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에 우리 부부는 여름 휴가를 예수원에서 보냈다.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지 동기가 중요하고 선택이 중요하다는 걸 경험했다.
우리는 예수원 가기를 백 번 잘 했다고 자위를 했다.
사실 바닷가나 강가에서 휴가를 보내봤자 휴유증이 더 심하다는 걸 몇 번이나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다시 찾은 예수원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우선 마음을 사로잡아 좋았다.
낭만적이거나 마음 들뜨게 하는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을 적에 우리는 안내자의 요구대로 핸드폰을 맡긴 후, 숙소를 배정받았고...
계곡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걸으며 우리는 십자가의 대화를 나누었다.
밭 어귀에 세워진 나무 십자가 앞 평평한 바위 아래에 무릎 꿇고 앉아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응시하면서 침묵 기도를 했다.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토레이 신부님이 한 줌의 흙이 되어
묻힌 곳에 세워진 비문을 읽어내려갔다.
성경 구절 하나만 덩그러니 새겨져 있었지만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님의 유언대로 화장을 하였고 무덤을 만들지 않아
그의 주검은 문자 그대로 반 평도 안되는 땅 속에 한 줌의 재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 뇌리 속에서 세월의 흐름따라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이름 석 자를 생각하면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높힘받는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온 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하나님께 미움받는 일이다'는
말씀이 화살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개울가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 자연이 들려주는
청아한 노랫 가락이 귓전을 간지럽혔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천상의 소리로 자연은 말없이
산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도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다고 말하는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가 차곡 차곡 눈처럼 쌓여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몇 달이 지났건만 그때 들었던 시냇물 소리가 지금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들리는 듯 하다.
훼손없이 자연 상태로 보존된 자연의 모습은 하나님의 놀라운 걸작품
그 자체인지라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돌 틈에 박혀있는 이끼들이 솜털마냥 감촉이 부드러웠다.
적재 적소에 잘 진열된 마트의 물건들 이상으로 조화롭고
균형잡힌 생태계의 배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의 탁월함을 탐내게 하였다.
우리는 한 자리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한 후 개인 소개 시간과
더불어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방학을 틈타 많은 대학생들이 방문하여
자리는 만원을 이루고 있었지만 덕분에 그들이 뿜어내는
젊음의 향기와 열기로 인해 내 안에서도 덩달아 젊은이의
감흥마저 이는 걸 보았다.
이런 나의 낌새를 알아차린 아내는 안개빛 눈길을 보냈다.
항상 아내의 눈 빛은 하나님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눈 동자 하나로 그렇게 다양한 뉘앙스를 풍길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 공작소를 방문하여 여러 형제 자매들이 정, 망치, 톱, 대패, 송곳 등 갖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십자가며 여러가지 목각 제품들을 만들어냄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즐거운 대화 속에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보기에 참 좋았다.
사람은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진가를 보여주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음을 목도하였다.
석식 후에는 카페를 방문하여 갓볶아낸 듯한 원두 커피 내음이 마치 낙엽타는
그것과 흡사해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다.
주간 일정표에 따라 이날 저녁 예배는 숙소별로 예배드리는 날이었다.
우리 숙소에는 나 혼자 목사인 까닭에 내가 예배를 인도했다.
필리핀에 살면서 잠시 다녀온 집사님,
실직하여 준비 중에 있는 형제들,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인 실업자
그리고 청년과 대학들이 우리 룸 메이트들이었다.
나는 베드로후서 1장에 나오는 본문 중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Partakers of the Divine Neture)'라는
제목으로 40분에 걸쳐 말씀을 전했다.
평소에는 영어로 한 시간 정도 설교하다가
순 우리말로 설교를 하니 감회가 새롭고
정말 신나게 말씀을 전해서 행복했다.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던 어느 중년 형제가 많은 도전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배 후에도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바람에
얼마동안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가슴에 새겨졌다고 털어놨다.
저녁 예배 후 침묵 기도실을 찾아 함께 침묵 기도에 들어갔다.
침묵 기도란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영음(Rhema)을 듣는 시간이기 때문에
고요한 중에 음성을 기다리는 기도를 말함이다.
우리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자주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와 단독적인 교통의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침묵 기도의
모본을 친히 보여주셨다.
침묵 기도실을 빠져나온 나는 공동으로 식사하는 자리인
대예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깊은 잠심 기도에 빠져있는 한 자매가 있었다.
나는 한켠 구석진 곳에 자리잡아 침묵 기도에 들어갔다.
얼마 안 있자 사람들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이런 소리마저 잠재울 요량으로 더 깊숙한 침묵의 동굴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나는 기도란 나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어느 한 정점에서
만나 불꽃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경험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영과 영의 합일(Unity)이라는 수학 공식같은
용어를 만들어 부르지만 실제로는 나의 영과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교통(communion)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영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투사하면 성령도
그분의 방식대로 내게 반응을 보여주시는데 이게 잠잘 때는 꿈으로,
침묵 기도나 관상 기도 중에는 환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영음이 반복적으로 들려오기도 한다는 것을 또 한번 경험했다.
