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역사
바빌로니아의 영광 페르시아 제국의 권세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고대에 가장 많은 전쟁이 일어난 곳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인간이 정착하기에 유리한 여건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지역을 차지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라면 일반적으로 서아시아 거의 전역을 가리키며 지금의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이 포함된다. 현재 각국에서는 이들 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는데 힘쓰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라크에서는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알려주는 바빌론, 이란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을 의미하는 페르세폴리스를 복원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원통형 인장을 점토 위에 돌려 찍은 후 봉인해 자신의 소유권임을 선언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토기에도 인장을 찍었다. 동양에서 사용하는 인장도 이들로부터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담 후세인은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재건하기 위해 수백만장의 벽돌을 구웠다. 벽돌마다 ‘네부카드네자르왕의 바빌론이 후세인 시대에 재현되다’라는 문구를 새겼다.
[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바빌론 ]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으로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시를 중심으로 ‘고(古)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제1왕조를 세우면서부터다. 이들의 수도 바빌론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 파괴, 약탈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복원됐다. 유명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기원전 6백5년~5백62년)가 바빌론을 사상 최대의 성곽을 가진 도시로 건설해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한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며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나보포라싸왕은 ‘마르둑신이 나에게 에테메난키(바벨탑)의 기초를 지구 중심까지 닿도록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야만 하늘까지 오를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동물의 왕’인 사자는 전쟁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하므로, 네브카드네자르왕의 궁전을 비롯한 성벽 곳곳에 조각했다.
[ 세계 7대 불가사의에도 포함 ]
바빌론은 거의 2천년 동안 황폐해진 상태로 방치됐다가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독일인 콜데바이에 의해 다시 햇빛을 보게 된다. 바빌론은 이중 성곽으로 돼 있는데 외각 성벽은 양변이 1천8백m와 1천3백m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이다. 헤로도투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이 네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리더라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적었는데, 콜데바이의 발굴로 이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됐다. 바빌론은 지구상에 알려진 고대의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장대한 성이었으며, 여기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공중정원은 중세시대에 파로스 등대로 바뀌기 전까지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도 포함됐다. 바빌론에는 사자의 그림이나 조각이 많은데 이는 사자를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이슈타르문’은 내성 입구에 있는데 용과 기괴한 장식으로 돼 있다. 그러나 현재 서있는 이슈타르 성문은 원래의 것이 아니다. 콜데바이가 독일로 가져가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슈타르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공중정원이 있다. 1978년부터 이라크는 ‘국민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돌려주기 위해 네브카드네자르 왕의 바빌론을 다시 건설한다’면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유명한 공중정원도 조만간 제 모습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이슈타르문. 원본은 콜데바이에 의해 독일로 옮겨져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문은 의식용 문인데다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파괴를 면했다.
뇌우(雷雨)의 신 아다드의 황소. 구운 벽돌 위에 채색유약을 칠한 짐승들의 부조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대의 특징적인 양식이다.
이슈타르문의 높이는 14.3m나 되며, 동물을 포함한 5백75개의 각종 조각들이 있다. 그림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각종 상상의 동물 모습.
페르세폴리스의 전경. 길이 4백50m, 폭 3백m로 궁전이라기 보다 궁전 속의 대도시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 사상 최고의 제국 페르시아 ]
페르세폴리스의 복원도
A. 아파다나 궁
B. 크세르크세스의 문
C.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메소포타미아의 패자로 등장한 페르시아 왕국은 처음에 우르미아 호수 서남쪽에서부터 힘을 길러 리디아의 크로에수스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다. 유명한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백22년-4백86년)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키로스(재위 기원전 5백59년-5백30년)의 인척으로 각국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고 명실공히 대제국의 왕으로 군림한다. 다리우스는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각 지역에 총독을 파견해 공물과 세금을 거뒀으며, 이를 위해 총 2천6백98km에 달하는 ‘왕의 길’을 건설했다. 중간 중간에 가장 빠른 말을 바꿔 탈 수 있는 역참이 1백11장소가 있었는데 아무리 먼 지역이라도 긴급한 서류가 1주일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안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이런 제도는 페르시아를 사상 최고의 제국으로 만든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에 패배한다. 전쟁의 결과로만 따지면 결코 대제국의 기초를 뒤흔들만한 큰 사건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에 패배한 후에도 1백50년 동안 계속 왕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알렉산더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와 정면 승부를 하다가 기원전 3백30년 이란고원에서 자살함으로써 페르시아 대제국은 영원히 막을 내리고 알렉산더로 하여금 세계의 패자가 되도록 한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에 조각된 조공사절단의 행렬도.
