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44) 대표는 말 그대로 영화판에서 온 몸으로 구르고 부딪히며 성장한 사나이다. 최근작을 꼽으면 프로듀서로 참여한 '부당거래'(2010, 류승완 감독),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윤종빈 감독), '베를린'(2013, 류승완 감독)같은 선굵은 남자 영화가 대부분이다. 그 사이 영화사를 창립해 '신세계'(2013, 박훈정 감독), '남자가 사랑할 때'(2014, 한동욱 감독)에는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연애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그와의 막걸리토크는 영화사 사무실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진행됐다. 제작자로서 세번째 영화 '무뢰한'(오승욱 감독)에 이정재의 캐스팅이 무산돼 근심이 가득하던 그의 얼굴빛은 잔을 기울이며 조금씩 환해졌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 라희찬(STUDIO 706)
-이정재가 '무뢰한'에 출연하지 못해 아쉽겠다. "'빅매치'(가제, 최호 감독, 하반기 개봉)를 촬영하다 어깨를 크게 다쳐 수술까지 받았다. 석 달 간 숟가락도 못드는 상태다. 이정재가 '무뢰한'을 정말 하고 싶어했는데 어쩌겠나. 눈물 머금고 다른 배우 찾아야지. 이정재 캐스팅됐으면 '하녀'(2010, 임상수 감독) 이후 다시 전도연-이정재 조합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데."
-그래도 전도연은 출연 의사가 확고하다니 안심이겠다. "고마울 따름이다. 도연씨를 회장님이라 부른다. 영화계가 모셔야할 여배우다. 도연씨는 그렇게 불리는 거 싫다는데도 계속 회장님이라 부른다. 도연씨가 이정재 캐스팅이 불발된 걸 알고는 전화로 '힘내세요. 다른 배우 찾아봅시다'라고 했다. 남자 같다. 의리있는 배우다."
-어떻게 캐스팅했나. "지난해 도연씨가 부산국제영화제 어느 파티에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고 눈 인사하러 갔다. 영화 얘기를 했더니 시나리오는 좋은데, 스케줄이 빡빡하고 노출신이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일단 만나고 싶다고 부탁해 오승욱 감독과 함께 만났다. 그 자리에서 도연씨가 안하면 영화를 엎겠다(제작중단을 뜻하는 영화계 속어)고 했더니 승락해줬다."
-'무뢰한'은 어떤 내용인가. "전도연이 술집 마담으로 나온다. 마담의 내연남인 조폭(박성웅)이 용의자로 몰려 형사에 쫓긴다. 이정재가 하려던 역할이 그 형사다. 형사는 용의자가 언젠가 나타날 거로 보고 신분을 속인 채 술집에 영업상무로 취직한다.그러면서 마담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내연남에게 질투를 느끼며 파국으로 치닫는 얘기다. 하드보일드 멜로다. "
-어떤 감정선이 실리나. "용의자의 내연녀와 형사라는 관계가 아니라면 둘이 사랑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어차피 사는 건 안타까운 거니까. '신세계'가 폭발하는 영화였다면, '무뢰한'은 많이 누르는 영화다. 엔딩도 색다르다. 정사신도 한 두 장면 있다."
-이정재 대신 어떤 배우를 섭외중인가. "강한 형사지만, 여자가 어루만져줄 약한 구석도 있어야 한다. 나이가 많아도 안된다. 쉽지 않은 캐스팅이다."
-박성웅은 '신세계'에 이어 또 캐스팅했다. "박성웅의 얼굴을 좋아한다. 쌍꺼풀 없고, 허우대도 멀쩡하다. 앞 뒤 안재는 사람인 것도 좋아한다. 영화를 보면 왜 박성웅을 캐스팅했는지 알 거다. 다음달 말 촬영에 들어간다."
-배우를 캐스팅하고 눈물 날 정도로 기뻤던 경험이라면. "이번 영화에 전도연이 그랬고, '군도'(7월 23일 개봉, 윤종빈 감독)의 강동원도 그랬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신세계'에서 최민식씨가 작은 역이지만 해준다고 했을 때였다. 덕분에 다른 배우들도 캐스팅됐다. 그가 없었다면 '신세계'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캐스팅이 잘되면 기쁘지만, 날 믿어준 만큼 잘 찍어야 한다는 부담도 생긴다. "
-그래서 사무실에 최민식이 나온 '신세계' 포스터를 걸어둔 건가. "그는 나의 영원한 형이다. 지금의 한재덕은 민식이형이 만들었다. '올드보이'(2003, 박찬욱 감독) 때 배우와 제작실장으로 처음 만났다. 그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교류하게 될 줄 몰랐다. 그가 '범죄와의 전쟁'으로 그 해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탔을 때 뛸듯이 기뻤다."
