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觀(공관) 丁淳基 가 다녔던 淸溪中央初等學敎 전경 입니다.
무안군 청계면의 마을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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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선동 (월선1리)
지명유래 :
월선리에서는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토끼산」「비친암골」 「월구정」「소잔등」「토끼바위」「은락골」등으로도 불렀으며 도선국가(옥룡자)가 무안 4명당의 하나인 운중수월(雲中秀月)이 있다하여「수월동(水月洞)」「수정동(水晶洞)」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뒤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마을형성 :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김해김(金海金)씨[김봉헌(金鳳獻)]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1592년]때 피난을 와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도 김해김(金海金)씨가 대부분인 동족 (同族)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타성(他姓)으로 전주이(全州李)씨, 이천서(李川徐)씨, 나주문(羅州文)씨등이 거주하고 있다.
전 설 :
범상골전설(지형에 관한 것으로 범이 잠자는 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전설). 도선국사전설《도선이 명당운중수월 (雲中秀月)을 가르쳐주게 된 연유를 전하는 전설로, 도선이 승달산 노승 진념(眞念)을 만나 북재를 넘어 이 마을에서 밭가는 농부에게 밥을 한끼 얻어먹고 명당을 일러주었다 함》
유물, 유적 :
정자나무(군지정 10-20-12호, 수령 300년)
중화 (월선2리)
지명유래 :
중화(重華)라는 절을 지을 때 상량문을 보고 모든 일을 성실히 행하여 자자손손 빛나라는 뜻에서 마을이름을 「중화」라 하였다.
마을형성 :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시는 김해김(金海金)씨로 본래 나주(羅州) 봉계(鳳溪)에서 살았는데 김시운(金始雲)의 부(父)[승황(承黃)]와 조(祖)[안세(安世)]가 임란(壬亂)·정유란(丁酉亂)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戰死)하자 이곳에 묘원(墓園)을 만들기 위하여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한편 광해군(光海君)때 밀양박(密陽朴)씨 박자신(朴自信)이 경기도(京畿道) 고양(高陽)에서 살았으나 당시 정국(政局)이 혼란스러웠고 부귀(富貴)가 뜬구름과 같이 허망하다고 여겨 이곳으로 옮겨와 은거(隱居)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물, 유적 :
입석(월선리 당산제의 신체(神?)), 열부현풍곽씨비(烈婦玄風郭 氏碑)[1890년].송은당(松隱堂)[1942년, 김종현(金鍾炫)의 유덕을 기리는 정자]
민 속 :
월선리 당산제(석대정, 노월촌, 일신동 마을과 함께 4년마다 한번씩 지냄)
※ 마을 앞 입석은 하마비(下馬婢)와 같은 구실을 해 왔었다고 전함, 현풍 곽씨열부비와 연관된 유적이기도 함.
신촌(월선2리)
지명유래 :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는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는 설(한 국지명총람)과 임진왜란이후 피난민들이 모여산 곳이라는 설, 그리고 마을 형성당시 신(新)[신(申), 신(辛)]씨들이 주축을 이 루었기 때문에 '신촌'이라 하였다는 말이 전해 온다.
마을형성 :
마을이 형성 될 때 신(新)[신(申).신(辛)] 씨들이 최초로 입향 했다하여 신촌(新村)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지명유래가 있으나 확실한 전거(典據)가 없다. 그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피난민 들이 대거 이주해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유물, 유적 :
삼강문(三綱門) (김해김씨 김난재, 김성보, 김성보의 처 3인모심)
배출인물 :
박권순(전면장)
석대정(월선3리)
지명유래 :
처음 이 마을에 정착했던 신처사(申處士)가 자손이 없어 자기의 재산을 마을에 내어 놓으니,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6월 유두날에 제사를 뫼시기로 하여 자연석의 제단과 비를 세워 제를 모셨 으므로 마을 이름이 '석대정' 혹은 '비석거리'로 불러 졌다 한다.
마을형성 :
약 1640년경에 함양 신처사(申處士)가 처음 이 마을에 입향 하였다고 구전되고 있지만 정확한 전거(典據)는 없다. 현재 무안박(務安朴씨)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고 그 외 경주이 (慶州李)씨,이천서(利川徐)씨,전주이(全州李)씨등이 살고있다 .
전 설 :
지명유래, 당산제와 관련된 전설로써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가 신처사를 위한 것이 아니고, 멸구를 없게 해달라고 비는 멸구제의 형태로 유두날(6월 15일) 고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한편 비석 거리에서는 떨어져도 다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일신동(월선3리)
지명유래 :
이 마을의 형국이 사기그릇에 고기를 담은 모습이라 전해오나 현재의 이름인「일신동」 이전의 명칭은 알지 못함.
