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1일(수) 촬영.
文信 문신 : 우주를 향하여.
바다꽃 / 1989, 스테인리스 스틸,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文信 문신 : 우주를 향하여.
문신은 1922년 일본 규슈(九州)의 탄광지대에서 한국인 이주노동자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운명이든 우연이든 그의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섯 살에 아버지의 고향 마산 땅을 밟은 그는 조모 슬하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열여섯의 나이에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마흔 무렵 파리로 향했고, 프랑스에 둥지를 튼 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화가가 아닌 '조각가 문신'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인생 대부분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그의 삶은 그가 감수해야만 했던 불운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 편협한 당파와 민족주의를 넘어 진정한 창작을 가능하게 만든 동력이었다. 이방인은 지속적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고향이나 정착지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낯선 땅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하게 접촉하고
주변을 면밀히 탐색한다. 그 결과 민족적 경계 개념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혼종성을 지닌다.
문신이 초월한 경계는 비단 지리적, 민족적, 국가적 경계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회화에서 조각으로 영역을 이동했을 뿐만 아니라, 공예, 실내디자인, 건축에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기성의 장르 개념을 벗어났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또한 그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유기체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 깍아 들어감(彫)과 붙여나감(소,塑), 형식과 내용, 원본과 복제,
물질과 정신 등 여러 이분법적 경계를 횡단했고 이들 대립항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찾아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신 조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대칭'은 단순한 형태적, 구조적 좌우대칭을 뛰어넘는다.
잠재적인 유랑자였던 그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여러모로 이질적인 존재다. 문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회고전은, 거대서사를 바탕으로 불연속적으로 기술되는 미술사에 그를 위한 고정된 위치를 설정하기보다,
문신 예술의 다양한 지형을 탐색하고 이방인으로서 그가 지녔던 자유, 고독, 열정, 긴장이
동시대 우리에게 던지는 자극을 경험하는 장을 제공하고자 한다.
전시의 부제 '우주를 향하여'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신이 자신의 여러 조각작품에
붙였던 제목을 인용했다. "인간은 현실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우주)에 대한 꿈을 그리고 있다"던 작가에게
'우주'는 그가 평생 탐구했던 '생명의 근원'이자 '미지의 세계',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고향'과도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주를 향하여'는 생명의 근원과 창조적 에너지에 대한 그의 갈망과, 내부로 침잠하지 않고
언제나 밖을 향하던 그의 도전적인 태도를 함축한다.
1. 파노라마 속으로
1938년, 밀항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문신은 이듬해 일본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는 일본 각지에서 모인 청년 예술가들이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교류하고 작업했던 도쿄(東京)
이케부쿠로(池袋) 시나마치(椎名町) 예술인촌에 거주하면서 화가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다졌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문신은 마산 추산동 언덕(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위치)에 터를 잡고 부산, 대구, 서울
등을 오가며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화면의 기교를 위한 낭만"보다"현실 생활의 체험"을 중시한 그는
온화한 기후에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마산의 풍경과 평범한 주변 사람들의 소박하고 거친 삶,
그리고 향토성 짙은 정물을 화폭에 담았다.
1957년, 문신은 반(反)아카데미즘을 내세운 모던아트협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을 활동의 장으로
삼았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고층 건물과 가로수가 즐비한 도시풍경으로 이동했고 화면은 도시적 감각으로
충만해졌다. 이 무렵 그는 미술계의 흐름을 반영하여 평면화, 단순화 등 추상적 요소를 접목했다.
문신의 회화에서 구상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로,
그는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대신 점, 선, 면 등 순수 조형요소와 마티에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프랑스에서 목격한 앵포르멜과 누보 레알리즘 등의 영향도 있었지만,
도불 직후 생계를 위해 파리 북쪽에 위치한 라브넬에서 고성(古城)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대상의 추상적
형태와 구조, 재료의 물성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그는 조각으로 영역을 전환하지만, 회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문신의 회화는 우리에게 그의 삶과 예술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준다.
자화상 / 1943,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도쿄 일본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던 시절 그린 자화상이다. 해부학에 근거한 인체 표현과
자연스러운 색감의 온건한 화풍을 보여주면서도 화면을 과감하게 나누는 구도나 인물의 시선이
인상적이다. 작가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재야 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에서 떨어지고
그 이듬해 제작한 작품으로,
20대 초반의 조선인 청년은 자신을 마치 타인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는 중년의 거장처럼 묘사했다.
