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마맨 14.06.28 13:43
평신도설교 (최종본)
복상원고 (01.9월호)
평신도가 설교를?
김 인수 교수
고려대학교 (경영학)
[복음과 상황] 5월 호에 실린 내 대담을 읽고 “달구지(slee1@calvin.edu)” 목사님이 6월 호에 쓴 반응에 대해 내 생각을 말씀드릴 필요가 있기에 필을 들었다.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몇 가지 있기에 목사님의 글을 중심으로 말씀 드리려고 한다. 목회의 기능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설교에 국한하여’ 논의하는 것임을 미리 양해해 주기 바란다.
또한 이 글은 달구지 목사님의 반응에 답하는 것이지만 한국교회 지도자 모두에게 드리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드시 고쳐야 할 한국교회의 심각한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먼저 나는 많은 목사(관례에 따라 목사를 통칭할 때에는 존칭을 쓰지 않고, 다만 구체적인 개인을 지칭할 때에만 존칭을 사용)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헌신적으로 목회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첫째, 내 대담을 읽고 목사님은 “왜 평신도가 설교를 하고 싶어하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반응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요점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교회가 제대로 세워지기 위해 설교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수동교회의 원로 목사님께서는 최근 기윤실 소식지에 실린 글에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 있게 잘 표현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끼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셨다.
이 정의를 보면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은사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다음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은사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결과로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의 목적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설교를 해야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과 영광이 제대로 들어 나는 것이다.
그가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가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따라 교회를 섬기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기존 교회의 제도를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잘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둘째, 달구지 목사님께서는 평신도들이 “설교를 우습게 보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평신도들의 진지한 고민을 그런 식으로 폄하시다니 나로서는 매우 놀라웠고 당혹스럽기조차 했다. 나는 오히려 은사를 갖지 않은 목사들이 혹시 설교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은사가 없는 목사들의 설교가 내용 없는 관념적 수준에서 맴돌다 보니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 왜 성도들이 한 교회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가? 왜 설교말씀이 좋다고 소문난 목사의 교회들은 급성장하고 있는가?. 이는 아마도 성도들이 너무나 말씀에 굶주리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셋째, “자신의 몸은 의사자격증 있는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면서, 왜 자신의 영혼은 자격증이 없는 사람에게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라고 말씀하셨는데, 의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검증에 합격하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과정들을 거치는지는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면허증을 가진 의사라고 다 명의는 아니다. 그러기에 많은 환자들이 명의를 찾아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목사님이 의사면허증과 목사자격을 비교한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만인 제사장설을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서 영혼은 목회자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다. 먼저 영혼의 문제는 신체적 문제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이다. 영혼의 문제는 단지 영적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및 사회적 차원과 서로 얽혀 있는 매우 복잡하고 깊은 문제이다. 과연 한국의 신학교가 우리의 이러한 문제를 맡아 할 만한 자격을 가진 목사들을 얼마나 양성했다고 생각하는가? 그 다음 신학교가 자격을 가진 목사들을 잘 양성했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문제를 목사에게 맡기도록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언제나 과오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사람인 목사에게 영혼을 의존하도록 한다면 그 목사가 오류를 범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사에서 보듯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잘못 인도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는 성도들의 영혼문제는 개개인들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좋은 교제를 통해 성도를 안위하고 세워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여러 해전 어느 신학대학원의 교수님께서 내게 “평신도에게 성경을 가르쳐 놓으면 목사의 골머리가 아파진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목사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목회인가? 오늘 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평신도들이 어느 목사님의 표현과 같이 병신도(?)가 되어 버린 것은 목회자들에 의한 목회자 의존적인 우민정책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달구지 목사님께서 “영혼을 자격 있는 사람에게 맡기라” 는 말씀도 목사의 설교가 성도들의 영적인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진정한 목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일 설교에만 의존하지 아니하고 매일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하여 자랄 수 있도록 훈련해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나는 자기 스스로 추진(self-propelling)할 수 있는 신앙적 능력을 가진 성도라고 표현하고 싶다. 얼마 전 일본에서 오래 선교활동을 하신 목사님이 내게 물으셨다. “체계적으로 말씀을 잘 분석하고 정리하여 설교를 해도 변하지 않던 성도들이 QT를 시작하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하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설교는 듣는 성도들로 하여금 소극적 학습을 하게 하지만 QT는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 학습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장 22-25 말씀에 듣고 돌아서는 자와 말씀을 들여 다 보고 있는 자의 차이를 이야기한 것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성도를 양육하는 것은 목회자에게는 안정적이고 좋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병신도가 되고 하나님의 교회는 병들어 갈 것이다.
