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 눈물 지켜보며 함께 눈물 흘린 2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평화의 적은 무관심”이라며,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나 몰라라 하는 무관심에서 깨어날 것을 호소했다.
24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곁에서 할머니들의 울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가 있다.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 전 회장으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선실(아기 예수의 데레사, 59, 서울 해방촌본당)씨다. 그는 정대협 산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관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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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홍보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김선실씨. 김선실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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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4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운데)와 미국 캠페인 중 미국 국무부 한일 담당관 캐서린 스트븐슨과 함께 한 김선실(맨 왼쪽)씨. 김선실씨 제공 |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3년 간 국어교사로 지내다 미국에서 문헌정보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씨는 1987년 대학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당시 여성이 결혼하면 자동으로 퇴직하는 ‘결혼 퇴직제’가 있었는데 다른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면서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여성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한 사건이었다.
1992년 늦가을, 그는 우연한 기회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참상을 알게 된다.
당시 정대협 총무였던 이미경 국회의원이 함세웅(당시 서울 장위동본당 주임) 신부를 찾아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활 기금 마련에 가톨릭 교회의 동참을 청한 자리에 동석하게 된 것이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가 얼굴을 드러내고 처음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힌 지 1년 후였다.
1992년 12월 27일, ‘민족의 십자가, 우리의 어머니’를 주제로 서울 아현동성당에서 가톨릭 교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미사가 봉헌됐다.
“(위안부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할머니들이 받은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막상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 보니 병들고 가난하게 사시는 겁니다. 당장 먹고 살게 걱정인 할머니들을 위해 생활 기금 모으길 시작했어요.”
가톨릭여성신학모임을 통해 여성신학을 공부한 그는 1993년 4월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를 창립했다.
여성신학을 접하면서 그는 여성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를 보기 시작했고,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를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가톨릭 여성의 정체성을 실현하고 싶었다.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 회장인 그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했다.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에 참석해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 정부와 국제 사회를 향해 외쳤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가 전쟁 범죄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김씨는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과 미국을 돌며 ‘위안부 피해 참상’을 증언할 때도 동행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당한 고통이 그의 고통이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 운동’도 이끌고 있다. 지금까지 200만 명에게 서명을 받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2012년 문을 연 건 지금까지 할머니들의 존엄성을 외쳐왔던 김 대표에게 작은 성과다.
학생과 청년 등 많은 시민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를 알게 되고 수요 집회에 동참해 주는 것 역시 그에겐 큰 위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하는 말 중 그를 더 속상하게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늙고 못 배워서 무시한다”는 한탄이다.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동안 그는 여러 차례 눈물을 닦았다. 말문이 막히기도 했고, 눈물이 고이기를 여러 번. 그는 “최근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화를 담은 영화 「귀향」 시사회에 다녀왔는데 펑펑 울고만 왔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언제 가슴 아파하며 할머니들을 위해 울어 준 적이 있나요? 신자들이라도 영화를 통해 할머니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겨 진심으로 한번 울어 줬으면 좋겠어요.”
이어 그는 “상대방을 위해 울어 주는 것, 그것이 자비의 실천을 위한 첫걸음이 아니겠느냐”라고 되물었다. 김씨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71년이 됐지만, 우리 할머니들은 아직도 해방을 맞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식민 지배하에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진 분들입니다. 할머니들이 부활의 봄을 맞아야지요. 할머니들에게 부활이자 해방은 할머니들이 명예와 인권이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지혜 기자 (평화신문)
취재 후기
“최근에 상대방의 고통을 위해 울어준 적 있으세요?”
인터뷰가 끝나고, 김선실씨의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울어준 적이…”
가슴 아픈 뉴스를 보고, 미간을 찡그리며 안타까워한 적은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없었다.
오랫동안 만난 연인과 헤어지면 눈물이 나게 마련이다. 그 눈물의 성분을 따져볼 순 없지만, 그 눈물은 그 연인 없이 앞으로 살아갈 내가 걱정되고 두려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가.
연인 사이에서도 온전히 이별의 아픔을 겪는 상대방의 고통만을 헤아려 눈물을 흘리긴 어렵다. 내가 아픈 게 항상 먼저이기에.
최근 1940년대 일본군이 한국 여성 2000여 명을 한꺼번에 위안부로 끌고 간 사실이 중국 정부의 문건으로 확인됐다. 세계 전쟁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건은 여성의 인권을 약탈한 가장 잔혹한 전쟁 범죄였다.
냉담하리만큼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에서 김씨는 24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곁을 지켰다.
김선실씨는 할머니들 증언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들을 때마다 새롭게 아프고, 들을 때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고 했다.
그가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 창립을 준비하며 만든 ‘여성의 기도’가 마음을 울린다.
이지혜 기자
“무관심의 벽을 헐고
소외된 이웃의 삶을 함께 나누며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소서.
역사와 이 사회의 구조적 악에 희생된
여성들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주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아픔을 더불어 치유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여성의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