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누가복음 9장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열두 제자 파송 준비를 합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능력과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길을 떠나는 데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식은 가지고 가지 말아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떠나가라’
복음 전하러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조금 이상한 명령을 내리시죠. 오늘날 선교나 전도 여행 떠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보통은 선교 후원카드를 만들어 더욱 풍요롭고 안전하게 선교 다녀올 수 있게 기도를 부탁하지는 않나요?
예수는 여전히 우리의 상식과 다릅니다. 그는 복음 전하러 가는 길에 아무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죠. 아무리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에 나그네 환대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생사가 위험한 일을 제자들에게 요구한 겁니다. 예수는 복음 전하는 일에 경비를 위한 지갑이나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대비책 조차 갖추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유명한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를 들어보신 적 있을 겁니다. 그는 인간의 5단계 욕구 그래프를 만들었죠. 그 그래프는 하단부터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가 차례로 등장하는데, 가장 아래에 생리적 욕구(식)와 안전의 욕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 그래프는 하나의 예시일뿐 우리에게 절대적 기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오늘날까지 이 이론을 공부한다는 것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공감받고 있기 때문이죠. 여튼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 즉, 목숨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먹는 것과 안전한 것, 모두 자기 목숨과 관련되어있죠. 오늘날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돈보다 건강 즉, 목숨이 중요하다고 어느정도 동의하는 시대니까요. 그러나 예수는 다릅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라 볼 수 있는 목숨을 사랑하지 말라는 부담스러운 요구를 우리에게 합니다.
제자들과의 대화입니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예수는 왜 자기 목숨을 부인하라고 하셨을까요? 아마 목숨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저버린 사람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니는 대학만 봐도 이런 사람들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두 자기 목숨, 안정적인 삶 위해 교회 안 나가기 시작하는 사람 참으로 많습니다. 기독교학을 공부한 이들 조차 그런 선택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취준생이 되면 교회가 인생의 후순위로 밀려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취직하면 새 사람이 된마냥 다시 자신있게 교회를 나갑니다. 뭔가 잘못되었죠. 아마 예수는 이런 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다’. 9장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지만, 제자들은 결국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합니다. 이 처참한 실패는 어떤 모습으로든 불신앙에 해당하는 태도가 있었음을 시사하죠.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는 일이었다고 예수는 밝힙니다.
예수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자기 목숨이 예수 따르는 길보다 소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생계와 안전은 아무렇게나 되도 상관없소’라는 태도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삶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의 증언이 솔직하게 와닿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나라와 희년이 오늘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답변 나올 겁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나는 내 스스로 모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희년은 내 삶과 완전히 무관한 이상적인 체제 아닌가요? 나는 어떠한 질서와 문화 아래 살아가고 있지? 나는 정말로 성서의 말씀을 내 삶으로 신뢰하고 있나? 아니면 들을 때만 동의하고, 삶으로는 동의하지 않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숨을 스스로 부지하려면 외롭고 불안합니다. 성서의 말씀이 단순히 이상적인 가르침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관게 속에서 우리는 이 길을 실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도 그랬고 마을 공동체도 그러합니다. 마을 공동체는 희년 정신으로 살아가고, 더 나아가 만나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미 삶으로 성서의 말씀을 실체화하며 경험하며 살아가죠. 그러니 더이상 ‘현실적으로’라는 이유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깁니다. 예수는 분명 이 길을 우리 앞서 가셨고, 우리에게 이 길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니 내 목숨만 바라보는 인생, 1인분짜리 인생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자유롭고 해방시키는 삶 살아갑시다. 우리 K도 계속해서 많은 청년들 만나고 초대합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질서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목숨 사랑하는데 다른 목숨 구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며 살아갑시다. 내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계속해서 하늘 뜻 비춰주는 관계 속에 살아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삶 살아갈 때, 복음 전하는 길에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필요없을 겁니다.
[삶 나눔]
#오래오래 뜀박질
지난 물날 마을에서 오래오래 뜀박질(마라톤)에 참여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여였죠. 작년을 돌이켜보면 참 못 뛰었어요. 평소에 전혀 달리지 않다가 갑자기 10km를 뛰려 하니 몸이 따라주지 않았죠. 뛰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결국 마지막 구간은 거의 걸으며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어요! 연습을 자주 하진 않았지만 함께사는 형제들 덕에 함께 뛰러 나갔고, 작년 경험을 바탕으로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어요.
뛸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는데 바로 함께하는 힘이 너무 신비로워요. 혼자 뛰었으면 중간에 몇 번이고 걸으려 했을 겁니다.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저에게 아직 낯설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낯선 일도 함께할 땐 완주할 힘이 생겨요. 나의 내면에 이런 힘이 있었나?라는 질문이 생길 정도입니다.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제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해줍니다.
뛰면서 삶의 지혜 배웁니다. 낯설고 어려운 길 아니 그보다 가기 싫은 길을 혼자 갈 때는 중간에 몇 번이고 포기하지만, 함께 갈 때는 완주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예수의 제자된 길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모두 이 길이 낯설고 처음이고 어렵지만, 함께하는 지체들 덕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힘 생깁니다. 내 앞과 내 뒤에서 함께 뛰어가는 지체 있으니 더욱 책임감 갖고 뜁니다. 이런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마지막 바자회
지난 한 주 저를 바쁘게 만든 바자회가 끝났어요. 돌이켜 보니 대학 시절에만 총 4번의 바자회를 열었네요. 매년 찾아온 바자회라 익숙하지만, 올해가 준비하는데 제일 힘들었어요. 준비하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죠. 숭선영도 이제 자기 목숨을 다한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 생활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점점 느껴져요. 완주를 향해가는 느낌? 모든 것이 차차 마무리되고 끝나갑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때이기도 하겠죠. 이제 마을에서 어떤 일 하며 살지도 기대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분명하게 설정해야겠어요. 아직 구체적으로 설정한 것은 없지만, 천천히 함께 고민하며 나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