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끈 신군부에 의한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으로 막으려는 시늉만 하고 제대로 막지 못한 존 애덤스 위컴 주니어 전 미 육군참모총장이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실이 19일에야 알려졌다. 미국의 부고 전문 사이트 레거시 닷컴에 따르면 위컴 전 총장은 지난 11일(현지시간) 애리조나주 오로밸리에서 사망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한미연합사령관으로 재임하며 10·26 사태와 12·12 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신군부의 집권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지켜 본 산증인이 5·18 44주기 다음날 세상을 떠난 사실이 알려졌다. 전시 및 평시 작전통제권을 가진 한미연합사령관(4성 장군)으로서 한국 민주주의에 오점으로 기록된 신군부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다.
특히 한국 육군 20사단의 광주 시위 진압 투입을 위해 작전통제권을 잠시 이양해 달라는 신군부 측 요청을 받고 수락한 사실이 그런 평가에 힘을 보탰다. 또 고인은 1999년 발간한 회고록 '위기의 한국'(Korea on the brink)에서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안보와 미국 국익을 위해 신군부와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을 피력했다.
다만 전두환 일당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신군부에 억류됐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생일케이크와 축하 카드를 보냈다. 뒤에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은 행동양식을 보인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50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고인은 앞의 회고록을 통해 1980년 5월19일 신군부의 계엄령과 야당 인사 체포 등 한국 상황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묻는 해럴드 브라운 당시 미 국방장관의 질의에 "우리는 전두환과 그의 동료들에 의한 지배(control)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며 "그 그룹(신군부)의 궁극적 목적은 전면적 권력 장악이 분명하며, 유일하게 남은 이슈는 권력 장악의 속도와 형태"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두환과 그의 조직을 물러나게 할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전두환 지배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우리는 우리의 지렛대에 대한 한계를 인식해야 하며, 따라서 한국에서 미국의 근본적 안보 이익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행동에 저항해야 한다"며 "우리는 지역의 평화와 안보 유지가 미국의 이익임을 물론 알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점점 질적으로 증대되고 있는 북한 위협에 직면해 한미 연합 무력을 계속 증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전쟁은 억지 되어야 한다"며 "한국의 경제적 어려움 심화와 국방비 지출 삭감에 힘을 실을 수 있는 경제 부문에서의 징벌적 행동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며 한국에 대한 경제 제재에 반대했다.
다만 고인은 2007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한국 영화 '화려한 휴가' 개봉을 앞두고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에 보낸 이메일에서 당시 신군부가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 투입 사실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으며, 군의 시민 무력 진압 사실을 파악하고는 한국군 고위 관계자들에게 즉각 항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신군부의 광주 시위 강제 진압에 대해 "불행한 역사적 상처를 남겼으나 대중의 (역사) 발전에 대한 열망을 군대가 무력으로 과잉 진압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 한국의 군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영원히 각인시켰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고인은 한국 근무에 이어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됐으며, 1987년 전역했다. 이듬해 12월 19일에는 주한미군 시찰차 방문 중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1987년 퇴역한 뒤에는 애리조나주 선시티의 시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여럿 방산 기업들의 회장 자리와 미 국방부 장관 정책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위컴은 '서울의 봄'이 좌절되고 전두환이 집권할 일만 남자 실망해 전두환이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다음날인 1980년 8월 8일 LA 타임즈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전두환이 한국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레밍'이란 북미 지역과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에 서식하고 있는 나그네쥐를 가리킨다. 단순히 쥐새끼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앞의 레밍들을 무조건 추종해 물에 빠지는 레밍처럼 당시 전두환을 추종하는 한국인들을 비아냥댄 것이었다.
또 만약 전두환이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국민적 지지기반이 있음을 증명하고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내부 안정이 우선이라며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아는 민주주의를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뜻있는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원래 해당 기사는 위컴의 신분을 '고위급 미군장성'이라고만 소개했지만 그 인터뷰를 보고 격분한 전두환에 의해 위컴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일이 커졌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이 8월 8일 뉴욕타임스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 기자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미군 고위관계자'를 위컴이라고 밝힌 일 때문이었다. 서울발 기사는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이 기사가 한국 언론에 다시 보도되면서 기사 내용이 검열, 왜곡돼 미국 정부가 전두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둔갑했다.
그러자 위컴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 전해졌다고 화를 내면서 워싱턴과 서울에서 일고 있는 파장에 당황했다.
1928년 6월 25일 뉴욕 돕스페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에 미국육군사관학교로 진학, 1950년에 졸업, 임관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회과학 교관을 맡기도 했다. 병과는 보병으로 처음에는 제18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독일 베를린에 주둔한 제6보병연대에서도 근무했다. 위탁교육생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고 군내보수교육기관인 국방전쟁학교와 국방참모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제5기병연대 1전투단으로 복무할 때 다시 한국에 왔다.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파병,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영관급 장교로 진급한 뒤에 주독미군 소속의 제3보병사단 제1여단장을 맡았다.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MACV) 부참모장으로 포로 석방 협상을 맡기도 했고 제 101 공수사단장과 합동참모본부 수석본부장 등을 거친 뒤 대장으로 진급해 존 베시에 이어 한미연합사령관에 올랐다.
한편 MBC는 5·18 당시 미국 국무부가 작성하고, 주요 정보가 가려진 채 지난 1996년 공개된 문건 '체로키'의 실제 작성자를 취재진이 찾아 만났다고 18일 단독 보도했다. 올해 93살이 된 문건 작성자 로버트 리치 전 한국 과장은 전두환의 존재와 44년 전 광주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워싱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직후 알게 됐다. 주한 미 대사관의 전문을 통해 동시에 알게 됐다"면서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명령자가 전두환일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리치 전 과장은 "첫 번째 집단 발포 명령자는 현지 지휘관이었다고 주로 간주하고 있다. 전두환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MBC는 증언과 기록이 미국에 남아 있지만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들을 접촉하지도 않고 다음달 활동을 끝내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사위원회가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추가로 확보할 정보가 많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