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3일 오늘의 역사
2020년 법원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가짜뉴스 쏟아낸 지만원에게 징역 2년 선고
2020년 6개월 이상 지속된 호주 산불 공식 종료 선언,
일주일간 400mm 폭우가 불 끔, 2019년 9월 이후 11,000곳 이상에서 불, 남한보다 넓은 11만㎢ 불타고, 10억 마리 이상의 동물 불타 죽음, 코알라는 멸종위기에 놓임
2017년 북한 김정은 이복형 김정남 피살
김정남은 2017년 2월13일 오전 9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제2청사에서 오전 10시발 마카오행 항공편 탑승을 위해 수속을 밟던 중 신원 미상의 여성 2명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내 항공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정남은 공항내 저가비용항공사(LCC) 전용 터미널에서 출국을 위해 셀프체크인 기기를 사용하던 중 여성 2명으로부터 미확인 물질을 투척 받고 사망했다
2014년 빙속여제' 이상화 소치올림픽 금메달 시상식
이상화는 13일(한국시각) 러시아 소치 메달 플라자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500m 경기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상화는 당당하게 시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수상했다. 또한 태극기가 연주되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앞서 이상화는 지난 11일 러시아 소치 아들레르아레나에서 열린 `
2014 소치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1·2차 레합계 74초70을 기록,
34명 중 1위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상화는 밴쿠버 올림픽에 이어 두번째 금메달 도전에 성공했으며, 올림픽 신기록을 달성했다.
이를 접한 누리꾼들은 "이상화 금메달 시상식 동영상 감동이다" "이상화 금메달 시상식 동영상 금메달 축하해요" "이상화 금메달 시상식 동영상 세계 1위라니 진짜 멋지다" "이상화 금메달 시상식 동영상 태극기 오를 때 나도 울컥" "이상화 금메달 시상식 애국가 나오는 순간 정말 눈물나더라" "이상화 금메달 시상식 정말 예뻐요" 등의 반응을 보였다
2010년 2010년 벤쿠버 동계 올림픽 개막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이 2010년 2월 13일 오전 11시(한국시간) 캐나다 브리티스 컬럼비아주 밴쿠버의 BC플레이스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개막식을 열고 17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번 개회식은 역대 동, 하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실내에서 열렸으며 캐나다는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과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 세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됐다.
전 세계 89개국에서 55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하는 이번 동계올림픽에는 스키와 빙상, 바이애슬론, 봅슬레이, 루지, 아이스하키, 컬링 등, 7개 종목(15개 세부종목)을 겨루며 총 258개(금 86개)의 메달이 걸려있다. 이번 올림픽은 '타오르는 가슴으로(With Glowing Hearts)'를 대회 슬로건을 내세웠고, 캐나다 원주민의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을 형상화한 '미가(Miga)', '콰치(Quatchi)', '수미(Sumi)'를 대회 마스코트로 지정했다.
한국 선수단은 역대 동계올림픽 출전 사상 최다 규모인 5개 종목에 8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지난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따내 종합 7위에 올랐다.
북한은 이번 대회에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 고현숙(25), 남자 피겨스케이팅에 리성철(24) 등, 2명의 선수를 파견했다. 한국과 북한 개회식 동시입장은 양측의 의견 차이로 성사되지 못했다.
2009년 국내 최장, 금정터널 관통식 정전 사고
2009년 2월 13일 오전 11시 35분쯤 부산 금정터널 한가운데 지점에서 한국철도시설 공단 주최로 열린 터널 관통 기념 행사 도중 갑자기 정전이 발생했다.
당시 행사장에는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과 허남식 부산시장 등 200여명의 관계자들이 있었다.
정전은 기념사, 내빈축사, 국토해양부 장관의 치사가 끝나고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중국 철도부 허화우 총공정사에게 감사패를 전달할 때 일어났다. 행사를 시작한 지 35분쯤 뒤다. 순간 터널 내부는 완전 암흑천지로 변해 행사 참석자들이 웅성거렸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정전 이후에도 전기 공급이 바로 재개되지 않자, 방송사 카메라 불빛과 차량 전조등을 동원해 20여분간 행사를 계속했다.
공단은 “당시 부산지역에 갑자기 분 강풍 탓에 터널 안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임시 설치한 전선이 늘어지면서 접촉 불량이 발생해 정전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정터널의 길이는 20.3㎞로 기존 국내 최장 터널이었던 KTX 황학터널(10㎞)의 2배, 최장 교량인 서해대교(7.3㎞)의 3배에 이른다.
