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설교
(요한복음 15:5-17)
오늘 교회당 올 때 부모님 차 타고 온 사람? 돈 내고 차 타고 왔나요? “저는 8살이니까 500원 낼게요~” 하고 돈 내고 온 사람 없지요? 왜요? 가족이니까! 차를 사고 운전하신 분은 부모님이시지요? 그런데 마치 여러분이 차를 사고 운전한 것처럼, 여러분은 차를 타고 왔지요? 부모님과 여러분은 한 가족이니까!
버스나 전철 타고 온 사람? 혹시 버스나 지하철 타면서 “기사님, 잘 탈게요~” 하고 돈을 안 내고 타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부모님이 곤란해지실 거예요. 왜요? 버스랑 전철은 여러분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기사님도 여러분의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게 이런 의미예요. 부모님이 사시고 운전하신 차가 마치 여러분 것이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하신 일을 모두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셨어요. 예수님만큼 사랑받고, 예수님만큼 칭찬받는 사람이 된 거예요. 어때요? 정말 감사하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에는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게 또 있어요.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오셔서 여러분과 같이 사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여러분이 하는 고민,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 모두 아시는 분이세요. 그리고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시죠.
그런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서 같이 사시는 거죠. “~~야 네가 미워하는 저 친구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랑한단다. 미워도 조금씩 사랑해 보지 않을래?”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예수님의 마음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닮아가요.
예수님과 하나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기억하면 좋겠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거!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거!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예수님 사랑 듬뿍 받고, 예수님 닮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바라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요한복음 15장 5-17절)
[ 서론 ]
우리는 누구나 살고 싶어 합니다. 단순히 숨이 붙어 있는 생존을 넘어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운동도 하고 맛난 밥도 먹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지요. 우리는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들어서 사람다운 삶, 생명력 있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우리를 가리켜 열매를 맺는 가지, 그러니까 생명력 있는 가지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에 관해 세 가지로 말씀을 들읍시다. 첫째,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정의입니다. 둘째, 생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생명의 목적입니다. 셋째, 생명은 어디서 오는가? 생명의 근원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누리며, 생명력 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생명의 정의: 사귐, 죽음에서 생명으로 ]
첫째, 생명의 정의입니다. 생명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귐입니다. 5절입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기준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 사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사귀지 않고서는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로 이 사실을 쉽게 알려주십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나뭇가지는 살아 있나요, 죽었나요? 아무리 생생해 보이더라도 그 가지는 죽었습니다. 나무를 떠난 가지는 시들어 갈 뿐입니다. 6절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1) 우리가 독립적인 생명체가 아닌 두 가지 이유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 생명을 얻고 유지할 수 있는 독립적인 생명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창조주 예수님께 의존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유가 오늘 본문과 더 들어맞습니다. 우리는 죄로 죽었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죄요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죽었습니다.
마가복음 7:21-22입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런 특징을 두 글자로 표현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죽.음.”입니다. 우리는 죄로 죽었습니다. 주님 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죽음을 왕성하게 촉진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순종, 그리스도 없는 예배, 그리스도 없는 사랑은 종교의 옷을 입은 죽음입니다.
죄로 죽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생명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6:51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 예수님과 연합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습니다.
2) 연합 vs 접촉 – 새로운 심장과 살갗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이 우리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죄 용서, “의롭다”라는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이 모두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살게 하는 새로운 심장이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는 울타리, 옷, 살갗, 피부이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뚫지 않고서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합이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만 믿음과 예수님의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과의 연합’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접촉’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무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느 날 제가 나뭇가지를 하나 가지고 와서 그 나무에 올려놓습니다. 제 실력이 좋아서 나뭇가지가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나뭇가지는 나무와 연합한 것입니까, 접촉한 것입니까? 접촉한 것입니다. 나무에서 아무런 진액도 생명력도 받지 못하고, 그저 갖다 대어진 상태일 뿐입니다. 그 가지는 죽은 것입니다.
여기 제 손과 팔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아무도 ‘접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 손과 팔은 하나입니다. 끊임없이 생명력을 공유하며 한 몸을 이루고 있지요. 제 손과 팔은 연합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접촉하고 계십니까, 연합하고 계십니까? 둘을 구별하려면 이 질문에 답해 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심장과 살갗으로 여기며 사는가?” 즉,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인식을 가지고 사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 그 무엇도 우리 삶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안정감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며 용서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을 회복하신 것처럼 학업과 직장생활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 학업과 일과 관계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지 정직하게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당에 가둬둔 채 필요할 때만 ‘접촉’하러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접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대화하는 일상, 일하고 사랑하는 모든 삶에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들을 보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가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약속을 덧붙이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분은 우리의 모든 일상에 함께하셔서 우리의 심장, 우리의 살갗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상하며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십시오.
3) 성령으로 가장(假裝; pretend)하기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과의 연합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치 그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가장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예수님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하셨을 생각과 말과 행동을 좋아하고자 노력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하지 않으셨을 생각과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처럼 살기 싫어하며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보면서 다시 순종합니다. 믿음과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즉, 믿음-순종-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반복되는 리듬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정신승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은 정신승리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고, 그분처럼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기도는 분명 힘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은, 단순히 규칙들을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가깝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에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려가는 것입니다.