넷째, “신학과정을 이수하지 않은 평신도가 어떻게 설교하려 하느냐. 바울을 평신도로 분류한 잘못을 보아도 알지 않느냐”고 반문하셨다. [복음과 상황]에 실린 내 대담내용의 원고가 사전에 내게 점검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인쇄에 들어갔기 때문에 내 말과는 전혀 다른 몇 가지 오류와 불충분한 설명으로 인한 논리적 비약이 있었다. 바울이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내가 대담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사도행전 9장에 무명의 평신도인 아나니아가 성경의 도사인 사울을 바울로 회심 시키는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말씀의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쇄된 글에는 아나니아가 빠지고 바울만 남아 있어서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신학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유용한 틀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은사를 가진 사람이 신학을 공부하면 좋은 설교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틀이 설교를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사람이 가르치는 신학교육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경영학도 마찬가지다. 경영학이 경영을 잘 하는데 도움이 될 유용한 이론과 틀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경영의 은사를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가장 훌륭한 경영자 중에는 경영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경영에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라 은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훌륭한 경영을 해내는 것이다.
만약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만이 경영자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든다면 우리 기업들은 국제경쟁에서 낙오되고 말 것이다.
즉, 경영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 경영학 이론을 배우면 경영에 더 도움이 되겠지만, 경영학 이론의 공부가 좋은 경영자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신학교육이 은사를 갖지 못한 사람을 좋은 설교자로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서울강남에 있는 한 중 규모 교회의 장로님이 상담을 청해 오셨다.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빈약해서 성도들이 힘들었지만 교회를 개척했던 그 목사님을 차마 내 보낼 수가 없어서 장로들은 오랫동안 고민하며 상의한 끝에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 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동안 중 규모 교회로써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경비를 감당한 후 드디어 그 목사님이 학위를 받고 귀국하셨다고 한다. 성도들이 큰 기대를 가지고 목사님의 귀국을 맞았지만 실망스럽게도 설교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비슷한 예는 수 없이 많다. 신학교육이 은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다섯째, 신학과정을 이수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씀을 깨닫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면 신학에 못지않은 유용한 틀을 갖게 되며, 그 결과로 얼마든지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은사를 가진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깨닫고, 전달하는 은사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성도들에게 강론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깊이 있게 깨닫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곧 교회를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D.L. Moody는 제대로 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가난한 구두 판매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설교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신학교를 가 보지도 못하고, 목사도 아니었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설교와 전도를 통하여 깊은 영적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최근 내가 감동적으로 읽은 책 중 하나가 [새 바람 강한 불길] (원제: Fresh Wind, Fresh Fire)이다.
책 표지에는 “이 땅의 무력한 교회와 메마른 심령을 부흥시킬 책”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심발라 목사님은 신학교를 다녀 보지 않고 안수를 받은 분이며, 그와 함께 동역하는 사모님은 악보를 모르면서도 작곡을 하고, 성가대도 지휘하며, 더욱이 그 곡으로 대규모 음악전도 집회까지 인도하는 분이다. 이 책은 심발라 목사님 부부가 뉴욕의 뒷골목에서 펼치고 있는 감동적인 목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
우리 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다. 영국 런던한인교회는 회중이 공동으로 예배를 집례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설교는 목사뿐 아니라 장로들도 서로 순번을 정해서 번갈아 가며 하고 있다. 여러 해전 국방대학원의 교수로 계시는 장로님께서는 그곳에 계실 때 간결하면서도 논리적이고 명쾌한 설교로 온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다고 한다.
