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십 년 전, 가도 가도 끝없는 황토길을 따라 ‘들불‘이 끝없이 피어오르던 ‘동학의 들판’은 이제 가을이 한창이다. 멀리 도망질치면서 슬금슬금 이 들판을 훔쳐보듯 노령산맥의 완만한 줄기를 앞세우고 정읍(井邑)에서 흥덕(興德)을 지나 직행버스로 30여분 서남쪽으로 난 아스팔트길을 달려가다 보면 고창(高敞)에 이른다. 산맥의 줄기는 이곳에 이르러 늙은 산으로 되어 들판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고창은 이 우뚝한 갈재와 방장산 구릉 안쪽에 펼쳐진 평야의 한복판에 옛 읍성(邑城)의 자취를 아직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채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의 생가는 바로 읍내 서문(西門)거리에 있다.
고창읍내 홍문(虹門)거리
투춘(偸春)나무 무지개 안
시내 우에 정자 짓고
정자 끝에 포도 시렁
포도 끝에 연못이라.
성관(姓貫)은 평산(平山)신씨
이실재(在) 효도효(孝)는
창적(彰籍)의 함자(啣字)요,
일백백(百) 근원원(源)은
친구간의 자호(字號)로다.
뜰 앞에 벽오동은
임신(壬申)생과 동갑이요,
이호(里號)는 동리(桐里)오니
너도 공부 하랴기면
가끔 가끔 찾아오소
에용 어허 우겨 방아로구나.
이것은 그가 거처하던 연당(蓮堂)의 모습과 자신의 이력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해 놓은 자서가(自敍歌)인 ‘동리가(桐里歌)’이다.
지금 남아 있는 생가(1979년 중요민속자료 제 39호로 지정)는 동리가 생전에 거처하며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창작생활을 하던 여섯 간짜리 겹집 사랑채이다. ‘동리가’에 나오는 홍문거리며 투춘나무 무지개, 시내 위의 정자, 포도시렁 등은 간 곳이 없다. 후원 뒷문이었을 듯 싶은 작은 대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북향으로 앉은 사랑채를 중심으로 오른편이 앞정원이고 왼편이 뒤꼍인 셈이다. 아름드리 통나무로 기둥을 세운 넓지 않은 툇마루에 나앉으면 오른쪽으로부터 눈에 들어오는 유화(柳花)며 석류나무, 마루 밑까지 끌어들여 흐르게 했다는 시냇물길, 지금은 말라버린 연못이며 하늘을 가릴 듯한 태산목의 유려한 정취가 당대 풍류가의 멋스러운 전원생활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후원으로 돌아들어 까치발을 하고 서면, 뒤 울 너머로 그의 호를 딴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과, 고창읍성인 모양성(牟陽城)의 성곽이며 누각이 이마에 닿을 듯 한눈에 들어온다. 계절이 서성이는 조락한 뒤 뜰 한가운데에는 동리가 태어나던 해에 심어놓은 오동나무가 백년 풍상을 말해주듯 갈바람소리를 내며 우뚝 서 있다.
본래 동리의 집은 ‘10묘지택의 대지’에 솟을대문 안에 열두 간 집 여섯 채가 있었다는 것이다. 10묘를 지금의 땅 넓이로 계산하면 2,500∼3,000평에 달하는 면적인데, 지금의 생가를 중심으로 하는 고창경찰서 일대의 땅이 전부 동리의 생가 터였다는 것. 이것은 당시 동리의 아버지 신광흡(申光洽)이 아전이라는 중인(中人) 신분임에도 관약방(官藥房)을 하며 많은 부(富)를 축적해 외아들인 신재효에게 물려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신재효의 선대는 대대로 경기도 고양(高陽)에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모양현(현 고창)의 경주인(京主人)을 맡으면서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뒤에 법성포와 무장을 거쳐 고창으로 낙향, 정착하게 된다.
신재효는 홍경래 난이 수습되던 해인 1812년(순조 12) 11월6일 11삭(朔)만에 신광흡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행장(行狀)에 보면, 그의 어머니가 고창에서 70리 길인 초산(楚山·지금의 정읍)의 월조봉(月照峰)에 치성을 다하여 늘그막에(부친이 41세 때) 얻은 귀한 외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통했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해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일찍부터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배워 제자백가에 능통했다는 기록도 행장에 보인다. 특히 음률과 창악, 속요에도 정통했던 기재적 문사였다는 것.
그러나 이런 동리도 신분의 제약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고작 아전인 서리(胥吏)에 머물러야만 했다.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장상댁(將相宅)에 못생기고/활 잘 쏘아 평통(平統)할까/글 잘한다 과거(科擧)할까?’