[각국의 문화와 전통 존중 ]
라마수. 날개 달린 인면수신상으로, 궁전 문을 지키며 악령을 퇴치하는 수호신이다. 다리가 5개인 것이 특징이다. (위)접견실로 향하는 계단의 벽에 새겨진 조각. 우측상단에 1만명 친위대원들이 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단 한명이라도 결원이 생길 경우 즉각적인 보충이 이뤄졌다.
(아래)페르세폴리스 궁전 벽면의 조각으로, 각국의 조공사절단이 조공을 바치기 위해 줄을 서있다. 각국 조공사절단의 앞에 안내인이 그들을 인도한다.
페르세폴리스는 가로 3백m, 세로 4백50m의 거대한 단구(호수나 바다의 연안에 생기는 계단 모양의 지형) 위에 세워졌으며 주변이 잘 보이는 라흐카트산에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궁으로 들어가는 ‘만국의 문’이 있는데 매년 초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이 이 문을 통해 본궁으로 들어갔다. 페르세폴리스에는 여러 궁전들이 있다. 다리우스 궁전, 크세르크세스의 궁전, 아타르크세르크세스 궁전과 무덤, 하렘 등이 있고 중앙에 아파다나궁(사절단을 접견하던 곳)이 있으며, 요소 요소의 계단 벽에 많은 조각들이 있다.
알렉산더는 3백31년 다리우스를 격파한 후, 페르세폴리스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페르시아의 요충지임을 감안해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페르시아는 원래 이란 고원의 작은 곳에서부터 출발한 기마 민족이므로 자신이 점령한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와 같은 나라에 비해 문화 수준이 낮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복한 이들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했으며, 페르세폴리스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궁정은 경사가 완만한 언덕 위에 계단식으로 지었는데, 이는 바빌로니아식이고 궁성 정문 양옆에 설치한 라마수는 아시리아식이다. 궁내의 넒은 공간에 설치한 열주(줄지어 늘어선 기둥)는 이집트에서 도입한 방식이다. 비록 각국의 다양한 기법을 조합해 만들었지만, 왕궁 전체로서는 높이 20m에 달하는 열주를 비롯해 장대함과 힘찬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들이 제국 시대의 문화적 요소를 나름대로 조화시켜 대제국의 위엄을 뽐내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의 제 1차 페르시아 전쟁은 끝나고 그 뒤를 이은 크세르크스 대왕은 그리스 정복이라는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이번에는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성이고 뭐고 엄청난 인해전술로 그리스를 파도처럼 휩쓸어 버리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원정공격루트로 헬레스폰트 해협에 함선으로 선교를 놓고 육군을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반도 북서쪽 트라키아로 대규모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역시 복속된 속국 마케도니아 해안을 따라서 북쪽에서 해군을 반도 동쪽 해안을 따라 함께 아테네로 남하시키는 수륙합동작전을 펼치려고 하였다.
이같은 전략은 선대왕때 마도니우스 장군이 써먹다가 마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삼지창처럼 생긴 칼키디키 반도의 하나의 창날끝에 위치한 아토스 산 근처에서 심한 풍랑으로 함선을 모두 잃고 퇴각한 적이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크세르세스 대왕은 아토스산 뒤편에 폭 100피트 길이 1마일의 운하(원정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있다)를 파서 함선을 이동시키려고 계획하는 등 매우 주의깊고 세심한 신경을 썼다. 즉, 세 번째 원정만큼은 지구의 지형을 바꿔서라도(어쩌면 삼지창을 훼손한 벌로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그의 필생의 의지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서쪽의 강력한 해상세력인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어서 시실리 섬의 여러 코린트계 식민도시들을 위협하여 그리스의 또다른 부유한 상공업 폴리스인 코린트(스파르타의 물주)가 아테네와 연합하려는 것을 최대한 견제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마라톤 만의 패전후 10년뒤인 BC 480년에 사르디스에 집결해 있던 엄청난 군대(100만명이었다는 설도 있음)에게 원정을 떠나도록 명령을 내리고 약 1200척의 대규모 함대(주로 페니키아, 이집트의 함선으로 이루어진)를 펠로폰네소스 해협에 모이도록 한다. 객관적 수치로만 볼때 그리스의 운명은 이제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였다.
