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보물2115-1호
소 재 지; 서울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 56-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려사(高麗史)』는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이 1451년(文宗 1)에 기전체(紀傳體)로 찬진한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정사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서,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는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등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완성되지 못했고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이후 1414년(태종 14) 태종이 변계량(卞季良), 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수정편찬을 명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해 결국 세종이 즉위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오류를 지적해 편찬을 지시했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1449년(세종 31) 편찬에 착수해 1451년(문종 1) 완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이다. 『고려사(高麗史)』는 1455년(세조 1)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금속활자 판본과 그 뒤 중종 연간(1506∼1544) 을해자 판본을 목판에 다시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1482년(성종 13)에 을해자로 간행한 판본, 1613년(광해군 5)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해 새진 목판본의 초간본, 1613년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한 목판본의 후대 간행본(17∼18세기 추정)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사(高麗史)』는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 사료라는 점, 비록 조선 초기에 편찬되었으나, 고려 시대 원사료를 그대로 수록해 사실관계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고려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문화사‧문헌학적 가치가 탁월해 보존하고 연구할 의의가 충분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보물 제2115-1호 ‘고려사’ 139권 85책은 을해자본을 번각한 목판본이다. 태백산사고본으로, 광해군 4년(161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을 1613년(광해군 5)에 인출한 것이다. 이는 “만력41년9월일 내사고려사일건 태백산사고상 좌승지신이 수결(萬曆四十一年九月日 內賜高麗史一件 太白山史庫上 左承旨臣李 手決)”라는 내사기(內賜記)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제1책에 ‘목록상(目錄上)’, ‘목록하(目錄下)’, ‘고려세계(高麗世系)’‚ ‘범례(凡例)’가 들어 있고‚ 제2책의 앞부분에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이 붙어 있다. ‘세가(世家)’를 시작으로 ‘지(志)’, ‘표(表)’, ‘열전(列傳)’을 수록하였고, 권137이 끝난 뒷부분에 ‘수사관(修史官)’을 기록하였다. 표지에는 묵서로 ‘고려사(高麗史)’라고 하였고, 면지에는 내사기(內賜記)를 적었다. 권두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찍혀 있고, 상변란의 중간에 걸쳐 ‘조선총독부도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之印)’과 상변란 밖으로 ‘서울대학교도서(大學校圖書)’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다. 사고본으로서 인출 상태는 물론 장정의 원형도 보존하고 있어 높은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고려사 보물2115-2호
소 재 지; 서울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 56-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려사(高麗史)』는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이 1451년(文宗 1)에 기전체(紀傳體)로 찬진한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정사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서,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는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등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완성되지 못했고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이후 1414년(태종 14) 태종이 변계량(卞季良), 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수정편찬을 명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해 결국 세종이 즉위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오류를 지적해 편찬을 지시했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1449년(세종 31) 편찬에 착수해 1451년(문종 1) 완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이다. 『고려사(高麗史)』는 1455년(세조 1)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금속활자 판본과 그 뒤 중종 연간(1506∼1544) 을해자 판본을 목판에 다시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1482년(성종 13)에 을해자로 간행한 판본, 1613년(광해군 5)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해 새진 목판본의 초간본, 1613년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한 목판본의 후대 간행본(17∼18세기 추정)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사(高麗史)』는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 사료라는 점, 비록 조선 초기에 편찬되었으나, 고려 시대 원사료를 그대로 수록해 사실관계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고려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문화사‧문헌학적 가치가 탁월해 보존하고 연구할 의의가 충분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고려사(高麗史)는 139권 85책은 을해자본을 복각한 목판본이다. 오대산 사고본으로 광해군 4년(1612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을 1613년(광해군 5)에 인출한 것이다. 이는 “만력 41년9월일 내사고려사일건 오대산사고상 좌승지신이 수결(萬曆四十一年九月日 內賜高麗史一件 五臺山史庫上 左承旨臣李 手決)”이라는 내사기(內賜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제1책에 ‘목록상(目錄上)’, ‘목록하(目錄下)’, ‘고려세계(高麗世系)’‚ ‘범례(凡例)’가 들어 있고‚ 제2책의 앞부분에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이 붙어 있다. ‘세가(世家)’를 시작으로 ‘지(志)’, ‘표(表)’, 열전(‘列傳)’을 수록하였고, 권137이 끝난 뒷부분에 ‘수사관(修史官)’을 기록하였다. 태백산사고본(奎貴3539)과 비교하여 표지에 제첨을 붙였고, 표지 면지에는 내사기(內賜記)와 함께 ‘경성제국대학도서장(京城帝國大學圖書章)’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다. 권두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찍혀 있고, 상변란의 중간에 걸쳐 ‘조선총독부도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之印)’과 상변란 밖으로 ‘서울대학교도서(大學校圖書)’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다. 책의 크기는 34.4×21.0cm 내외이다. 판식을 보면 광곽은 사주단변(四周單邊)에 반곽의 크기는 20.3×14.5cm 내외이다. 을해자본과 비교할 때 책의 크기는 더욱 커지고, 광곽은 세로의 길이가 약 1.0∼1.5cm 정도 줄어든 상태이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9행 17자 소자쌍행으로 되어 있다. 오대산사고본으로서 인출 상태는 물론 장정의 원형도 보존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고려사 보물2115-3호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50(신촌동 134) 연세대학교 도서관