-여전히 프로듀서와 제작자를 오가고 있나. "'베를린' 프로듀서와 '신세계' 제작자를 동시에 하면서 힘들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됐다. 프로듀서를 맡은 '군도'와 제작자로 나선 '남자가 사랑할 때'가 겹쳤다. 이쪽에도 미안하고, 저쪽에도 미안하고 그런 상황이었다. 전주 세트장에서 두 영화를 함께 찍은 적이 있는데, 황정민이 '군도' 촬영장에 놀러오기도 했다."
-'군도'는 윤종빈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던데. "편하니까 그랬겠지. 내가 잔대가리 안굴리는 편이기도 하고. 돕는다는 생각이었는데, 하길 잘한 것 같다."
-'군도'는 어디까지 진척됐나. "윤 감독이 열심히 후반작업중이다. 사운드 작업을 하러 곧 런던에 간다. 재밌는 오락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배우들이 워낙 많아 스케줄 맞추기 쉽지 않았다. 수염 분장도 해야하고, 액션도 있어 힘들었지만, 영화는 재밌게 나온 것 같다."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었나. "말타는 장면이 많았다. 말이 30~40마리 떼로 달리니까 배우가 떨어지면 부상의 위험이 컸다. 실제로 하정우와 강동원만 빼고 대부분의 배우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강동원은 승마 교관이 선수급이라고 칭찬했다. 점프해서 안장에 앉는 것도 직접 하고, 한 손에 칼을 들고도 잘 탔다. 하정우도 한 손으로 말을 탔는데, 정말 도적 같았다."
-어떤 것을 기대하면 될까. "역사적으로 민란이 성공한 적이 없다. 그런 팩트와는 다른 구석이 있다. 윤 감독 특유의 위트와 드라마가 있다. '윤종빈이 액션도 잘 찍네'라는 반응도 나올 거다. 오락영화의 구첩반상 같은 느낌이다. '이 정도면 안쪽팔려'하고 안도했던 영화는 관객들이 다 좋아해줬는데, '군도'도 그렇다."
-언제 희열을 느끼나. "용기내서 좋아하던 여자에게 고백했는데 '나도 널 좋아해' 라는 반응이 올 때가 연애의 최고 순간 아닌가. 영화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이 좋아해줄까 두근두근하는데, 반응이 빵 터질 때 희열을 느낀다. '범죄와의 전쟁'의 명대사 '살아있네'가 유행어가 되고, '신세계'에서 황정민이 했던 대사 '드루와 드루와(들어와 들어와)'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될 때 기분이 짜릿하다. 쪽팔리는 영화 만들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군도'가 그렇게 존경하는 최민식의 '명량-회오리 바다'(김한민 감독)와 올 여름 같은 시기에 개봉할 참인데.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두 영화가 동시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경사가 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공동 금메달인 거지."
-3월말 이탈리아에서 열린 피렌체 한국영화제에 최민식이 초대됐을때 함께 다녀왔는데. "민식이형과 여행한다는 생각으로 따라갔다. 민식이형 사인회에 망치나 장도리 들고와서 손잡이에 사인해달라는 팬들이 많았다. 망치를 문신으로 새긴 사람도 있었고. '올드보이'의 열혈팬들이 그렇게 많은 거다."
-첫 멜로인 '남자가 사랑할 때'의 흥행성적이 아쉽지 않나. "250만 관객이 목표였는데, 199만 명까지 갔다. 손해는 안봤지만 좀 아쉽다. 너무 정직했던 것도 있었고, 결국 영화를 잘 못만들었으니 그런 결과가 나온 거다. '파이란'(2001, 송해성 감독)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가당치 않은 꿈이었다. 더 노력해야지."
-개인적 인생에서도 멜로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연애는 하나."살살 하다말다 한다. 사실 결혼이 두렵다. 꼭 해야 하나란 생각도 들고. 지금은 영화가 더 중요하다.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일에 너무 매몰된 탓에 두 달 전 헤어졌다. 마음이 아프다. 난 내가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모습이 상상이 안된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하지만 사랑은 하고 싶다."
-영화를 곧잘 연애에 비유하는데. "사랑하는 이와 만나면 즐겁기만 하나. 고통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좌절도 하고, 그런 게 연애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과정이 고통이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의 박수 받을 때, 그 짧은 희열을 위해서 하는 거다. 캐스팅도 연애다. 전도연에게 꼭 함께 영화 찍고 싶다고 '꼬시는' 건, 사랑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인물이든 스토리든 장면이든 뭐 하나엔 꽂혀야 영화를 만드는데, 그것도 여자 사귀는 것과 비슷하다. 얼굴이 예쁘거나, 성격이 좋거나, 몸매가 좋거나 뭔가 마음에 드는 게 있어야 만나는 것 아닌가."