이번에 관통된 곳은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 지하 350여m 지점으로 금정터널 가운데 가장 깊은 곳이다. 2009년 7월에 전 구간의 공사가 마무리되면 부산~서울간 소요시간이 최소 2시간 10분으로 현재보다 30분 가량 단축된다
2007년 시장경제 강조 '교과서 모델' 교육부, 배포계획 전격 중단
2007년 KF-16 전투기, 네번째 추락
2007년 2014년 동계올림픽 후보 도시 검증 IOC 실사단, 평창 현지 도착
2007년 북한 핵 폐기를 위한 6자회담 합의문 타결·발표
6자회담 참가국들은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포기를 전제로 불능화(disablement) 조치를 취하면 중유 100만톤 상당(운송비 포함 4000억원 추정)의 에너지 및 경제 지원을 하기로 합의했다.
참가국 수석대표들은 이날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조치’ 합의문을 채택했다. 북한은 13일부터 60일 이내(4월13일 시한)에 영변 핵 시설을 ‘폐쇄(shutdown)·봉인(seal)’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의 입 국을 허용키로 했다. 이에 대한 보상 조치로 한국이 우선 5만톤(200억원)의 중유를 지원키로 했다.
나머지 95만톤은 북한이 이후 추가 조치를 통해 핵시설을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갈 때마다 단계적으로 지원키로 했다. 대북 지원비용은 참가국들이 ‘평등과 형평의 원칙에 따라 분담’ 한다는 규정하는 합의 의사록도 채택됐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 해결을 전제로 추후에 지원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합의문은 또 북한이 핵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리스트를 IAEA에 제출하도록 했다. 정부 당국자는 “리스트에는 플루토늄 핵프로그램 관련 시설 및 그 동안 추출한 플루토늄을 포함한다”고 했다.
2007년 정부·주민 24개 합의 서명, 평택 미군기지 이전갈등 종지부
2007년 2월 13일 지난 3년 6개월간 경기도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놓고 벌어진 주민과 정부 간 갈등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미군기지 예정지 주민 및 정부 대표단은 13일 오후 평택시청에서 이주단지 조성과 향후 생계 유지대책을 골자로 하는 24개 합의사항에 최종 서명했다. 이에 따라 이주를 거부하며 팽성읍 대추리·도두리에 남아 있던 59가구 주민들은 오는 3월 31일까지 이주를 완료할 예정이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인근 노와리와 남산리 2곳에 이주단지를 제공하고, 가구당 150~200평의 대지와 일부 농지를 유상 공급할 계획이다. 주민들은 이주단지 2곳 중 1곳을 선택할 수 있다.
2006년 영화 조스 원작자 피터 벤츨리 사망
영화 ‘조스’ 의 원작자인 해양소설가 피터 벤츨리(Peter Benchley.65)가 2006년 1월13일(한국시각)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미국 하버드대 졸업 후 대통령 연설문 작가, 기자로 활동하던 벤츨리는 1974년 소설 ‘조스’ 를 발표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거대한 백상어가 평온한 바닷가 마을을 공격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197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다.
벤츨리는 영화의 각본 집필에도 참여했고, 영화 속 TV 리포터 역으로 잠깐 출연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 백상어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 벤츨리는 정작 말년에는 ‘상어보호운동가’ 로 활동하며, ‘ 심연(The Deep)’, ‘ 섬(The Island)’ 등의 해양소설을 꾸준히 발표했다.
2004년 서울대학교 황우석교수, 세계 최초 인간배아 줄기세포 배양 성공
국내 과학자들이 세계 최초로 사람의 난자와 체세포를 합쳐 인간 배아(胚芽) 줄기세포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12일 인터넷 속보를 통해 황우석(黃禹錫) 서울대 수의대 교수와 문신용(文信容) 서울대 의대 교수팀이 인간의 체세포 핵을 난자에 삽입하는 방법으로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암·당뇨병 등 위험한 질병에 약을 투여하는 대신 줄기세포를 손상된 장기에 투입해 거부 반응 없이 원래 상태로 복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인간배아줄기세포를 각종 조직으로 분화시키는 기술이 개발되면 암, 당뇨, 파킨슨병 등 세포이상에서 비롯되는 각종 난치병에 새 치료법을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황 교수는 “조사 결과 체세포 제공자와 복제된 배아줄기세포의 유전자가 일치했다”며 “환자 자신의 체세포를 이용하면 면역 거부 반응 없이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세필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장은 “난치성 질병을 세포를 이용해 치료하는 데 큰 한계를 뛰어넘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생명’으로 봐야할지 논쟁이 적지 않은 인간 배아를 사용해 이뤄져, 큰 윤리적 논란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이봉주, 도쿄국제마라톤서 한국신기록 수립(2시간7분20초)
이봉주가 2년 만에 마라톤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했다. 이봉주는 2월 13일 열린 2000도쿄국제마라톤에서 2위로 2시간7분20초를 기록, 자신이 1998년 로테르담마라톤에서 세운 한국기록(2시간7분44초)을 24초나 단축한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다.
