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2000-656, 2018. 5. 29. 화>
< 땅의 예찬 >
한병철 지음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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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심각한 자연재앙을 앞에 두고,
많은 이들에게는 흉보凶報로 읽혀야 할 것이다.
이는 땅이 인간의 냉혹함과 폭력에 보내는, 분노에 찬 답변이다.
우리는 땅에 대한 경외심을 모조리 잃었다.
더는 땅을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
한병철
봄의 꿈
울긋불긋 꽃들을 꿈꾸었네,
5월에 피어난 모습을,
초록 들판을 꿈꾸었네,
즐거운 새들의 외침을,
수탉이 울어
눈을 떴네,
사방은 춥고 어둡고
지붕에선 까마귀 우짖는다.
하지만 저기 창유리에
누가 잎사귀를 그려놓았나?
잎사귀들아, 너희는 겨울에 꽃을 보는
꿈쟁이를 비웃는 거지?
13-14pp
F. Schubert / Winterreise – Nr. 11. Frühlingstraum
Carina
Vinke
& Jacob Kellermann
F. Schubert / Winterreise – Nr. 11. Frühlingstraum
Viola
/ Richard
Yongjae O'Neill
Guitar
Duo
/
Song-ou Lee
& Oliver Fartach-Naini
…
정원사의 지혜라는 게 내겐 분명 부족한 모양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내내 꽃이 피는 정원을 가꾸기로 마음먹었으니.
‘내려놓을 줄 아는‘ 정원사의 지혜보다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의 열망을 더 좋아하니 말이다.
…
15p
…
최초의 망설이는 빛줄기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저 변용 變容과 황홀경의 찰나들,
억눌린 환희의 순간들이 우수를 끊어놓는다.
새벽은 통상적인 시간보다 앞선,
그리고 삶과 죽음의 시간이 멈추어진 과거에 들어 있는, 시간-이전이다.
<아침의 노래>는 꽃피는 겨울정원을 향하는 나의 환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목소리를 준다(규정한다).
이 노래들이 이 책의 기본음조이다.
…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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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크로스와 봄크로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놀랍다.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
23-2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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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은 프랑스 말로는 뉘메리크numérique이다.
즉, 숫자로 된 것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신비로움을 없애고, 시詩를 없애고, 세상을 낭만적이지 않게 만든다.
세상에서 온갖 비밀, 온갖 낯섦을 없애고, 모든 것을 알려진 것, 진부한 것, 내 마음에 드는것,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은 동일하게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디지털화에 직면하여 세상을 다시 낭만화하고,
땅을 땅의 시를 다시 찾아내고, 땅의 신비로움, 아름다움, 고귀함의 품격을 되찾아주어야 할 것이다.
…
29p
…
노발리스는 낭만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평범한 것에 높은 의미를, 일상의 것에 신비로운 겉모습
을, 잘 아는 것에 모르는 것의 품위를, 유일한 것에 무한한
모습을 주어서 나는 그것을 낭만화한다.
겨울정원은 낭만적인 장소다.
겨울 한가운데 꽃피어나는 생명의 온갖 징후는 신비롭고 마법적인 것,
동화 같은 것이다. 꽃피는 겨울정원은 무한함의 낭만적 겉모습을 유지한다.
…
35p
노발리스 (Novalis. 1772.5.2.-1801.3.25.)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시인이자 사상가로서 본명은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Friedrich von Hardenberg).
예나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익힌 후 프라이베르크의 광산전문학교에서 광물학과 지질학을 공부한다.
광산 감독관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한편,
광산에서
얻은 이미지에 판타지로 가득 찬 시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시의 근저에는 조피 폰 퀸이라는 소녀와의 연애 체험이 동기로서 자리 잡고 있다.
약혼 후 곧바로 그녀는 결핵성 질병으로 사망하지만, 그는 실의 가운데서 그녀를 정신적 동경의 대상으로서 결정화하였으며
그 이상화된 형상이 그의 시 속에서 살아 있다.
그의
대표작은 『밤의
찬가』와 『푸른
꽃(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이다.
그
같은 창작활동과 동시에 그는 둘도 없는 친구 Fr. 슐레겔
등과 문예와 사상 동아리를 만들고
그 기관지 『아테네움』을 무대로 예나에서의 독일 초기 낭만주의 운동의 사상적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피히테와 셸링의 관념론철학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마술적 관념론'으로서 시적으로 변용하고
포에지의 힘에
의해서 우주의 체계를 통합하는 '보편적 학'의
구축을 지향했지만,
그것을
체계화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는
계몽사상이 낳은 속물적인 근대 시민사회를 기피하는 나머지 현실에서는 달성될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의 부활과
가톨릭주의로의 회심에 의한 신과의 신비적 합일, 나아가 동양적 세계로의 회귀를 몽상하게 되었다.
