 모자라 장지연 사장과 직원들을 구속시켰다. 이 사건으로 신채호는 황성신문에 근무할 수 없게 되어 대한매일신보로 직장을 옮긴다. 박은식도 대한매일신보로 잠시 왔다가 다시 황성신문으로 돌아간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대한제국과 영국이 합작으로 창간한 신문이다.
사장은 영국인 베텔(Ernest T. Bethell, 裵說)이었지만 양기탁이 총무로 근무했다. 다행스럽게 영국인 베델은 우리민족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당시에 발행인이 외국인이면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아도 신문을 간행할 수 있었기에 신채호는 이 지면을 통해 대한의 역사와 민족의 앞길을 밝히고 일제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글을 발표한다. 그의 기사와 논설을 읽으면 민중들은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두 주먹에 힘이 오를 정도였다.
다음은 그가 대한매일신보에 썼던 논설의 제목이다.
<제국주의와민족주의>,<한국과 만주>,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만주와 일본>, <이십세기 신국민>, <일본의 삼대충노, 일본의 큰 충노 세사람>,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 <이십세기 신동국지영웅>, <유교계에 대한 일론>, <영웅과 세계>, <국수보전설>, <'애국' 두자를 구시하는 교육가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가족교육의 전도>, <동화의 비관>, <진화와 퇴화>, <신가국 삼관념)의 변천>, <서호문답>, <정신상 국가>, <국민의 혼>, <국한문의 경중>, <국문연구회 위원 제씨에게 권고함> 등이다.
그는 그렇게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어갔다.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용기있게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항일운동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였다. 황성신문을 사임한 신채호는 양기탁의 권고로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신채호의 애국적이고 정열적인 호소는 일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용기와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채호가 우리민족 역사탐구를 통해 얻은 민족혼과 대외투쟁의식은 실로 눈물겨운 결실이다. 역사관계 논설과 논문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단행본을 발행하면서 그는 우리민족의 역사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그 토대를 만들어 간다.
특히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려고 사력을 다했던 민족의 영웅들의 일대기를 서술했다.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장군등이 그 예다.
우리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독립의 모태가 되는 것임을 역설한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했던 사관은 민족 사관이었다. 고려의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의 사대주의자로 비판하며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다르며 그들과 대등하게 대결하면서 왔다는 자부심의 근거들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나이 31세 되던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4개월 전인 1910년 4월, 신채호는 31세 때에 망명을 선택한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를 방문하여 춘원 이광수 등의 환영을 받기도 한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탐방하고 같은 해 9월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 당도한다. 이곳에서 그는 3년간 신민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다.
권업회를 창설하고 권업신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문사 운영은 순탄하지 못했다. 재정난으로 운영을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울 때 김규식으로 부터 초청을 받아 상해로 간다.
1년간 상해에 머무르면서 그는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였으며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운다. 언더우드의 양자였던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지만 그는 독특한 단어 암기와 해석을 통해 기본이 쓴 <로마제국흥망사>와 카라일이 쓴 <영웅숭배론>을 원서로 읽었다고 하니 그의 천재성을 알만하다.
무엇보다 그는 1914년 환인현에서 1년간 거주하면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인 만주를 실제로 답사한다. 이 답사를 하면서 "집안현의 유적을 한번 답사하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김부식을 비판하면 민족사를 감명깊게 설파했다. 그는 급기야 대종교에서 설립했던 동창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아예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한다. 이 저서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그의 삶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880년 12월8일. 충남 대덕 출생
1887년 7세 때 조부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귀래리로 이주한 후 이곳에서 성장
1898년 성균관 입학하고 독립협회운동
1901년 <문동학교>에서 애국계몽운동
1905년 성균관 박사<황성신문> 논설위원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위원
1908년 <가정잡지」발간
1910년 중국 망명
1911년 <권업신문>주필 블라디보스토크
1914년 고구려 유적지 답사
1915년 북경에서 <조선상고사> 집필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충북)에 피선됨.<신대한> 창간
1920년 결혼 북경에서 배우자: 박자혜
1922년 <조선혁명선언>기초 의열단 행동강령
1924년 <다물단선언문>기초 무장독립운동단체
1925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가입
1927년 <신간회> 발기인
1928년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발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류 되어 체포됨.
1930년 일제의 대련 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송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함.
