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티모르 사람들은, 25년간 인도네시아와 처절한 싸움을 벌였지만, 인도네시아 항공사에 독점 취항권을 내주었다. 『호주나 미국 항공사에 독점권을 줄 수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와 화해하며 살기 위해 독점 운항권을 가루다 항공에 주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80여 명의 승객은 대부분 호주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었다. 사업차 가는 한국인 승객이 간혹 보였다. 푸른 바다 위를 1시간30분쯤 날아가자 제주도처럼 타원형으로 생긴 섬이 나타났다.
부드러운 산들 사이로 강이 흘렀고, 해안도로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비행기는 가볍게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딜리 비행장에 비행기라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한 대뿐이었다.
티모르 사람들은 1975년까지 45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폴리네시아인과 포르투갈 사람들 사이에 혼혈이 이뤄져, 이웃나라인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사람들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큰 눈에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딜리 공항의 기온은 32℃, 습도는 70% 이상으로 한국의 삼복더위를 연상케 했다. 땀이 계속 흘러 몸에 옷이 달라붙었다. 공항 택시정류장의 택시들은 낡은 일제車 일색이었다. 택시운전사에게 『에어컨이 작동하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10분 이상을 달려도 찬 공기는 나오지 않았다. 운전사는 중앙선과 신호등이 없는 도로를 시속 20~30km로 느릿느릿 달렸다. 추월하려는 차도, 빨리 달려가는 차도 보이지 않았다. 東티모르의 시간과 속도는 대한민국 서울의 3분의 1 정도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국과 東티모르 사이의 문화적 시차에 적응하는 데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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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사는 나를 2000년에 세워진 「2000 호텔」 앞에 내려놓았다. 공항에서 10분 정도 거리였는데 요금이 10달러였다. 東티모르의 작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00달러(2001년, 구매력 기준). 이걸 감안하면 엄청난 고액 택시요금인 셈이다.
국민의 85% 이상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한다.
농부들은 소르굼(수수의 일종)ㆍ옥수수ㆍ벼 등을 재배하고, 소ㆍ돼지ㆍ개ㆍ닭 등 가축을 기른다. 나중에 농가들을 돌아보니 키운다기보다는 짐승들이 알아서 큰다는 게 적절한 표현으로 생각됐다. 어부들은 작살과 작은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다.
딜리 시가지는 우리의 중소도시를 연상케 했다.
건물들은 대부분 단층이었고, 간혹 눈에 띄는 3~4층 이상의 건물들은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 과정에서 파괴되거나 불탄 상태 그대로였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 짐을 풀고, 오후 5시쯤 東티모르의 중부 오지 투리스카이로 이동했다. 이곳에 고등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사회복지법인인 가정복지회 李澈相(이철상ㆍ70ㆍ대한내과의원 원장) 이사장, 趙敦濟(조돈제ㆍ67) 대구 동일교회 목사와 함께 였다.
수도 딜리에서 행정수도 후보지인 아일레우까지 75km를 갔고, 거기서 투리스카이까지 70km를 더 갔다.
140km를 이동하는 데 여섯 시간이 걸렸다.
영부인 커스티 여사가 내준 구스마오 대통령 전용 지프차와 東티모르 외교부가 내준 한국산 지프차 한 대는 덜컹거리는 흙길을 힘겹게 달렸다. 긴 비행과 덜컹거리는 도로 여행에 李이사장과 趙목사는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東티모르는 3800km에 이르는 도로 중 428km만이 포장됐다고 한다. 포르투갈 통치 시절에 포장됐다는 도로는 雨期(우기) 동안 土砂(토사)가 씻겨 내려가 움푹 파여 있었다. 대통령 전용 지프차 운전사 루돌프와 외교부 직원 베레는 곡예운전을 하며 구덩이를 피해 갔다. 도로의 왼편은 낭떠러지였다.
간혹 앞쪽에서 마주치는 차가 나타나면 엉금엉금 서로 비켜갔다.
東티모르의 雨期는 11월쯤 시작해 4월까지 계속된다.
도로 주변에 안개가 자욱하더니, 스콜성 비가 후두둑하며 차 지붕을 두들겼다. 딜리 인근을 벗어나자 휴대전화가 불통이었다. 기지국이 딜리에만 하나 있기 때문이다.
