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죠지뮬러”라는 별명을 지닌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소외된 외국인을 섬긴, 30년의 기도사역자이며, “주님, 오늘도 부탁해요”라는 책의 저자인, 홀리네이션스 선교회의 “마마킴 김상숙 권사”입니다. 권사님에게 믿음의 자극을 준 사람은,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입니다. 조지 뮬러는, 평생동안, 성경 200독과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권사님 역시, 200독을 향해,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독을 향하는 것이, 읽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암송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마음 판에 새겨진 말씀들이, 삶의 순간 속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만날 때마다, 신기하게도 마치, 컴퓨터의 엔터키를 누른 것처럼, 튀어나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이, 성경 읽기를 시작한 것은, 성경읽기의 유익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 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겁니다.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를 비롯하여, 작사한 곡이 20곡이나 찬송가에 있는, 크로스비 여사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여섯 살에는, 시력을 잃어, 평생을 시각 장애자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0여 편에 이르는 찬송가를 작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크로스비 여사의 삶처럼, 권사님도, 늘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가운데, 주신 사명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 분이 깨달은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경외 받으실 분이지, 우리의 거래 대상이 아니다. 그 무엇을 해도 아버지의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한다는 것이 기본 정신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는, 더욱더 넘치는 감사로, 주님 앞으로 나간 권사님은, 감사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언어는 감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축복을 가져올 수 있는 전주곡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귀가 좋아하는 불평과 원망과 두려움의 언어로 기도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또한 아버지는 감사의 언어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감사의 언어로 아버지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로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시절, 로버트 레이턴 목사는, “기도는 천국의 창고를 열고 보화를 가져오기 위한 열쇠와 같고, 간절한 기도는 강하고 큰 날개를 가져서 어떤 새들보다도 높이 날아 하늘 보좌에 닿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간구하는 모든 것을 얻은 듯, 왕궁에서도 원수들을 담대하게 꾸짖는다”고 했습니다. 김상숙 권사님이나 로버트 레이턴 목사님이나 오늘의 우리나 모두가, 삶 속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두가 똑같이 겪는 어려움이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자인 다윗역시, 달랐습니다. 다윗과 함께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삼상 30장을 보시면, 다윗과 함께 했던 자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공하여, 그들의 가족과 가축들을 모두 가지고 가고, 성을 불태움으로 인해, 다윗을 향해 돌로 치려하는 상황에서조차,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찬양을 인도하는 자를 따라, 이스라엘 전체가 다양한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입니다. 그리고, 이 찬양의 주제는, 어떠한 곤란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때,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는 겁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습니다.
본문을, 쉬운 역으로 보시면, “내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에 응답해 주소서. 나의 의로우신 하나님 내 근심을 덜어 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받으실 때, 어떻게 응답하신다고 합니까?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그럽게 하셨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브”는 “넓게 하다, 여지를 만들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풍요로움과 안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과거에 풍성하게 받았던 복을 회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상을, 한적한, 여가시간에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대적들에게 포위당하거나 압박을 당할 때, 언제나 그를 도우심으로, 대적들의 포위망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을 높이 세우셨습니다. 또, 다윗이 슬픔과 탄식 속에 있을 때는, 친히 기쁨과 위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윗 곁에서, 다윗과 함께 하시며, 다윗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셨던 겁니다. 다윗은 이것을 회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이 당하는 곤경도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을 굳게 믿는 가운데,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는 성도된 우리 모두의 의무요, 특권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의무요, 특권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몇몇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 말하는 그 정도로만 알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우리 안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다윗이 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저 그렇게, 기도에 들은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삶 속에 새겨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렘 33: 3을 보시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인, 성도들의 간구를 듣습니다. 그리고, 응답합니다. 그래서, 약 5: 16을 보시면,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의인”이 누굽니까? 도덕적으로 선한 자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 14: 13 – 14을 보시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을 버겁게 여깁니다. 또는, 기도하는 것을 하나의 형식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행 1: 14과 같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여기를 보시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막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거나 설계도를 작성할 때, 막연하게 하지 않듯, 기도도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는 현실로 다가오는 미래입니다. 살전 5: 17을 보시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또, 사 59: 1 – 2을 보시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구약 66권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믿습니까? 믿으시길 바랍니다.
