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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루 늦춰진 산행이 서희는 자꾸 마음에 걸렸다. 겨우 하루뿐이야. 하루 해는 금방 저물고 말 아.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지만 까닭 모를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산으로 가자고 한 것 은 갑작스레 결정한 일이었다. 아니 그녀는 벌써부터 산에 가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겨울 산에서 발목을 다쳐 세준의 등에 업혀 내려온 그날부터 그녀의 가슴속에는 산 하나가 우뚝 들어 와 있었다. 그가 돌아오면, 산에 가자고 하리라. 그렇지만 그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으므로 크게 기대하지 않고 말했었다. “지영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방학 동안 서클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했는데 너무너무 좋았데 요.” “산에 가고싶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설임 없이 말했다. “그럼, 가자.” 그녀는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뻤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괜찮아요. 그리고 오빠는 할 일도 많잖아요?” “내일 당장 떠나자.”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자신보다 그 일에 더 적극적이었고 더 열중 하는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꺼낸 그녀쪽에서 머뭇거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하고 일시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사람인가 하면,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았다. 생각이 깊고,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녀의 일에 있어서는 마치 분명하고 명쾌한 기준을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자신이 도달 하기엔 너무 아득한 높이에 그가 있는것은 아닌가 하고. -미안하다, 서희야.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어. 어제 밤늦은 시간에 걸려온 그의 전화였다. 산 에서 소용될 부식 등으로 새로산 배낭을 채울 때였다. 산으로 가자고 했을 때 그는 그녀를 데리 고 등산용품점으로 갔고, 나란히 등산화와 배낭을 샀다. -형한테 전화가 왔어. 내달에 결혼한대. 형수 될 사람과 함께 만 나자는데 내일 외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는 모양이야. 약속을 하루만 미룰 수 없을까?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쉬움보다도 불안함이 먼저 다가온 까닭이었다. -내일 밤차를 탈까? “아니에요. 하루 늦어진 건데요, 뭐. 잘됐어요. 준비가 충분치 못했거든요.”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미안해야 한다면 오히려 그녀였다. 미안하다, 서희야. 그 말이 그녀의 가슴에 긴 울림으로 맴돌며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엄마를 찾아나섰던 그때도 그는 수없이 같은 말을 되뇌었다. 여름방학중의 어느 밤이었다. 사춘기의 시작이었던 모양이다. 초경, 그리고 젖가슴이 아기 주먹 만큼 도드라진 신체적 변화야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서희의 사춘기는 공연히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지는, 그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우울했고, 가슴이 미어질 듯 답답했고, 그에게 까닭 없이 심통을 부렸으며, 홀로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 그날 왜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지 분명한 기억은 없었다. 다만 고아라는 뼈저린 깨달음 에 사춘기 소녀답게 그녀는 집착했고, 그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분노의 감정이 뒤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소망원에 온 한동안 그녀는 세준에게 자주 말했었다. 엄 마가 곧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1년, 또다시 1년이 흘러갔다. 그녀는 그 기약없는 기다림에 점차 익숙해졌고 아주 잊은듯 지냈다. 엄마를 그리워했는 지, 원망했는지 역시 확실치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엄마를 찾으러 가자고. 그냥 울음을 달래려는 말인 줄 알 았다. 그러나 재차 그가 말했고, 은밀하면서도 차마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이 담겨 있었다. 밤이 어 떻게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새벽에 그와 소망원을 나선 후 읍내까지 줄곧 말이 없던 그가 물었 다. “엄마를 찾으면 어떡할 거니?”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막상 그를 따라 나섰지만 엄마를 찾으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엄마를 수없이 원망하면서도, 한편 엄마가 자신을 아예 찾아올 수 없는 형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그가 다시 근심에 잠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소망원에서 나갈 거니?” 그녀는 지체없이 고개를 저었다. 딸의 행방을 모를 리 없는 엄마였다. 마음만 있다면... 손톱만 치라도 딸을 그리워했다면 적어도 한 번 쯤은 찾아왔어야 마땅했다. 엄마와 그녀를 이어주는 단 하나의 끈은 큰 집이었다. 그녀가 소망원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곳, 엄마가 1년만 기다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그곳이었다. D시에서 방직공장을 운 영하던 아버지의 죽음은 엄마와 외동딸인 그녀를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만들었다. 커다란 정 원에 연못이 @p 151 있던 2층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자란 그녀를, 어머니는 큰집에 맡겼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보자. 일 년만 꾹 참고 기다려라.” 겨우 여덟 살이었다. 엄마가 떠난 다음 날부터 큰어머니의 눈치와 구박 속에서 그녀는 1년을 지냈다. 피아노를 치는 대신 작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집안의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더러 천성적으로 병약한 그녀가 시골에서 평생을 산 큰집 식구들의 눈 에 마뜩할 리 없었다. 그녀는 곧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아이가 되고 말았다. 수드룩한 조카들, 그 녀보다 성큼 나이든 조카들 사이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맨밥을 퍼먹고 말 정도로 주늑든 아이였 다. 걸핏하면 손찌검부터 하는 큰어머니가 특히 무서웠다. 1년이란 여덟 살짜리 아이에겐 턱없이 길고 가혹한 세월이었지만, 그녀는 잘 참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큰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소망원에 들어선 것은, 열 살이 되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처음 본 소망원이 왜 그렇게 음산하고, 싫고, 무서웠는지... 어둠침침한 방에서 고만고만한 아이 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자기들끼리 무어라 수근거렸고, 마침내 낄낄 대는것이 그랬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영영 엄마를 만날 수 없을거라는 생각 때문에 큰어머니 에게 통사정을 했다. 