바람앞의 촛불신세인 아테네에게는 다행하게도 테미스토클레스라는 현명하고도 유능한 지도자가 존재하였다.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찬란한 승리를 몹시 부러워했던 그는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곧 있을지 모를 대규모 침공에 맞서서 조국 아테네를 구하고자하는 열망과 야심이 남달랐었다.
그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서 자신의 두뇌로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의 복잡한 입력 상황들을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계산/분석하고 판단/결정하여 거의 실시간에 최적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경이적인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방공 구축함의 이지스 체계가 반경 500km 이내의 200개의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하고 이중 24개의 표적을 동시에 격파가 가능하게 만드는 레이더 시스템과 수퍼컴퓨터의 실시간 계산력에 비교될지도 모른다. 이와같은 그의 능력은 사실 교육을 잘 받은데서 기인한다기보다 맥도널드의 설립자 레이 크락처럼 street-smart에서 오는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마라톤 전투의 행운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고 페르시아가 또다시 대규모 해군을 동원하여 그리스 반도 상륙작전을 감행해 온다면 페르시아군이 아티카에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이를 막아낼 작정이었다. 물론 페르시아 해군의 거의 1000여척에 달할지모를 압도적인 숫적 우세에 대항하여 탁트인 넓은 해상에서 정면대결을 벌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 반도 남동쪽에는 천연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많은 섬들이 있었으며 이 섬들 뒤에 숨어서 페르시아의 함선들을 기습 공격하고 퇴각하는 게릴라 전술을 계속 구사하여 페르시아 함대를 혼란, 산개시키면 적의 침공을 단념하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페르시아의 예봉을 무디게(말들을 놀라게 해서 엄청난 배멀미로 맛이 가게 하면 기병대를 약화시킬수도 있을지 모른다)할수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피라에우스의 천연 항구들을 요새화하여 적의 상륙을 최대한 저지하려고 하였다. 만약 마도니우스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크세륵세스가 북쪽 침공루트를 이용, 대규모의 육군과 해군을 그리스 반도 북쪽에서 함께 남하시키면 잘난 스파르타군이 그리스의 산악 지형을 최대로 이용, 테르모필라이의 좁은 협로에서 적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아테네 함락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기어오르는 페르시아군의 인해전술을 아테네 성벽안에서 막아낼 방법(이 시대에는 핵폭탄이 없었다)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최악의 경우의 작전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스파르타가 페르시아군의 남하를 저지하지 못하거나 배신을 때릴 경우에 모든 시민들을 아테네에서 살라미스 섬과 더 남쪽의 트로이젠으로 소개시키는 이른바 아테네 소개작전을 제 1단계로 펼치고 제 2단계로 스파르타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설득하여 페르시아의 대규모 해군을 살라미스의 좁은 해역으로 유인시켜 해전(Operation Dried Sausage's Fury)을 벌일 생각이었다.
적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문을 통해 한두명씩 낑겨서 공격해 올 수밖에 없는 적을 하나씩 망치로 내려치는 전략인 것이다. 만약 스파르타가 해전을 거부하면 아테네 시민들을 함선에 태우고 그리스 반도를 영원히 떠나 이탈리아 남부 어딘가로 건너가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제 3단계의 최후의 작전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물론 제 3단계 작전은 그를 제외한 극소수의 인물만이 알고있는 극비였을 것이다.
