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환종주 3회차 일치의 길

[時雨]

제주 환종주 2코스 일치의 길

함덕 - 김녕해수욕장 - 월정리 - 평대리 - 하도 - 종달해변 37km

누적 거리
59km

1. 할머니의 손길

그렁 그렁
" 할머니 밖에 산 짐승이 내려 왔나봐요"
"아니다 아가, 밖에 지금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그런거란다."
"할머니 밖에 누가 왔나봐요"
"아니다 아가 밖에 지금 함박눈이
내려서 그런거란다"

"할머니 자꾸 추워요"
"할머니 손은 약손!
할머니 손은 약손!"

밖은 점점 어두 컴컴 해지고
신열이 나면서 온 몸이 떨린다.

춥네 추워.
간신히 일어나서 해열제 한 알 털어 넣고 지난 어린시절 할아버지댁애
갔을 때 할머니께서 배가 아프거나
열이 날 때 마다 "할머니 손은 약손"
하면서 농삿일로 잔뜩 거칠어진 손으론
나를 어루 만져 주시던 일이 자꾸 생각난다.

떠나기 하루전에 병원에 다녀왔다.
심한 기침과 편도선이 부어 침을 삼키기 어려울정도였다.

2.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밖은 아직 어둠에 둘러 쌓여 있다.
마치 거두어 들이지 않을 것 같은
묵직함으로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 불쾌함 처럼.

그렇게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라서
배낭을 꾸리고, 짐옮김 서비스를 하려고
호텔 프론트에 배낭을 맡긴다.

지나가면서 함덕에서 하루 자야지 했던 염원?이 오늘 이뤄졌다.

바다도 캄캄하다
이따금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만이
이곳이 바다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준다.

서우봉을 오른다.
밤새 신열로 힘들었던 상태라서
몇 발자국을 뗐는데도 땀이 비오듯 흐른다.

기침이 계속 이어지고 훅훅 숨은 버겁다.
어둠이 벗겨지면서 나무 사이로 붉게
보이는 태양.
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일출.
누구에게는 늘 같은 태양일지라도 누구에게는 또 다른 태양일진데
붉게 타오르는 하늘은 그로인해 경이롭다.


에둘러 내려 오는 길
그렇게 많이 다녔던 길인데도 오름 정상에서 내려오는 다른길로 내려오다 보니 또 새롭다. 멀리 지미봉이 보이고 풍차가 보이고 아직도 내게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돌담 골목길 사이사이로 보이는 적요로움 속에 숨어있는 情.

마치 사람의 흔적조차 없는 이 적요로운
골목길도 내가 걸으면 비로소 내게 다가오는 따뜻함이고 나를 걷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3. 다시 김녕

재작년인가 한적한 바닷가 모퉁이에 있는 정자에 텐트를 친 적이 있었다.

남들은 삼겹살을 구워 먹느라 정신 없을 때 고등어 한 마리 기름에 튀겨 호기롭게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새벽 텐트를 나와 바라보던 바다 건너 안개에 쌓여 있는 빨간 등대.
신비롭기까지 했다.

곱디고운 흰 모래사장.
탈탈탈
밟고 지나온 길은 보면서 신발을 털어본다.

그리고 김녕 그 어느 골목에 있는 작은 카페. 홀리듯 들어가 진한 커피 한 잔 하던 그 시간들이 떠오른다.

4. 바람처럼 길 따라

걷다보면 내가 바람인지 길인지
아니면 바람에 이끌려 길을 걷는지
길을 따라 걸으면서 바람을 느끼는지

1월 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봄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다
등 뒤에서 혹은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그것은 완연한 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다의 모습도 달라지고 물빛 까지 변하고
길 따라 걷다 보면 같은 세상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똑같은 게 없다.

걷는 길에서 느끼는 묘미이다.

월정리해수욕장을 지나면서
다리에 무리가 왔다.

5. 고통

즐겨야 한다
느끼는 순간 더 힘들어지기에.

그래도 자꾸 거슬린다.
바지에 쓸린 피부가 발갛게 부어오르고
걸음걸이가 자꾸 이상해진다.

처음 겪는 이 상황이 참 당황스럽다.
그래도 겪어야할 상황이라면
견뎌야지.

작년에 지나다가 우연하게 들렸던
칼국수집에 들려 진한 국물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을 풀어 본다.

야자수 가로수가 보이면서 종달리.
허벅지에서 점해 오는 고통은 점점 배가 되고 이제 걸음걸이가
어그적어그적...

바람이 불어 오고 유난히 바다에 많이 떠 있는 원앙이 이상하다 싶을정도로 많다.

모퉁이 돌아 종달리.
어제는 원래 김녕까지 걸어야 했는데
일정상 함덕에서 하루를 마무리 했었다.

오늘 종달리 까지 37km .
이 쉽지 않은 걸음을 또 걸어냈다.

2024년 1월 17일
時雨

[묵공]

남은 길을 무탈하시고
물같이(如水),
바람같이(如風),
자유롭게, 행복하게
잘 걷기를 기원합니다.

[섭이앤]

아쿠 ᆢ
아픈몸으로 37km
대단하세요
아플땐 쉬어가셔야지 ᆢ
다음날이 걱정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