그가 뒷날에 읊은 이 자탄(自嘆)섞인 단가를 보면 반상(班常)의 신분차별로 인해 맺힌 시름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신분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매우 강한 자아실현을 위한 의지로 나타났다. 이것은 그가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辭說)을 개작하면서 자신이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창자(唱者)가 아니었으면서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작중세계에 이입시킨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다른 가객 몽중가는 어사보고 산물을 한다는데 이 사설 짓는 이는 신행길을 차렸으니 좌상 처분 어떠할지’〈남창춘향가〉
‘가만 가만 빈말씀을 알 수가 없건마는 제사를 지내실 제 축문이 있겠기에 이 사설 짓는 사람 제 의사로 지어시니 공명선생 알으시면 꾸중이나 안하실지’〈적벽가〉
뿐만 아니라 그는 철저한 자력갱생의 실천자였다. 그가 40대가 되던 철종대 초에 이방(吏房)이 된 편력의 이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수신제가하고 입신(立身)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왔는가를 알 수 있다. 효(孝)와 우애 뿐 아니라 재산을 축적하는 면에 있어서도 철저했다. 심지어는 곡식에 거름되는 똥·오줌마저도 제 집에 돌아와서 보라는 샤일록적인 지독스러움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50∼55세를 전후하여 고을 관청의 재정을 실질적으로 전담하는 호장(戶長)을 지낸다. 당시 가객들 사이에 유행하던 〈날개타령〉이 그의 됨됨이의 일면을 얘기해 준다.
‘에헤에헤 나하에야
한량 중에 멋 알기난
고창의 신호장(申戶長)이 날개라’
그가 호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60세 무렵. 야인으로 돌아가 지금의 동리정사(桐里精舍)에 칩거하며 처사(處士)의 호칭을 받고(1873년·고종 10), 풍류를 벗삼는 유유자적한 전원생활로 노년을 보내게 된다.
그동안 광대들에 의해서 구비전승으로만 전해오던 판소리 사설들을 개작·정리해 문헌으로 집대성함은 물론, 이론체계를 세우고 문하의 제자들 지도에 혼신을 쏟았던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각 고을에 있는 광대들을 불러모아 침식을 제공하면서 연당집 대청마루에서 각각 판소리의 한 대목씩을 불러보게 하면서 사설과 음률, 창법을 바로 잡아주었다. 열두 간 중행랑에는 연일 도처에서 모여든 기녀와 창부, 소리광대들로 붐볐고, 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연당 난간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척도(尺度)하고 있는 동리 앞에 나아가 지도를 받으면서 ‘소리꾼’으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때 그가 설파한 판소리 이론은 그의 〈광대가(廣大歌)〉에 잘 나타나 있다.
“광대라 하난거시, 제일은 인물(人物)치레, 둘째난 사설(辭說)치레, 그 직차(之次) 득음(得音)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
하면서 판소리광대가 갖추어야 할 기본요건으로 인물·사설·득음·너름새의 네 가지를 규정하고,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즉, 첫째 빼어난 얼굴에, 둘째 좋은 목소리로 장단과 가락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셋째 분명하고 정확한 사설의 발음으로 노래나 이야기를 엮어나가야 하며, 넷째 구성지고 맵시 있는 표정이나 몸짓으로 청중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현재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신재효 판소리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물론 그 이전에도 판소리 명창광대가 있었다. 서유구(1764∼1845)의 사촌처남인 송만재의〈관우희(觀優戱)〉나 〈8도 재인등장(八道才人等狀)〉, 신위(申緯)의 〈관극시(觀劇詩)〉에 나타난 단편적인 기록을 보면, 판소리는 영·정조 때 우춘대·하한담·최선달·권삼득·모언갑·송흥록 등의 명창들이 열두 마당을 불렀다. 이 열두마당은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타령·화룡도·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강릉매화전인데, 이 중에서 춘향가·퇴별가·심청가·박흥보가·적벽가·변강쇠가 등 여섯 마당만이 신재효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신재효 이후에 변강쇠타령마저 연주되지 않았고, 나머지 다섯 마당만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 취사선택에 의한 개작(改作)은 유교적 관념인 삼강오륜에 그 주제를 맞추려 했던 계산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아무튼 뒷날 국창(國唱)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소리광대들 중 이날치(李捺致)·박만순·김세종·정창업·김창록·장자백·김찬업·김토산(金土山)등 당시 남도 판소리의 커다란 양대산맥인 동편제(東便制 : 구례·운봉·순창 출신)와 서편제(西便制 : 광주·나주·보성·고창 출신)의 거장들이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 나갔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여류국창인 진채선(陳彩仙)과 허금파(許錦波)도 그의 문하생이었는데, 특히 어릴 때부터 그의 문하에서 사사를 받은 진채선과는 보통을 뛰어넘는 연인 사이로서 그에 얽힌 에피소드가 자주 얘기되곤 한다.