일본 각지에서 상경한 예술인들이 거주하던 "이케부쿠로(池袋) 몽파르나스' 예술인촌에서
작업하던 작가는 민족적 정체성보다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중시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아침바다 / 1952, 캔버스에 유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문신은 현재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이 들어선 추산동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산의 바다 풍경을 즐겨 그렸다.
<아침바다>는 바다에서 느껴지는 낭만주의적 격정과 인상주의적인 눈부신 햇살이 조화를 이루어,
문신의 화가로서의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해가 솟기 직전의 바다의 아름다운 광경을 포착한 작가는 화면을 거칠고 힘찬 붓놀림으로 단순하게 처리했다.
수평선을 잘 살리기 위해서 가로로 긴 캔버스는 물론, 추상적인 문양으로 조각된 액자 역시 작가가 직접 제작했다.
해바라기 / 1959, 캔버스에 유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낙원 / 1952,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어부 / 1946, 나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초기에, 문신은 회화뿐만 아니라 목조각을 제작, 전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평론가 근원 김용준은 당시 이를 두고 "액자는 액자대로 목조는 목조대로 회화와 불가분한 유기적인 생명"을 지닌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한바 있다.
<어부>는 1948년에 제작한 <고기잡이>의 모티브가 된 고부조 목조각으로,바다에서 생명을 건 어부들의
긴장된 표정과 팽팽한 근육을 생생하게 표현해, 이때부터 문신이 조각가로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기잡이 / 194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마산에 정착한 문신의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마산의 풍경을 즐겨 그렸다.
김용준은 문신의 회화가 "내 나라의 현실과 자연에서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현상을 예술적인 관조를 통해
구현"한다고 보았다. 화폭은 평온하고 아름답기만한 바다가 아니라 거기에 생계와 목숨을 건 어민들의 거칠고
활기찬 삶으로 가득하다.
당시 문신은 물감을 제외한 화구를, 즉 캔버스와 캔버스 틀, 붓과 액자까지 손수 제작했다. 볼륨감 넘치는
해녀들이 조각된 아름다운 나무 액자는 회화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내며 동시에 그 자체로 완벽한 부조 작품이다.
해녀들이 조각된 액자틀.
정물 /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7세 때에 할머님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나의 그 평화스러운 생활이 끝장나 버렸다. 그때부터는
숙부모님 곁에서 잡화점 일을 거들며 학교를 다녔다. 그즈음하여 나는 틈만 있으면 바닷가에 가서 바다물에
뛰어 들기도 하고 조개도 잡고 물속에서 노는 색색고기도 즐겨 보면서, 바닷물이 빠져나간 모래밭 위에다 고기며
그림을 그렸다. [...] 그때부터는 친척집 잡화점보다 선창가의 판장(販場) 생선 가게가 나에게는 더 흥밋거리였다.
어부는 나의 친구였고 어선은 나의 자유스러운 즐거운 집이었다.
친필 원고 중에서, 연도 미상,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소장.
고기 / 1959, 종이에 펜과 수채, 개인 소장.
명태 / 1957, 캔버스에 유채,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닭장 / 1950,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1948년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 이후 문신은 "현실에서 유리된"" 화면의 기교를 위한 낭만"이 아닌
"현실 생활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작품을 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림의 제재이든 기법이든 '관념'이 아닌
'체험'을 중시한 그는 당시 주변 인물들의 소박한 삶을 솔직하게 그렸다. 화면을 꽉채운 구성과 빼곡히 닭장에 갇힌
닭의 모습이 답답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깊게 눌러쓴 밀짚모자와 우산으로 겨우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가린 채 닭장 앞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은 전쟁통에 무기력하던 서민의 삶과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문신 특유의 '남성적인 정열'이 느껴지는 따뜻한 색채가 돋보인다.
군계,群鷄 / 1953,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1953년 <제3회 문신전><부산 르네상스화랑다방>에 출품되었다. 전시를 후원한 "후반기 미술회" 동인들이
전시 서문에서 당시 문신의 회화를 "엄밀한 관찰에서 오는 명쾌한 화풍"이라 평했듯이,
<군계> 역시 삶과 밀착한 체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6,25전쟁기 피난 시절 고요한 밤에 피난민 부락의 양계장
에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고 적은 그의 짧은 친필 원고를 통해, 우리는 이 작품이 작가가
체험한 전쟁의 은유, 즉 남과 북으로 갈린 조국의 현실을 암시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를 표현하는 작가 특유의 과감한 화면 구성과 두터운 윤곽선, 따뜻한 색채, 거친 필치가 인상적이다.
