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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지 더운 여름날입니다. 어줍짢은 글 한 편 올립니다.
이제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만 72세 7개월)이라 생각하고 배낭여행 계획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제목 “퇴직 초등학교 교장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 - 세계 배낭여행”
서남유럽 중심(북아프리카 모로코 포함) 50일간의 대장정인데 이미 비행기 표는 예약완료 했습니다.(9월 17일 출발 ~ 11월 7일 귀국)
지금 여행할 곳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여행스케줄>
인천→파리(4박/파리시내, 베르사유궁, 몽생미셀)→런던(4박/시내투어와 솔즈베리의 스톤헨지)→에딘버러(3박/인근 관광지)→포르투갈(3박/리스본, 파티마, 포르투)→스페인(18박/전지역*바르셀로나 제외)→모로코(7박/전지역 두루)→스페인 바르셀로나(3박)→안도라(1박)→남프랑스(3박/루르드, 아를, 아비뇽)→스위스(4박/제네바, 체르마트, 인터라켄, 루체른, 베른)→프랑스 파리→인천
<저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저는 이 카페를 만든 여행의낭만입니다. ㅎ
(1) 루이 16세<Louis XVI>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비극
프랑스 루이 16세는 부르봉(Bourbon) 왕가의 마지막 황제이다.
1770년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했고 1774년 즉위였으나 각 당파와 귀족들의 알력에다 시민혁명의 불길에 휩쓸려 1791년 1월 루이 16세가, 같은 해 10월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guillotine)의 이슬로 사라졌다.
(2) 루르드(Lourdes) 성모발현 성지
프랑스 남부 툴루즈(Toulouse) 남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 루르드(Lourdes)는 피레네(Pyrenees) 산맥 기슭에 위치하며 급류를 이루는 강의 양안에 발전된 도시로, 중세에는 성채와 함께 전략적 요새였다고 한다. 백년전쟁 중 프랑스가 18개월에 걸친 포위공격 끝에 1406년 잉글랜드로부터 되찾았다. 강안에 세워진 중세시대 성은 루이 14세(1643~1715)가 등극한 때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국사범의 감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1858년, 2월부터 6월 사이에 베르나데트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라는 14세의 소녀는 루르드에서 가까운 가브드포(Gave de Pau) 강안의 마사비엘(Massabielle) 동굴에서 성모 마리아의 환영(幻影)을 수차례 목격한다. 1862년, 교황은 그 환영은 성모님의 발현이 확실하다고 선포하여 '루르드의 성모' 숭배가 공인받게 되었다.
베르나데타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프랑스>/Sancta Bernadetta<라틴>/1844. 1. 7. ~1879. 4. 16.)는 프랑스 루르드 출신으로 가난한 제분업자의 딸이었는데 1858년 2월 11일부터 6월 16일까지 이곳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에서 18차례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성모님이 발현하였던 그 동굴의 지하 샘물은 불치병에 기적적인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그때부터 루르드는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는데 그 이후 매년 환자나 불구자 5만여 명을 포함하여 거의 300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1876년 동굴 위에 작은 성당을 세웠는데 너무 많은 순례자들로 비좁게 되자 1958년,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지하성당을 다시 세웠다.
수비루는 1879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했는데 그녀의 시신은 지금까지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채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1925년 6월 14일 복녀품(福女品)에 오른 후, 1933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에 교황 비오 11세(Pio XI)에 의해 성녀(聖女)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4월 16일이다.