말도 잘 듣고, 울지도 않고, 일도 잘하고, 밥도 조금씩 먹겠다고, 큰어머니는 당장이라도 빰을 후려칠 기세로 눈을 부라렸지만, 한 대 얻어맞는 것으로 될 일이라면 맞고 싶었다. 큰아버지의 집은 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떠나 중학교 2학년 이 되어 다시 찾은 셈이었다. 큰아버지는 연신 헛기침을 토해냈고, 큰어머니는 여전히 쌀쌀맞았 다. 엄마의 행방을 물었을 때 큰아버지는 말했다. “제 속으로 난 자식을 버린 여자 팔자가 오죽하겠냐.”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D시의 시장에서 식당을 하고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더라 고. 그녀는 그만 소망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저었고, 1시간 남짓 시외버스 를 타고 D시로 갔다. 시장에 있는 모든 식당을 샅샅이 뒤졌지만 엄마를 찾을 순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지만 그는 물러설 줄 몰랐다. 그는 시장 안에있는 모든 점포들을 뒤지고 다녔고, 그녀는 그만 말리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는 식당이 아닌 술집에 있었다. 붉은 페이트로 왕대포라고 쓴 유리문 너머 빡빡머리의 사내아이를 업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머리카락은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헝크러졌고, 부은 듯한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가슴속 의 엄마와는 너무도 멀고 낯선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체르니를 가르쳐주던 곱고 아름다운 엄마가 아니었다. 그에게 등이 밀려 들어섰을 때 엄마가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얼 마나 많이 원망했고, 얼마나 많은 설렘으로 떠올렸던 얼굴인가. 한동안 엄마는 우뚝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7년 만이었다. 그녀는 당신의 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엄마를 알아볼 수 있다면, 엄마 역시 마땅히 그 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많이 컸구나.” 보고 싶었다. 미안하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런 식의 말이어야 당연했다. 하지만 엄마는 퀭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차라리 아무 감 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 엄마의 심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그녀는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건 무 섭도록 변해버린 엄마의 모습이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만 했다. 그때 안쪽에서 누구 엄마, 하는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엄마의 얼굴이 변 하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이왕 왔으니 국밥이나 한 그릇 먹어라.”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배워야 할 체념을 그때 다 배워버렸다고. 세상에는 도대체 자신의 뜻 과는 무관한 것이 얼마든지 있으며, 삶이라는 것은 차라리 무관한 것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그녀 는 그때 알아 버렸는지도 몰랐다. 소망원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수없이 말했다. “미안하다, 서희야.” 그때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읍내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소망원으로 접어들 때 그가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시곤 했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할 때 돌아보라고. 이제까지 왔던 길이, 바로 가야 할 새로운 길이라고.” 그녀에게 가야 할 새로운 길이 있었다면, 바로 그였다. 그는 우거진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었 고, 그 오솔길을 걷는 것으로 그녀는 사춘기의 방황과 좌절을 견딜 수 있었다. 지영과의 약속 시간을 확인하고 서희는 집을 나섰다. 무작정 종주를 계획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그녀에겐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세 준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제 지영에게 전화를 해 간단한 것은 알아두었지만 미진하고 부족한 느낌은 여전했다. 하루 늦어진 만큼 지도를 펼쳐놓고 지영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집을 나서 몇 걸음 채 떼어놓기 전이었다. 등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려 한쪽으로 비켜섰는데, 다시금 들려왔다. 돌아보니 민혁, 그 남자 였다. 이 남자는 왜 또 나타났담. 남자가 조수석의 유리창을 내리고 외쳤다. “타요.” “아니에요. 걸어가겠어요.” “그러지 말고 타요. 너무 많이 걸으면 서희씨의 멋진 각선미가 망가질 겁니다.”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빨라도 차를 떨쳐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한 차례 클랙슨을 울리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 "점잖은 자리가 있다고 서희씨한테 말했죠. 그 모임이 내일이에요. 서희씨가 파트너로 참석해주 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먼 옛날의 일도 아니었다. 바로 어제 그녀는 자신의 뜻을 분명희 전달했다. 그런데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점잖은 자리에 파트너가 되는 일은 아무래도 힘들겠어요.” “점잖은 자리라고 했지만 부담스러운 모임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남자는 마치 반승낙이나 받은 듯 굴었고, 그녀는 기가 막혀 고개를 돌렸다. “내일 오후 다섯시입니다. 알았죠?” 제멋대로군.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남자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갈 수 없어요. 그렇게 아세요.” “이유가 뭐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남자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여하튼 내일 오겠어요.” “와도 소용 없을 거예요. 내일 서울에 없을 테니까요.” “서울에 없다니... 어디 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고, 이어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게 어딥니까?” “그걸 일일이 말해야 되나요?” “물론이죠.” “왜요?” “난 서희씨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으니까요.” 남자가 느물느물 웃었다. 그녀는 그런 남자가 싫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학교 앞에 이르자 그녀는 남자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차가 따라 들어올 수 없는 골목으로 꺾었 다. 그리고 골목과 골목을 돌아 솟대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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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즐감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