배출인물 :
이진우(전 면장)
청계리
청계 (청계1리)
지명유래 :
구전에 의하면 청계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마을로부터 약 150m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나 임진왜란(1592년)때 폐촌이 되버리고, 난이 끝난 다음 최초로 무안박(務安朴)씨 박사번(朴四番)이 입향하고 그후 나주정(羅州丁)씨.광산(光山金) 씨가 차례로 입향 하였다 한다.
전 설 :
마을 뒤쪽에 있는 태봉산은 명나라 태자가 볼모로 잡혀와 있을 때 한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 태를 태봉산에 묻었다 한다. 후에 누군가 태를 넣어둔 석함을 발견하여 고여 있는 탯물을 마셔 버렸는데 그속에서 구슬만한 금이 나왔다고 한다.
유물, 유적 :
지석묘(마을 동쪽 50m지점에 6기)
행림 (청계1리)
지명유래 :
청계마을 북동쪽에 위치하며 옛이름은 '골시초'라 했고 조선시대 에는 살구나무가 무성하다하여 행림(杏林)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살구나무가 없다.
마을형성 :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여 터를 닦은 성씨는 경주김씨[김성집 (金星集)]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본래 경기도 과천 남면에 거주하였으나 김성집이 영광으로 부임하여 임기가 만료 된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승달산에 올라 행림을 보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이곳으로 이거 해왔다는 기록이 있다.
학유정(청계4리)
지명유래 :
백학이 솔밭 정자나무에 많이 날아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지었 다는 설과 풍수지리에 의해 마을 지형이 학(鶴)의 형세를 그리고 있고, 마을 앞의 새비(새우)섬을 학이 먹이로 보고 내려앉으려는 형상이라고 하는 설이 전해 온다.
마을형성 :
효종(1649 ∼ 1659)때 나주정(羅州丁)씨 정도하(丁道夏)가 최초로 입향 하였으며 그후 나주김(羅州金)씨 김용규가 이거해 왔고 현재는 밀양박(密陽朴)씨와 김해김씨 등이 많이 살고 있다.
학유정(청계4리)
지명유래 :
백학이 솔밭 정자나무에 많이 날아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지었 다는 설과 풍수지리에 의해 마을 지형이 학(鶴)의 형세를 그리고 있고, 마을 앞의 새비(새우)섬을 학이 먹이로 보고 내려앉으려는 형상이라고 하는 설이 전해 온다.
마을형성 :
효종(1649 ∼ 1659)때 나주정(羅州丁)씨 정도하(丁道夏)가 최초로 입향 하였으며 그후 나주김(羅州金)씨 김용규가 이거해 왔고 현재는 밀양박(密陽朴)씨와 김해김씨 등이 많이 살고 있다.
구암(청계2리)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의 형상이 아홉 개의 바위가 송편처럼 겹쳐 있다하여 구암(九岩)이라 칭 했다.
도림리
선돌 (도림6리)
지명유래 :
마을에 선돌(立石)이 있기 때문에 선돌이라 칭했다. 옛부터 이 선돌에 공을 들이면 소원성취한다는 자연숭배사상에 기인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형성 :
처음 입향한 성씨는 전주이(全州李)씨 이근용(李根龍)이 원래 담양 월선면 능동서 살았으나 을사사화(1545)로 인하여 이 마을로 옮겨오게 되었다. 전주이씨가 입향한 이 후 선조대(1567∼ 1608)에 장흥 장도면 북교리에 거주하던 청주한(淸州韓)씨 한 번인(韓番仁)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고 임진왜란 (1592)이후 여산송씨, 무안박씨, 나주정씨, 김해김씨 등 복합성씨 로 이루워 졌으나, 목포대학교 이전으로 지금은 여러 외지인이 들어와 상업활동으로 도시화가 되어가고 있다.
전 설 :
선돌(선돌에 관한 전설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떤 장사가 성을 쌓으려가다가 다 쌓았다고 해서 돌아가다가 멈춰 서버린 것이 선돌이 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지금의 중학교 부근에 옛날 칠성당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7개의 바위가 있었다 함) 이 마을로 애기를 못 낳는 여자가 점을 치러 와서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를 묻자 점쟁이가 집으로 돌아 갈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 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궁금한 여인은 뒤를 돌아 보았다가 선돌로 변하게 도었다는 이야기 가 전해 오고 있다)
유물, 유적 :
지석묘(청계파출소 입구 10기), 효자무안박씨지비(1864년 세움, 박순(朴洵)의 효를 기리기 위함), 3휴정(三休亭)《1939년 박시보 지음, 처사옹(處士翁) 박기윤의 정자(亭子)》
민 속 :
선돌마을 입석(사람형상의 바위로 박석노씨 집안에 1기 위치 칠성바우,미륵바우라 불림, 마을에서 제를 지내지는 않고 명절 때 집안에서 지냄). 청계중학교 안 석인(石人)《학교 뒤뜰 연못 좌우에 1쌍 2기》
연곡(도림 2리)
지명유래 :
연곡(蓮谷)마을은 입석마을 아래에 있는 마을로 조그만 연못에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하여 유래된 지명.