(3) Great Britain과 United Kingdom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걸쳐 살던 고대 원주민 켈트족은 기원전 50년경 로마군(라틴족)의 침입, 곧이어 유럽민족인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웨일스(Wales/남서부), 아일랜드(Ireland/서쪽의 섬), 스코틀랜드(Scotland/북부), 잉글랜드(England/중부와 남동부)로 나뉘어 국가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1536년 웨일스, 1707년 스코틀랜드, 1801년 아일랜드와 통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GB) 혹은 유나이티드 킹덤(United Kingdom/UK)으로 부르는 『연합왕국』이 되었으나 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전쟁을 일으켜 아일랜드 섬의 남부는 독립하였는데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는 종교문제로 영국연방으로 남았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씨앗은 1845년부터 1852년까지 7년간 아일랜드 지방을 휩쓸었던 감자 역병으로 인한 대기근(Great Famine)이 있었는데 영국 대지주들의 무자비한 착취로 아일랜드인들은 수많은 아사자(餓死者)를 내었고 전염병까지 겹쳐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아일랜드 인들은 지금까지도 당시 영국인들의 착취와 횡포에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
우리는 통상 잉글랜드(England/영국)이라고 부르지만 잉글랜드 이외, 특히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지역의 사람들은 매우 싫어하며 지금까지도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소수의 과격한 세력들이 있다고 한다. 잉글랜드에 통합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홈 네이션(Home Nation)이라 부르며 현재도 자치정부, 자치의회, 자치수도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고유의 언어,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다.
웨일스의 수도는 카디프(Cardiff/ 웨일스어로 Caerdydd), 스코틀랜드는 에딘버러(Edinburgh), 북아일랜드는 벨파스트(Belfast/ 아일랜드어로 Béal Feirste)이고 잉글랜드 수도는 당연히 런던(London)이다.
(4) 수수께끼의 고대유적 스톤헨지(Stonehenge)
스톤헨지(Stonehenge) - ‘공중에 걸쳐진 돌’이라는 뜻.
영국 잉글랜드지방 솔즈베리 북쪽 13km 지점에 있으며, BC 3.100년 경 세워진 미스터리의 건축물(고인돌)이다. 용도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선사유적이라 모두 추측일 뿐이라고 한다. 거대한 30개 기둥으로 구성된 원, 말발굽 모양으로 배치된 5개 석탑, 그 위의 상인방 돌은 길이 8m, 무게 50톤.
돌 해머로 두드려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미뤄 그리스의 미케네(Mycenae) 문명과 크레타 미노스(Minos) 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 동지와 하지의 일출과 일몰 방향으로 중심축이 배치되어 있음.
(5) 런던 브리지(London Bridge)
런던 중심부를 흐르는 템스(Thames)강에 1176~1209년 사이에 건설된 최초의 목조다리. 수많은 화재로 붕괴되었는데 수차례 보수를 거쳐 1820년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새 런던다리(New London Bridge)로 바뀌었고 다시 1960년대에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두 명의 어린이가 두 손을 맞잡고 높이 들어 다리 모양을 만들고, 5~6명의 어린이들이 그 밑을 통과하며 부르는 게임송인 이 노래는 영국 어린이들의 오래된 놀이인데 우리나라로 와서는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로 바뀌었다.
(6) 영국 역사의 비극의 장소 런던탑(London Tower)
16세기, 영국 튜더(Tudor) 왕조의 국왕 헨리 8세(Henry VIII)는 왕이 되기 위해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자 이혼하고 아름답고 총명했던 시녀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하지만 딸(엘리자베스)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하자 억울한 누명(불륜설 등)을 씌워 앤을 사형에 처하고 또 다른 아름다운 시녀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와 결혼했으나 역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영화화되었던 『1.000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앤 불린이다.
또한 형수인 캐서린과의 이혼이 교회법으로 허용되지 않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영국국교인 성공회를 만들어 자신이 수장이 되고 이혼을 합법화한다. 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Elizabeth I)가 결국 여왕으로 왕권을 이어받고....
형수와, 앤 불린과, 이혼하고 시모어와 결혼하는 등 여성편력이 복잡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아들을 낳지 못해’ 였다지만 과연???
1.000일 동안 왕비로 있었던 앤은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처형당하는데 결혼도 런던탑에서 올렸다니 아이러니이다. 그 밖에도 왕권 쟁탈로 수많은 왕족들이 갇혔던 곳이 또한 런던탑이다. 앤의 마지막 말은 『주님께 제 영혼을 맡깁니다.』
헨리8세는 1547년 1월 28일 사망하는데 향년 56세로 왕위에 오른 지 38년이었다고....
(7)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15세기 영국의 요크가문(York/紋章/하얀 장미)과 랭카스터가문(Lancaster/紋章/빨간 장미)의 왕권다툼 전쟁.