그 분은 신학을 공부한 적이 전혀 없지만 수 십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분이며 그래서 “평신도 목사”라는 말을 듣고 있다. 지난 여름 미국 유학생 수련회에서는 수 십 명의 목사들을 제치고 KAIST의 기계공학교수인 한 안수집사님이 빌립보서를 3일 동안 강해하여 많은 학생들을 감동하게 하였다. 그 이전에는 다른 대학의 교수로
있는 평신도가 구원, 성장, 헌신의 설교뿐 아니라 사도행전을 강해하여 많은 학생들을 감동하게 하였다.
여러 해전 미국 대학에 봉직하고 있던 한 평신도는 동부에 있는 어느 한인 장로교회의 여름 수양회 전체를 맡아 말씀사역을 한 적이 있다. 수양회가 끝나자 3박4일 동안 계속된 그 분의 설교를 들으신 신학박사인 그 교회 목사님께서 “어디에서 성경을 그렇게 깊이 있게 공부했느냐”고 물으셨다. 그는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신학적으로 보아도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말씀”이라며 그를 격려해 주셨다. 그는 장로교 신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신학이 성경에서 나왔으니 같은 원전을 읽은 자기 생각과 일관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바로 그 평신도가 서울에서 개최된 신학대학원 협의회 연차총회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33개 신학교에서 오신 100여명의 신학자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끝난 후 어느 신학교에서 오신 한 신학자께서 그의 설교가 자기 교단의 교리와 아주 잘 맞는다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는 그 교단의 교리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그 교리도 성경에서 정리한 신학이니 같은 원전을 공부한 그의 이야기와 일관성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문하였다.
미국에서 설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목사님께서 다른 교회의 젊은 목사들의 설교 준비를 돕기 위해 최근에 [설교클리닉]이란 과정을 개설하셨다. 이 과정에서 설교를 잘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이론들을 공부한 후 하나의 사례로서 바로 그 평신도가 어느 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녹음 테이프로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분의 설교를 [설교클리닉]을 수강하는 목사들에게 들려주었던 것은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어느 설교보다도 좋은 사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라 성경연구원을 설립하여 목회자 재교육을 하고 계시는 분은 평신도이시다. 그는 런던성서학교에서 1년 성경을 연구한 것 외에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보기 드문 성경선생으로써 많은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내가 아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한 서리집사는 말씀을 깨닫는 은사와 남에게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함께 가지고 있다. 남을 잘 섬기는 아내와 함께 10년 이상 가정을 개방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해 오셨다. 최근 그는 어느 교회에서 주일 아침 설교를 하게 되었고 그의 설교는 많은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어 결국 목사님께서는 최소 한 달에 한번 정도 주일 아침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런 평신도들이 어떻게 이렇게 설교를 잘 할 수 있었을까? 비록 신학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한 그들은 신학 못지않은 좋은 틀을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리 있게 전달하는 은사를 가지고 성도들이 깊이 감동할 수 있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평신도들의 설교가 감동을 주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말씀을 분석하고 정리하고 전달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평신도의 깊이 있는 말씀이 같은 입장에 있는 다른 평신도들에게 크게 도전이 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삶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경험이 말씀과 잘 연결됨으로써 그들의 설교가 관념적인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에 말씀을 조명하여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한국 교회가 제도를 가지고 위와 같은 평신도들의 설교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대단히 안타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제도는 설교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하기 보다는 기득권자의 교권주의 수호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작년 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유학생 수련회에서는 어느 한 평신도가 4일 동안 오전에 말씀을 전하고 저녁 집회는 어느 젊은 목사님이 전하셨다. 목사님이 그 평신도의 성경강해를 듣고, “하나님, 설교를 안 해도 되는 저 평신도에게는 저렇게 말씀을 깊이 깨닫고, 잘 전하는 은사를 주시고, 항상 설교를 해야 하는 저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지 않으셨습니까?”라는 항변성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따라 교회를 섬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섯째, 그렇게 말씀에 은사가 있으면 신학교에 갈 것이지 왜 그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이런 평신도일수록 주위 사람들로부터 “길을 잘 못 들었다. 