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가옥 선교장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강릉 선교장
족제비가 일러준 이곳이 하늘이 내린 명당!
300여 년간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강릉의 선교장은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꼽힌다.
또한 울창한 송림에 안긴 가옥 터는 예부터 명당자리로 알려졌는데,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데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효령대군의 11대손인 무경 이내번이 경포대 근처의 저동에 살던 때였다.
가산이 일기 시작하여, 좀 더 너른 터를 찾던 어느 날,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일이 집 앞에 일어났다.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에 떼를 이루어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무경이 뒤를 좇았다. 그러다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송림
앞에 멈췄는데, 그 많던 족제비의 무리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게 생각하여
한동안 망연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명당이라고 무릎을 쳤다.
[연못 위의 정자 '활래정']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높지 않은 산줄기가 평온하게 둘러져 있고, 왼쪽으로는 약동 굴신하는 생룡(生龍)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할 만하고, 약진하려는 듯한 호(虎)가 오른쪽으로 내려 자손의 번식을 보이는 산형이었다.
과연 이곳에 터를 잡고 나서 이씨가는 날로 번창했다. 이씨가에선 하늘이 족제비를 통해 훌륭한 터를 내리신
것이라고 믿었고, 최근까지 뒷산에 족제비의 먹이를 가져다 놓는 풍습이 전해졌다. -<강릉 선교장(열화당)> 중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은 어디인가?” 하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물었는데,
1위를 차지한 가옥이 바로 강릉의 선교장이었다. 수백 년 된 소나무에 둘러싸인 웅장한 한옥, 홍련이 가득한
연못과 푸르게 다듬어진 정원까지. 과연 한국 사람이 선망하는 가장 한국다운 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99채 한옥과 연못]
선교장에 들어서면 입에 발린 ‘한국 전통 가옥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보다 감탄사가 먼저 터져 나온다.
규모도 여느 한옥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서 10만㎡의 너른 터에 열화당, 작은 사랑채, 행랑채, 연지당,
동별당, 안채, 활래정, 서별당 등 건물이 무려 10동이고 방은 99칸을 넘어선다.
우리나라로서는 드물게 출입 대문이 두 개라는 점이나 ㄱ자로 보이지만 사실 따로 떨어진 건물로
이루어진 정자와 같이 색다른 건축 양상을 띠기도 한다. 건축학자 정인국은 <한국건축양식론>에서
“선교장은 분산 개방된 건물 배치로 통일감과 균형미는 적지만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 생활의
활달함이 가득 찼다”며 자유로운 선교장의 건축물에 주목했다.
그중에서도 시인 묵객들이 예찬을 아끼지 않는 건축물은 단연 사랑채 ‘열화당’과 정자 ‘활래정’이다.
실제로 열화당은 단순한 사랑채가 아니었다. 팔도에 떠도는 이야기가 열화당으로 모여 가옥을
지키는 자가 앉아서 전국의 정황을 꿰뚫어볼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족보를 찍고 문집을 만드는
문화공간으로 쓰이면서 현재의 미술전문 출판사 열화당의 뿌리가 되었다.
연못 위에 돌기둥을 세워 만든 정자 활래정은 마루와 온돌방 사이의 부속차실이 눈에 띈다.
이는 손님이 보이는 곳에서 차를 끓이지 않았던 조선 사대부의 풍습을 말해준다. 홍련이 피어오른
연못 위의 정자에서 향긋한 차와 풍류에 취했을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글 최혜진 기자 자료 협조 강릉 선교장
Info 영동고속국도 강릉IC → 강릉터미널에서 시내 방향 → 7번 국도 속초 주문진 방향 → 강릉대학교 지나 경포대 방향 → 선교장
관람시간 3월~10월 9:00~18:00(11월~ 2월에는 17:00까지), 설날, 추석 당일 휴관
관람료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문의 033-646-3270 www.knsgj.net
2010년 4월11일 강릉지역과 삼척 지역 풍수지리 답사여행 첫번째로 선교장을 찾아 나섰다
선교장의 안내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소: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
남쪽 을 향하여 선교장(船橋莊)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집은 집 터가 뱃머리를 연상시켜 선교장이라 부르는데, 이내번(李乃蕃)이 지었다고 한다.
이내번(李乃蕃·1703~1781)은 효령대군 11세손으로 가선대부를 지낸분으로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300년을 이어온 집이다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1815년에 이후(李厚)가 건립하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1816년에 이근우(李根宇)가 중건하였다
현재 출판사 열화당 사장인 이기웅(62)씨도 선교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집 후손이다. 출판사 이름을 ‘열화당’으로 짓고,
돈도 되지 않는 고급스런 미술 출판을 고집하는 배경에는 선교장 사랑채인 열화당의 인문정신(人文精神)을 계승한다는 의지가 한몫하고 있다
선교장이 지닌 문화 패트론 정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볕당·사당·정자·행랑채를 고루 갖춘 큰 집으로,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 집의 배치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인 서남향이다.
선교장은 건축규모부터 다른 집들과 차원이 다르다. 민간주택의 한계인 99칸을 넘어 120여 칸이 넘는 웅장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한일자의 형태로 쭉 펼쳐져 있는 행랑채만 해도 총 23칸에 방이 20개이다. 방1개에 4~5명이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100명 가까운 사람이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이다.
좌우 길이가 60여m에 달하는 한일자 형태 행랑채의 위용은 방문객을 압도한다. 작은 사랑채는 6칸 겹집으로 되어 있다
30명 정도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이다. 가장 고급손님들이 묵는 큰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방이 3개에다 대청마루가 6칸이나 되고, 대청마루보다 약간 높은 누마루가 4칸이나 된다.