1485년 랭카스터가(家)의 헨리 튜더가 마지막 전쟁의 승리로 전쟁 종결. 튜더왕조의 시작.
(8)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런던의 블룸스베리에 있는 1753년에 세워진 대영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히는 박물관으로 주요 소장품은 고대 및 중세의 공예품과 예술품들이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로마 등에서 시작된 고대 문명에 관한 전시품들이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미라(Mummy)와 로제타석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붐비는 곳이며,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석상과 그리스 신전 부조(浮彫)들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또 2000년 11월, 한국관이 신설되었는데 구석기 유물부터 조선 후기 미술품까지 두루 전시하고 있다.
(9)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과 잔 다르크(Jeanne D'arc)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대부분 전투는 영국이 승리하여 광대한 영토를 빼앗았지만 최후의 전쟁인 오를레앙(Orleans) 전투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시골소녀 잔 다르크(Jeanne D'arc)의 활약 덕분에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는 빼앗겼던 대부분의 영토를 되찾는다.
평범한 시골소녀였던 잔 다르크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조국을 구해내지만 결국 포로가 되어 종교재판에서 마녀로 낙인찍히고 무고한 70가지 죄목을 덮어쓰고 화형을 당한다. 죽음이 다가오자 그녀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부탁했고, 아울러 자신이 묻힐 자리에 축성식을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잔 다르크 가족들의 탄원으로 교황 칼릭스투스 3세는 조사위원회의 설치를 명했고 1455~56년에 진행된 이 조사의 결과로 1431년의 잔 다르크의 유죄판결은 취소되었다.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ⅩⅤ)는 잔 다르크를 성인으로 추증했고 축일이 정해졌다. 같은 해 6월 24일 프랑스 의회는 잔 다르크를 기리는 국가적 축제를 매년 5월의 2번 째 주 일요일에 거행하도록 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10) 포르투갈 성모발현 파티마(Fatima) 성지
포르투갈(Portugal) 중부 산타렘(Santarem) 주 빌라노바 데 오렘(Ourem)에 있는 작은 마을 파티마는 레이리아(Leiria) 남동쪽 29㎞ 지점의 코바다이리아 고원에 있다. 마을이름은 12세기에 무어(Moor) 공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1917년, 성모의 발현으로 성모 마리아 성지가 되어 해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가난한 포르투갈 시골동네인 파티마의 젊은 농부의 자녀들인 7살의 히야친타(Hyacintha), 9살의 프란치스코(Francisco)와 10살의 루치아(Lucia)는 1917년 5월 13일부터 그 이후 10월 13일까지, 자신을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라고 밝힌 한 여인을 매달 만났다고 한다.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는 친 남매간이고 루치아는 사촌이었다. 3번째로 성모 마리아를 만난 뒤 아이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쟁이라고 욕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접 성모님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다음 달 10월 13일, 아이들의 말을 확인하려고 신문기자와 7만여 명의 군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날씨는 시커먼 구름이 온통 뒤덮이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는데 오후 1시경, 갑자기 비가 그치고 먹구름들이 물러갔으며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와 묘한 은빛 원반처럼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루치아가 군중을 향해 태양을 보라고 크게 소리치자 하늘에는 여러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고, 태양이 하늘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한 태양이 하늘에 있는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기 전에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였다. 이 현상은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십 km 떨어진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모두 목격하였다. 훗날 수녀가 된 루치아는 성모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그 부인이 입은 옷은 반짝거리는 물이 채워진 수정 유리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을 쏟아내는 찬란한 것이었다. 부인이 입은 옷은 발밑에까지 늘어뜨려졌으며 별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여섯 살 정도로 보였고,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상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 듯 한 슬픔도 비치고 있었다. 가늘고 섬세한 그 부인의 손은 진주 같은 것으로 엮어진 묵주를 들고서 가슴 부분에서 서로 맞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리아의 주교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했다. 같은 해에 교황은 파티마 순례자들에게 면상(免償)을 주었다.
