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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심종근씨가 건립한 동광탕은 심씨의 아들 심완구 전 울산시장이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건립 50년이 가까운 이 목욕탕은 그동안 굴뚝 일부가 잘려 나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옛 주소인 학산동 100번지에서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
울산 사람들 중 심완구 전 시장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 건물이 재정적으로 심 전시장이 어려웠을 때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던 목욕탕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목욕탕은 1964년 심 전 시장의 부친 종근씨가 당시 대현면 배밭을 판 돈으로 건립했다. 종근씨는 당초 이 돈으로 중앙시장 인근에 있었던 울산목욕탕을 사려고 했으나 울산목욕탕이 너무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바람에 이곳에 새 목욕탕을 짓게 되었다.
일제 말까지만 해도 울산읍은 인구가 2만여명이 넘었지만 목욕탕이 없어 주민 불편이 컸다. 1937년만 해도 울산읍 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던 방어진에는 목욕탕이 2개나 있었지만 울산읍에는 목욕탕이 한곳도 없었다. 이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는 울산읍에도 목욕탕을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동아일보는 1937년 1월 5일 기사에서 “최근 울산에 교육기관인 갑종 농업고교와 체육시설인 공설운동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영화관까지 건립되었지만 아직 읍민 건강을 위한 공중목욕탕이 없어 읍민들의 불편이 크다”면서 “읍민들과 지역 유지들이 일치단결해 목욕탕 건립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일제말기가 되며 울산에 두 개의 목욕탕이 들어서게 된다. 하나는 옛 동헌 건물 아래 금융조합 건물(현 농협자리) 맞은편에 있었는데 이 목욕탕은 일본인이 경영해 해방과 함께 주인이 일본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사라졌다.
이에 비하면 중앙시장 입구에 있었던 울산목욕탕은 해방 후에도 영업을 오랫동안 해 울산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
울산사람들 대부분이 목욕문화를 익힌 것이 울산목욕탕을 통해서다. 어릴 때 북정동에 살면서 이 목욕탕을 자주 이용했던 고동원(67)씨는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가정 경제가 어려워 청소년들 중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면서 “당시 병영 학생들과 시내에서 축구 시합을 마치고 울산목욕탕에서 함께 목욕을 하면 학생들 대부분이 목욕 경험이 없어 팬티를 그대로 입고 탕으로 들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부녀자들도 이 무렵에는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 아니면 목욕탕에서 목욕할 기회가 없어 명절에는 평균 6~7시간씩 목욕을 했다”면서 “이 바람에 기력이 떨어져 실신해 목욕탕에서 실려 나가는 여인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70년대가 되면 이 목욕탕은 해방 후 만주에서 울산으로 와 양품 장사를 해 돈을 벌었던 최준식씨가 구입해 미도그릴과 미도다방을 함께 운영함으로써 성시를 이루었다.
유성렬씨가 옥교동에 옥천탕을 세운 것이 50년대 초다. 일제강점기 옥교동 옛 유미빌딩 자리에서 사진관을 경영했던 미시다니(西谷)가 일본으로 간 뒤 유씨는 이 자리에 목욕탕이 있는 3층 건물을 건립했다.
해방 후 울산 최초의 3층 빌딩으로 알려진 이 건물은 난방이 스팀식으로 1층에는 목욕탕이, 2층에는 유미다방과 유씨의 개인 사랑방이 있었다. 마시다니로부터 배운 사진 솜씨가 뛰어나 울산의 사진 역사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유씨는 당시만 해도 울산의 유지로 언변이 좋아 경남도청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 울산 대표로 참가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교육위원이 되기도 하는데 그의 사랑방에는 이동철 울산육영회 회장이 자주 방문했다. 3층에는 원룸 형태의 방이 있어 당시 울산여고 미술선생이었던 김홍명씨가 화랑으로 사용했고 1968년에는 김씨가 유미다방에서 미술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옥천탕이 문을 열 때만 해도 우리나라 목욕문화는 일본식을 벗어나지 못해 탕 내에서 사용하는 바가지는 대나무 태를 두른 나무바가지였다. 그리고 남녀 탕 사이에는 목욕 후 몸을 헹구는 탕이 따로 있었는데 옥천탕은 이 탕이 울산목욕탕 보다 넓어 얼굴을 이 탕 속으로 넣으면 여인들의 목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짖궂은 청소년들이 물을 뜨면서 이 탕 속으로 얼굴을 넣다가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했다.