진채선은 1847년 고창군 심원면 검당포에서 무당집 딸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여양진씨(驪陽陣氏)로 본래 무장에서 10여대를 눌러 살다가, 이후 고창의 검당포로 분가해 수 대째 살았다. 그녀가 고창의 심원 출신이며 성씨가 진씨라는 사실을 밝혀낸 이기화 고창 문화원장에 의하면, 1949년에 이원장 친구의 할아버지이자 신재효와 사돈간인 오의균씨(1948년 고창군수 지냄)의 얘기를 토대로 진채선의 이질녀(여동생의 딸)가 검당포에 살고 있음으로 확인했는데, 그 조카의 말로는 이모인 진채선이 얼굴이 약간 얽은 살짝곰보였으며 목소리는 청아하면서도 톡 튀는 듯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동리는 35년 연하인 진채선과 서로 사랑을 하였던 것이다.
그 무렵(1869년) 마침 경복궁이 중건되어 낙성연(落成宴)을 열면서 대원군이 전국의 광대들을 불러들여 경축의 풍류를 즐겼는데, 고창고을에서는 신재효가 그의 수제자인 채선을 보내 경축의 뜻으로 손수 지은 〈명당축원가〉〈성조가〉〈방아타령〉과 그녀의 장기인 〈춘향가〉를 부르게 하였다. 물론 원납전 모금 때도 5백 냥을 헌금했던 동리였다. 창을 듣고 난 대원군이 크게 놀라며 그 스승을 물으니 채선이 〈동리가〉를 불러 스승인 신재효를 소개했다. 이렇게 하여 채선은 대원군의 총애을 입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녀가 신재효의 빈민구휼한 덕행과 원납전 헌금 사실을 대원군에게 소상히 아룀으로써 신재효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이란 명예관직의 교지가 내려졌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비로소 중인이었던 신재효가 양반으로 신분상승이 된 것이었다. 이때가 1877년(고종 14), 그의 나이 66세였다.
이 무렵부터 궁중의 어전광대를 뽑는 기준의 하나로 ‘고창의 신재효 문하를 거치지 않고는 어전(御前)광대는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가 말년을 보낸 동리정사에서의 생활을 얘기해 주는 이런 일화도 있다.
그는 고독과 명상을 즐겼다. 사람들과 담론할 때에도 항상 눈을 감은 채였고, 평생을 두고 밤에 방에 불을 켜두는 일이 없었다. 그가 거처하는 방에는 돗자리를 깔고 사방 벽은 온통 검은 벽지로 도배를 해 어둡게 한 다음, 바늘귀 만한 구멍을 문에 뚫어놓고 그곳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빛을 벗삼아 홀로 명상의 삼매경에 젖어들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5자(尺) 정도 높이로 낮은 투춘나무 홍살문(무지개문이라 표현)을 만들어놓고 자기 집에 거들먹거리며 찾아오는 양반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고 이 문을 지나 들어오는 꼴을 정자 위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응어리진 신분차별에 대한 통한을 삭였다는 것이다.
그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외에도 어부사·허두가·오섬가·광대가·호남가·도리화가·치산가·갈처사십보가·단잡가·권유가·명당축원·방아타령 같은 단가(短歌)를 창작하기도 하였고, 그 당시 불리던 것들을 수집하여 정리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폭 넓은 창작정신의 소산인 ‘가루지기 타령’의 완전개작·정리로 도덕률이라는 족쇄가 채워졌던 조선조의 성(性)이 비로소 해방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날개 단 한량’으로 불릴 만큼 타고난 멋과 풍류기질로 끝내 판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오동잎 지듯 그 날개를 접고 영면한 것은 1884년(고종21). 기이하게도 그가 태어난 날인 11월 6일로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의 유해는 고창군 청북면 옥동(현성두리) 동남편 내동(內洞) 산기슭의 선영에 모셔져 있다.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愛碑)와 추념비가 모양성 안에, 그리고 〈동리가〉를 새긴 노래비가 생가터인 동리정사 안 한구석에 을씨년스럽게 서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낯모를 손님들을 맞는다.
이 고장 판소리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소리꾼들이 많지는 않지만, 우뚝한 소리꾼으로 명창 고 김소희(金素姬), 시조국창 김여란(金如蘭) 이 있다.
그래도 이 고장 사람들은 꼭 한가지만은 같은 소리로 목청을 돋군다.
“고창 신재효 문하를 거치지 않고는 어전광대는 될 수 없다!”
저 옛날 동리의 연당집에서 낭랑하게 울려나오던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 가락이 동리국악당에서 끊임없이 울려나오길 기대해보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