순례자들의 봉헌은 로사리오의 기도를 자주 외우고 은총이 가득한 성모 마리아님의 원죄없는 잉태를 의심 없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모님께서 3명의 어린 목동들에게 알려주셨던 ‘비밀’ 이라고 불리게 된 메시지가 있는데 그 비밀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에서 처음 두 부분은 공개적으로 밝혀졌다. 그 비밀의 첫째 부분은 불쌍한 죄인들의 영혼이 가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장면이었으며, 둘째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었다고 한다. 비밀의 마지막 부분(제3의 비밀)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으며, 파티마의 목격자였던 루치아 수녀에 의해서 1944년 쓰여졌고 1957년 이래로 교황청에서 보관되고 있는데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교황청에서는 세상에 발표하지 않도록 금지하였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의 추측에 따르면 제3의 비밀은 가톨릭교회 내부에 발생될 혼돈(대혼란, 무질서)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파티마가 성모발현의 성지로 알려진 후 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Basilica/성전)가 건축되기 시작하여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있으며, 성당의 양쪽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고 정면에는 광장이 있는데 한 쪽에 자그마한 성모 발현 기념성당이 있다. 이 파티마 성모발현 성지는 기적적인 치유의 은총이 많이 보고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없다.
1967년 5월 13일, 성모님 첫 출현 후 50주년 기념일에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들이 교황 파울루스 6세가 평화를 기원하며 집전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운집했다.
(11) 스페인 역사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Santander) 지방의 선사시대 유적인 알타미라(Altamira) 동굴벽화가 보여주듯 스페인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약 500년간은 로마의 지배기로 국명을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했다. 그 이후 북유럽의 게르만족이 잠시 차지하였다가 7세기 초 아프리카의 무어(Moor)족이 침공하여 이슬람국인 그라나다(Granada) 왕국을 건설하고 15세기 말까지 800여 년 간을 통치하는데 이때 이슬람 건축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알함브라(Alhambra) 궁전, 헤네랄리페(El Generalife) 정원 등이 건축된다.
15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국인 동남 해안지방의 그라나다(Granada) 왕국과 북부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한 바스크(Basque) 지방의 나바라(Navarra) 왕국, 북동부 지역의 아라곤(Aragon) 왕국, 이베리아 중부의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4개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서쪽은 지금처럼 포르투갈(Portugal)이 있었다.
1474년, 이사벨(Isabel) 1세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아라곤의 페르난도(Fernando) 2세와 정략결혼하고 카스티야의 왕위를 쟁취하는데 결혼당시 이사벨이 18세, 페르난도가 17세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총력을 집중하는데 결국에는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바라 왕국까지 합병하여 스페인 통일에 성공하며 스페인 통일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
이사벨 여왕은 용기와 배짱이 두둑하여 1492년 이탈리아 사람 탐험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에게 자신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까지 처분하여 배를 대어주는 이른바 벤처 투자를 하는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엄청난 부를 안겨주어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끌어낸 여왕으로 유명하다. 그 이후 해양대국, 스페인 무적함대의 밑거름이 된 것도 이사벨 여왕의 업적이라고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피사로(Francisco Pizarro), 코르테즈(Fernando Cortés)등을 앞세운 중남미 대륙의 진출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엄청난 부를 안겨주게 되는데 후세에 약(藥)이 되었는지 독(毒)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들 정복자들이 중남미 인디오들에게 저지른 숱한 만행들은 지금까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고 유럽 백인들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디오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은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로 대변되는 혁명가들을 낳아 좌파정권들이 들어서는 빌미가 되었다. 또 자본주의 선진국에 종속되어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후진국들의 탈 종속(脫從屬)을 부르짖는 해방신학(解放神學)이 싹트게 된다.
이로부터 수세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중남미의 대부분 나라들은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현재 인디오들은 모국어 대신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으니 스페인의 자랑일까, 수치일까??
스페인 내전(1936~1939) 이후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서 36년 간 군부 독재를 겪었고 그 이후 민주화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12) 검은 성모님의 기적 몬세라트(Abbey of Montserrat) 수도원(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은 바르셀로나 몬세라트(Montserrat) 산기슭에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침식되어 들쭉날쭉하고 거친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는 몬세라트 산은 붉은 사암과 역암(礫岩)의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둘러싸고, 깊은 협곡은 아슬아슬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산기슭의 동굴에는 선사시대에 사람이 거주했던 유물들도 발굴 된다고 한다.