마을형성 :
정확하게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이 마을에 옮겨와 터를 닦았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을에서는 최초 입향성씨가 무안박씨 였다고만 알고 있으며 현재는 목포대학교 이전으로 외부인의 유입이 늘어 상가를 형성하고 있는 도시화가 진행 중이다.
남성리
남성동(남성 1리)
지명유래 :
소살봉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소살봉 아래에 서당이 있었는데 샛별이 뜰때까지 책을 읽었다하여 남성동(南星洞) 이라 칭하였다.
마을형성 :
이 마을의 형성 유래에 대해서 마을 주민들은 상세히 전해 듣지 못하고 있으나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 연산군(1494∼1506)때 여산송(礪山宋)씨 송옥명이 나주 금안동에서 살다가 갑자사화 (1504)로 인하여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고 한다. 그 뒤 경종 (1721∼1724)때 나주나(羅州羅)씨 나세화가 나주읍 보산리에서 살다가 1722년(경종2년)에 발생한 사육신옥사사건(死六臣獄司 事件)과 관련하여 이곳으로 피난 왔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장흥고씨가 가장 많고 그외 전주최씨, 달성배씨 등이 거주 하고 있다.
망산(남성 2리)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이 웅장하여 산에서 풍겨나오는 정기로 소원을 성취 한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망산(望山)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정확한 입향유래는 알수 없으나 약 1590년경 순흥안(順興安)씨가 입향하여 터를 닦았으며 그후 제주양(濟州梁)씨가 이주해 왔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유물, 유적 :
지석묘(마을 동쪽에 있는 야산에 11기), 효열부제주양씨지문 (1920년 세움, 효자 양광묵.양재덕.깅릉함씨)
광석(남성2리)
지명유래 :
마을의 지명이 3m 아래에 암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어 넓은 박독이라는 의미에서 광석(廣石)이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형성 :
입향유래에 대해서 마을 주민들은 확실히 전해 듣지 못하고 있다.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 중종(1506∼1544)때 동복(同福)에 거주하던 오수현(吳壽炫)이 누대로 살아온 동복이지만 살기가 어려워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동복오씨가 대다수이며 무안박씨도 소수있다.
복길리
복길(복길1리)
지명유래 :
「복길(卜吉)」이란 지명은 이 마을의 모양이 ‘卜'자처럼 되어 있기에 유래된 것이다.
마을형성 :
이 마을형성 유래를 마을 주민들은 상세히 전해듣지 못하고 있으나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 전주이씨 이종만이 선조 (1567∼1608)때 영광(靈光) 묘장(苗長)에서 살다가 용사지난 (龍巳之亂)이 발생하자 난(亂)을 피하여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후 경종(1721∼1724)때 설제(雪齊) 정가신(鄭可臣)의 후손인 도(嶋)가 1722년(경종2년)에 발생한 임인옥사(壬寅獄事)와 관련하여 이곳으로 이주(移住)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배출인물 :
이남규(李南圭)《前 국회의원, 도지사》, 박재수(朴才秀)《 前 면장》
텁석골 (복길2리)
지명유래 :
「텁석골」이라는 지명은 복길(卜吉)마을을 가다가 이 마을에서 텁석 주저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 :
원부락인 복길(卜吉)마을의 인구증가로 인해 농토를 찾아 192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최초로 입향한 성씨는 알 수 없고 현재 전주이(全州李)씨·김해김(金海金)씨·강릉함 (江陵咸)씨·이천서(利川徐)씨등이 살고 있다.
구로리
구로동(구로1리)
지명유래 :
옛날부터 9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매년 9명 이상있는 장수마을 이라 하여 「구로동(九老洞)」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처음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김(金)씨와 이(李)씨가 살았다고 하나 확실한 전거(典據)는 알 수 없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때에 난(亂)을 피하기 위하여 나주에서 거주하던 정립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현재 나주정(羅州丁)씨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유물, 유적 :
경주이씨열여각(慶州李氏烈女閣)
관동(구로2리)
지명유래 :
옛날 관가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관동(館洞)」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관터와 활을 쏘던 시장터가 있다.
마을형성 :
정확한 입향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으나 진·이·문씨가 많이 살았다고 전하며 현재는 나주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한편 이곳에는 지석묘(支石墓) 13기(基)가 무리를 지어 분초 하고 있으며 20여년전에는 돌칼, 돌석기등이 발견되어 현재 청계초등학교에 보관되고 있다. 옛날 관청(官廳)의 중심지였다고 하며‘관(官)터'‘사장터'등의 터자리가 남아 있다.
전 설 :
갈마봉바위(옛날 자식이 없는 부인들이 이 바위에 기도하고 여기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소원이 이루어졌다 하는데 이 바위는 사람의 생식기를 닮았다. 또 상처에 이 물을 찍어 바르면 낫는다고 한다.