영오(詠誤)-신채호(申采浩)
-김경식 번역
我誤聞時君誤言(아오문시군오언) 내가 잘못 들었으니 그대 역시 잘 못 말하였네
欲將正誤誤誰眞(욕장정오오수진) 오류를 수정하려는데, 그 오류를 누가 옳다고
하겠는가
人生落地元來誤(인생락지원래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본래 모순인데
善誤終當作聖人(선오종당작성인) 모순을 잘 고치면, 끝내는 성인이 될 수 있다네
계해십월초이일(癸亥十月初二日)-신채호(申采浩)
-김경식 번역
天空海闊晋悠悠(천공해활진유유) : 하늘은 빈 공간 바다는 아득하게 넓구나
放膽行時便自由(방담행시편자유) :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떠도니 자유롭네
忘却死生無復病(망각사생무복병) : 죽고 사는 것을 망각하니 다시는 병도 나지 않네
淡於名利更何求(담어명리갱하구) : 명리에도 관심 없으니, 다시 무엇을 구한단말인가
江湖滿地堪依棹(강호만지감의도) : 강과 호수 땅에 의탁하여 살 수 있고
雪月邀人共上樓(설월요인공상루) : 눈 내린 달밤에 함께 누각에 오른다네
莫笑撚自吟獨苦(막소연자음독고) :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난과 고독을 비웃지 말게
千秋應有伯牙酬(천추응유백아수) : 먼 훗날에 뒤에 내 마음 알아 줄 사람 반드시 있으리라
술회1(述懷1)-신채호(申采浩)
-김경식 번역
善惡贊愚摠戱論(선악찬우총희논) : 선과 악은 모두 다 희극 같구나
耶回孔佛瞞相嗔(야회공불만상진) : 기독교, 회교, 유교, 불교가 서로 자랑들 하지만
辨看靑白之非眼(변간청백지비안) : 긍정과 부정의 잣대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닌데
散作塵埃倒是身(산작진애도시신) :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 우리 몸이라.
妄念慈悲還地獄(망념자비환지옥) : 생각이 없으면 자비도 지옥일 수 있으며
任情屠殺使天人(임정도살사천인) : 마음에 새기면 살생도, 하늘의 일이 될 수 있
吾人來去只如此(오인래거지여차) : 우리 삶과 죽음도 다만 이와 같구나
捨假求眞更不眞(사가구진갱불진) : 위선을 버리고 진리를 찾는 것이, 참
진리라네
술회 2 (述懷 2)-신채호(申采浩)
-김경식 번역
鷄狗於人本無罪(계구어인본무죄) : 닭이나 개는 인간에게, 본래 지은 죄가
없지만
只爲口腹日殺之(지위구복일살지) : 다만 사람이 식사 하던 날에 죽이는
것이라네
惟有强權而已矣(유유강권이이의) : 세상에 오직 하나 강인한 권력이 있을 뿐
이구나
空言仁義欲何爲(공언인의욕하위) : 공허하게 인과 의를 강조하니 어찌 할 것인가
席門談道眞适士(석문담도진괄사) : 탁상공론으로 도를 말하는 것은 교활한
선비이고
手劒斬人是快兒(수검참인시쾌아) : 칼로 악인을 살상하는 것이라야 진정으로
남아라네
云云聖哲果何者(운운성철과하자) : 성현이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高標二字瞞相欺(고표이자만상기) : 성현 두 글자 높이 받들지만 서로를 속이는구나.
북경우음(北京偶吟)-신채호(申采浩) 북경에서 우연히 읽다
- 김경식 번역
寂寂桃燈坐(적적도등좌) : 적적하여 등불 켜고 앉았네
非爲守六庚(비위수육경) : 여섯 도리를 준수하려는 것은 아니네
石才慙後死(석재참후사) : 재주 없는 자로서 오래사는 것도 부끄럽구나
無漏悟前生(무루오전생) : 다른 삶이 없고보면 내 전생의 삶을 알 만하도다
世薄難爲客(세박난위객) : 세상의 인심은 각박하여 길손이 되기도 어렵구나
春來若有聲(춘래약유성) : 봄이 오니 어떤 소리 들리가 듯하네
一朝貧富異(일조빈부이) : 하루 아침에 빈부가 달라지고
始識故人情(시식고인정) : 친구의 정도 변할 수 있음을 알겠네.