이와같은 작전의 수행을 가능케하는 수단으로서 많은 함선의 건조가 필요했다. 아테네 해군은 당시 약 70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를 200척까지 늘리려고 계획했다. 이에 필요한 재원으로서 원래 아테네 일반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기로 작정했던 새로이 발견된 은 광산에서 캐낸 은을 함선을 건조하는데 사용하려고 하였다. 오늘을 살아가기에 바쁜 상당수의 아테네 시민들 중에 이같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만약 동해상에서 엄청난 매장량의 유전이 발견되어 일본과 미국에게 팔아서 막대한 외화를 획득한다고 가정하면 국민에게 천만원씩 나누기 보다는 이지스 구축함 400척을 건조하자고 주장하면 욕먹을지도 모른다) 것이다. 그의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 아리스티데스는 해군확장 정책에 반대하였다.
북방의 야만족 침입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를 지켜온 것은 바로 팔랑크스 육군이지 볼품없는 배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검증되지 않은 해상 전략으로 아테네를 페르시아로부터 지켜낼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진보적인 생각(그러면 아리스티데스는 보수적?)으로 위험스럽게까지 보였다. 물론 아리스티데스는 마라톤 전투의 승리에 고무(사실 페르시아군의 100% 위력이 발휘된 전투가 아니었다)되어 페르시아군을 육지에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의심쩍어 보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진심(love you from the bottom of my heart)을 신뢰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도편추방제(ostracism)로 그가 정치적 힘을 잃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여 해군력 확장을 밀어붙일수 있게 된다.
그는 훨씬 우세한 수의 페르시아 해군에 대항하여 좀 더 크기가 크고 육중한 트라이림을 건조하려고 하였다. 당시의 해전은 서로 배를 가까이 근접하여 화살등을 쏘거나 적의 갑판위로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형태가 주를 이루었는데 트라이림은 배의 앞에 뾰죽하고 튼튼한 충각을 달아서 적 함선의 측면이나 취약한 후면으로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는 전술을 사용한다. 그리스인들은 한층 약아서 먼저 적함의 옆을 매우 가깝게 스쳐 지나가서 노를 모두 부러뜨리는 전술로 기동성을 잃게 만들고 엔진이 꺼진 적함과 서로 뒤얽히지 않고 안전하게 구멍내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이같은 전술의 핵심은 바로 배의 속도와 기동성에 있었는데 노줄을 3층으로 만들어서 속도를 최대한 높이고 노예 대신에 실직한 아테네 자유민들을 노꾼으로 고용하여 봉급을 두둑하게 주고 노젓는 훈련(close pass, sharp turn, sprint, back off)을 강도높게 시켰다고 한다. 말하자면 생활터전을 잃은 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이 해군에 입대하여 배의 엔진(최대 10노트면 몇 마력짜리 엔진일까?)이 된 것이다. 아테네 입장에서는 전쟁준비 태세를 갖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셈이다. 해군력 증강과 훈련, 적 함대를 일거에 괴멸시킬수도 있을 작전계획, 최악의 경우 모종의 작전 등. 이제 남은것은 스파르타를 위시한 다른 그리스 도시들과의 성공적인 동맹을 최대한 이끌어내 페르시아군과의 일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와 코린트는 회의를 거듭하며 짱구를 굴렸다. 그러나 크세륵세스의 속셈이 아테네의 멸망뿐만이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포함한 그리스의 완전 정복과 식민지화라는 것을 깨닫자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한다. 마케도니아를 지나 페르시아군이 개떼처럼 밀려오자 그리스 연합군은 북쪽의 테살리아 근처에 약 1만명의 군대로 제 1방어선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방어가 여의치 않자 남쪽으로 퇴각하여 해안을 낀 좁은 협로인 테르모필라이에서 7000명의 군대로 제 2방어선을 치고 페르시아군을 기다렸다. 사실 스파르타를 포함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서는 좁은 길목인 코린트 지협(isthmus)에서 페르시아군을 막아내길 선호했다.
