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레사프 사람들/정민나
코끼리 발로 꾹꾹 파도를 밟으며 보트피플, 울퉁불퉁한 물의 표면에 불쑥 드러난다 버리지 못한 쓰레기는
따로 모아 물 위에 띄어놓고 비 오는 초록으로 없는 정원을 가꿔 함지박 나무를 키운다
아침노을로 사람의 영토를 넓혀 물은 가급적 평화로운 마당이 되었다 매끄러운 물로 아침밥을 짓듯 물고기
농장을 지었지만 축축한 빨래는 물 위의 집을 기울게 한다
한 그루 태양으로 피어올린 여러 겹의 시간, 지구 외딴 곳에 산소가 부족하면 금방 창백한 내면이 드러난다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의 모퉁이 젖은 옷이 마르는 동안에도 보트피플, 수백 번 몇 채의 집으로 흔들린다
자유를 항해하는 사람들 발치에 걸리는 날 무슨 일인가 가까이 배를 대어 보면 별일 아니라는 듯 물고기 밥
을 먹고 있다 건기 때 저만치 밀려갔다 우기 때 이만치 밀려온다
물고기는 수량이 정해져 있어 부족한 비늘은 서늘한 바람으로 초과한 지느러미는 탱글한 햇볕으로 오늘을 접
안한다 벗어날 수 없는 물의 마을 어르고 달래는 톤레사프 호수에서 마음 출렁여도 수상가옥 비추는 달빛 물의
리듬을 탄다
E 입국장, 12번 출구/정민나
산 멀리 바다 멀리 길을 켜 놓으면 넓은 설원을 지나가는 청
어떼 항구도시 오오타루
구름을 꺼버리면 눈총도 직선적이라 이곳 창가에서 황야지
대까지 아키다 코인 같은 경치는 숨쉬기 단조로워
슬리퍼 신고 한밤을 오갈 때는 기온차가 커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삿뽀로 맥주 삿뽀로 건포도
삿뽀로 난타 같은 눈 눈…… 눈의 뒷골목을 열면 주름이
다 펴지도록 하염없는 발자국……
한 사흘 눈사람으로 살아 보려면 컨셉을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해요 한 칸 다다미 맛있든 싱겁든 네비게이션은 길만 켜
놓으면 가라고 하니까
맛을 음미해서 먹는 거죠 손가락 마디만큼 이것이 침묵이다
하고 그 고봉밥을 다 먹는 거예요
설경은 쌓이고 쌓여 옥수수 옆에 옥수수 천마 옆에
천마 가방 안에 한 모금 피로 회복제 챙겨 넣고
그 길에 서면 부엉이도 고양이도 안 자고 카스미저택 닌자쇼
처럼
밤새 눈이 내려요
보관함, 나/정민나
50가 ― 4292 무거운 가방을 트럭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이
곳은 비가 오는 곳 비옷을 파는 곳 우묵한 곳
아기똥풀과 나란히 안개 속을 걸어가는 나는 처진 어깨를
만져보고 두 손을 툭툭 가볍게 털어보고 단돈 이 천원에
금방이라도 뜯겨져나갈 쓰레기봉투를 힐끗 지나간다 배드
민턴 네트가 축 늘어진 아침 가장자리를
벌건 멧새 한 마리 날리며 울퉁불퉁 옥수수밭 돌담길 수평
선의 이름표를 떼어내며 까악까악
피어오르는 까마귀를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내가
맡기고 온 가방 가 ― 오십인지 나 ― 오십인지 안개가 깊어갈
수록 노란 아기 똥풀이 예뻐서 무릎을 구부리고
입구에서 멀어질수록 인터쿨러 방열기가 돌아가는 감나무
도 매화나무도 얼굴이 노랗게 젖어들고
철창을 뽑아든 짐차 같은 50 ― 가
자갈자갈 세상을 밟는 소리로 벚나무를 지나고 보리수나무
를 지나고 똑같은 뒤통수가 보이는
창문들 멀어질수록 보관함 나 ― 오십은 까마득히 잊고
마음 갯벌/정민나
너는 검은 흙을 묻히고 검은 햇볕을 입히고 던지면 검은 돌
이 되는 웃음을 네 귀퉁이 울퉁불퉁 펼쳐놓고
너는 모래 같은 어머니를 쌓고 텐트 같은 아버지를 매고 자
갈밭에 앉아
발가락에 묻은 모래알 염기의 바람 속 너는 휘어지고 너는
넘어지고
뻘의 딸이라도 된 것처럼 질척질척 허리를 잡고 끈적끈적 씨
름을 하고
번쩍 들린 여름을 털썩 뻘 안으로 던져 놓고 한쪽 눌러놓은
섬이 뻘 밖으로 튕겨 나가면 두 손 두 발로 기어가 신발 속 꽉
찬 매미울음을 털어놓고
빙빙 돌다 힘이 들면 뻘 묻은 신발을 높이 하늘로 차올리고
기러기처럼 뻘 바닥이 가볍게 날아오를 때
갯벌 돛자리에 떨어지는 햇살은 펄떡이는 아이들 금 밖의 세
계를 보일 듯 말 듯 밀어내고 뻘의 손자손녀처럼
가족사진을 찍다가 물이 미는 오후 누군가 지나가다 돌멩
이를 툭 차면 펄럭 뻘 한쪽이 저물고
물고기를 잡는 가장자리 촘촘한 말뚝을 내려놓고 이제 옷
갈아입자 뻘 묻은 팔을 떼어놓고
너는 이 검은 섬 놓고 가야지 뻘 속에 빠져 더듬거리는 길을
건져 뻘 묻은 손으로 새들을 다 날려 보내고
성형/정민나
나란히 놓인 칼과 사과
이 사과 맛 괜찮을까?
자리를 바꾸며 그녀가 칼을 집어든다
紅顔은 흠짓!
양날이 새파란 칼날 앞에서 힘껏
자기 몸을 잡아 당긴다
가면을 만들어 보시오
눈을 뜯어내고 민들레 꽃잎을
귀를 뜯어내고 구름의 풀밭을
피고 지려는
칼과 사과의 접전이 격렬할 때
한 번 더 쑥! 둥근 목선 사이로
칼을 집어넣는다 눈 코 귀 입 겹겹의
사과를 벗기면
그녀가 날아오르고
맹목적 손놀림으로 칼은 낙하한다
고무밴드를 끼우는 가면
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이 사과 맛 괜찮을까?
그녀
빛나는 홍안이 지익지익 늘어난다
세차게 짝!
제 얼굴을 때리는 그녀의 미각과 촉각 사이
둥근 노래 귀에 걸면
민들레와 사과
앞 뒤 가면이 되오니 원하는 쪽을 사용하시오 랄랄라
자리를 바꾸며 그녀는 칼을 집어든다
입체적으로 사과를 집어든다
<<정민나 시인 약력>>
*동국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꿈꾸는 애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