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임금은 1863년 12살에 조선 제 26대 왕으로 즉위를 한다.
고종이 어리므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1873년까지 10년간 정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기간 동안(1863~1873)에
1866년 병인양요,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고종친정親政(1873년)이후에는 1875년 운요호사건, 1876년 강화도 조약이 맺어졌다.
천주교 박해는 흥선대원군 시절 1866년 병인양요 전후가 절정이었다.
1866년 병인년에 서양선교사 9명이 새남터에서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로즈제독이 원수를 갚으러 강화도에 쳐들어 왔다. 서울 양화진 절두산에서는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8,000명을 한강변에서 참수하였고 그리고 추가로 2,000명을 합하여 1만 명의 천주교 신자가 참수斬首되었다. 그래서 양화진의 누에 머리와 닮았다는 잠두봉蠶頭峰이라는 이름이 사람의 머리를 절단한 참수斬首의 의미인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 인천의 제물진두津頭에서도 1868년에 4명의 신자가 도끼로 참수당하고, 1871년에는 6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왜 조선은 그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죽였을까? 도데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천주교 신자들은 모반을 하지도 않았고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남을 다치게 한 일도 없었는데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래서 천주교 순교자가 대원군을 역사의 법정에 고소하는 형식으로 엮어진 책이다.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 ? /방상근> 이 책은 판사와 변호사, 피고인 흥선대원군의 진술을 통하여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알수 있었다. 참 흥미로운 책이다.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은 신분제가 존재하는 불평등사회였는데 천주교는 평등사상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주神主와 조상제사 문제로 대표되는 유교와 천주교의 가치관 상충과 남연군 묘 도굴사건과 당시 정치세력(남인:노론)간의 다툼으로 근 100년동안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이 희생의 터전위에 1866년 조불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드디어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건립된다. 오늘날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는 전 인구의 10% 정도다.
제물진두는 184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상해로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배를 타고 출발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러나 그 이듬해 1846년 25살에 새남터에서 순교를 당한다.
대구에는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따서 <대건중고등학교>가 있다.
오늘은 독후감 답사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마침 비가 내렸다. 배호의 <비내리는 명동거리>를 흥얼거리며 명동길을 걸어 보았다.
첫댓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
인천대공원 정문에서 내려가다 김대건 신부 표지석을 보았었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화이팅하세요.
조선시대는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권력다툼에 사상이 억압이 생겨나는 것(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 종합적으로 봐야겠습니다만 천주교박해도, 반대편 혹은 그 세력을 박해하기 위한 방편, 구실인 측면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목표도(권력)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
선생님 감사합니다.
비가 내립니다.오늘도 화이팅하세요.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연수구에도 대건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김대건 신부가 25살에 순교를 하셨군요.
잘 봤습니다, 김대건신부가 사제서풀을 받으러 출발한 장소가 제물진두였네요. 감사합니다..
참고로 인천 대건고등학교는 화도진공원아래 영풍아파트자리였고 '98년에 연수구로 이전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가끔 휴일에는 서울 합정역에 내려서 양화진 외국인 순교자 묘원과 기독교100주년 공원과 절두산 천주교 순교자 기념관 주변을 걷습니다. 오늘도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