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筆禍, 붓에서 꽃은 떨어지는가?
- 역사 창작물의 타인 검열 -
류서재
인간 삶의 발자취, 역사의 재현성으로 볼 때, 1400년대 김시습의 『금오신화』, 1500년대 허균의 『홍길동전』, 1600년대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도 시공간을 바꾸어 1980년대 서울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도 좋을 듯합니다. 이승과 저승을 통합하는 남녀의 사랑도, 조선의 개혁을 꿈꾸는 욕망도, 숙종을 깨우치게 하려는 목적 소설도 인간관계의 범위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기 마련이지요.
남녀와 권력은 시대의 거울로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이며, 특정 시공간의 이름은 인간관계를 담는 형식, 외연일 뿐이니까요. 문학의 목적은 사회와 인간 탐구이며, 그 문제의식을 간과하면, 문학의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작가, 글, 독자를 삼위일체로 보았을 때, 작가가 없으면 무주공산 맥 빠진 글이 되고, 글이 없으면 작가의 존재 이유가 없는 미개함만이 남으며, 독자가 빠지면 덧없고 공허한 글이 됩니다. 독자와의 공명의 과정, 천의무봉의 꽃을 피우기 위해 작가는 엄정한 자기 검열 과정을 거칩니다. 작가의 자기 검열은 작품의 미학 때문입니다. 작가가 작품의 주체가 되는 자기 검열과 독자가 작품의 주체가 되는 타인 검열, 문제는 타인 검열입니다.
작가는 시민이면서 동시에 유토피아를 꿈꾸는 제2의 창조자, 그의 작품은 완전한 은유의 세계이며, 그로서 유일한 세계이지요. 작가는 인간 삶의 기록자이며, 때로 역사라는 외피를 두르고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고, 미개와 문명을 가르고, 필화筆花와 필화筆禍의 경계를 가릅니다. 어떤 글이 꽃이고, 어떤 글이 폭풍우이며, 이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허구의 세계에서 시간의 정수를 뽑아낸 글, 상상력의 칼날이 없다면, 창작물이 창작일 수 있을까요? 역사 기록의 한 문장만으로도 《대장금》의 서사를 만들고, 소설, 드라마에서는 한 문장의 대사 때문에 역사 왜곡 바람이 일어납니다.
때로 나보코프, 밀란 쿤데라, 카프카처럼 작가의 전복적 상상력은 꽃이 아니라 칼입니다. 작가는 권력자의 맞춤 정장을 만들지 않고, 대량생산의 기성품을 만들어냅니다. 대량생산의 횡적 구조는 평등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진보입니다. 글은 고인 물이 아니라 진보의 칼날입니다. 작품이 타인 검열을 받으면 작가의 자기 검열은 무너집니다.
작품의 미학보다 이데올로기가 먼저인 시대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남자의 장발과 여자의 미니스커트를 통제하고, 국민의 성 풍속과 부부의 성을 통제하며,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의 고착화, 『주홍글씨』, 『테스』의 시대,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교수집단 반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가자, 장미여관으로』,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학교 폭력 써클이 일본 만화의 영향이라는 이유로 스포츠신문 연재 만화가가 음란물 제조 혐의를 받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글과 문화는 국격을 의미하는데, 시대는 진보하고 있는 걸까요? 현대사회에서도 역사 창작물의 타인 검열은 진행 중이며, 우리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권력 이동을 확인하게 됩니다.
드라마의 경우, 《철인왕후》의 조선왕조실록 폄하, 신정왕후 폄하 풍양조씨 종친회 반발, 《기황후》,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덕혜옹주》, 《나랏말싸미》의 역사 왜곡, 《작은 아씨들》의 베트남 전쟁 역사 왜곡, 넷플릭스 삭제, 방영 중단, 《조선구마사》의 역사 왜곡, 동북공정 논란, 방영 취소, 해외판권계약 해지, 스트리밍 서비스 중단, 작가, 감독, 배우 사과 등의 예화들을 통해 시청자의 막강한 권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자유가 자유를 제한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져서, 작품성은 간과되고 이의를 제기하는 집단의 존재만을 확인하게 됩니다.
드라마에서 문제 되는 것은, ‘시청자의 왜곡된 역사 인식 조장’입니다. 드라마 작가는 필화筆禍의 에너지를 가진, 부정적인 의미의 ‘능력자’가 되겠지요. ‘왜곡된 역사 인식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창작물에 대한 인식능력 없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대로 순진하게 믿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일제강점기 국민 계몽소설, 국민교육헌장 시대는 지나갔으며, 방송국은 교육부가 아니고, 작가는 교육자가 아닙니다. 교육부가 문학교육을 고민하고, 역사학자는 역사의 빈틈을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사실성으로만 재단하려고 하는데, 역사 서술자의 입장과 세계관에 따라 역사 서술의 각도가 달라지며, 역사학자의 역사관에 따라 역사가 정리됩니다. 역사가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역사 창작물을 역사의 하위장르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소재의 차용 비율이 작품마다 다르지만, 역사를 논증한 소설이라도 허구성을 선취해야 합니다. 역사소설의 상위개념은 소설이며, 역사가 아님을, 역사소설이 역사를 고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역사라는 통시성으로 인간과 사회라는 문학적 과제를 탐구할 수 있는 것임을, 과거의 시간성이라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재해석되고, 재현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설의 허구성은 역사와 거리가 있으며, 역사 기록은 반드시 그래야 할 경전이 아닙니다. 창작 표현의 한계는 독자가 정할 일이 아니며, 그런 한계 안에서는 통제된 획일성만 있고, 무의미한 토톨로지만 있습니다. 그런 공간에서 역사 창작물은 실명實名의 위험성으로부터 후퇴하는 전략을 세워 익명 속으로 숨어들고, 작가는 이데아를 버리고 밥과 떡을 구하는 인간으로 위축되어서 타협의 그늘로 숨게 됩니다.
작가가 한국사의 거대한 광산에서 한국인의 서사를 캐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명 인물의 삶을 통해 당대의 서사를 캐내는 일은 매우 유의미합니다. 한국사는 한국인의 공적 자산이며, 그것의 내용을 공유하고 문화적으로 확장해나가야 할 책무가 작가에게 있습니다.
한국사의 인물은 시대성을 대표하는 공적 인물인데, 실명 소설이라는 이유로 한 가문의 명예훼손이라는 타인 검열을 받기도 합니다. 작가는 탐구할 가치가 있는 시대와 인물을 선택할 뿐이며, 시간의 땀방울로 글을 쓰는 작가가 현실적 이해관계도 없는 역사 인물에게 인격적 훼손의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역사 인물을 후손의 사적 영역으로 제한하고 축소하며, 후손의 명예를 위해 조상이 우상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한국사의 공적 인물을 한 가문의 인물로 축소한다면, 그 인물의 공적 가치도 축소되는 모양새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부 독자의 경우, 특정 관념의 자아상을 가지며, 그 상에 어긋나면 작품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작가가 일부 독자에 의해 검열받는 세상이라면, 창작물이 죽은 디스토피아의 논란은 계속될 것이며, 또한 AI 세상에서는 필화筆禍를 통제하려는 권력의 자리바뀜이 어떻게 진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