딜리에서 70km쯤 떨어진 「아일레우」에 이르자 도로 양편으로 커피나무 숲이 나타났다. 커피나무는 해발 1000~ 1500m의 高지대에서 자란다. 시원한 바람이 차창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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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1942년부터 2년간 이곳에 진주하면서 4만여 명의 東티모르 사람들을 학살했다. 아일레우에서는 성당에 주민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아일레우 학살 희생자 기념비」를 방문했다. 학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웠다.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이 떠올랐다. 조그만 섬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列强(열강)들은 그냥 놔두지를 않았다. 東티모르 사람들은 거의 맨 손으로 점령군에 저항했고, 힘없이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東티모르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운명이 닥쳐 왔다.
공기가 맑아서 반달이 유난히 크고 밝게 보였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東티모르에 사는 한 교민이 『하늘에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서로 부딪치느라 「빠드득빠드득」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는데 그대로였다.
자정 무렵 달리는 차 앞에 노루 두 마리가 나타났다. 차를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노루가 아니라 송아지였다. 이곳에서는 돼지·소·염소 같은 가축을 놓아 먹인다.
자정 무렵 투리스카이의 한 성당에 도착했다.
낮 동안 태양 전지판으로 충전한 전기를 이용해 작은 전구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성당 사무실에 우리 일행을 위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안남미 밥, 배춧국, 삶은 라면을 볶은 것, 야채와 닭고기 요리가 主메뉴였다.
마을 사람 20여 명이 우리가 올 때까지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더니 수줍어하면서 자리에 앉으려 하질 않았다.
밥을 먹는 사이 이곳저곳에서 「짝, 짝」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 냄새, 사람 땀 냄새를 맡은 열대의 모기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든 것이다. 내과의사인 李澈相 이사장은 『이곳 물에는 석회 성분이 많아 그대로 마시면 위험하다』며 가져온 미네랄 워터병을 우리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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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서둘러 온몸에 모기약을 발랐다.
말라리아의 공포가 엄습하는 시각이었다. 동행한 東티모르 국립대학의 이은택 교수는 『東티모르 사람들은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다』며 『육식을 하면 지방 성분이 몸 바깥으로 배출돼 모기의 표적이 된다』고 했다. 선교사인 李교수는 지난 7년간 채식만 했다고 한다.
새벽 1시쯤 야자나무를 쪼개서 만든 東티모르 전통 가옥으로 들어갔다. 습기로 매트리스가 눅눅했다. 모기약을 온몸에 바르고, 모포를 머리 끝까지 올리고 모기의 집요한 공격에 대비했다. 「내일부터 고기는 절대로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요란한 라디오 소리에 일찍 잠이 깼다.
東티모르 사람들은 라디오를 곁에 두고 생활한다. 라디오가 내보내는 뉴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독립운동 기간 중 라디오가 東티모르 독립운동 세력과 주민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정보전달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국영인 라디오내셔널, 가톨릭방송, 크리스찬 라디오방송 등 4개 방송이 있고, 텔레비전은 「티모르 텔레비전」 한 곳뿐이다.
우리가 잠을 잤던 교구 사무실 주변에 40여 가구의 民家가 있었다.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봤다. 아침식사는 대부분 삶은 감자 몇 알이었다. 점심은 대개 굶고, 저녁에 옥수수와 밥을 먹는다고 한다.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것이다. 東티모르 사람들의 主食은 쌀, 토마토, 감자, 고구마, 콩, 얌이다. 어젯밤 우리가 먹은 저녁은 대단한 盛饌(성찬)이었던 셈이다.
이 교구의 길헤르모 神父는 『영양상태가 나쁜 대신, 당뇨나 위장병이 없다』며 『먹을 것이 부족해 개도 풀을 먹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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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가 쇠고기보다 인기가 있다. 큰 돼지 한 마리 가격이 큰 소 한 마리 가격과 비슷한 200달러다. 食用으로 이용되는 개는 한 마리에 15달러 정도였다. 이곳 사람들은 약한 마약 성분이 있는 풀뿌리를 껌처럼 씹는다.
씹다가 즙을 내뱉는데 핏빛이다. 오래 복용한 노인네들은 이가 모두 붉은색이다. 씹으면 오랫동안 정신이 몽롱해져 東티모르 정부는 채취를 금지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예전처럼 야생으로 자라는 이 풀의 환각 성분을 즐긴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이곳 주민들의 표정은 밝았다. 東티모르 사람의 60% 이상이 문맹이다.