이것은 중부 그리스 도시들과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아테네는 테르모필라이에서 방어선을 쳐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스파르타군으로서는 함께 남하하는 페르시아 해군이 유보이아 섬 북쪽의 해협을 통과하여 육군에게 보급 물자를 공급하고 그리스군의 방어선 뒤편을 위협하는 사태를 막기위해서라도 아테네 해군이 필요했다. 마침내 스파르타의 팔랑크스와 페르시아의 백만대군은 좁은 협로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은 엄청난 양의 화살을 스파르타군에게 퍼부어 화살이 태양을 가려서 어두컴컴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주력보 병인 불사의 군대가 스파르타의 밀집방진을 뚫기위해 계속 밀어 넣어졌다. 그러나 역시 스파르타군은 전투기계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들은 레오니다스 왕의 지휘아래 페르시아의 파상공격을 이틀이나 막아냈다. 스파르타군의 팔랑크스 정면은 그리스 최강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이틀간의 파상공격에서 1만명이나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으나 스파르타군의 손실은 미미해 보였다. 페르시아군은 초조해졌고 다혈질에 성질이 급한 크세륵세스는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이때 페르시아에게는 천운으로 그리스에서 배신자가 나타난다. 그는 산허리를 돌아가서 테르모필라이를 우회하는 방어가 허술한 길을 페르시아군에게 가르쳐주고 막대한 반대급부를 요구한다. 페르시아군이 우회하여 스파르타군의 배후를 노리자 레오니다스 왕은 약 1000명의 군사를 남기고 나머지 군대를 후퇴하도록 명령한 뒤에 자신 포함 300명의 스파르타군이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이때 테베군은 전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재빨리 항복하고 크세륵세스 대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약삭빠름을 보인다. 한편 스파르타인 유리비아데스 제독이 지휘하는(아테네인이 자신들의 해군제독이 되는 것을 꺼려한 동맹도시들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임명) 그리스 연합함대(주로 아테네 해군으로 구성)는 아르테미시움에서 좁은 해협으로 낑겨 들어오려는 페르시아 해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사실 페르시아 함대는 여기까지 남하하면서 자신들을 쫓아다니는 폭풍우 때문에 미칠지경이었다. 이미 상당한 손실이 있었는데 아테네 해군의 맹렬한 저항을 받자 페르시아 함대는 공해상으로 철수한다. 크세륵세스는 함선 200척을 유보이아 섬 남단으로 돌아가서 그리스 해군에 대한 뒷치기 공격을 시도하는데 폭풍우가 이들을 삼켜버린다. 이것은 아마도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훼손한데 따른 벌이거나 어쩌면 예언자 대니얼이 말한 대천사 게이브리얼이 인간들의 역사적인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신호였는지도 몰랐다.
출처 : 강상훈 싸이월드
아케메네스 제국 (BC559 - BC331)
아케메네스 제국은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 제국을 이르는 말이다. 이란 북서쪽 아제르바이잔에 살고 있었던 페르시아인들이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그 당시 엘람 왕국의 지금의 페르세폴리스 근방에 정착하였다.
당시 엘람 왕국이 앗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 왕자는 부친 아케메네스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키루스 2세가 즉위한 BC 559년부터를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 소아시아를 점령한 뒤 BC 539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강재국인 바빌론을 함락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주었다.
BC 529년 아랄해 연안의 스키타이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선 키루스 2세는 전쟁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다리우스 1세와 그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 기간 중 아케메네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이들의 통치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 리비아, 아라비아 반도에서 카프카스 산맥과 아랄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두번에 걸쳐 그리스 본토에 원정하였는데 마라톤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제국의 절정기에는 건축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제국의 수도였던 파사르가다에, 페르세폴리스, 엘람 지역의 수사를 조영하여 여름과 겨울의 수도로 삼았다.
다리우스가 장대한 궁전을 조영하고, 도시 전체를 성새(城塞)로 두른 이후 크게 번영하였다.
페르세폴리스(세번째 수도)는 다리우스 1세가 BC 518년부터 150년에 걸쳐 건설한 도시이다.
다리우스 대왕의 궁전은 기둥이 7층 높이의 건물로 내궁, 외궁이 있다. 페르시아궁전의 특징은 실내에 기둥을 썼다.
궁전 주춧돌에는 연꽃 문양을 사용하였고, 기둥 머리에는 쌍숫소상을 조각하였다.
아파타나 입구로 오르는 계단 벽에는 전 세계에서 조공을 바치러 온 사람들이 부조로 새겨 있다. 28개국의 사절들이 신년(춘분)이 되면 조공 행사에 참석하였다.
다리우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에게 패하며 BC 33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가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