유물, 유적 :
지석묘(관동마을 앞 야산에 11기(基) 위치). 입석(마을입구와 마을창고 옆에 2기, 선독·제사돌이라 부름)
배출인물 :
정해연(교통부 사무관), 정병호(국방부 사무관), 정봉환(전 면장)
상마리
상마정(상마1리)
지명유래 :
상마정(上馬亭)」이란 지명은 마을의 형태가 말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 :
약 1430년경에 인동장(仁東張)씨와 김해김씨가 최초로 입향하 였다고 구전되고 있다.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 최초 입향성씨는 상산김(商山金)씨「김태호(金泰浩)」로 인조(仁祖)때 (1623∼1649) 나주(羅州) 삼도면(三道面)에서 세거(世居)하였 으나 병자호란(1636년)때 난(亂)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 뒤 효종(孝宗)때 (1649∼1659)에 진주강(晋州姜)씨 「강춘주(姜春周)」가 영광(靈光) 백수(白岫)에서 살다가 토지가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도 상산김씨와 진주강씨가 대다수이며 타성(他姓)인 남평문(南平文) 씨도 약간명 거주하고 있다.
유물, 유적 :
지석묘(상마정 마을앞 광산김씨선산(光山金氏先山)에 16기). 입석(마을 입구에 1기)
배출인물 :
강대윤(전 면장) 조광훈(농업진흥청 서기관) 오창선(전 면장) 오우영(전 면장) 오병열(국교교장)
용마(상마2리)
지명유래 :
마을형성시 용의 형국을 한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물이 풍부한 곳이라 하여 하마전·두동리 마을과 함께 「용계(龍溪)」라 했다가 일제때 「용마(龍馬)」로 바꿨다.
마을형성 :
1839년(헌종5년)에 무안에 세거(世居)하던 여산송(礪山宋)씨가 처음 입향하여 터를 닦았다가 그후 20여가구로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구전된다. 현재는 여산송(礪山宋)씨·한양조(漢陽趙)씨·진주강(晋州姜)씨·무안박(務安朴)씨·풍천임(風川林)씨 등 복 합성씨의 마을이다.
배출인물 :
임갑재(용산소방서장), 강대연(전 도보건과장), 박석진(기획예 산실장). 조규석(보성등기소장)
평림(상마3리)
지명유래 :
평림 마을은 숲이 울창한 매봉산이 위치하는데 마을의 형세 (形勢)가 꿩의 형상과 같고 매봉산과 어우러져 매가 지켜보는 가운데 꿩이 숲을 날지 못하고 숨어사는 곳이다 하여「죽림 (竹林)」이라 했으나 그후「평림(平林)」으로 개칭되었다.
마을형성 :
언제 어떤 연유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자세히 전하고 있지않다. 다만 조선말기(1800년대이후)에 여산송씨와 나주나씨가 처음 입향했다고 전한다. 현재는 박(朴) 정(丁)·김(金)·송(宋)·장(張)씨 등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유물, 유적 :
지석묘(광주∼목포간 국도변에 3기)
복용리
용수동(복용1리)
지명유래 :
지형이 용(龍)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용수동(龍水洞)」이라 하였으며 그외「참새골」「개꼬리」라고도 부른다.
마을형성 :
입향유래에 대해서 마을사람들은 자세히 전해 듣지 못하고 있다. 약 1880년경 장자산에 임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하고 있지만 현재 임씨는 한가구도 없다.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기록에 의하면 최초 입향성씨는 탐진최(耽津崔)씨 최태현(崔泰賢)이 본래 나주 성지(羅州 聖智)에서 세거(世居)하다가 무신란(戊申亂 1728) 이 일어나 이를 피하여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전 설 :
장재산 살맥이독⇒용수동마을에(일명 장자산)임장자라는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태봉산의 큰스님이 보낸 상자가 시주하러왔는데 시주는 주지 않고 오히려 헛간에 가두었다. 이를 본 큰스님은 임장자에게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으면 마을 앞 세군데에 액맥이 돌을 세우고 갓난아기의 태(胎)를 태봉산에 쌓으라고 일러 주었다. 욕심이 많은 임장자는 아무도 접근을 못하게 하고 오직 혼자 만이 태봉산에 태를 묻었으나 결국 임장자는 폐가했고 마을은 폐허로 변하였다고한다.
민 속 :
선돌(마을 앞 선둑개에 3기, ‘선독'·‘살맥이독'이라 부른다.)
