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아테나이스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트마르 라는 긴 이름을 가진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뤼삭 레 샤토의 성에서 샤랑트 공 모르트마르 공작의 딸로 태어났다. 1660년 왕제비의 시녀가 되었고 그 후 1663년 비고르 총독의 아들인 몽테스팡 후작 루이 앙리 드 파르다이앙 드 공드랭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국왕은 결혼을 승낙해주지 않았었다. 루이 14세는 매우 높은 귀족인 모르트마르 공작과 맞서고 싶지는 않았으나 몽테스팡 가문이 프롱드의 난 때 프롱드 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탐탁치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국왕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나 얼마 후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왕제비와 다투고는 왕비의 시녀로 들어갔다. 왕비 마리 테레즈는 활달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몽테스팡 후작 모두 낭비벽이 심했던 데다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빚더미에 올라앉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몽테스팡 부인은 곧 국왕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1667년에 라 발리에르를 몰아내고 애첩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 자리를 12년 동안이나 유지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마리 테레즈는 분노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몽테스팡 후작 부인의 미모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싫어하던 팔라틴 공녀마저도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겸손하고 조용했던 라 발리에르와는 달리 몽테스팡은 화려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금발에 육감적인 몸매와 매력적인 입매, 고른 치아, 섬세하기로 유명한 손을 가진 그녀를 보고 외국 대사들도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세비녜 부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의 극치였고, 그녀의 몸치장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같았으며 그녀의 활달함은 그녀의 몸치장과 같았다." 라고 썼다. 루이 14세도 그녀의 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몽테스팡 후작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내를 정말로 사랑했던 것이다. 아내에 대해 질투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기고 특히 왕과 아내를 공유하는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하던 그 시대에 여기저기에서 왕을 욕하고 다니며 분통을 터뜨리는 몽테스팡 후작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심지어 그는 다윗왕의 구절을 인용하며 왕에게 직접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왕의 분노를 산 몽테스팡 후작은 결국 에스파냐로 피신해야만 했다.
12년 간 왕의 사랑을 받으며 멘 공작, 벡생 백작, 툴루즈 백작, 투르 양, 블루아 양 등 8명의 아이를 낳았고 베르사유 옆에 아름다운 클라니 성을 지어 소유하게 되었지만 몽테스팡 부인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루이는 바람기가 짙어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퐁탕주 양, 루르 백작부인, 외이에 부인, 안 드 로앙 샤보 수비즈 등 여러 여자들에게 한눈을 많이 팔았다. 불안해진 몽테스팡은 점쟁이를 찾았다. 당시 파리 시내에서 유명한 점쟁이는 라 부아쟁이라는 여자였다. 몽테스팡 부인은 그녀에게서 사랑의 묘약을 구입하고 아이들의 목을 베어 나온 따뜻한 피로 마법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1671년 라 부아쟁이 체포되었다. 그녀의 체포는 프랑스 상류 사회에 많은 충격을 가져왔다. 라 부아쟁은 많은 귀족 들에게 사랑의 묘약이나 독극물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서 독약을 사 남편을 독살한 여인도 많이 있었다. 라 부아쟁의 집에서는 2000구의 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마법의 의식을 위해 희생된 아이들이었다. 체포된 라 부아쟁은 자신의 고객 이름을 댔고 그 중에는 푀키에르 후작, 뤽상부르 원수, 폴리냑 자작 부인, 루르 백작부인, 비비온 공작부인, 브렝빌리에 후작부인, 부이용 공작부인, 수아송 백작부인 등이 있었다. 끝의 두 여인은 마자랭의 질녀이기도 했다. 또한 라 부아쟁은 수아송 백작부인과 루르 백작부인, 폴리냑 자작부인이 라 발리에르가 사랑받고 있던 시절 그녀의 자리를 뺏기 위해 그녀를 독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그 말을 들은 국왕은 분노했다.
1680년 2월 29일 라 부아쟁은 마녀로서 화형 당했다. 그러나 그 것은 더 큰 사건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를 살릴 희망에 입을 다물고 있던 라 부아쟁의 딸이 모든 것을 고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몽테스팡 후작부인이었다. 라 부아쟁의 딸은 몽테스팡 부인이 마법의 약을 지어가서 국왕에게 먹였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알몸으로 배 위에 아이의 따뜻한 피를 받고 그 피로 성체 배령을 하는 마법의 의식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국왕과 왕세자의 우정, 왕비의 퇴출, 국왕의 은총의 획득 등을 기원했다고 증언했다.
국왕은 심한 충격을 받았고 그녀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몽테스팡을 내 쫓지 않고 왕궁의 테두리에서 살게 했다. 항상 궁정에 있으면서도 무시하는 것이 루이 14세의 복수였다. 그는 공식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사람들이 가혹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를 무시했다. 세비녜 부인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이 14세가 몽테스팡 부인을 가혹하게 대한다고 썼으며 뷔시 백작은 국왕이 몽테스팡 부인을 경멸하는 듯이 대한다고 말했다.
그러한 세월이 10년이 지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몽테스팡 부인은 파리의 생 조제프 수도원에 들어가 17년 후 66세의 나이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국왕은 전혀 슬퍼하지 않았으며 몽테스팡 부인의 아이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그녀를 위해 지어진 클라니 성은 버려져 오늘날에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첫댓글 사진들이 엑박ㅡ.ㅡ
애첩께서 취향이 로리타였군요;; ㅋ
야동에 너무 심취했나.....순간 후장부인이라고 해서 들어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