이날 낮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을 떠나 오오모리를 돌아오는 42.195㎞ 시내구간에서 열린 레이스는 기온 11도 안팎의 호조건에서 시작됐다. 줄곧 2-3위를 유지하던 이봉주는 27㎞지점에서 맨 앞에 나선 코스게이의 바로 뒤를 쫓았으며 선전을 다했다. 이봉주는 막판 뒷심 부족으로 자페트 코스게이(케냐·2시간7분15초)에게 우승을 내줬으나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금메달) 이후 1년여 계속된 부진에서 완전히 회복된 모습이었다.
96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봉주는 이로써 3명을 뽑는 국내마라톤 남자부 대표선발전에서 형재영(2시간10분37초.조폐공사)을 가볍게 제치고 1위에 올라서며 2회 연속 올림픽 진출을 확정했다.
1999년 영화 `쉬리` 서울극장 개봉, 국내 최다 관람객 기록
강제규 감독이 연출하고 한석규와 최민식, 송강호, 김윤진이 주연한 영화 `쉬리`가 1999년 2월 13일 개봉됐다. 개봉 119일 만인 6월 11일 종영한 `쉬리`는 한국 영화사를 다시 쓰게 할 정도의 화제작이었다.
한국 최다관객수를 기록하고 있는 `타이타닉`의 226만명을 훌쩍 뛰어넘어 서울 243만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579만명이 관람했다. 타이타닉이 100만명과 200만명 기록을 각각 39일, 102일 만에 기록한 반면 쉬리는 22일, 56일만에 달성했다. 영화흥행성공으로 극장들은 150여억원을, 제작사 강제규필름은 비디오-TV영화 판권을 제외한 극장수입만으로 70억원을, 주연 한석규는 12억원 가까운 거금을 벌어 들였다. 이후 일본에도 진출해 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계에서는 쉬리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보였다. 긍정적인 쪽에서는 쉬리가 `파이의 크기`를 키움으로써 한국영화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며 멜로나 코미디에만 몰두해왔던 관성에서 벗어나 새 분야에 도전, 대단한 성과를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반면 어차피 시장규모가 한정된 상태에서 한 영화의 독주는 다른 영화에 악재로 작용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1998년 멕시코정부, 대사관 직원 마약밀수 혐의로 김찬식 북한대사 추방
1995년 일본 NEC, 1기가 D램 개발
일본 반도체 생산업체인 NEC가 1기가(G) D램 개발에 성공했다고 1995년 2월 13일 공식발표했다. 1994년 8월 삼성전자가 256메가D램을 개발한 지 6개월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차세대 반도체가 개발된 셈이다.
NEC는 1기가D램(기가는 10억을 의미)은 2.6㎝×3.6㎝크기의 칩에 0.26미크론(1미크론=1천분의1㎜)굵기의 회로를 집어넣어 약 22억개의 소자(Cell)를 집적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1기가D램은 당시로서는 양산단계였던 16메가(M)D램보다 3세대 앞선 것으로, 휴대용 정보단말기 등 각종 첨단멀티미디어기기에 주로 사용됐다.
1기가D램은 신문내용으로는 1천장을 기억할 수 있고, 움직이는 화면은 약16분, 음성정보는 약4시간 가량을 각각 저장할 수 있다.