배출인물 :
김원규(전 완도경찰서장) 최재섭(전 면장)
대곡(복용2리)
지명유래 :
「용수동」마을의 동편에 위치한 마을로 동·서·북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깊은 골짜기란 뜻에서「대곡(大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형성 :
약 1190년경에 100호(戶) 이상되는 장제산마을에서 주로 김해 김씨와 전주최씨등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괴질병으로 마을이 폐촌이 되었고, 이때 일부사람이 용수동 마을로 이거(移居)하고 일부는 장제산마을 북쪽 골짜기로 옮겨왔으며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구전된다. 한편 무안세적지(務安 世蹟誌)에 의하면 최초 입향성씨는 김해김씨 김현주(金顯周)로 본래 나주(羅州) 백구(白鷗)에서 세거(世居)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기록이 있다.
전 설 :
각시바위·눈물바위(명당을 찾으러 다니던 도사가 동서북이 산 으로 감싸고 있는 이 마을을 보고 너무 좋아 도포자락을 날리 며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마을로 올라오던 중「장금」이라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마을을 다시 살펴보니 동 서는 잘 감 싸고 있으나, 북쪽의 지형이 좋지 않아서 크게 실망하여 통곡 하며 흘린 눈물자국이 바위에 남아 있는데 이 바위를 각시바위라 한다.)
배출인물 :
김중호(전대 교수), 김명근(전대 교수)
강정리
강정(강정1리)
지명유래 :
강정(江亭)」이란 지명은 마을앞에 강이 있다 하여 강(江)자와 동네에 정자나무가 있어서 정(亭)자를 붙인데서 유래되었다.
마을형성 :
현재 나주정씨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약 1630년경에 장 (張)씨가 처음으로 입향하여 터를 닦았다고 하며 그후 신안 압해도에서 거주하던 나주정씨 정덕용(丁德用)이 강건너 바라 다 보이는 강정마을 뒷산이 마치 정자가 있는 것처럼 아름답 고 수목이 울창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구전(口傳)된다.
유물, 유적 :
고림산봉수(高林山烽燧) 《마을뒷산 도대봉(道垈峰)에 있으며 남으로 군산봉수(群山烽燧), 북으로 봉옹산봉수(烽甕山烽燧)에 응했음.》
배출인물 :
정규훈(전 면장), 정진(통대 의원)
태천(강정2리)
지명유래 :
태천(台川)」은 강정마을의 동편에 위치한 마을로 지형이 별 모양과 같고, 마을 앞에 인천강이 있어 「태천(台川)」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1680년경에 봉대산(고림봉) 아래에 대월리라는 마을이 있었는 데 괴질병으로 폐촌이 되었고, 그 일부(신氏)가 지금의 태 천(台川)마을로 옮겨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그후로 신(申)씨는 타지역으로 이주(移住)해가고 나주정씨 정덕용(丁 德龍)이 다시 마을을 이루어 현재는 나주정씨 동족마을을 이루 고 있다.
배출인물 :
정평팔(전 면장), 정순기(의학박사)
도대리
도대(도대리)
지명유래 :
도대봉(道垈峰)의 북쪽에 위치하며 임란(1592년)전에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절골」이라 칭하였다. 그후 일제시대때 바닷 가에 해당화가 많이 있어 「해당촌」이라 불리우다가 마을 중 앙으로 길이 가로질러 있기 때문에 「도대(刀垈)」라 하였다가 「도대(道垈)」로 개칭되었다.
마을형성 :
선조년간《宣祖年間(1567∼1608)》에 청주한(淸州韓)씨와 청송 심(靑松沈)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으나 임란(1592년)때 해 적의 횡포가 심하여 모두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으며 그후 1724년 (경종4년)에 다시 청주한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 였다고 구전(口傳)되고 있다. 한편 구전(口傳)과 관계된 자료로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는 최초 입향성씨는 숙종(1674∼1720)때 청주한씨 한처양(韓處良)이 나주 오양리(五良里)에서 세거(世居)하다가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후로 정조때(1776∼1800) 청송심씨(심득상 (沈得相))가 함평(咸平) 신광(新光)에서 세거(世居)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유물, 유적 :
지석묘(도대마을 동쪽 100m지점 야산에 4기 위치
민 속 :
당산제(도제)를 마을입구와 뒷산 밑에 있는 당산나무에 마을 의 평안과 질병방지를 위해 지냈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배출인물 :
서원주(전 면장)
서호리
서호정(서호1리)
지명유래 :
마을의 서쪽에 위치해 있고, 바다와 인접되어있어 서호정(西湖 亭)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이 마을에 최초로 입향한 성씨는 나주정(羅州鄭)씨 「정신 (鄭紳)」으로 임진왜란(1592)때 부친이 노량전(露梁戰)에 참가 하여 공을 세우고 전사하자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이마을 에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그 뒤 망해정(望海亭) 을 건립하여 부친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는다.
신기(서호2리)
지명유래 :
서호정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엿다 하여 신기(新基)라 하였다.
마을형성 :
담양에서 세거하던 전주이씨 김대수(金大守)가 임진왜란(1592)때 이 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후 무안 박씨 박도범(朴道範)이 입향하여 현재는 김해김씨, 달성배씨 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기동(서호 3리)
지명유래 :
서호리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라 하여 기동(基洞)이라 칭하였다.