소 / 1957,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일제 강점기 이후 많은 화가들이 소를 주로 민족적, 향토적 소재로서 다뤘는데 문신은 여기서 탈피하여
철저히 조형적인 관점에서 대상에 접근하고 있다. 갈색 선은 어미소와 송아지의 밀착한 몸체를 가로지르며
그 골격을 드러내는 윤곽선이 되기도 하고,투시된 어미소의 갈비뼈가 되기도 한다.
대상의 단순화 또는 평면화, 복수(複數)의 시점, 한정된 색채 등에서 입체주의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읽어낼 수
있다. 실제로 문신은 일본 유학 이전부터 피카소를 즐겨 모사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금붕어가 있는 정물 / 1959, 캐버스에 유채, 임호건 소장.
문신의 1950년대 작품은 주로 자연이나 일상을 대상으로 하지만 점차 주관적인 형태를 취하며 대상을
단순명료하게 구성하려는 작화 태도를 보인다. 이는 당시 한국화단에 확산된 서양 모더니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황토색과 초록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면에서 어항과 물풀의 경계가 일그러지고 그 사이로 헤엄치는
금붕어는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대상의 단순화, 평면화, 강렬하고 밝은 색채 등에서 야수주의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읽어낼 수 있다.
정물 / 1957, 캔버스에 유채, 가나문화재단.
샴페인이 있는 정물 /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선인장이 있는 정물 / 1958, 캔버스에 유채, 임호건 소장.
1957년 문신은 '모던아트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모던아트협회는20세기다운 새로운 미술을
지향했던 단체로, 서양화가 김영주(金永周)는 이름을 두고 "기성의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와 전위적인 방법을
선택한 입장"이라고 평했다. 이 시기 문신의 회화는 점차 평면화되고 대상은 구성적인 요소로 간결하게
정리되기 시작한다.화면 속 유리병과 호박은 명확한 구분 없이 평면적으로 연결되고
화분에 심긴 선인장도 동일한 둥근 형태와 초록색으로 통일감을 형성한다.
정물 / 195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정물 / 195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모자 / 1955, 캔버스에 유채, 가나문화재단.
인물 /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소녀상 /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소녀 / 1953, 캔버스에 유채, 가나문화재단.
무제 / 1966,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 재료, 통도사 성보박물관.
알타미라의 인상 / 1966,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재료, 홍익대학교박물관.
달표면 / 1966,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 재료, 개인 소장.
무제 / 1963, 패널에 혼합 재료, 국립현대미술관.
1961년 초 도불한 문신은 본격적으로 추상 작업을 시작 했다. 당시 파리 미술계는 부활한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과 앵포르멜,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누보 레알리즘, 신구상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시멘트가 두껍게 칠해진 패널에 숟가락, 노끈 등 일상의 오브제가 부착된 이 작품은 그가 이러한 최신
경향에 관심을 가지면서 형식, 재료, 기법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조형적인 실험을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스페인 출신의 어느 여성 화가를 모델로 제작한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무제 / 1966,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박물관.
무제 / 1968, 캔버스에 모래와 아크릴릭, 유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무제 / 1980, 캔버스에 모래와 아크릴릭, 유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무제 / 1980, 캔버스에 모래와 아크릴릭, 유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무제 / 1974, 캔버스에 모래와 아크릴릭, 유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무제 / 1980,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 재료, 개인 소장.
두 여인 / 1974, 캔버스에 혼합재료, 경남도립미술관.
무제 / 1978,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 재료, 개인 소장.
작가가 영구 귀국하기 2년 전에 제작한 이 작품은 본인의 추상 조각 작업의 근원으로 강조했던 원과 선을
기본으로 삼고, 이를 변주하여 기하학적인 형태를 단순하게 구성했다. 그는 조각에서 형태를 중시하고
마티에르를 부차적이라고 간주해 표면을 아주 매끄럽게 연마했는데, 회화에서는 투명한 프랑스 모래를
재료로 사용하는 등 마티에르를 풍부하게 살려 물성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선명한 붉은 색과 깊은 푸른색의 대비만으로 무한한 우주의 신비를 연상시킬 만큼 매력적이다.
제목 미상 / 1978,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재료, 부산시립미술관 신옥진 기증.
전시장 모습
무제 / 1981, 백자에 청화, 철사, 진사(광주 분원 요), 개인 소장.
무제 / 1981,백자에 청화, 철사, 진사(광주 분원 요), 개인 소장.
문신은 생전 100여 점의 도화(陶畵)를 남겼다. 작가는 스스로 '채화(彩畵)'라 이름 붙인 채색 드로잉을
종이가 아닌 백자 위에 그린 것이다. 광주 분원요와 덕산 출신 곡우(谷雨) 진종만의 백자에
작가 특유의 대칭적인 추상 형태가 리드미컬한 곡선과 선묘의 반복, 그리고 대범한 색체로 펼쳐진다.