1994년 시인 김남주씨 별세
시인 김남주씨가 지병인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그는 채 50을 채우지 못한 일생동안 시인이기를 거부하면서 시를 써온 시인이었다. 그는 시를 쓰는 혁명가를 원했지만, 그의 혁명은 현실의 벽앞에서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오랫동안 옥중의 혁명 시인으로 존재하면서 그의 시가 사랑의 무기가 되기를 원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아 교도소에서 복역중일 때 이 시인에게는 펜과 종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1.5평의 감옥에서 숨겨두었던 못으로 우유곽에 시행들을 하나씩 새겨갔다. 서향받이라 여름이면 한증막같은 열기로 달아올랐다는 그 방에서 그는 `서른 일곱의 어쩌지도 못하는 이 기막힌 나이 이 환장할 청춘을 못 끝에 쏟아 부으며 나의 칼 나의 피`라고 새겨갔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명망있는 반체제 운동가들이 특사를 받을 때마다 그의 이름은 빠졌다.
9년째 복역중이던 지난 1988년 정부의 가석방조치로 세상에 돌아온 시인의 나이는 당시 40대 초반이었지만, 그의 머리는 이미 백발이었다. 그는 출옥이후 오랜 옥독에 시달렸지만, 시작과 시낭송에 전념했다. 1933년말 이미 병이 깊어졌을 때 그는 문병온 후배들에게 "야, 80일정도 남았다더라. 내 걱정말고 열심히 살아라"면서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1984년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 체르넨코를 새 서기장으로 선출
1984년 2월 13일. 브레즈네프의 최측근이었던 원로 당정치국원 콘스탄틴 체르넨코(73)가 지난 9일 사망한 안드로포프의 후임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됐다.
당 원로로서 그리고 당내 제1의 이데올로기 전문가로서 크렘린의 노장세력을 대표해온 그가 안드로포프 사망이후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티호노프 수상, 그로미코 외상, 그리고 우스티노프 전국방상으로 이어지는 정치국내의 노장세력과 고르바초프, 로마노프로 대표되는 소장세력간의 타협의 산물로서 그가 최적임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1911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20세때인 31세 공산당에 입당했다. 몰다비아공화국에서 일하고 있을 때인 1950년 브레즈네프가 몰다비아 당제1서기로 부임해오자 출세의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1971년 당중앙위원, 1976년 당중앙위 서기국원을 거쳐 1979년에 정치국원이 됐으며 그해 SALT II 협정서명때 브레즈네프를 수행,실력을 과시함으로써 브레즈네프의 오른팔로서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 크렘린의 대권경쟁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1983년 인도, 대규모 반정부시위
1981년 KBS, 광고방송 실시 결정
1980년 미국, 2년3개월 만에 국제노동기구(IOL)에 복귀키로 결정
1980년 제13회 동계올림픽 개막(미국 레이크 플레시드)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세계최대의 미계석유회사 아람코 완전 국유화
1974년 소련 반체제작가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되다.
소련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솔제니친이 1974년 2월 12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체포돼 다음날인 13일 소련에서 추방됐다. 솔제니친은 1945년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과 강제수용소 등에 감금되었다가 1953년 풀려나기도 했다.
1956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 발언을 하는 등 소련이 탈스탈린화 정책을 펼치며 문화생활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자, 이에 자신감을 얻어 1962년에 문예지 '노비미르' 11월호에 단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했다.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에서 한 수인이 겪는, 틀에 박힌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이 소설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재등장이라는 평을 받으며 국내외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9만 6,000부가 발매된 '노비미르'는 곧 매진됐고, 그 후 인쇄된 85만부도 순식간에 매진됐다.
하지만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등장하자 솔제니친은 다시 반체제 작가로 몰렸다. 그후로도 솔제니친은 `연옥의 한가운데서`(1968) 등을 출판하며 일관되게 소련 체제를 비판, 인간성회복을 주장해왔다.
서방세계는 1970년 솔제니친에게 노벨상을 안겨줬지만 소련은 감시와 탄압의 끈을 더욱 세게 조였다. 솔제니친은 1973년 12월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묘사한 `수용소군도` 제1권을 파리의 YMCA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솔제니친은 이후 3차례의 소환명령에 불응했고, 1974년 2월 12일 소련 당국은 마침내 솔제니친을 국가반역죄로 체포하고 소련시민권을 박탈했다. 그리고 이튿날 솔제니친 부인은 소련당국으로부터 남편이 서독으로 추방됐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서독정부도 소련정부로부터 솔제니친을 추방한다는 통고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솔제니친은 15일 창작활동을 위해 스위스로 가 다시 북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으로 최초의 국외추방이었다. 그의 망명생활은 20년이나 계속됐고 1994년 5월 27일에서야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71년 재일동포19만 명, 일본정부로부터 영주권 취득
1969년 중앙정보부, 위장간첩 이수근 체포했다고 발표
판문점을 통하여 위장귀순했던 이수근이 그 정체가 드러나면서 1969년 2월 13일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군용기편으로 압송됐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 있던 이수근은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회의를 취재하다가 회의가 끝나자 UN군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올라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월남귀순하게 됐다.