백두산도중1 (白頭山途中 1)
- 김경식 번역
人生四十太支離(인생사십태지리) : 인생 사십년이 너무도 길구나
貧病相隨暫不移(빈병상수잠불이) : 가난과 병마가 잠시도 날 떠나지 않았었네.
最恨水窮山盡處(최한수궁산진처) : 한스럽구나 물이 없고 나무 없는 산이여
任情歌曲亦難爲(임정가곡역난위) : 자유롭게 노래하기도 어렵구나.
■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삶과 죽음
의암 손병희(1861~1922)은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했다.
손두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둘째부인 최씨이다.
유년시절부터 자신과 같은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지니고 성장한다. 그는 가난한 삶에서도 의협심을 가지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자들을 증오했다. 강자에게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12세 때 관청에 공금을 납부하러 가던 중 눈길에 쓰러진 사람의 구휼비로 그 비용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감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한기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던 정이 많았던 청년이었다. 그의 나이 22세 때인 1882년(고종19년) 큰조카인 손천민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한다.
1885년 2대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을 독대하며 독실한 신도로 거듭났으며,
1892년에는 최시형등 동학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한다. 동학의 대표 40여 명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외쳤으며, 충북 보은군 장내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척양등 조선 조정에 대하여 시위를 벌인다. 이런 일련의 운동대열에서 손병희는 최시형의 참모로 크게 활약한다.
삼정의 문란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통한 민심 이반은 동학교도들의 교세를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에 전봉준의 남접의 동학교도들은 조정과 싸움을 준비하고 항쟁한다. 남접의 무력 투쟁에 대해 최시형은 타협을 하려고 했다.
이 무렵 손병희는 북접통령으로 임명되어 통령기를 받고 공주전투 등 왜적과 싸움을 전개한다.
북접의 동학교도를 지휘하여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한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수 많은 동학도들이 이 싸움에서 죽어갔다.
엄청난 절망감을 경험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최시형과 충주부근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최시형과
손병희는 계속해서 관군들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함경도와 평안도지역으로 피신지역을 옮기고 교세를 오히려 확장한다.
이런 행동들로 인해 그는 교주 최시형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는다. 1897년 12월 24일 제3세 교주로서의 실질적인 동학의 책무를 인계 받는다. 1898년 3월 최시형이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6월에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교주가 된다.
교주가 된 뒤에 그는 우리 국토의 많은 기행하며 동학의 재건에 목숨을 건다.
우금리전투에서 대패했던 원인을 찾기 위해 세계사를 공부할 필요를 느낀 그는 미국을 살펴볼 계획으로 1901년에 동생 병흠과 이용구와 함께 나가사키를 거쳐 오사카에서 생활했다. 이곳에서 감시와 목숨에 위협을 느끼자 다시 상해에서 몇 개월간 미국행을 결행하려고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서 당시 유학을 하고 있던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이진호, 박영효등과 가명을 하고 만나기도 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외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망명인사들과 일본에 유학생들은 국내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자극을 주었다.
손병희는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중화와 일원화 그리고 비폭력의 3개 원칙을 정했다.
독립운동은 폭넓은 지지를 위해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등과 이완용까지 설득하여 독립구국에 대열에 합류시키고자 했던 사람이 손병희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한다. 결국 그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3.1운동이 주체로 준비하였다.
초기에는 민중봉기를 할 생각도 하였지만 결국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비폭력운동으로 3.1운동을 기획했다.
평화적인 토대위에 3.1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손병희의 전략이었다.
3,1운동 당일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검거되어 3년형을 구형받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그러나 1922년 5월19일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위가 소파 방정환이다.
■ 신동문 시인의 삶과 문학
신동문 시인은 1927년 7월20일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아버지 김재한과 어머니 김대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건호’다. ‘東門’이란 이름은 폐질환으로 충북 도립병원에 입원 해 있을 때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날마다 자신의 병상에서 내려다보면 시신(屍身)이 충북도립병원 동문을 통해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자신의 처지를 연상하며 강렬한 죽음으로 떠나가는 이들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본명인 신건호란 이름을 버리고 시구문(屍柩問)인 동문(東門)을 평생 이름으로 삼는다. 죽어 떠나가는 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청주도립병원의 동문(東門)이 되고 싶었을 터이다.