확산하는 생명의 기운을 품은 문신의 드로잉이 백자의 풍만한 볼륨 및 유백(乳白)의 바탕색과 만나면서,
유기적인 추상 형태의 자유로움과 신비로움이 배가 된다.
매끄럽고 광택 나는 백자의 물성이 문신이 주로 다루던 조각 재료의 물성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무제 / 1993, 백자에 청화, 철사, 진사(덕산 곡우요), 개인 소장.
무제 / 1981,백자에 청화, 철사, 진사(광주 분원 요), 개인 소장.
무제 / 1966,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 재료, 국립현대미술관.
1965년 귀국했을 때, 문신의 캔버스에서 구상중인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대신 재불 시절
라브넬 성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체득하게 된 추상 형태, 부분과 전체의 관계, 물성에 대한 감각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67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할 무렵 제작된 이 추상화는, 원과 사각형과 유기적인 추상 형태의 리드미컬한 구성과 단조롭지만
조화로운 색 배열, 그리고 미묘한 마티에르의 변화가 아름답다.
야전 병원 / 1952, 목판화,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문신은 나무 부조 외에도 나무를 재료로 한 목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야전 병원>은 작가가 종군화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제작된 작품으로, 병원이라 불리기는 해도 침대 하나 없는 허름한 방에서 책을 읽어주는
간호사와 그녀를 둘러싼 부상병들의 평안한한 때를 포착했다.
전체적인 구성과 인물 및 공간 묘사가 자연스럽고, 흐르는 듯한 긴 곡선과 짧은 선, 선의 굵기와 강약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목판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이해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정물 /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도시 풍경 / 195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1957년 서울로 활동의 장을 옮기면서 문신의 작품에는 마산 앞바다와 산 대신 서울의 고층빌딩과
가로수, 가로등, 그리고 익명의 군중이 들어섰다.
<도시 풍경>이 제작된 해는 그가 회원으로 활동한 모던아트협회는 물론 당시 한국 미술계 전반에서
앵포르멜로 대표되는 추상미술이 주류가 된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서 문신 역시
조형적 실험을 통해 점차 평면화, 단순화된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는 끝까지 구상 이미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는 또한 한편 두텁게 칠한 가로수의 녹음(綠陰)과 가볍게 덧칠한 거리의 마티에르(질감)
차이에서도 그만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서대문에서 / 195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태평로에서 / 1959, 캔버스에 유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황혼 / 1954, 캔버스에 유채, 임호건 소장.
1957년 <제2회 모던아트협회전> <서울 화신화랑>에 출품된 작품이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나 갈
즈음까지 문신은 서울과 부산 등지를 오가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자연이나 일상을 즐겨 그려왔던 문신은
1954년경부터 점차 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며 주관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검은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기와지붕과 나무들 너머로 황혼에 물든 마산의 시가지가 따뜻하게 펼쳐진다.
검정과 주황을 대비시킨 대각선 구도의 대담한 화면 구성에서 문신의 추상에 대한 관심을 예견할 수 있다,
잔설 / 1948, 캔버스에 유채, 임호건 소장.
마산에 정착한 문신은 일본 체류 당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화가이자 평론가였던 길진섭은 문신의 회화가 "낡은 사상과 양식의 허위와 화려한 화면이라는 것은
벌써 모조리 주워 담아서 조각배에 띄어 버린 지 오래다"라고 평했다.
잔설이 남은 황토색 삼각형 산 위에 옥빛 하늘을 향해 뻗은 상록의 소나무가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대상의 형태를 존중하면서 표현주의의 입장을 드러내거나 추상의 경향으로
이행하려는 작가의 갈등이 엿보인다.
아침 바다 / 195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제1전시실 모습.
첫댓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文信 문신 : 우주를 향하여
엄청난 양의 작품과 해설
감사히 즐감합니다
정성으로 올려 주신 글을 보고
관람하면 소홀히 지나칠 수 있는것도
유심히 보고 즐감하지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건희컬렉션에서 봤던
"닭장"그림이 문신화가의 작품으로
확실히 각인 되었슴다
글고 세계 3대 조각가로는
영국의 헨 리 무어, 미국의 알렉산더 칼더,
그리고 한국의 문신 조각가임다
화가로서 조각가로서
한국에선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선 대가이시죠
편집에 수고 하셨습니다
덕분에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대단히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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