심종근 어른이 동광탕을 건립해 손님들을 받을 때만 해도 아들 심완구씨는 서울에서 어려운 야당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수협중앙회에서 근무했던 심씨가 정치를 하기 위해 수협을 나온 것이 70년대 말로, 그는 이후 1981년 8대 총선에서 최형우가 울산에서 당선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서울 생활은 어려웠다. 그는 당시 서울 무교동에서 불고기집을 운영했는데 울산 출신의 야당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어 이들을 대접하다보니 항상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그는 1972년 유신이 발생했을 때 울산에서 유신반대운동을 벌이다 서울로 피신한 동료들을 숨겨준 것이 문제가 되어 부산 보안사까지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 때 보안사를 나온 후 빈털터리로 찾은 곳이 그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동광탕이었다.
당시 상황은 그와 함께 부산 보안사에 연행되어 고생을 했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의 부인 원영일 여사가 최씨의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 쓴 글에 잘 나타나 있다.
“8대 때 저의 남편을 도왔던 울산의 야당 인사들 중 유신 때 아무 죄도 없이 부산 보안사에 끌려가 고생했던 사람은 심완구씨를 비롯해 9명이나 되었습니다. 나 역시 그 때 서울에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어느 날 부산 보안사까지 이감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보름정도 조사를 벌여도 아무 잘못이 나타나지 않자 나와 심완구씨를 먼저 풀어주었습니다. 그때 저와 심씨는 동지들도 함께 석방시켜 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버티었으나 동지들이 우리들에게 먼저 나가라고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심씨와 저가 먼저 출감했습니다. 둘은 풀려난 후 동지들의 가족들에게 안부도 전하고 격려도 하기 위해 먼저 울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울산에 도착하고 보니 둘 모두 돈이 한 푼도 없어 우선 심씨 부친께서 운영했던 동광탕으로 가 서울로 가는 차비를 마련했습니다.”
아들이 야당 생활을 하느라고 서울에서 부산 보안사까지 연행되어 고통을 당한 것을 직접 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심씨의 부친은 1978년 12월 10대 총선이 시작되기 전 갑자기 돌아갔고 이 때문에 심씨는 10대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다.
10대 총선은 심씨에게는 금배지를 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왜냐하면 8대 총선에서 울산에서 처음 당선됐던 최형우 의원이 유신 후 야당 동지들이 모두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고 고생하고 있을 때 혼자 미국으로 가 6개월간 버클리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이 때 YS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 대부분이 그의 미국행을 만류했지만 그가 미국으로 간 것을 놓고 울산의 야당 인사들은 그가 중앙정보부의 지원금으로 미국에 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10대 선거에서는 울산의 야당 인사들 중 심씨를 후보로 밀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11대 선거는 5공화국 등장 후 처음 치러진 선거로 이 선거에서 이후락씨가 부정축재자로, 최형우씨가 정쟁법에 묶여 출마를 못했기 때문에 당시 제일 야당인 민한당 후보로 출마했던 심씨는 호랑이 없는 선거전에서 토끼들과 싸우는 격이 되어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 심씨는 울산으로 내려온 후 선거자금이 없어 가족들이 살고 있는 동광탕을 은행에 저당한 후 그 대출금으로 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11대 총선은 이변을 일으켜 정치경력으로 보나 정통 야당의 맥으로 보나 선두주자로 자타가 공인했던 심씨가 낙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선거에서 심씨는 4만여 표밖에 얻지 못해 차점자인 고원준씨에 비해 무려 2만여표가 뒤지고 말았다.
이후 그는 와신상담해 신민당 돌풍이 불었던 12대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였던 최형우씨를 물리치고 당선되었으나 11대 4년은 그에게는 절치부심의 세월이었다. 11대 선거로 동광탕 마저 날렸던 그는 당시 뚜렷한 수입이 없어 서울에서 아파트 전기료도 못내 촛불을 켜고 생활했고 울산에 살았던 그의 어머니는 중앙시장에서 바구니 장사로 호구지책을 했다.
그러나 이후부터 관운이 틔어 그는 12대에 이어 13대 선거에서도 당선, 2선의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면서 울산에서 초대 민선시장과 광역시 시장까지 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요즘 그는 서울 최병국 변호사 사무실에서 김채겸, 이석호, 신원호씨 등 재경 울산출신 인사들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 소일하고 있다.
시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선거 때 마다 울산으로 와 특정 후보를 지원했으나 그들 대부분이 예상외 후보가 되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다. 특히 그는 지난해 대선 때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대신 야당의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울산 지인들로부터 정치적 신념마저 버렸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러나 울산 사람 모두가 비난하더라도 심씨가 만약 문 후보를 도왔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이 있는데 이 비화는 다음 정치편에서 다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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