찰스 스펄전은, 본문의 시작을,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시작함에 대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의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나를 지켜보고, 이 일을 하도록 도와주며, 심판자가 되시어, 내게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훼방하고 비방하오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본문 속의 다윗이 그러합니다. 본문에서, “의의 하나님”이란,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다윗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 부정하다면서, 정죄할지라도, 다윗은,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재판하심으로, 억울한 오해와 누명을 해명하실 것임을 믿었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십니다. 요 1: 48을 보시면,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나다나엘은 조용히, 무화과나무 아래에 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수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적에게 포위되기도 했고, 적진에 들어감으로, 생명이 위태로움이 눈 앞에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또, 다윗에게 지혜를 주심으로, 그 위태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이성을 초월한 문제에 대해서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순탄하지 않는 삶 속에서도, 놓치지 않은 것이 기도입니다. 이를 보면서, 성도인 우리도, 우리의 삶이 바쁘고, 힘들고, 어려워도, 때로는 피곤할 때에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한 주간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신 것처럼,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본문을, 쉬운 역으로 보시면, “주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의지는, 불변해야 합니다. 그럼, “의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형식적인 성전 출입을 금하라는 겁니다.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야말로 완벽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비롯한, 제사장, 서기관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럼, 본문에서 제시하는 “의의 제사”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세리의 기도와도 같은 겁니다. 신 6: 5을 보시면, 하나님의 강조사항이 있습니다. 보시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 의지, 능력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의의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요 4: 21을 보시면, 이 여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의 조상들은, 그들의 중심지인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라 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했기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요 4: 23 – 24을 보시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지켰습니다. 그랬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림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피신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곧,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비록, 당장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어 보이고, 또, 아무런 응답이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의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중심이 불변했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윗도 모르는 구원의 길을 주셨습니다.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제물을 드림으로, 속죄하여도, 그 속죄는 단회적일 수 밖에 없기에, 영원한 의의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한 의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의의 제물”이 되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찬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시면, 2절에서,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라고 합니다. 또, 롬 5: 8을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시 115: 9 – 10을 보시면,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시 18: 1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왕상 8: 23을 보시면, 솔로몬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중심도 이와 같습니까? 우리도 이 고백과 같이,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시며, 내가 영원토록 믿고, 의지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십니까? 본문 속의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본문을, 쉬운 역으로 보시면, “주께서 나의 마음에 큰 기쁨을 채워 주시니 이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가득할 때의 기쁨보다 더 큽니다. 내가 평안히 누워 잠을 자니 나를 이렇게 안전하게 돌보아 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예전에 만났던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은, 수색에서 살던 젊은 시절, 사업이 실패함으로, 가족들이 힘들어지자, 자살할 마음으로, 소주를 마시며, 한강을 향해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길에,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총각무 한 단을 들고는, 기쁨 속에서, 찬양을 부르며 오더랍니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에게 “나는 사업에 실패해서, 몹시 괴로운데, 아주머니는 보아하니, 행복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뭐가 그리 좋아서, 노래를 하며 갑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하루종일 밭에서 하던 일을 마치니까, 주인이 고생했다면서, 품삯과 함께, 총각무 한 단을 줘서, 돌아가는 길이니, 이것이 행복이 아니고, 뭐가 행복입니까?”라며, 계속해서, 찬양을 부르며 가더랍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있는 기쁨과 평안이, 어디에서 시작합니까?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느끼는 기쁨이,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도 넘친다고 합니다. 또, 그가 평안히 눕고 잘 수 있는 것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지냈고, 도망자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시 121: 3 – 4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며, 시 127: 2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합니다. 또, 빌 4: 6 – 7을 보시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합니다. 약 40년이라는 인생의 짧은 세월 속에서, 오직 복음만을 전하다가 소천한 유석경 전도사는,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쁘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하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합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주님의 기쁨이 되고 싶습니다”라며, 직장암 말기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힘써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언제나 우리에게, 해 같이 비춰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