서기 888년, 기독교 은둔자들이 몬세라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이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받았다. 11세기에서 15세기 초까지 번창하던 베네딕토 수도회 분원은 1410년 대 수도원으로 독립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현재의 수도원과 바실리카 성당은 각각 1560년과 1755년에 세운 것으로 1812년 프랑스군에게 파괴당한 후 대대적으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몬스세라투스(톱니모양의 산), 카탈루냐인들은 몬트사그라트(신성한 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이 산은 오르기 험난한 바위산으로 지금은 등산열차, 케이블카 등이 설치되어 있고 또 가파르기는 하지만 오르는 길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정식 명칭은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산타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Santa Maria of Montserrat Abbey)'으로, 치유의 기적을 베푸는 오래된 성모자(聖母子) 목조상(像)으로 유명하다. 이 목조상은 성 누가(St. Luke)가 조각하고 사도 베드로(St. Peter)가 스페인으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며, 무어(Moor)인이 지배할 당시 동굴 속에 감춰져 있었다고 한다.
검은 성모상 :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이 성모상은 특이하게도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이다. 성 루카에 의해 만들어지고 서기 50년, 성 베드로에 의해 이곳 몬세라트로 모셔져 왔다고 하는 이 성모상은 아랍(Moor)인들에게 강탈당하거나 파괴될 것을 우려해 동굴 안에 숨겨 두었는데, 880년 목동들에게 밝은 빛과 함께 천상의 음악이 들려 빛이 있는 쪽을 따라가 보았더니 동굴 안에 검은 성모상이 있었다고 한다.
목동들은 놀라 이 사실을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만레사 주교에게 알렸고 주교님은 성모상을 옮기려 하였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교님은 성모상이 있어야 할 곳은 이 자리인 것 같다며 이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고고학자들이 조사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따르면 12세기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몬세라트 수도원 바실리카 대성당 제단 뒤편 2층에 모셔져 있는 이 검은 성모상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지만 오른손에 들고 있는 공은 만질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이것을 만지려고 찾아오는 순례객들로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이 검은 성모님은 치유의 능력을 베푸는 기적의 성모님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에스꼴라니아 소년 성가대(Escolania, Boys' choir) : 이곳 수도원의 자랑으로 13세기,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성가대이자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히는 ‘에스콜라니아’ 성가대가 있다.
빈 소년합창단,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과 더불어 세계 3대 소년합창단으로 꼽히는 에스콜라니아 소년 합창단은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객들과 관광객들을 위하여 무료로 매일 오후 1시에 2곡을 부른다고 한다. 공연이 없는 토요일에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성당 내부는 카탈루냐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소년의 조각상 : 검은 성모상과 함께 한 소년의 조각상이 순례자들의 눈을 끄는데 이 조각상은 애틋한 사연이 있다. 이 근방에 살던 한 소년이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소년은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소년의 사연을 알게 된 수도원에서는 단 하루지만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원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소년은 그토록 원하던 성가대복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안타깝게도 얼마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소년의 부모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준 성당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에 에스콜라니아 성가대복을 입은 아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수도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자비의 문 :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년 12월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시작으로 특별 자비의 희년(慈悲의 禧年)을 발표하였다. 교황님께서 발표하신 자비의 희년은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바타칸 교황청 성베드로 대성당에는 평소에는 봉인되어 있다가 희년(禧年)에만 열리는 ‘자비의 문’이 있다. 이 베드로 대성당의 자비의 문은 잠벌(暫罰)을 사해주는 전대사(全大赦)의 은혜를 내리는 문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번 교황님께서는 한 가지 더하여 전 세계적으로 베드로 대성당의 자비의 문과 같이 각 나라 별로 중요한 성당에 자비의 문을 열도록 하였다. 따라서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지정된 성당의 자비의 문을 통과하면 전대사의 은혜가 베풀어진다.