길헤르모 신부는 『우리는 고난의 역사를 가톨릭 신앙 하나로 이겨내 왔다』며 『물질적으로 어렵지만 오늘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증오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투리스카이 마을의 추장인 알폰소씨는 『포르투갈은 우리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하는 등 기여한 점이 있으나, 인도네시아는 착취만 했다』고 흥분했다. 알폰소씨는 우리가 가지고 간 디지털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알폰소씨와 동네 사람들을 세워 놓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었다.
인구 6000명 규모인 투리스카이 마을은 마을 한가운데에 큰 성당을 지으려고 터를 닦고 있었다. 李澈相 이사장이 기부한 2만5000달러는 「투리스카이 고등학교」 신축에 쓰일 계획이다.
투리스카이 중학교의 학생은 360명. 고교생 39명은 학교 건물이 없어 중학교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학생들은 우리 일행을 「국빈」처럼 반겨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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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추장의 안내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봤다.
高지대 산록을 따라 드문드문 집들이 모여 있었다. 야생 커피를 채취하는 아낙네, 정글 도검 「마체테」로 잡초를 쳐내는 젊은이, 집 앞에서 목욕을 하다가 이방인들을 발견하고는 수줍게 몸을 감싸는 젊은 여성….
오지 마을은 평온했다. 이곳이 수없는 학살과 유혈 투쟁의 현장이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東티모르의 인구는 85만 명. 2003년 美 CIA 자료에 의하면, 東티모르의 출생률은 2.7%, 사망률은 0.7%(2003년)이다. 이 중 유아 사망률이 5%에 달한다. 현지 의사는 30여 명 정도로 인구 2만5000명당 의사 1명꼴이다.
투리스카이 마을 병원에는 의사가 없다. 남자 간호사 1명과 여자 간호사 1명이 감기·설사·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했다. 간호사 조아오(38)씨는 『하루 50~60명의 환자가 찾아온다』며 『아스피린 같은 해열 진통제와 항생제를 나눠 주지만 확보한 약품의 양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李澈相 이사장은 『병상 135개인 東티모르 국립병원의 사정도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기증한 9대의 인큐베이터 중 2~3대가 고장이 나서 방치돼 있고, 초음파 검사기도 고장이 나서 쓰지를 못합니다. 기초검사장비인 X-Ray도 충분하지 않아요. 東티모르가 지금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의료 인력과 장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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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딜리로 돌아오는 길에 「사메」라는 지역을 지났다. 사메는 東티모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스위스를 떼어다 놓은 듯한 풍경이다. 이 지역을 지날 무렵 도로에서 가까운 산에서 흰 먼지가 치솟아 올랐다.
火田民들이 밭을 일구려고 불을 지른 것이다.
불길을 피하지 못한 원숭이들이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꽥꽥」 괴성을 질렀다. 연기 때문에 눈이 따가운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불길과 연기를 못 참겠는지 원숭이들은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불난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연상시켜서 마음이 아팠다.
도로 곳곳에 자갈 무더기가 무덤처럼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주민들이 산을 파헤치고 채취한 콩알만 한 돌들이다. 건축업자들이 한 무더기에 2달러를 주고 사 간다고 한다. 개발이 서서히 시작되면서 東티모르의 아름다운 자연들은 사람들의 탐욕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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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오후 5시쯤.
수도 딜리 인근 「발리바」 지역에 있는 사나나 구스마오(57) 대통령의 私邸(사저)에 도착했다. 담장이 없는 그의 집은 30평쯤 되어 보였다. 구스마오 대통령 내외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우리 일행은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었으나, 구스마오 대통령은 파란 와이셔츠에 맨발이었다. 기자는 『東티모르 외무부에서 간편한 차림으로 오라고 했다』고 얘기했으나, 연로한 李이사장과 趙목사는 『그래도 한 나라의 국가원수를 만나는데 노타이 차림은 안 된다』고 했다.
긴소매 와이셔츠, 양복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우리 일행은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자신의 게릴라 시절의 사진이 박힌 기념시계를 하나씩 선물로 나눠 줬다.
호주 출신인 영부인 커스티 여사가 망고와 케이크, 직접 재배한 포도를 내왔다.