마지막 삶의 안식처였던 단양행은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삶의 안식과 봉사처로 삼았던 곳이다. 그는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그 해 ‘풍선과 제3포복’을 출간했는데 이 시집은 그의 유일 시집이 된다. 이 무렵 그와 현실 참여적인 의지를 보인 시인이 신동엽 시인과 김수영 시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에게는 중요했지만 출판을 통한 독자들과의 교류를 중시하여 ‘새벽’ ‘사상계’ ‘신구문화사’ ‘민음사’ ‘창작과 비평사’에 근무하며 당시 진보 문학지의 토양을 개척한다. 김수영, 신동엽, 고은 시인,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진보적인 작가들이 모인다.
신동문 시인은 1964년 경향신문 특집부장으로 근무하며 '김삿갓 따라 강산천리'를 연재했다. 이 무렵 쌀값이 계속 오르자 어느 독자의 "북한에는 쌀이 남는다니 수입이라도 하자"는 투고를 신문에 게재한다. 이 기사가 화근이 되어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에 강압에 의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굽히지 않는다.
이런 고난의 길에서 피와 땀과 눈물로 얻은 시가 있다. 이 시는 그의 삶이 전형을 보여 준다. 끝내 ‘내 노동으로’ 란 시를 끝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 문인에게 붓과 펜을 뺏는 세상은 불행한 시대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속에는 굽이굽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옥에 갇히고 삼족이 멸했다. 일제강점기에 당한 그 참혹한 자존심의 손상을 이 민족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국광복과 6.25, 그리고 4.19 혁명이 끝난 후에도 이 땅에는 글쓰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태백산맥을 썼던 소설가 조정래는 반공단체들에게 집단으로 고발을 당해 약 10년 넘게 검찰에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판결을 받지 않았던가. 그 세월은 그에게 절망과 죽음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3백 만권이 더 팔린 책의 지은이를 상대로 벌이는 이념과 분단의 전쟁으로 인한 원한과 분노는 50년이 되어도 풀리지 않았다. 이념의 갈등은 여전히 우리사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통일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런데 신동문 시인은 1960년 새벽 편집장 시절 민감한 이념 소설인 최인훈의 '광장'을 게재한다. 원고지 600장인 최인훈씨의 중편소설이었다. 이 작품이 게재될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은 4,19혁명으로 잠시 자유화의 바람이 일렁이던 시절이었다. '새벽'지의 주간으로 있었던 신동문이 최인훈의 '광장'을 극적으로 게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시대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문예지도 아닌 곳에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게재한 것은 신동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으리라. 그는 통이 크고 배짱이 있어 겁이 없었다. ‘광장’은 해방전후사와 6,25로 이어지는 시대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다. 지금도 전쟁과 이념, 통일문제에는 단골로 거론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젊은 지성인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니 신동문 시인의 작품을 보는 예리함과 통찰력을 느끼게 한다.
그의 체구는 호리호리하고 얼굴은 희고 맑았지만 의지와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첫사랑(김재숙)의 여인이 6,25 전쟁 중에 숙명여대 기숙사에서 있다고 믿고 그녀를 찾아 한강을 맨 몸으로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 공군 사병시절에는 직업 권투선수 출신의 거구의 미군을 눕히기도 했던 호기 있던 젊은이였다.
그러나 1993년 추석이 가까울 무렵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병명은 담도암이었다. 이 병은 아직도 무서워 모두들 떨고 있는 병이다. 74년 신동문 시인의 어머니 장례식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고은 시인은 ‘문의마을에 가서’ 라는 제목으로 써서 발표한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짤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고은 시인의 시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전문
고은의 이 시는 문학평론가 김현이 수작으로 꼽은 작품이다. 고은의 대표작이 되었다. 죽음에 관한 놀라운 성찰을 하고 있는 고은 시인은 이후 큰 작가로 거듭난다. 신동문 시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이렇듯 고은 시인에게 시작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했다. 청주시 문의는 신동문 시인의 고향이다.
최근 이곳에 신동문 시인의 시비가 건립 된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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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리 공부하고 가야 겠지요^*^
저도 서울에 있다면
김경식 선생님따라 문학기행을 다니고 싶은데
너무 멀러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