이 중요한 ‘자비의 문’이 바르셀로나의 몬세라트 수도원에 있는데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인 검은 성모상을 보러 들어가는 문이 바로 교황님께서 지정해 주신 ‘자비의 문’ 중의 하나라고 한다.
(13) 모로코 약사(略史)
모로코는 8세기에 최초의 회교왕조를 건설한 이후 12세기에 이르러 알제리·리비아·스페인 남부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한 적이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 등 유럽열강의 침략을 받아 1912년에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56년 3월 2일 독립하였다.1961년 2월 국왕 하산 2세(Hassan II)가 즉위하여 1962년 12월 입헌군주국을 선포하였다.
1972년 3월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여 시행한 이후 국왕이 삼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사하라전쟁의 장기화와 열세로 인하여 야당의 불만이 누적된 데다가 1981년 5월과 1984년 1월에는 식료품가격 폭등과 노사분규 등이 겹쳐 대규모 유혈폭동을 겪기도 하였다. 1975년 11월 스페인이 서부사하라에서 철수하자 모로코는 서부사하라를 점령하였고, 그 뒤에 서부사하라 독립단체인 폴리사리오와 전쟁을 계속하였다. 아프리카단결기구(OAU)와 국제연합은 1983년 모로코와 폴리사리오간의 직접교섭과 서부사하라에서의 휴전 및 국민투표실시를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으나, 모로코는 이에 응하지 않고 서부사하라문제의 군사적 해결에 집착함으로써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한편, 폴리사리오를 승인하는 국가 수도 점차 증가하여 1984년 11월 아프리카단결기구 제20차 정상회의에는 폴리사리오가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에 항의하여 모로코는 이 기구로부터 탈퇴하였다. 모로코는 폴리사리오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알제리와 1976년 외교관계를 단절하였고, 1979년 3월에 이디오피아와, 4월에는 이집트와도 단교하였으나, 1989년 2월 알제리·튀니지·리비아·모리타니와 아랍-아그레브연합(AMU)을 결성하고, 1991년 9월 폴리사리오와의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분쟁종식에 주력하고 있다. 모로코는 1956년 유엔에, 1961년에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으며, 대외적으로 우경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마그레브연방의 건설, 아랍 및 아프리카의 단결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모로코는 191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1956년 다시 독립하였으며, 오늘날 북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유일한 왕조이다.
(13) 불후의 명화 카사블랑카(Casablanca/하얀집)
- 마이클 커티즈(미국) 감독의 1942년 작품.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 -
세계 2차 대전, 파죽의 독일군에 밀려 파리까지 점령당하자 지하에서 싸우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령 모로코로 피신, 미국행 배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미국인 험프리 보가트는 옛 애인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이 프랑스 레지스탕스 리더인 남편과 나타나 독일 첩보원을 피하여 미국으로 밀항하는 통행증을 부탁한다.
아직도 옛 애인을 잊지 못하는 험프리 보가트.... 결국 부부를 미국으로 떠나도록 도와준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카페에서 속삭인다.
“내일 저녁 만나서....”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을 어찌 약속할 수 있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쟁 중의 절박함을 나타내는 대사이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고혹적인 매력과 험프리 보가트의 여심(女心)을 흔들던 우수에 찬 눈동자가 오래도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화이다.
들으면 언제나 우수에 젖게 하는 애잔한 멜로디의 음악 ‘카사블랑카’
미국가수 버티 히긴스(Vertie Higgins)는 카사블랑카 영화를 보고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사실 영화 OST와는 관계가 없는 노래지만 바로 이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매혹적인 곡이다.
Casablanca(카사블랑카/하얀집)
I fell in love with you watching Casablanca
Back row of the drive-in show in the flickering light
Popcorn and cokes beneath the stars became champagne and caviar
Making love on a long hot summers night
나는 카사블랑카를 바라보며 당신과 사랑에 빠졌었지/ 야외극장의 뒷줄, 희미한 불빛 아래
별 빛 아래에서 팝콘과 콜라는 샴페인과 캐비어로 변했지/ 길고 더운 여름밤 사랑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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