조금 있다가 세 살 난 대통령의 큰아들 알렉산드르가 『아빠』를 부르며 나왔고, 생후 1년6개월 된 둘째 아들 올록이 잠이 덜 깬 듯 구스마오 대통령에게 잠투정을 했다.
구스마오 대통령 부부는 아이들을 안고 집 구경을 시켜 줬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이 집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내가 손수 가꾼 집』이라고 했다.
『2001년에 이사 와서 수리를 했습니다. 지붕 페인트 칠을 내가 했고, 집 뒤편의 테니스 코트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집 주변의 호박과 꽃은 모두 내가 심은 겁니다. 대통령 관저가 딜리에 있지만, 집무실에서 일을 끝내고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 옵니다. 아이들이 이곳을 무척 좋아해서 관저로 옮기지 않고 있습니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오른발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다쳤느냐』고 물었더니, 『밀림에서 게릴라 투쟁을 하면서 늘 군화를 신고 생활해서 무좀이 고질병이 됐고, 발에 그때 난 상처가 많다』고 했다. 李澈相 이사장은 구스마오 대통령의 다리를 살펴보더니 『당뇨가 없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몸이 전체적으로 허약한 것 같으니 한국에 와서 종합검진을 한번 받아 보시라』고 권했다.
1997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찌삐낭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구스마오는 남아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만났다.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한 만델라가 구스마오를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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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티모르 독립의 결정적인 계기는 이 만남에서 마련됐다.
구스마오의 부인 커스티는 호주에서 발간된 「독립을 원하는 여인」(2003)이라는 책에서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축구광인 구스마오는 감옥 안의 축구경기에서 2대 1로 져서 투덜거리며 자신의 감방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교도소장이 다가와서 「넬슨 만델라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구스마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교도소 밖의 한 장소에서 만델라와 구스마오의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됐다.
『당신은 독립에 관심이 있는가? 평화에 관심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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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첫 물음이었다. 구스마오는 『평화로운 독립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만델라는 「구스마오와 東티모르의 미래를 놓고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다.
구스마오는 『우리는 인도네시아가 東티모르를 침공하던 시점(1975년)부터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다. 나는 이미 수하르토를 용서했다』고 대답했다.
만델라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오히려 부끄럽다』고 했고, 구스마오는 『나에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했다>
1999년 9월 인도네시아의 감옥에서 풀려난 구스마오는 넬슨 만델라처럼 東티모르 사람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호소했다. 그는 보복과 과거청산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東티모르 학살을 주도했던, 티모르 서부지역 민병대를 용서한다는 뜻으로 이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인도네시아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온 세계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그들(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폐허뿐이다. 우리가 재건의 능력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반드시 보여 주자』고 호소했다.
구스마오는 인도네시아를 적성국으로 만들지 않았다. 東티모르 독립 기념식장에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대통령이 참석했다. 구스마오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사했다.
『난 독립을 위해 싸웠지 국가발전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임무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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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르의 소리」 신문기자로 일하던 구스마오는 인도네시아의 티모르 침공 직후(1975년) 펜을 놓고 게릴라軍에 참여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당신은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었고,
우리는 당신과 함께 민족의 살길을 얻었다>
東티모르 게릴라 저항군이 부른 독립군가에 나온 「당신」은 구스마오를 가리킨다. 그가 對인도네시아 저항운동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카리스마가 新生國 東티모르의 통합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게 東티모르 사람들의 일치된 얘기였다. 東티모르 외교부의 한 직원은 이런 얘기를 했다.
『구스마오가 화해를 얘기하지만, 東티모르 사람들은 모두가 학살의 피해자들이다. 티모르 서부로 도망간 2만5000명의 민병대는 인도네시아를 등에 업고 동족을 학살했다. 이들이 고향 東티모르로 돌아온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내 형제, 내 자식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겠나? 구스마오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다. 이게 東티모르의 어두운 그림자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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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마오 대통령은 소탈했다. 대답하면서 가끔씩 큰 웃음을 터뜨렸고, 손으로 큰 제스처를 취했고, 주변 사람들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東티모르 전체인구의 3분의 1인 25만 명의 목숨을 代價로 독립을 쟁취한 지 2년이 넘었다. 대통령께서는 과거를 잊고 화해하자고 강조해 왔다. 인도네시아로 도망간 2만5000명의 민병대 등 용서와 화해의 장애요인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조상들은 400년 이상 포르투갈에 맞서 싸웠다. 인도네시아의 침략에 맞서 25년간 투쟁했다. 우리가 외세의 억압과 통치를 수용했다면, 우리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고난을 맞이했다. 이건 자랑스러운 역사다. 우리는 투쟁과 고난의 과거를 기억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한다』
─東티모르에는 8개 이상의 政派(정파)가 있다고 한다. 정파들 간의 알력 갈등은 어떻게 조정하고 있나.