초상화를 그리려면 상대방을 계속 보아야 합니다. 어떤 생김새를 가졌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깊숙한 인격까지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오셔서 사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예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을 닮아갑시다.
[ 생명의 목적: 사랑, 생명에서 죽음으로 ]
자,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곧 우리의 생명입니다. 죽어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 목적은 무엇일까요? 즉,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요? 생명의 목적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1) 자기 사랑 – 생명을 가장한 죽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사랑은 생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사랑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명령이 있다면,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일 것입니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신을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점잖은 자기 사랑으로 피해를 보는 유일한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 독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나 자신을 참으로 사랑해 줄 자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수명은 유한합니다. 우리의 지성은 언젠가 퇴화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몸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날마다 다잡지 않으면 흐트러집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죄로 죽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자기 사랑은 생명을 가장한 죽음입니다.
2) 친구 사랑 – 죽음을 가장한 생명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내게 호감을 주거나 이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에 분명한 조건을 다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도움이 되는 사람, 호의를 보이는 사람만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적당히 사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13절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친구 사랑은 서로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웬만해서는 친구를 대신해서 생명을 내어놓을 일이 없습니다. 대신,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사랑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나의 성향을 넘어, 나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는 사람까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될 이유에 집중하고는 합니다. ‘호의를 베풀어도 별 반응이 없어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성격이 맞지 않아서, 고집이 세서’ 등등.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일찌감치 꺾인 가지가 되어서, 지옥의 땔감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26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자신을 넘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비로소 조금이라도 알게 됩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은 죽음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넘어 친구를 사랑할 때, 우리 안의 생명이 약동합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친구 사랑은 죽음을 가장한 생명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교회 – 온전한 성장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이지요. 교회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야말로 열매가 가득한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떤 면에서 교회는 공동묘지입니다. 친구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자아가 묻힌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산산이 조각나는 비명, 처절한 회개의 기도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분만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생명력 가득한 울음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리고 탄생이 끝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은 자라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4:15-16입니다.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십시오. 자기를 넘어 서로 사랑함으로써 자라가십시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들어 옆의 친구들을 바라보십시오.
홀로 앉아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 마음의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 육아에 몰두하여 예배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이들, 여러분 서로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넘어,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여러분이 받은 생명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교회를 세워갑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닮아 사랑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알고, 그분을 닮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자기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 예수님의 친구로만 가득한 곳입니다. 교회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누리시길 바랍니다.
[ 생명의 근원: 은혜, 생명에서 생명으로 ]
1) 하나님의 가장(假裝; pretend)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사랑하며 생명에서 죽음으로도 옮겨갈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이 생명의 근원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만약 은혜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별 설교가 끝나자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하고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신할 것을 모두 알고서도 그들을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될 만해서, 그만한 자격을 갖췄기에 우리를 친구라 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분의 친구답게 만들기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친구라 불러 주십니다. 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마치 우리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힘쓰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친구로 대하고 계셨습니다. 미래에 완성될 영광스러운 우리의 모습으로 앞당겨서 우리를 보며 우리와 사귐을 나누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실제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친구로 대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어머니와도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진짜 말을 배우기 전에도 마치 말할 줄 아는 아기를 대하듯이 함으로써 말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을 배웠습니다. 만일 우리를 기른 분들이 우리가 당장에 말을 하지 못하니 거기서 멈췄다면, 아무도 말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배반할 것을 아시고도 그를 친구라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다시 베드로를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배반의 대가를 혹독하게 요구하시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5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중략)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사명을 맡기시며, 그를 친구로 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베드로의 배반까지 모두 떠안은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그분의 친구답게 자라게 합니다.
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며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이건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우리의 생명과 성장과 사랑에 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고야 마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반드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친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위한 일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사야 48:11입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3)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생명의 근원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은 그분께 기쁜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우리는 흔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떠올립니다. 분명, 하나님 아버지의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은 예수님께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처럼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의 얼굴에는 고통과 괴로움뿐만 아니라 기쁨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2:2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두려워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 자체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받고 서로 사랑할 것을 내다보며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뻐하며 이 생명을 누리고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토록 기뻐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참 좋겠지요. 나의 밑바닥까지 모두 알고도 그가 나를 기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구나 그분은 우리를 기뻐하다 못해 생명을 내어주셨고, 우리를 그분처럼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일이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갈수록 기뻐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사랑으로 친구가 생명을 누리기 때문에 우리는 기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은혜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주님은 우리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기쁘게 그 은혜에 참여합시다.
[ 결론 ]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고 싶어 합니다. 생존을 넘어 생기 있게, 사람답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귐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옵니다. 이 생명은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생명에서 죽음으로 옮기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 갑니다. 그 과정 중에 생명의 근원이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발견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생명,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죽음을 택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묵상하는 주간이지요. 이번 주 오한장은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고통과 인내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기쁨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닮아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서 생기 있게 살아가십시오. 그와 같이 참으로 살아 있는 우리 관악교회 되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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