마을형성 :
옛부터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 鄭·丁·金·徐·韓씨 등 복합성씨가 살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약 300여년전에 나주 정(丁)씨 정사겸(丁士謙)과 고성김(固城金)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배출인물 :
정웅태(변호사)
연소동(서호4리)
지명유래 :
마을의 지형이 제비집처럼 생겼으며 가뭄에도 물이 많은 마을이 라하여 연소동(燕巢洞). 「연수동」이라 칭하였다.
마을형성 :
입향유래에 대해서 자세히 전해오고 있지 않으나 임진왜란(1592) 때 경남 밀양에서 거주하던 박씨가 피난을 와서 이곳에 정착 하 였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그 뒤로 흥성장(興城張씨)가 물이 풍부한 이곳에 마을을 다시 형성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송현리
송치(송현1리)
지명유래 :
송치(松峙) 또는 「솔치」라 불리는데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무성 하게 심어져 있다하여 유래된 것이다.
마을형성 :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나주정(丁)씨로 대대로 세거 하였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하여 마을민들은 일로·무안 등지로 피난가 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청계면 강 정리에서 살던 나주정씨 정지용(丁智龍)이 다시 마을을 형성하였 다고 전한다. 현재는 나주정(羅州丁),장흥고(長興高),달성배(達成裵), 김해김(金海金)전주이(全州李)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민 속 :
입석(2기, 영감할멈, 선독바우라 부르며 살맥이 기능을 한다.)
배출인물 :
정순석(전 통일주체대의원), 고안주(육군중령), 김성태(교감) 고행진 (전 면장) 정영민(목포해양경찰서장)
대성동(송현2리)
지명유래 :
일제시대때 대성실행조합이라는 농촌진흥조합이 있었는데 이 단체에 서 유래되어 대성동(大成洞)이라 칭하였다.
마을형성 :
약 1530년경에 나주정(羅州丁)씨가 입향하였다고 구전되는 것 외에 자세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다. 한편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 연산군(1494∼1506)때 나주 정대흥(丁大興)이 처음 입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정대흥은 개성부 덕영면 칠리에서 세거하며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이었으나 정국이 혼란스러워 벼 슬을 사양하고 고향을 떠나 이 곳으로 옮겨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로 영조(1724∼1776)때 수은(睡隱) 강항(姜抗)의 5세손인 계 공(啓恭)이 영광 불갑에서 살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이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출인물 :
황부실(전 면장), 강대원(군농협장), 황의선(전남 농협지부장)
청수리
신흥(청수1리)
지명유래 :
옛날에는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워서 생계유지를 하였던 마을이라 하여 「임굴」이라 하였는데 그후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 었다고 하여 신흥(新興)으로 개칭 되었다.
마을형성 :
언제, 어떤연유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상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 나 약 1790년경에 노(魯)·김·이씨 등 3호가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유물, 유적 :
신흥사(신흥마을 동편에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음)
청수동(청수1리)
지명유래 :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맑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하여 청수동(淸水洞)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이 마을의 형성유래를 마을주민들은 상세히 전해듣지 못하고 있 으나, 다만 약 1790년경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물이 많은 지역 이라하여 노(魯)·서(徐)·최(崔)씨 등 3성이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상작촌(청수2리)
지명유래 :
상작촌(上鵲村)이란 지명은 옛날 풍수지리에 능한 스님이 마을 위 치와 형국을 보고 마치 한쌍의 까치가 앉아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마을형성 :
구전에 의하면 1586년(선조14년)에 진주(晋州) 강장자(姜將子)라는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을 찾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이곳에 당도하였는데 이른아침 까치소리를 듣고 까치 둥우리 밑에(마을 지형이 까치모양임) 집을 짓고 정착하였다고만 전해오고 있다. 현 재는 김해김·문화류·무안박·달성배씨 등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유물, 유적 :
입석(마을입구에 1기 있음)
태봉리
태봉(태봉리)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인 태봉산(台峯山)이 복호형(伏虎形)이라하여 복호(伏虎) 또는 태봉(台峯)이라 칭한다.