목사가 되었더라면 더 잘 했을 것이다. 신학교에 가라”는 권고를 받는다. 이런 평신도들의 대부분은 심각하게 신학교에 가는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로 부르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평신도로서 삶의 현장과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일곱째, 또한 달구지 목사님은 “은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공인된 자격을 갖춘 자가 설교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교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은 사람이다….정상적인 경우에는 목사만이 설교할 수 있다. 목사만이 강단권을 갖는 것은 ‘비성경적’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셨다.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그 나름 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강단권을 아무에게나 허락했을 때 성경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 잘못된 것을 가르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한 목사가 그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바로 비슷한 이유로 성경을 쉬운 일상언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것을 금지했던 과거의 과오를 또 한번 범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신학교를 세우고 목사 제도를 세운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러한 과정과 제도를 통해서 좋은 목회자들이 양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제도는 신학교에 입학하는 사람들의 은사를 점검하기 보다는 단지 소정의 과정을 끝내면 시험을 통해 강도사가 되고, 그 다음 어느 정도의 경험이 쌓이면 목사로 안수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은사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제도적 과정을 통과했기 때문에 목사가 되고 그 분들이 강단을 독점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20년 이상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을 지도해 오면서 “박사과정 학생들의 80% 정도는 (학생들은 내 기준이 너무 높다고 불평하지만) 학문을 전공할 만한 소양(은사)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차라리 박사과정에 들어오지 않았어야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로 모든 졸업생들이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소수만이 학자의 길에 들어가게 되고 그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좋은 학자가 된다.
반면 내가 전공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 중에는 박사학위를 갖지 않은 교수들이 여럿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분석력과 창의적 논리로 새로운 이론을 개척해 내는 그들의 학문적 업적을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학교를 나와야 목사가 되고 목사가 되는 사람은 모두 설교해야 한다면 목사들의 80% 정도는 신학교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이 역시 너무 높은가요? 40년 이상 수 많은 곳에서 신앙생활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나는 결코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성도들에게 설문조사를 해 본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자료가 나오지 않을까 오히려 두렵다.
은사를 갖지 않은 목사가 설교를 하면 그 설교를 해야 하는 목사도 힘들겠지만 그런 설교를 들어야 하는 성도들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제도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지 못하고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설교의 은사를 갖지 않은 사람도 목회사역에 헌신하도록 부르신다. 목회에는 설교 못지않게 보살핌의 사역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목사의 길로 부르시지 않고 평신도로 지나게 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은사를 갖지 않은 목사에게 설교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나, 은사를 가진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을 금지하는 제도를 두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목사가 되고 목사는 모두 설교를 해야 한다면 적어도 몇 가지의 보완책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 경우에도 은사를 가진 평신도의 설교 기회를 막지는 말아야 한다). 즉 외국의 일부 신학교와 같이 입학 심사 때 은사를 객관적으로 점검하는 절차가 필요하며, 졸업 시에도 다시 은사를 재점검해 보고, 나중에 목사 안수 받을 때에도 은사를 다시 한 번 점검한 후에 설교자의 직분을 맡겨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보완책을 강구한다면 신학생 중에 불과 20% 정도만이 목사안수를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보완책이 강구되어야 웨스트민스트의 신앙고백서도 제대로 지켜지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과 같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누구나 어렵지 않게 목사가 되어 강단을 독점할 수 있는 제도가 계속될 경우, 함량 미달의 설교자는 계속 양산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 교회는 영적으로 더 황폐해 질 것이 분명하다.
