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코크의 영화 '현기증(Vertigo)'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꼭 닮은 여인에게 그 여인의 모습을 강요하는 남자의 집착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 남자와 얼마나 유사성을 가질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그 비슷한 일이
내게도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모임에 참석해 콜라텍에서 춤을 추던 순간 저만치서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초보시절 나의 파트너를 꼭 닮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내 머리 속에 '검은 수트를 입은 여인'으로 각인된 바로 그 여자였다.
그 여자를 발견한 순간ㅡ나는 최소 5년 이상 그녀를 보지 못했다 ㅡ나의 감정은 살짝 스쳐가는 미움이었다.
냉담함을 가장하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미움에 더 가까웠다.
그녀와 헤어지게 된 계기가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기에 그런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와는 '의견 차이'로 헤어졌었다. 그녀는 철저히 고독을 고수하는 여인이었고,
마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란 영화에 등장하는 오드리 햅번 같은 외곬수였다.
그녀는 기꺼이 나와 춤 추었지만 그리고 식사와 술자리를 함께 했지만 그 이상 인간적인 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춤장에서 만난 남자와는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만큼 춤에 미친 여자를 보지 못했다.
자신이 좋아하지만 그 좋아하는 것에 완전히 마음을 주지 못하는, 이런 '이중 구속(double bind)' 상태의 캐릭터를 나는 춤세계에서 수없이 보았지만, 그녀만큼 철저한 경우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급기야 나는 그녀의 그런 이중적인 면모에 질려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그게 끝이었다.
그 후 곧바로 사과 문자를 보냈으나 그녀로부터 답이 없었다.
아니다. '흘러간 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류의 문자를 받았던 것도 같다.
그녀는 마치 오래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온 듯 단호했기에 나로서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5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단 한번도 그녀를 조우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기묘한 일이었다.
아니다. 딱 한번 그녀가 잘 가던 콜라텍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보라는 듯이 모른 체 했기에 그건 해후라고도 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수 년 동안 그 한번의 스쳐감이 전부였다면 그건 거의 보지 못한 것과 다름 없다.
그 후 그녀는 나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졌다.
그러나 그 모임에 참석한 자리에서 그녀를 다시 발견한 순간 나는 급격히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 소환되었다.
분명 그녀였다. 그녀는 어디 외국에라도 나갔다가 돌아온 모습이었다.
멀리서도 해풍이 실어나르는 진한 바다 내음이 풍겨오는 듯했고,
아직도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듯 그녀의 어깨 위에서 나부끼는 머리칼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검은 수트를 입고 있었다.
목부분에 살짝 레이스가 들어간 상의와 밑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깔떼기 같은 통바지를 입은
그녀는 전에 없이 날렵해 보였다.
다이어트를 한 것일까?
멀리서도 그녀의 얼굴은 전에 없이 팽팽해 보였다.
그동안 흐른 세월을 생각하면 성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나는 약간 냉소적인 기분이 들어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사실은 그녀에게 접근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녀를 놓쳐 버렸다.
그래도 아쉬움을 느끼진 않았다.
그랬다기보다는 그녀가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그냥 넘겨 버렸는지도 몰랐다.
그 날은 얼떨결에 그렇게 넘어갔다. 만약 그녀가 맞다면 다시 만나리라는 배짱이 내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몇 번인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한 적이 있다고 확신하였으므로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녀의 모습을 그 다음 주 토요일 모임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는 달리 혼자 온 게 분명해 보였다.
그녀와 옷깃을 스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 가까이서 춤을 추었는데 나는 한 순간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나를 의식하는
듯한 얼굴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그 주에도 그녀는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 후 몇 주인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었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했다.
의미 있는 웃음을 띠었지만 그녀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살짝 싱거운 듯한 그 미소는 여전했다.
나는 그 미소만으로도 그녀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정말 그녀가 이미 나에게는 낯선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마치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춤을 추었다.
그녀는 춤 스타일이 약간 활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꼬리에 예의 그 싱거운 듯한 미소를 달고 춤을 추었다.
춤을 마친 후 나는 플로어에 서서 손을 잡은 채 그녀에게 잠깐 음료라도 나누자고 제안했다.
마치 둘이서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태도는 정중했고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 보았다.
결코 미인은 아닌 것이, 그녀는 찢어진 눈을 하고 있었고,
얼굴은 가면을 쓴 듯 하얗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목을 살짝 덮는 생머리를 기른 그녀는 마치 대낮에 출몰하는 유령처럼 보였다.
나는 회심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그녀를 식당 테이블로 인도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연극조의 기조를 허물지 않아야 한다.
"저기 댁은 제가 전에 알던 여자 분을 꼭 닮았어요." 하고 나는 운을 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태연했다. "어머, 그러세요?" 하고 그녀는 그냥 되묻는 얼굴이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혹시 성씨가 J아니세요?"
그녀는 아니라고 했다. 그래 성이야 착각할 수도 있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만날 때도 성명으로 서로를 부를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럼 이름이....현주 아니세요?"