마을형성 :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달성배(達城裵)씨로 교수관(敎受官)이 던 배명(裵蓂)이 원님에게 자신의 정착지를 의뢰하였는데 전라도 무안 태봉에 터을 잡으라고 일러주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그 후 김해김씨가 입향하였다고 구전되고 있으나 확실한 전거(典據) 는 없다. 한편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의 기록에 의하면 인조 (1623∼1649)때 김해김씨 김중태(金重兌)가 함평 신광에서 세거하 다가 병자호란(1636)때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물, 유적 :
지석묘(마을 앞에 1기), 고분(달성배씨문중제각 뒷산에 5기, 속칭 몰무덤), 도요지《신흥동(新興洞)부근에 있어 청수리요지(淸水里 窯止)라고도 함》, 삼왕묘(三王廟)《1946년 세움, 김수로왕(金首露王).양왕(讓王).흥무왕(興武王)을 모심》, 태봉사(台峯祠)《1980 년 세움, 배지타(裵祗?).배현경(裵玄慶).배운용(裵雲龍).배정지(裵 廷芝).배균(裵均).배회(裵繪).배명(裵蓂).배협(裵俠)등을 모심》
민 속 :
태봉도제(웃당산의 당산 영감과 아랫당산의 당산할머니께 농사 풍년, 질병방지등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14일에 당산제(도제)를 지내며 제가 끝나면 굿과 줄다리기를 한다. 웃당산과 아랫당산은 도(道)나무인 수령 550년의 느티나무(10-109), 군(郡)나무인 소나 무(10-20-14, 수령320년)·팽나무(10-20-15, 수령 400년)·동백나 무(10-20-16, 수령 400년)로 둘러 쌓여있는데 이곳에서 줄다리기 도 한다.
배출인물 :
배석준(전 면장), 배운기(면장), 배준태(해군대령), 배광언(전라남도 의회 의장)
남안리
동암(남안1리)
지명유래 :
동암(東岩)」이란 지명 이전의 옛이름은 「절우정」이라 불렀으나 이름이 좋지 않다하고 마을 동쪽에 바위가 많이있어 「동암(東 岩)」으로 개칭하였다.
마을형성 :
현재 수원백(水原白)씨, 경주정(慶州鄭)씨, 문화유(文化柳)씨 등이 살고 있는데 1776년(정조원년) 최(崔)씨가 최초로 입향하여 마을 을 형성하였으나 화제로 인하여 불타고, 그후로 수원백(水原白)씨 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구전되고 있다. 한편 무안세적 지(務安世蹟誌)에는 최초로 입향한 성씨는 수원백(水原白)씨 백운 헌(白運憲)이 인조(1623∼1649)때 해남 옥천에서 살다가 흉년으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민 속 :
입석(2기(基), 당산영감·할멈이라 칭함)
배출인물 :
유청길(영암경찰서장), 백흥선(전 무안군 교육위원)
남안동(남안2리)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의 형세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다 하여 「남 안(南雁)」이라 칭하였으나 일제시대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안동(南安洞)」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마을형성 유래는 정확히 전해오고 있지 않으나 약 1590년경에 밀 양박(密陽朴)씨가 처음 입향 하였고 그후로 무안박(務安朴씨)가 입향 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배출인물 :
박준규(전대교수), 박한규(전북대교수), 박장규(고교교장), 박영규 (은행지점장), 유재학(초등교장)
상천동(남안3리)
지명유래 :
상천동은 원래 마을이 까치형국이라 하여 「자작동」으로 불렀으나 약 1900년경에 어떤 지관이 마을을 지나면서 마을이 발전하기 위 해서는「상천동(上泉洞)」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여 해방 후 부터 바꿔 불렀다.
마을형성 :
약 1680년경에 문화유(文化柳)씨가 처음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 였다고 하며 그외 어떤 연유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상세 히 전해오고 있지 않다.
유물, 유적 :
입석(마을입구에 1기(基))
사마리
화설당(사마1리)
지명유래 :
처음에는 청천리(淸川里)의 아랫마을이란 뜻에서 「하청천(下淸川)」 이라 불렀으나 학문과 시에 능한 화설처사(花雪處士) 유운(柳運) 의 당호에 따라 화설당(花雪堂) 마을이라 칭하였다.
마을형성 :
조선 중종(1506∼1544)때 문화(文化) 유자(柳慈)가 나주 다시에서 세거(世居)하다 결혼하여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후 유자 (柳慈)의 손(孫)인 화설처사(花雪處士) 유운(柳運)이 학문(學問)과 시에 능통하였으며 말년에는 화설당(花雪堂)이라는 정자를 건립 하고 당대의 석학(송시열, 강항, 박남곽, 유시남)등과 교류하며 후 학들을 양성하였다. 현재 화설당 마을에는 문화유(文化柳)씨를 비 롯한 나주나(羅州羅)씨·이천서(利川徐)씨 등이 분포하고 있다.