한국정부는 그가 북한의 언론계 거물이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고 정착의 기반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순회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도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내려 했다.
그의 여러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이수근은 더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군용기 편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969년 7월 3일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사형 39년만인 2008년 12월 19일 위장간첩이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1989년 처음으로 문제 제기된 이수근의 간첩 논란은 이로써 종지부를 찍게됐다.
1969년 해외원정 등반대, 훈련 중 조난
한국산악회 주관 제1회 해외원정등반에 앞서, 적설기 내한훈련을 위해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해말 1천7백8m)에 등반한 등반대 대원 19명이 1969년 2월 13일부터 14일까지 내린 폭설과 눈사태로 죽음의 계곡 부근에서 조난돼 대장 이희성 육군중령 등 10명이 실종됐다.
국내 베테랑급 산악인인 이들은 1970년대 히말라야등반에 대비, 훈련차 2월 4일 서울을 떠났다. 이같은 조난 사실은 같은 대원인 전담 이재인씨 등이 산에서 내려와 속초경찰서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졌다. 정부는 2월 17일부터 3월 3일까지 조난자 수색본부를 설치하고 군인, 경찰, 민간인 등 2천명을 동원해 시체 10구를 찾아 3월 3일 설악산 신흥사 보제루에서 합동장례식을 치렀다. 조난 원인은 기상이변과 눈사태를 경시한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1967년 청마 유치환 타계
1967년 2월 13일 시인이며 부산여상 교장인 청마 유치환씨가 버스에 치여 두개골 파열상을 입고 부산대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치환씨의 급서는 한국문학계에 큰 충격과 슬픔을 던졌다. 부산여상 교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청마의 죽음을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청마는 1908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다. 넉넉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어머니는 현모로 이름이 높았다.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한 그는 초년에 허무주의적 경향의 시를 썼다. 만주를 방랑할 때 참형을 당한 도둑들의 모가지를 보고 쓴 시 `수`는 그의 젊었을 때 시풍을 말하는 대표작이다. `청마시집` `생명의 서` `청령일기` 등의 시집을 내는 동안 그의 작품은 차츰 원숙해져갔다.
해방이듬해 제1회 조선시인상을 받았고 1950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1958년에는 아시아 자유문학상의 영예와 더불어 예술원회원의 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에 사설도서관을 세워 문화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그는 `생리`라는 시 동인지를 내기도 했고, 연극운동도 벌였다. 청마는 8·15를 맞아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문화유치원을 세웠다. 한글강습소도 만들어 청소년을 가르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1966년 순정효정황후 장례
망국의 한 속에 살다가 일흔 세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순종황후 윤비!
운명한 지 열 하루만인 1966년 오늘 국장이 거행됩니다.
윤비는 구한말인 1893년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 윤택영의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13살 때인 1906년 왕세자 순종비였던 민비가 운명하자 순종의 계비(繼妃)로 입궐했습니다.
순종과는 후사가 없어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이 왕세자로 책봉됐습니다.
윤비는 1926년 순종이 승하한 뒤 숨질 때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 왔습니다.
윤비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에 있는 순종왕릉에 합장됐습니다.
1962년 파리 백만시민 반OAS데모
1961년 민족일보가 창간됐다.
1960년 프랑스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다.
프랑스가 1960년 2월 13일 알제리 남서부 사하라 사막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미국, 영국, 소련에 이어 4번째 핵보유국가가 되었다.
이 실험에 사용된 원자폭탄은 TNT 화약 60-70킬로톤에 상당해 영국과 미국의 초기 원자폭탄 3배의 위력을 갖는 규모였다. 미국의 압력과 유엔의 비난을 무시하고 핵병기개발을 추진한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 만세,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강국이다`라고 관계자에게 축전을 보냈다. 프랑스는 4월 1일에도 원자폭탄을 실험했다.