『우리 티모르 사람들은 정신력이 강하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인도네시아를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했던 것은, 서로를 끌어안으려는 마음 자세, 「자유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것들이 정파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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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티모르는 21세기의 첫 번째 신생 독립국가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東티모르를 어떤 나라로 만들고 싶은가.
『나는 東티모르가 유엔의 도움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東티모르는 우리 국민들의 투쟁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400여 년의 식민지 역사, 최근 25년간 진행된 압제의 역사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東티모르 개발을 위한 「국가비전 2020」을 추진 중이다. 경제·사회·문화·복지를 2020년까지 開途國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상록수 부대가 東티모르의 독립과정을 도왔고, 한국 민간기업들이 東티모르 개발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 한국에 바라는 것은.
『한국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많다. 24년간의 인도네시아 지배로 인해 잃어버린 우리의 自助·自立 정신을 살리는 데 한국의 경험이 필요하다. 아직 외국인 투자에 대한 법적 토대가 마련돼 있지 못하다. 우리는 석유나 가스에만 의존하지 않고, 국제교역을 늘리려고 한다. 고용을 유발할 수 있는 기업들이 많이 와 줬으면 한다』
─오르타 외무장관은 『한국 국민들이 東티모르에 허니문 관광을 온다면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겠다』고 얘기를 했다.
『외국 관광객들이 별 다섯 개짜리 특급호텔을 원한다면 그건 어려울 것이다. 자그마한 리조트를 세우고, 환경친화적인 관광은 가능할 것이다. 서울에서 東티모르로 전세 비행기를 띄우는 일은 나와 오르타가 해야 할 임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섬과 바다와 山河를 즐기기 위해 전세기를 운영하려면 아마 3년 이상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東티모르에서의 1주일이 발리에서의 1주일보다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나』
─다음 大選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앞으로 무얼 할 계획인가.
『2006년 이후 가족들과 함께 집에 살면서 호박을 키우려고 한다. 난 참 피곤하게 살았고, 많이 지쳤다. 24년간의 빨치산 투쟁, 독립을 향한 3년간의 격렬한 소용돌이, 지난 2년간의 긴장, 그리고 남은 임기 3년…. 2006년 이후는 그냥 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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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東티모르를 다섯 사람의 「이상적」 공산주의자들이 이끌었다. 알카티리 現 수상, 라모스 오르타 現 외무장관, 그의 前妻 안나 푸수아 現 법무장관 등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추구했다.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구스마오 대통령 등이 가장 먼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났다.
차기 大選 주자로는 46세의 前 게릴라 지도자 마탄 루악, 라모스 오르타 現 외무장관, 1990년 초까지 인도네시아 정부下에서 주지사를 지닌 마리오 카리스칼라오 등이 거론된다.
마탄 루악이 이끄는 東티모르군 1000여 명은 한국군이 주둔했던 라오템에 주둔하고 있다. 東티모르군은 다국적군으로부터 기본 전투장비만 지원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東티모르 경찰은 東티모르군보다 더 강력한 무장을 하고 있다. 광복 직후 한국의 상황과 흡사하다.
東티모르 대사를 겸하고 있는 호주 주재 북한대사 천재홍은 지난해 연말 20여 명의 방문단을 이끌고 東티모르를 방문했다. 이들은 東티모르 지도자에게 『東티모르군을 AK소총을 비롯, 박격포 등으로 무장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東티모르 의회의 한 관계자는 『유엔평화유지군(PKF)을 보낸 한국의 적성국인 북한의 지원을 받는 것은 외교적으로 곤란하기 때문에, 북한 측의 제의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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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일 오후 東티모르 국립대학의 벤자민(43) 총장을 만났다.
그는 호주 시드니의 맥콰리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아마비였던 그는 東티모르 저항군의 「조국 재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호주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공부했다.
벤자민 총장은 앞으로 10년간 東티모르 테툼語의 문자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30여 년 역사의 東티모르 국립대에는 104명의 교수가 있고, 그중 박사는 5명에 불과하다.