오늘 날 한국 교회가 경건의 모습은 대단하면서도 경건의 능력이 약한 데에는 바로 강단을 독점하는 함량미달의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리더십 문제를 공부하는 나는 이 분야를 공부하면 할 수록 리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리더십 부재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제도 하에서 목사만이 강단에 서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제도를 만들게 되는 데에는 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제도 자체가 나중에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연구하는 조직이론에서도 같은 문제를 볼 수 있다. 조직이 성장하면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규정과 계통이 도입된다. 조직의 목적을 잘 달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나중에는 조직의 일을 잘 하는 것 보다는 규정과 계통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목적 달성은 실패하게 된다. 이것을 관료병리현상이라고 부른다. 신학교 제도를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하여 좋은 목회자를 양성하고 그들에게 강단을 지키게 한 것도 말씀을 보호하고 설교의 수준을 높이자는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교권주의를 낳게 하였고 하나님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해야 한다. 좋은 조직은 규정과 계통을 도입함과 동시에 그 규정과 계통을 부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와 같이 교회도 제도가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점검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 신학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외국에서 신학교를 나오고서 현재 모 기업에서 일하며 평신도 사역을 하고 있는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무 급진적인 생각이라 한국교회가 수용하기 쉽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 깊이 있게 고려해 볼 가치가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되어 전하고 싶다.
“현재와 같은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신학교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 대신 교회 내의 여러 깨어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 삶을 통해 충분히 검증된, 가르치는 은사와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보살핌의 은사를 가진 분들에게 목회와 주일설교를 맡기고, 신학교와 성경학교는 이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더욱 체계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무장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기관으로 변해야 한다.”
사도들이 초대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전적으로 맡게 된 것은 3년 동안 주님과 가졌던 깊은 교제의 결과이지 바울처럼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구약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바울 역시 선교사로 전도자로 세워진 것은 그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의 구약 훈련이 아니라 주님을 올바로 만난 후 주님과의 오랜 교제에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여덟째, “평신도 설교자를 투표를 통해서 뽑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하셨는데 나로서는 오히려 내 대담을 읽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평신도라고 다 설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의 은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은사를 가지고 깊이 있게 성경을 연구하여 자기 정리를 제대로 한 사람이어야 한다.
성서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보면 이런 사람이 어렵지 않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한 예로 내 친구 중 한 사람은 미국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박사학위 과정 중에 미국 침례교로부터 말씀의 은사가 있는 것을 공인 받고 “평신도 설교자”(lay preacher)로 허입 되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재학 중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학공부를 끝내기 전에 이미 목회자로서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고 주위의 지도자들이 공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평신도를 목회자 의존적인 병신도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람을 많이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사람을 개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제대로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제대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강단이 개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세계적으로 목회자만이 설교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를 제외하면 별로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말레이지아에서 개최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 선교위원회 회의에 갔다가 그곳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귀국한 선교학 박사인 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주일날 정신과 의사인 장로님이 하신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교회에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와 박사학위까지 가진 목회자가 있다. 그러나 말씀의 은사를 가진 여러 명의 장로들이 목사와 팀을 이루어 돌아가며 설교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강단 벽이 높은 영국의 일부 성공회에서도 담임목사는 사회를 보고 집사 중 은사를 가진 사람이 주기적으로 설교하는 예는 비일비재하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은사를 따라 사역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보스턴에는 상당히 큰 중국인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는 두 분의 목사님이 계셨고 일주일 중 주일 아침 예배만 한 번 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한 달에 네 다섯번 있는 주일 예배를 두 분이 번갈아가며 설교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부탁으로 한 한국인 평신도가 주일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가 영어로 설교하고 중국인이 통역해 주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두 목사님께서 그에게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꼭 와서 설교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하여 그렇게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화란의 개혁교회에서는 은사를 가진 집사가 설교하고 마지막 축도까지 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니 설교를 하고, 그 다음 축복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 집사와 평신도 아나니아는 세례까지 주었다. 우리 나라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이는 성경의 원리보다는 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데에서 생기는 문제이다. 유교는 그 발생지인 중국에서 보다 한국에서 더 철저하게 지켜져 온 것도 한국 사람들의 제도 집착적인 경직성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쪼록, 강단이 개방되어 설교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교회인 한국교회가 다시 제대로 세워질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