1959년 일본 각의서 재일교포북송안 가결
1958년 정부, 베네주엘라 정식 승인
1956년 지방자치법 개정안 공포
1955년 물의 도시 베니스, 건물 안전검사
1951년 지평리 전투가 시작
미군과 프랑스대대가 지평리 일대에서 1951년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방어전투이다
지평리는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은 이 지역을 장악하면 유엔군 방어부대들을 양분할 뿐만 아니라 서부전선의 후방을 위협할 수 있었고 유엔군은 사통팔달인 지평리지역 확보로 좌우 전선과의 연계를 용이할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2월 공세작전기도를 무력화할 수 있는곳이었다
1961년 2월13일부터 2월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과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격전을 벌였다
연대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병의 조명지원에 방어진지를 끝까지 고수하였고 동부전선의 국군과유엔군의 근접항공지원의 엄호 하에 펼친 축차적인 지연작전에 중공군은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고 북으로 철수 하였다
지평리 전투는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서 얻은 최초의 전술적인 성공으로써 새로운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외러 강력한 공격작전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행안경비대창설
1945년 연합군, 독일 고도(古都) 드레스덴 무차별 폭격.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영국과 미국의 공군기들이 독일 드레스덴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추축국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 등의 연합국 사이에 벌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은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연합군의 승리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지상군이 독일에 대한 마지막 공격 태세를 갖추기 전에 공중 폭격을 강화하기로 결정, 드레스덴을 초토화했다. 이 공습은 드레스덴에 대한 5차례의 연속 공격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날 밤 영국 공군은 800대의 랭커스터 폭격기를 출격시켰고 미국 제8공군이 폭격기 B-17 450대가 65만 발의 소이탄을 투하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폭탄으로 카펫을 깐다'는 '봄벤테피히(Bombenteppich·융단폭격)'이라는 단어가 이때 생겨났다. 대대적인 폭격으로 400년 역사의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3만~ 13만 여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연합군이 군사적으로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에서는 독일이 영국의 코벤트리를 폭격한 데 대한 앙갚음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드레스덴은 옛 동독지역의 보석같은 도시다. 작센왕국의 수도로 18세기 독일의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바로크양식을 대표하는 츠빙거 궁전이나 리하르트 바그너가 `탄호이저`를 직접 초연한 젬퍼오퍼, 프라우엔교회 등 아름다운 건축물이 곳곳에 널려있어 `엘베 강가의 피렌체`, '중부 유럽의 파리'로 불렸다.
더구나 미군은 하이델베르크 같은 유서깊은 고도(古都)는 폭격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슐레지안 지방에서 많은 피란민이 드레스덴에 몰려 피해가 더 컸다.
1934년 중외일보서 강화도에 신문공수, 최초의 신문공수
1907년 여성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 런던에서 부인참정권 요구하다 체포
영국의 여성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1907년 2월 13일 런던에서 여성사회정치동맹(WSPU) 회원들과 함께 여성의 동등한 투표권을 요구하며 기습시위를 벌이다 56명 전원이 체포됐다. 시위대는 이날 런던홀에서 여성의회 수립을 선포하고 참정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작성해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 있는 남성 대표들에게 전달하려는 행진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번 시위를 주도한 WSPU는 여성의 참정권을 쟁취할 목적으로 1903년 팽크허스트에 의해 창설됐다. 그녀는 ‘말보다는 행동’을 표방하며, 방화와 투석, 교도소 안에서의 단식투쟁과 같은 게릴라 방식의 치열한 운동을 펼치며 숱하게 교도소 신세를 졌으나 마침내 1917년 여성참정권을 얻어냈다. 그녀가 세상을 뜬지 불과 한달 뒤의 일이었다.
1898년 대한제국 광무황제가 경운궁 태극전을 중화전으로 개칭하였다.
1795년 미국 최초의 주립대학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개교
1689년 영국, 권리장전 채택
1689년 메리 2세, 영국 국왕이 즉위하다.
1547(조선 명종) 정미조약 체결 왜국과 왜인의 조선왕래 제한을 일부 해제
1451(조선 문종 1) 군기감 설치, 화차 제작
1403(조선 태종 3) 주자소 설치, 구리로 계미자 10만자 주조
1395년 예문춘추관 여민국 설치
1308(고려 충렬왕 34) 예문춘추관 설치
787(신라 원성왕) <왕오천축국전> 지은 혜초 스님 입적
혜초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가 중국 감숙성의 돈황에서 혜초의 불교유적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3권중 2권이 발견되어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