그녀는 다시 도리질을 했다. 마치 스무 고개를 하듯이.
이런...그것도 아니었나...? 그러나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나는 완벽하게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볼을 꼬집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흥미 있어 하는 눈치였다.
"거기 알던 여자라는 그 분."
나는 마침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아 정말 그 분과 너무 닮으셨어요. 전 영판 착각하고 말았네요."
나는 그녀에게 내가 참석하는 모임에 게스트로 참석하기를 권했다.
나는 그렇게 하여 그녀를 내 곁에 잡아두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다만 나에 대한 개인적인 호의는 거두어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매주 토요일 다른 일이 없으면 그곳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대화를 나눠 본 결과 나는 그녀가 상당히 세련된 취향의 여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의 그녀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고독한 여인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세련된 중산층 부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그 날은 친구와 동행했다고 했다.
마침 곁을 같은 모임의 회원 T씨가 지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를 끌어들여 동석했다.
나는 그녀에게 친구를 불러 밖으로 나가서 한잔 더 하자고 넌지시 제안했다.
T씨는 나와 죽이 맞는 회원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T씨와 나는 먼저 밖으로 나가고 그녀는 춤추고 있는 친구를 대동하고 뒤이어 밖으로 나오기로 했다.
콜라텍 계단 밑 입구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가 오지 않아 초조해진 내가 위로 올라가 보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플로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녀는 웃고, "친구가 춤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이쪽으로는 눈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나갈 태세를 갖추고 보관소에서 가방을 찾아 가지고 있었다.
T씨가 기다리다 못해 올라왔다. T씨는 상황을 파악하고 모임실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는 친구를 꼭 기다려야 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은 그만 귀가하겠다고 했다.
내가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그녀는 웃으며 사양했다.
그녀와 나는 다음 주 토요일에 보는 것으로 약속했다.
그 전에 내가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 약속으로 대신했다.
문득 나는 다음 주는 모임에서 야유회를 간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우리는 다다음 주에 만나기로 약속을 수정했다.
그러나 야유회 날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야유회 날 밤에 양주를 마시고 엉망으로 취해 필름이 끊어진 상태에서 여회원을 희롱하는 추태를 연출하고 말았다.
거기다 말리는 남자 회원에게 병을 깨뜨려 위협하는 폭력적인 행태를 벌이고 말았으니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몽유병이나 다름없는 그런 술버릇이 하필 그 날 도질 줄이야 십 년 이상이 지나도록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생각컨대 나는 술을 마신 상태에서 여성이 흘리는 메시지의 그 독특한 이중 구속 상태에서 해제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를 유혹해 봐.ㅡ그러나 유혹하면 안 돼. (그건 성추행이야.)
혹은 이건 되지만 그건 안 돼.
혹은 나를 유혹해 봐. ㅡ그러나 너는 아냐.
등등
이런 걸 이중 구속 상태라고 하는데 메시지가 갖는 표면과 이면이 정반대되는 것을 요구할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남자는 여성이 던지는 메시지와 그것이 의미하는 메타 메시지의 간격을 허물면 벌을 받는데,
나는 술의 힘을 빌어 일거에 그 간격을 허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나는 졸지에 패륜아가 되어 모임을 탈퇴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패륜아. 정작 그 "오명"ㅡNotorious 이것도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또다른 영화 제목이다. ㅡ이 나에게 씌워졌을 때 나는 할말이 없었다.
화폭을 앞에 두고 나는 여인의 초상화를 그려 본다.
물감을 진하게 칠한 배경 위에 여러 개의 원과 원추와 기하학적 도형으로 구도를 잡는다.
그리고 이목구비, 어깨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와 독특한 얼굴 표정.
그러고는 나는 색조에 색조를,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지만 제법 온전한 형태를 갖춘 그림을 보면 애초에
내가 그리고자 한 어느 여인과도 멀어져 있다.
문득 나는 그림을 파기하고 또 다른 그림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검은 수트의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플로어의 어둠이 짙어지며 강렬한 조명이 그녀를 감싸고
어둠이 조금씩 먹어들 듯하다가 마침내 목 부위 위로 얼굴만을
동그랗게 남겨놓았다.
마치 절정을 헤매는 듯 지긋이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은 그 얼굴 위로
빛은 빨려들듯 사라지고
곧이어 흔적 없는 어둠만이 남았다.
2019, ㅁㅈ.
(끝)
첫댓글 잃어버린 사랑...사람을 다시 찾은 듯한 느낌과 욕심이 무리수를 두다 엽기적이 될수도 있지요. 히치콕 감독은 어떻게 표현 했을지 궁금합니다.
박찬욱 '헤어질 결심'이 이 영화를 오마주(창조적 모방. 경배)했다고 봐도 될 겁니다.
특히 탕웨이는 이 영화 여주인공과 흡사하고 의상까지 비슷합니다.
이 영화를 본 적 없어 패쓰...~~~
영화를 몰라도 상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