재학생은 6200명이다. 4년간 교육을 받는 데 드는 비용은 1인당 450달러 정도다.
이 대학에 재직 중인 李恩澤(43) 교수는 한국어, 동양사, 동양철학사, 서양철학개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신학기부터는 학교 측의 요청에 따라 「한국경제 개발사」도 강의할 예정이다.
최근 세계의 석유 메이저들이 東티모르의 석유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국 브리티시 패트롤」은 1999년 이전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유전개발 허가를 받았고, 자카르타 감옥으로 구스마오를 찾아가 독립 후에도 기득권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독립 이후 미국의 쉘社와 칼텍스社, 호주·일본 기업들이 석유개발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東티모르 정부는 호주와의 해상 국경선 획정으로 2~3년內에 석유개발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東티모르의 소비재 도소매업과 호텔업은 華商(화상)들이 장악하고 있다. 한국의 전자제품과 자동차가 인기지만 물량은 태부족이다.
「東티모르의 남대문시장」이라는 코모로 시장은 외국에서 들여온 조잡한 전자제품과 생활용품으로 가득했다. 東티모르의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는 선진국 수준으로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할 「빵」은 태부족이다. 「빵 없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여러 개발도상국의 실패에서 우리는 확인했다.
東티모르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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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사관은 포르투갈 대사관 옆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柳珍奎(유진규ㆍ56) 駐東티모르 대사는 『東티모르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지원을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다』며, 東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의 국제대회 우승 소식을 전해 줬다.
3월25일부터 29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리베리노 컵 국제 소년축구대회」에 참가했던 東티모르 유소년 축구 대표팀은 김신환(47) 감독이 지도했다. 東티모르 팀은 단 한 골도 내주지 않고, 결승에 올랐고, 일본 팀을 4 대 1로 누르고 우승했다.
경비 때문에 참가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東티모르 팀은 한국대사관과 아시아나항공의 협조로 서울에서 轉地훈련을 거쳐 일본에 갈 수 있었다.
柳대사는 『이곳 東티모르에는 연인원 3200명의 상록수 부대가 주둔했고, 4년간 675만 달러를 지원했다』며 『하지만 일본이 1억5000만 달러를 지원한 것에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지원 규모』라고 했다.
─東티모르의 치안상황은 어떤가.
『인도네시아와 긴장 관계에 있다. 가족을 포함한 2만5000명의 민병대가 티모르 서부 국경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유엔이 東티모르를 떠난다면 이 점이 불안요인이다. 유엔이라는 「바위」가 눌러 꿈쩍 못하지만, 유엔이 떠나면 이들 민병대가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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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최근 東티모르에 군사지원을 제안했다는데.
『최근 호주 주재 북한대사가 東티모르를 찾았다. 이곳 사람들은 혁명가인 체 게바라를 좋아해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도 한다.
북한이 이 점에 착안해 접근하고 있지만, 북한이 東티모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희박하다. 東티모르는 미국·호주·일본·중국·한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東티모르에 군사기지를 건설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東티모르 앞에 있는 아타우로 섬에 미군이 잠수함 기지를 건설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국 항공모함이 이곳에 잠시 머물러서 그런 말이 생긴 것 같다. 미국·일본·태국이 엄청난 대사관 부지를 확보했다. 東티모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그동안 티모르에 기울인 노력과 그 결과로 쌓인 友誼(우의)를 더 키워야 한다』
─구스마오 대통령이 『東티모르 사람들의 자주·자조정신을 일깨우는 데 한국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새마을운동이 좋은 선례가 되지 않겠나.
『마을들이 너무 흩어져 있어 새마을운동과 같은 동원 방식이 적용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東티모르에는 인권민주주의가 먼저 들어와 한국의 1960년대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4월3일 정오 딜리 공항에서 발리行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솟아오르자 東티모르가 한 점 섬으로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길거리에서 만난 東티모르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코레아 파쿠스(한국 최고)』라며 우리를 반겼다. 지구의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수천km나 떨어져서 살고 있는 두 나라가 귀한 인연을 맺었다.
유혈의 바다 속에서 자유를 쟁취한 東티모르 사람들이 그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걸맞은 「번영」을 쟁취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첫댓글 앗 조목사님 사진도 있네요... 천천히 두고 두고 읽어 보아야 겠네요... 감사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