전 설 :
지치봉 석굴⇒임진왜란(1592년)때 문화유씨문중(文化柳氏門中)의 하인으로 있던 할멈이 모두 피난길에 올랐으나 족보를 빠뜨리고 온 것을 알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족보를 보존하기 위하여 이 석굴에서 열매로 생명을 유지하며 4년이상을 숨어 지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마을사람들이 돌아와 보니 종할멈의 몸에는 털이 돋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문화유씨문중(文化 柳氏門中)은 족보를 소중히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물·유적 :
화설당《1600년대 초기 처사(處士) 유운(柳運)이 세움, 우암(尤庵) 송시열친필의 액호(額號)와 수은(睡隱) 강항이 지은 <화설당기(花雪 堂記)>가 있음》, 화계정(花溪亭)《1951년 중건, 화계거사(花溪居士) 유기정(柳基渟)의 정자》
민 속 :
입석(마을에서 50m 떨어진 작물시험장 가운데 1기(基)가 있음. 선독, 막음독, 앞당산 하네당산 등으로 불림)
배출인물 :
유수현(전 도위원), 유재능(전 면장), 유길선(검사), 유인순(산부인 과 원장), 유상현(전 도위원), 유광선(초등교장)
사마동(사마2리)
지명유래 :
입향조가 사마원공 벼슬을 했다하여 그직책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도 「사마동(司馬洞)」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약 1730년경에 달성배(裵)씨가 사마(司馬)벼슬을 한 뒤 이곳으로 옮겨와서 마을을 형성하여 마을명을 「사마동(司馬洞)」이라 칭 하였다. 그후로 나주정(羅州丁)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 나 상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민 속 :
입석(마을앞 동각앞에 2기(基), 선독·각씨독·서방독이라고도 부름)
배출인물 :
정규동(전 면장)
남계(사마3리)
지명유래 :
화설당 서쪽에 있는 마을로 청수천가에 있는데 그 하천에서 풍겨 나오는 계절의 향기가 절기마다 뚜렷하다는 뜻에서 「절리」「남계 (南係)」라 하였다.
마을형성 :
구전(口傳)에 의하면 약1730년경에 벼슬을 하던 탐진최(耽津崔)씨 최광국(崔光國)이 낙향하여 산천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이곳에 이르러 잠시쉬며 사방을 둘러보니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뒷편에는 파란 파도가 넘실거려 그 경관이 너무 아름답고, 더구나 넓은 들판이 함께하고 있어 사람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곳으로 여겨 정착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후로 경주정(慶州鄭) 씨와 진주강(晋州姜)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무안세적지 (務安世蹟誌)에 의하면 최초 입향한 시조는 탐진(耽津) 최천강(崔 天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나주 초동에서 살았으나 이곳이 살기좋은 곳으로 여겨져 자손대대로 번영하며 살수 있도록 옮겨 왔다는 기록이 있다.
청천리
상청천(청천1리)
지명유래 :
3면이 산이므로 맑은 물이 산골짜기에서 마르지 않고 흐르기에 「맑으내」「청천(淸川)」이라 하였다.
마을형성 :
달성배(達城裵)씨 동족마을로 최초 입향자는 증암(甑岩) 배회(裵 繪)로 경상도 대구에서 세거(世居)하였으나 1456년(세조2년) 단종 복위(端宗復位)가 되지않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마 을을 형성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전 설 :
명옥폭포(이 폭포수를 맞으면 만병이 완치되는데 옛날 앉은뱅 이가 이 폭포수를 맞고 완치되어 그 발자국이 바위에 남아있 다 한다. 그러나 부정한 사람이 폭포에 다다르면 폭포수가 고 인 웅덩이에 구렁이가 꿈틀거리는 형상이 나타나는데 일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으며 그때 그물로 목욕을 하면 큰 변고 가 일어난다 한다.)
유물, 유적 :
지석묘A군《광주-목포간 국도변에 달성배씨세장산비(達城裵 氏世葬山碑)에서 약 15m 떨어진 곳에 5기(基)있음》. 지석묘 B군《마을앞 천연기념물인 팽나무숲사이에 4기(基)》. 청천 사(淸川祠)《1710년 세움, 배현경(裵玄慶).배운용(裵雲龍).배정 지(裵廷芝).배균(裵均).배회(裵繪).배명(裵蓂).배극렴(裵克廉)등을 모심》. 달성배씨지비(達城裵氏之碑)《1930년 세움》. 배병의 효자각(裵炳儀孝子閣)《1927년 세움》.마곡사(麻谷寺)《시리봉 동남족에 위치, 1954년 세움》. 느티나무(도나무, 10-110)
배출인물 :
배태일(물리학박사), 배종무(목포대학교총장, 국회의원), 배상 석(교장), 배석윤(전 군수), 배영훈(조대교수)
하청천(청천2리)
지명유래 :
처음에는 「연화동(蓮花洞)」이라 하였다가 청천리를 양분하여 웃마을은 물이 맑고 깨끗한 곳이라 하여 「맑으내」라 하였 으며 아랫마을인 하청천은 큰 서당이 있었던 관계로 「하서 당(下書堂)」「아랫서당」이라 불리었다.
마을형성 :
이 마을에 최초로 입향한 성씨는 달성배(達城裵)씨 배명(裵蓂) 으로 1618년(광해군10년) 정월대비(正月大妃)의 호(號)를 소거 (消去)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자 이에 부당함을 상소한 배명 (裵蓂)은 호남일대를 방랑하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 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유물, 유적 :
배룡나무(군지정, 10-20-17)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muan.go.kr/home/www/country/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