『고려사(高麗史)』는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이 1451년(文宗 1)에 기전체(紀傳體)로 찬진한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정사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서,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는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등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완성되지 못했고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이후 1414년(태종 14) 태종이 변계량(卞季良), 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수정편찬을 명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해 결국 세종이 즉위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오류를 지적해 편찬을 지시했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1449년(세종 31) 편찬에 착수해 1451년(문종 1) 완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이다. 『고려사(高麗史)』는 1455년(세조 1)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금속활자 판본과 그 뒤 중종 연간(1506∼1544) 을해자 판본을 목판에 다시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1482년(성종 13)에 을해자로 간행한 판본, 1613년(광해군 5)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해 새진 목판본의 초간본, 1613년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한 목판본의 후대 간행본(17∼18세기 추정)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사(高麗史)』는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 사료라는 점, 비록 조선 초기에 편찬되었으나, 고려 시대 원사료를 그대로 수록해 사실관계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고려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문화사‧문헌학적 가치가 탁월해 보존하고 연구할 의의가 충분하다. 연세대학교 소장 ‘고려사(高麗史)’ 139권 33책은 을해자본을 번각한 목판본이다. ‘최한기장(崔漢綺藏)’ 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최한기(崔漢綺)의 수택본으로 추정되고 있다. 총 33책 139권인 판본은 광곽의 크기가 규장각의 사고본과 동일하고 동아대 소장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인출 시기가 규장각의 사고본과 동일한 시기일 가능성을 말해준다. 다만, 제30책에 수록된 권 122와 권123은 후대에 작성된 필사본으로 보완된 상태이다. 완질본으로 인쇄 상태가 나쁘지 않고 보관 상태도 좋은 편이므로, 연구하고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고려사 보물2115-4호
소 재 지; 부산 서구 구덕로 225(부민동2가 1)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고려사(高麗史)』는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이 1451년(文宗 1)에 기전체(紀傳體)로 찬진한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정사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서,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는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등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완성되지 못했고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이후 1414년(태종 14) 태종이 변계량(卞季良), 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수정편찬을 명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해 결국 세종이 즉위해 『고려국사(高麗國史)』의 오류를 지적해 편찬을 지시했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1449년(세종 31) 편찬에 착수해 1451년(문종 1) 완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이다. 『고려사(高麗史)』는 1455년(세조 1)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금속활자 판본과 그 뒤 중종 연간(1506∼1544) 을해자 판본을 목판에 다시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1482년(성종 13)에 을해자로 간행한 판본, 1613년(광해군 5)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해 새진 목판본의 초간본, 1613년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한 목판본의 후대 간행본(17∼18세기 추정)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사(高麗史)』는 고려(高麗)의 정사(正史)로서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 사료라는 점, 비록 조선 초기에 편찬되었으나, 고려 시대 원사료를 그대로 수록해 사실관계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고려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문화사‧문헌학적 가치가 탁월해 보존하고 연구할 의의가 충분하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보물 제2115-4호 ‘고려사(高麗史)’ 139권 75책은 을해자본을 번각한 목판본이다. 총75책(139권)으로 제1책에는 ‘목록상(目錄上)’, ‘목록하(目錄下)’, ‘고려세계(高麗世系)’‚ ‘범례(凡例)’,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수사관(修史官)’ 이 수록되었고, 권1부터 순서대로 1권 혹은 2권씩 수록되었는데, 대부분은 2권씩 수록되었고 제25책, 제26책, 제28책∼제31책, 제43책∼제44책, 제48책, 제58책, 제63책 등 11책은 1권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표지의 좌상단에는 ‘여사(麗史)’라는 표제가 묵서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권차 표시 대신 고려사(高麗史)의 총권차 표시가 작은 글씨로 묵서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사고본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책의 가장 뒤에 배치된 ‘수사관(修史官)’이 이 판본에서는 책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고, 사고본 제2책의 첫머리에 배치되었던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이 이 판본에서는 ‘고려세계(高麗世系)’와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판본에서는 장정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이 있다. 즉 제21책에 수록된 권39와 권40이 순서가 서로 바뀌어 권40과 권39의 순서로 장정되어 있다. 책의 크기는 27.5×18.3cm 내외로, 조사 대상 『고려사』 가운데 가장 작은 크기이다. 판식을 보면 광곽은 사주단변(四周單邊)에 반곽의 크기는 19.6×14.2cm 내외이다. 을해자본 및 사고본과 비교할 때 책의 크기가 작아지고, 광곽 역시 을해자본과는 세로의 길이가 약 1.5∼2.0cm, 사고본 보다는 약 0.5∼1.0cm 정도 줄어든 상태를 보여주고 있어 활자본 및 목판 번각본의 초쇄본과 후쇄본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 판본은 규장각에 소장된 사고본과의 판식, 서체의 인출 상태를 고려할 때 초간본 인출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인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열전 권제23의 권수제면에는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 홍진(洪進, 1541∼1616)의 장서인으로 판단되는 ‘당흥부원군장(唐興府院君章)’ 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홍진(洪進)의 소장본이었던 초인본으로 결권을 보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완질본이면서 보존상태도 좋아 서울대, 연세대 소장본과 더불어 연구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