헤겔은 노발리스의 현실을 기피하는 낭만적 정신의 결말을 '아름다운 영혼'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즉 "자기 마음의 순결을 보존하고자 하여 현실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아름다운 영혼"은 동경 속에서 자기를 구하면서
결국은 자기를 상실하고 마는 "공중에서 용해되는 형태 없는 안개 같이 소멸한다“
[『정신현상학』 3. 483f.]. 여기에는 바로 현실세계에서 정신의 실현을 보고자 하는 헤겔의 비판이 들어 있다.
-이사카 세이시(伊坂靑司)
[네이버 지식백과] 노발리스 [Novalis] (헤겔사전, 2009. 1. 8., 도서출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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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피는 아네모네는 그 모습 때문에 광채아네모네라 불린다.
실제로 이 꽃은 겨울 추위 속에서 푸른 보라색 광채를 낸다.
땅을 덮은 얼음을 최초의 태양관선이 녹이자마자 이 꽃이 모습을 드러낸다.
광채아네모네는 내게는 겨울바람꽃, 갈란투스와 함께 분명한 겨울꽃이다.
…
58p
Anemone coronaria
Galanthus
(설강화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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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고트프리리트 벤 의 시 <아네모네>가 이해된다.
뒤흔들어놓는 너 – 아네모네
땅은 차가워 지금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 너의 왕관은
믿음의 낱말, 빛의 낱말을 중얼댄다.
권력만이 잘되는
인정머리 없는 땅에다
너 조용한 꽃은
말없이 씨를 뿌렸지.
뒤흔들어놓는 너 – 아네모네
너는 절정의 여름이 큰 꽃들을 엮어 만들어낸
믿음을, 빛을 지니고 있네.
…
59p
아네모네 /
이미자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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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넘겨 받았을 떼 뒤쪽 그늘진 곳에 옥잠화 두 그루가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이들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아름답다 여기지도 않았고, 그 어떤 고귀함이나 아름다움도 보지 못했다.
…
지금 나는 이런 첫 판단, 옥잠화에 대한 나의 첫 판단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것은 잘못된, 틀린 생각이었다.
내 무지탓이었다.
옥잠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내가 눈이 멀어 있었던 것뿐이다.
이제 그런 판단을 기꺼이 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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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옥잠화의 거의 도취한 성장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옥잠화는 정말로 두드러진 생장능력을 갖는다.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5월에는 그야말로 인상적인 크기에 도달한다.
거의 분출하는 그 성장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
72-73pp
옥잠화(玉簪花)
박종화 시
미녀 같은 흰 꽃을
그대 이름 아시나
부르기를 옥잠화
가을마다 피어서
솔솔 부는 서풍에
향기로이 웃나니
알아줄 이 누구요
배옷 입은 선빌세
옥잠화 (박종화 자사 / 이흥렬 작곡)
Ten
한승석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한국가곡의 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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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
76p
…
내 정원은 어떻게 해선지 내가 신을 믿게 만들었다.
내게서 신의 존재는 이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확실성이고 증거이다.
신이 계시고, 그래서 내가 있다.
스펀지로 만든 무름덮게를 기도방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신께 기도드렸다.
“당신의 창조를, 그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고맙습니다! 우아합니다!”
생각함은 감사함이다.
철학은 다름 아닌 미와 선을 향한 사랑이다.
정원은 가장 아름다운 선善, 최고미, 즉 ‘토 칼론 to kalon’이다.
…
128p
* 칼론 kalon
즐거움을 주고 마음을 끌어당기며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뜻.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 형태로 인해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가 하면,
또 다른 방식과 다른 이유로 즐거움을 주는 수많은 다른 것들도 포함
…
"나는 '땅의terran' 질서를 사랑한다.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소중한 신의 선물을 향해 깊은 충절, 깊은 결속의 감정을 느낀다.
내 생각에 종교란 다름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이런 깊은 결속 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아무 구속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게 자유란 지금으로서는 정원에 머물기라는 뜻이다."
…
150p
시간에 기대어
최진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설움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살아있을까
후회투성인 살아온 세월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 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사랑하오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Baritone. 고성현 (1962-)
Bass.
René Pape
(1964.-)
첫댓글 이렇게 귀한 내용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문도 바뀌고 더 좋아졌어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별거 아닌데 혼자서 조금 뿌듯해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사진으로 해 놓으니 정말 카페다운 카페입니다. (이제야.. >.<)
말로만 들은 옥잠화를 사진으로라도 보게됐네요
감사합니다 ^^*
좋은내용!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