난곡동에 들어서 몸을 난곡천을 따라 남동진시킨다.
〈선교장〉의 터는 주산에서 동진한 용맥이 활모양으로 굽어흐르는 안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소조산은 시루봉이다.
주산에서 뻗은 내룡은 형기적으로 입수가 뚜렷하지 못하고, 이기적으로도 용맥이 분명치 못해 지기가 왕성한 곳은 아니다.
단, 활처럼 굽은 안쪽의 중심에 위치함으로 좌우로 낮은 동산이 청룡과 백호가 되었다. 장풍이 좋고 내외당이 우선수로 순행하니 생기가 응집할 조건을 갖추었다. 간좌곤향(艮坐坤向)을 놓았음으로 향상으로 관대수와 양수가 들어온다.
관대수는 신동이 태어날 수이고, 양수는 자손이 번창하고 부귀를 누릴 수이다. 대부대귀하고 후손이 번창하고 자손 모두가 발복할 터이다.
즉, 지기는 왕성치 못한 곳이나 좌향을 잘 잡아 부귀를 누리는 명당이다. 임방(壬方)의 시루봉은 천보에 해당되어 벼슬아치를 배출할 산이다.
선교장에 이처럼 사랑방이 많았던 이유는 부자집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한 숙박시설이었다는게 후손들의 증언이다.
대관령 넘어 관동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선경이라 일컬어졌다. 금강산, 설악산, 경포대에다가 영랑 선인이 놀았다는 영랑호까지 끼고 있어서 전국에서 많은 유람객들이 몰려왔다
이 유람객들은 대부분 관동의 첫째가는 부자집인 선교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였다. 관동의 제일 가는 호텔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공짜였다.
역대 선교장 주인들도 손님들의 무전취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6.·25때 폭격으로 소실됐지만, 이 집에는 1인용 7첩 반상 그릇이 300인용 가량 보관돼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손님을 접대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열화당’(悅話堂) 이라는 사랑채의 당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선교장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담론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생을 사는 의미와 보람이 바로 즐거운 대화에 있다는 독특한 철학을 가졌던 것이다
대접도 후하고 경치도 일품이다 보니 손님들이 선교장에 오면 몇 달이고 떠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야박하게 면전에 대놓고 떠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과객이 지나치게 오래 머문다 싶으면 간접적으로 그 의사표시를 했다.
과객의 밥상을 차릴 때 국그릇과 밥그릇을 바꾸어 놓거나, 간장종지 놓는 위치와 김치 놓는 위치를 바꾸어 놓는 방법이었다.
손님 상차림에도 반찬그릇 놓는 위치가 각기 정해져 있었던 법도의 시대였으므로, 국그릇의 위치변동은 이제 그만 떠나주시라는 간접적인 의사표시로 인식되었다.
위치가 바뀐 밥상을 받은 과객은 아무 말도 않고 다음날 곧바로 보따리를 싸서 떠나곤 하였다고 한다
그 서쪽에 사랑 마당이 있다.
사랑채는 열화당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一자형 평면이다. 열화당은 대청·사랑방·침방·누마루로 구성되고, 대청 앞에 툇마루가 붙어있다.
특히 사랑채 전면에는 차양(適陽)이 가설되어 석양의 강한 햇벌과 눈·비를 가리게 하였다. 팔괘 상으로 이문간주(離門艮主)에 해당되어 동문서주(東門西主)로 불배합되어 흉하고. 음문양주(陰門陽主)로 배합되어 길하며, 화문토주(火門土主)로 상생이다.
화해택은 초년에는 간혹 부귀를 누리는 자가 있으나 부녀의 성질이 강폭하다 하였다.
부엌·안방·대청·건넌방으로 구성되고, 동쪽의 동별당, 서쪽의 중문간 행랑채와 연결된다.
안채는 팔작지붕에 홑처마이고, 동별당은 부엌 앞쪽에 ㄱ자형으로 위치하는데, 온돌방·대청·마루방·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안마당의 중심에서 중문과 안방의 배치를 살피면, 유문갑주(酉門甲主)이다. 음문양주(陰門陽主)로 배합되어 길하며, 금문목주(金門木主)로 상극이다. 절명택으로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고 재산은 파산한다. 3) 중문(門)과 부엌(조)의 배합을 살핀다
부엌은 안방의 동쪽에 있는데, 방위를 판단하면 유문묘조(酉門卯조)이다. 태문진조(兌門震조)로 음문양조(陰門陽조)라 배합이라 길하고, 금문목조(金門木조)라 상극이다. 장남와 장손이 상하여 오래되면 자손이 적다.
또 수로의 유입이 없고, 대문과 집안에 큰 나무가 없어 길하다.
방정한 부지에 건물의 크기가 알맞으며 담장의 높이도 적당하다. 또 대문과 사랑방 그리고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일직선 상에 놓이지 않아 길하다.
연못을 둔 점은 가상적으로 흉하나, 안 마당이 아닌 대문 바깥에 위치하여 흉함은 적다.
또 좌향이 정법으로 놓여졌다. 따라서 신동이 태어나고 자손이 번창할 명당이다.
하지만 사랑채를 비롯하여 안방과 부엌의 배치가 흉하여 길함이 상쇄되었다. 이 가옥은 안채가 동별당과 서별당으로 나뉘어 역할을 담당하니 안채만의 흉함은 크지 않을 것이다.
가상적으론 흉함이 없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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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회가 되면,,,가보고 싶네요
다음에 우리 카페에서 한번 갈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