-영화인생 최고의 캐릭터를 꼽는다면. "'신세계'의 정청(황정민),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최민식)이다. 정청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캐릭터다. 오대수 덕분에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영광을 누렸다. 최익현은 정청과 달리 있을 법한 인물이다. 우리 아버지들이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았나. 비겁하게 산 아버지를 절대 욕할 수 없는 거다."
-롤모델로 삼은 영화인이 있다면. "없다. 무식하게 얘기하면 내가 남들의 롤모델이 돼야겠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을 한다. 그러려면 내 작품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지. 20대 때는기타노 다케시를 좋아했다. 웃으며 권총 자살하는 장면('소나티네'), 계속해서 싸대기 때리는 장면('그 남자, 흉폭하다') 등 내가 만들고 싶은 장면을 미리 찍었더라. 그의 스태프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사 이름이 사나이픽처스인데, 사나이의 길은 뭐라고 생각하나. "난 세련되진 않았지만 잔대가리는 안 굴린다. 그런 미덕이라도 갖추며 살려고 한다. 먹고 살겠다고 남을 밟거나 등치지 말자는 주의다. 쉽게 말해 쪽팔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그게 사나이의 길이다. 영화도 쪽팔리게 만들면 안된다. 느와르 풍 영화를 하는 건 잘할 것 같아서다. 난 내가 모르는 건 못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한 적 있는데. "이왕 만드는 거 잘 만들었다는 얘길 들어야 하지 않겠나. 감동과 여운이 남는 영화인 거지."
-그러면 '감동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되지 않나. "난 그런 단어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를 만들거야'같은 낯 간지러운 대사는 못날린다.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안한다. 그런 건 말로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 하면 되지."
-콤플렉스나 열등감 있는 친구들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결핍 있는 친구들이 파이팅이 넘친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덤비거든. 나도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학력·외모·집안환경 등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고교 때 성적은 반에서 50등 정도였다. 학교 정족수 채워주는 애였다. 영화로 치면 보조출연자 수준이었지. 그런 열등감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열등감은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결핍있는 친구들을 보면 예전의 날 보는 것 같아 길을 열어주고 싶다. '뭐든 끝까지 해보고 난 뒤 남 탓을 하라' '영화,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다. 막노동하던 야간 전문대 출신인 나도 영화사 대표가 됐다'고 말해준다. '무뢰한' 제작부에 지방대 영화과 출신의 키 작은 친구가 지원했길래 얼굴도 안보고 무조건 뽑으라 했다. '남자가 사랑할 때'의 한동욱 감독도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얻었지만, 실제론 초졸이다."
-영화계에 '패밀리'라고 꼽을만한 사람들은 누가 있나. "최민식·황정민·류승범·박성웅은 확실히 들어가고, 하정우는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조심스럽다. 감독으로는 류승완과 윤종빈이 있다. 류승완 감독과는 친척같은 느낌이다. 서로 어려울 때 '부당거래'를 같이 했다. 누가 류 감독 건드리면 못 참는다(웃음). 말이 패밀리지, 사실 내가 그들에 묻어가는 거다."
-'신세계' 속편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나. "박훈정 감독이 대본을 쓰고 있다. 전편의 프리퀄이다. 기대하는 이들이 워낙 많다. 배우들도 빨리 하자고 한다. 나중에 3탄도 만들어 신세계 트릴로지를 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1편보다 나은 2편이 나와야 한다. 빨리 열 번째 영화 만들어서 부산영화제에서 '사나이픽처스의 밤'이라는 조촐한 해장국 파티를 하고 싶다."
-제작자로서 영화상 시상식에 서고 싶은 포부는 없나. "수상소감 멘트는 준비해놨다. '사랑하는 민식이형, 형은 내 인생의 배우입니다. 이 상 나눠 가져요.' 황정민이 '신세계'로 지난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수상소감에서 날 언급해줬다. '사랑하는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 고맙습니다. 우리 가늘고 길게 오래 영화해요'라고. 그 동영상을 반복재생시켜놓고 보면서 집에서 혼자 소주 마셨다. 그런 수상소감을 계속 들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막걸리이야기는 나오질 않네요![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6.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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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토크는 영화사 사무실에서![소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30.gif)
잔을 기울이며 진행됐다. 제작자로서 세번째 영화 '무뢰한'(오승욱 감독)에 이정재의 캐스팅이 무산돼 근심이 가득하던 그의 얼굴빛은 잔을 기울이며 조금씩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