크리스쳔의 삶 가운데 기도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신비를 경험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쉬지말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는 말씀 자체 속에
커다란 신비가 숨겨져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게 하신다.
우리가 모르스 부호나 암호를 해독하여 그 뜻을 알아내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세 가지 방식 즉,
꿈과 환상과 영음으로 표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해석하여(민수기12장 6-8절)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도록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주시는 분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침묵 기도를 하노라면 우리의 입술로 표현되는 언어가
얼마나 제한적이고 폭이 좁은가를 알게 된다.
반면에 침묵이 우리의 입술보다 몇 배로 더 진솔하고 다양하고
깊이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방언으로 기도하다가 그 방언 기도의 내용이 저절로 알아지면서
통변을 하게 될 때는 기도의 신비감을 더 한층 고조시켜주기도 한다.
방언 통변 기도를 하다보면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알게 되고는 또다시 놀라게 된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다른 것들이
무수하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쯤되면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있고 소중한가를
그리고 그분께 대한 경외심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인지를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이사야는 이런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중들던
스랍들 중 하나가 그에게로 날아와 숯불로 그의 입술을 태우는 환상을 보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고
탄식하였다(이사야 6장 1-7절).
베드로 역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누구든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죄악을 깨닫게 되고 죄를 자백하여 겸손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사6:8-9).
우리를 겸손케 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하시는 작업임을 깨닫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나로 겸손한 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우리는 새롭게 되고 지속적으로
겸손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우선 우리를 겸손한 자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다.
우리가 겸손해질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올바른 자기 정체를 알게 되고
합당한 고백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의 소유자시요 나는 단지 청직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스런 종이 되게 하시고 타인을 향하여서는
자비로운 이웃이 되게 하소서.'
'주여, 제게는 주님 자신이 필요합니다.'
'주여,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주여, 주의 생명의 빛을 내 안에 비춰주소서.
그리하면 살겠나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한 자리에서 기도할 때 기꺼이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 중에 자신을 무익한 존재로
고백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종 귀신들리거나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기적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기적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산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실하고도 성경적인 검증 방식이다.
아침 기도회는 내게 있어서는 의미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을 연출하였다.
먼저 사회자가 구약 성경을 읽은 후 그 말씀에 대하여 깨달은 바를
서로 큐티 형식으로 나눈 다음에 신약 성경도 그렇게 하였다.
"속 사람이 연약하거나 자라나지 못할 때는 겉 사람인 육체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되다.
그리하여 육신 중심의 삶이 주체가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열매를 맺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
거듭남을 통해 영에 속한 자가 되었으므로,
속 사람인 영이 주체가되고 영이 중심된 삶을 살아갈 때 육체는
순종적인 하인 노릇을 잘 하게 된다. 이처럼,
영 중심한 삶은 성령에 인도함받는 삶으로 이끌리게 되어
결국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너희는 열매없는 자가 되지 말고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매사에 주도적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말씀을 음미하게 되었다.
아침 기도회를 마친 후 조반상에 둘러 앉은 사람들 중에
유독 정장을 한 신사가 있었다.
얼굴이 긴장된 듯해서 식후에 물어봤다.
형제의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은데,
무슨 일로 긴장을하느냐고.
그가 대답하기를 지난 3개월 동안 예수원에 들어와서 공동체 생활을 하였는데,
오늘 예수원 정회원 지체들이 자기 자신을 정회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심사 평가하는 날이라고 했다.
오늘 최종 심사를 통해 평점이 좋아야 정회원으로 받아준다고 했다.
내심으로 별 걱정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난 석 달 동안 그들과 더불어 지낼 때 매사에
좋은 일꾼으로서의 모본을 보여주었다면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 될 일을 왜 혼자 긴장하고 걱정하는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그의 남은 일생과 관계된 일이니 말이다.
나도 머지않아 선악 간에 심판하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날이 오겠지. 그날을 생각하면 정말 긴장되고 또 긴장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미 선포하셨고 이미 기록해주신 말씀따라 심판하시겠다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가
심판을 좌우하게 될 관건임이 명맥하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말하고 평가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자랑할 만하다고 말할 수 조차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씀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너희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하나님께 미움받는 일이다."
주여! 낮아지게 하소서.
가난하게 하옵소서.
무명한 자 되게 하소서.
세상의 말미에 두시옵소서.
충성된 하인되게 하소서. 아멘!
첫댓글 산돌 목사님은 외국인 노동자들 선교 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 좋은글로 은혜 나누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침묵기도... 훈련을 해보겠습니다../우리의 삶가운데 사람에게 보이기위한 삶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에게 정직한 삶을 산다면 분명 하나님도 사람도 다 칭찬듣는 삶이 될거 같아요......... 목사님 샬롬~
정말 은혜의글 감사드립니다.알지못했던것들을 깨닫고 마음에 담아갑니다.저도 침묵기도를 해보아야겠습니다. "너희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하나님께 미움받는 일이다" 보여지기위해 인정받기위해 칭찬받기위해 살지않고 하나님께 진실한자로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목사님 평안의 안부를 전합니다.샬롬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