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유감
시내버스가 막 출발하려는데 할머니한분이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친다.
「아이고, 기사니~임, 머시냐 거~ 김대중 코 코…」
「김대중컨벤션센타말이요?」
「올~체, 맞구만이라우!」
「썩을놈의 이름을 요상시럽게 져갖고 …」
기사아저시의 말꼬리가 올랐다가 늘어진다. ‘김대중컨벤션센타’ 맞은편에 결혼예식장이 있는데, 시골에서 고속버스로 올라와 광천종합터미널에 내려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한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컨벤션센터’라는 낯설고 어려운 외국말이 시골할머니의 서툰 입에서 술술 풀려나올 리 없고, 운전기사역시 몇 번씩 반복되는 지루한 물음에 그만, 짜증이 날 법도 한 상황에서 일어난 작은 이야기다. 그래도 ‘광천종합터미널’을 ‘유~스퀘어’로, ‘ㅇㅇ예식장’을 ‘ㅇㅇ컨벤션웨딩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외국어간판이 눈에 많이 띈다. 우리하고 친숙한 공공기관에서조차 KT. KEPCO. KORAIL. KTX. KT&G. POSCO 등의 영문을 앞세운 홍보물이나 청구서를 내밀면 머리가 어지럽다.
한글은 오히려 나라밖에서 더 큰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유네스코는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고, 문명퇴치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상’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세종대왕탄신일을 ‘문맹퇴치의 날’로 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영국 옥스포스대 언어대학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는 한글’이라고 선포한바 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글이 막상, 제나라에서는 한글날이 국경일에도 끼지 못할 만큼 홀대를 받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한글의 역사는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들로부터 언문이라 하여 업신여김을 당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말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한밭’이 ‘대전’으로, ‘한내’가 ‘대천’으로, 그리고 내 고향 곡성읍내를 흐르는 ‘여울내’도 비슷한 소리의 한자인 ‘영운천’으로 억지로 바뀌었다. 그래서 외국어를 사용하면 세련되어 보이고, 한글은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다는 편견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수난을 이겨내고 오늘에까지 이르렀기에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
예쁜 한글 상호를 사용하여 성공한 기업이나 가게가 꽤 많다.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한 ‘빙그레’ ‘도투락’ ‘해찬들’을 비롯하여 ‘놀부항아리갈비집’이나 ‘꿈에그린성형외과’ ‘아까오고또오고수퍼’도 그렇고, 아파트도 ‘개나리’ ‘어울림’ ‘푸르지오’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채우고취하고민속주점’ ‘징검다리출판사’ ‘우렁각시반찬집’ ‘쇳대철물점’ ‘뿔테와금테안경점’ ‘마를래푸를래미용실’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때는 ‘예쁜우리말이름짓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고 운애’란 이름이 대상을 탔고, 우리학교 학생 중에도 ‘이 슬비’ ‘마 루찬’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으며, 내 친구는 아들형제에게 ‘정 다운’ ‘정 다워’라는 고운이름을 선물하였다. ‘강 나루’ ‘여 우비’ ‘진 달래’ ‘고 우리’ ‘한 송이’등 관심만 있으면 멋지고 예쁜 우리말 이름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내일이 오백 예순 네 번째 맞는 한글날이다. 올해는, 신문이 쉬는 날과 겹쳐서 언론의 조명을 받을 기회조차 없어 아쉽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정부에서 10월 4일부터 10일까지를 한글주간으로 정했다고 하니 이 때만이라도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한글을 지켜 오신 선열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말, 우리글을 애용하기를 간절히 권한다.
오늘밤엔, 보성강가에 있는 ‘지리산가는길’이라는 정겨운 이름의 우리말찻집을 찾아가야겠다.
(특별기고, 남도매일신문 2010.10.8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